(5-8-1-2) 全國의 風景돌아보기, 慶北 漆谷 多富洞戰績記念館 (下)
(20) 最後의 堡壘, 洛東江防禦線戰鬪
共産軍은 南進을 계속, 7월말 洛東江을 渡河하고 大邱와 釜山을 잇는 我軍의
大動脈을 끊으려고 압박을 加해왔다.
이에 美8軍司令官 워커 Walton H. Walker)將軍은 북한공산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防禦線으로 洛東江과 그 上流 東北部의 산악지대를 잇는 天然障碍物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를 死守하기로 했으며 이 방어선을
‘워커 라인’이라고도 부른다.
1950.08.04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洛東江防禦線은 남북 160km, 동서 80km의
타원형을 이루었는데,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주로 美軍이,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國軍이 담당했다. 北韓共産軍은 ‘8월攻勢(1950.8.4∼8.25)’와
‘9월공세(1950.9.1∼9.15)’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왔으며,
곳에 따라서는 방어선을 돌파 당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我軍은 內線作戰의 利點과 制空∙制海權의 優位를 최대한 활용해 격퇴했으며,
9월 15일 仁川上陸作戰 개시와 더불어 다음날부터 總反擊을 시작했다.
(21) 野戰삽(倭館地區戰鬪에서 鹵獲)과 철모 (*鹵: 소금 노)
(22) 북조선로동당(북조선(北朝鮮勞動黨) 黨員證과 木函 反步兵地雷(多富洞戰鬪에서 노획) (*函: 함 함)
*北韓은 頭音法則을 사용하지 않아 노동당(勞動黨)을 ‘로동당’이라고 한다.
(23) 戰鬪靴 – 彈皮
(24) 수류탄 – 羅針盤 - 雙眼鏡
(25) 軍番 없는 勇士 學徒兵 – 救國警察 - 6∙25당시 大邱狀況
=軍番 없는 勇士 學徒兵
어린 나이의 中學生으로 우리를 지켜준 勇士, 군軍服이 아닌 校服,
戰鬪靴 대신 運動靴, 펜이 아닌 銃을 들고 싸웠다.
=救國警察 -警察總帥 趙炳玉
우리는 어떤 絶望이라도 이겨낼 것이다. 그들의 崇高한 희생이 최후의 방어선을 지켰다.
=6∙25당시 大邱狀況
-行政府와 國會는 釜山으로 避難 -避亂民南下로 6·25이전의 大邱人口 30만명이
70만명에 육박 -08.21深夜; 시내 중심부에 敵砲彈 3발 投下
- 08.21 深夜; 大邱驛 부근에 5발 투하.
=警察의 必死卽生 精神
(26) 洛東江 최후의 방어선 多富洞戰鬪
多富洞戰鬪(1950.08.01~09.24)는 國家存亡의 위기극복을 위해 構築한 최후의 沮止線(馬山-倭館-洛東里-
盈德: 240km)으로 大邱로 진출하려는 敵의 공격을 격퇴하고, 仁川上陸作戰과 反擊의 발판을 마련한 救國의
激戰地였다. (*沮: 막을 저)
=多富洞戰鬪 主要 高地別 狀況圖
① 護國의 다리 ② 鷓鴣山(303고지) ③ 絨緞爆擊地(若木面 德山洞) ④ 328高地 ⑤ 遊鶴山(839고지)
(*鷓: 자고 자 *鴣: 자고 고 *絨: 기는 베 융 *緞: 비단 단)
(27) 仁川上陸作戰과 北進
仁川上陸作戰–서울收復–平壤奪還–韓∙滿國境進擊作戰–鴨綠江을 건너는 中共軍
(28) 再反擊과 膠着戰∙∙∙∙∙그리고 休戰 (*膠: 아교 교)
=再反擊과 膠着戰: 韓∙滿 國境線撤收 –再反擊 作戰 –戰線固着과 高地爭奪戰
=休戰: 戰爭捕虜 交換
*韓∙滿國境線撤收에 있는 사진은 1950.12.04 平壤의 大同江鐵橋의 파괴된 Truss위를 건너는 사진으로
AP통신 從軍寫眞記者 막스 데스포가 1951년 퓰리처賞을 받은 사진이다.
*이 모습을 나는 직접 目擊했다. 平壤 大同江에는 京義線鐵道가 지나는 鐵橋와 大同門근처의 人道橋가 있었으나
폭격으로 파괴되어 練光亭 옆 人道橋부근에는 임시로 架設한 木橋가 있었으며 나룻배는 파괴되고 운행이 금지되고,
木橋는 國軍撤收作戰用으로 통제되어 平安南·北道에서 떠난 避亂民이 강변에 꽉 찼으며, 일부 청년은 나무 문짝을
떼어내 올라타고 도渡江했으나 우리 가족은 12월 3일과 4일은 헛발질하고 5일새벽에 撤軍하면서 파괴한 木橋의
殘骸를 엉금엉금 기여 船橋里로 渡江했으나 도로는 軍用으로 통제되어 경의선철도를 이용해 南下하려고
大同江驛으로 갔을 때 파괴된 철교 위를 기어서 건너는 장면을 직접 보았다.
(29) 個人火器 展示 (1)
=PPSH-41 기관총(중국) (*왼쪽 위에서 2번째)
-길이 84.2㎝ -중량 3.5㎏ -사거리: 200m -탄창용량 7~35발
*통상 ‘따발총’이라고 했으며 6·25前 북한에서는 ‘뚜루레기’라고 했다(*총소리가 ‘뚜루룩’하고 소리 난다고….)
(30) 個人火器 展示 (2)
=DP 輕機關銃 Light machine gun (러시아) (*오른쪽 맨 아래)
-길이 113.2㎝ -중량 13.7㎏ -사거리 1000m -탄창용량 260발
(*북한에서는 ‘망짝 뚜루레기’라고 불렀다. *망짝; 맷돌의 方言)
(31)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平和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을 때만 지켜지는 것임을….
(32) 40mm 對空砲 (美國)
1962년 4월 미국에서 생산, 1983년 5월 한국군에 도입, 2006년 退役.
-射距離 8,664m -발사속도 60~120발/분 -全長 213.36cm -중량 2,3ton
(33) 122mm 曲射砲 (소련)
6∙25전쟁 때 북한공산군 步兵師團 曲射砲聯隊의 火器로 我軍의 155mm 曲射砲와 對等한 성능의 火器로,
過去에 蘇聯과 그 衛星國의 基本 野戰砲兵火器이다.
-射距離 11,800m -발사속도 5~6발/분 -중량 3,450kg.
(34) 57mm 直射砲 (미국)
6∙25전쟁 이전부터 韓國軍의 유일한 砲兵火器로, 북한공산군의 T-34戰車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사거리 12,000m -발사속도 20발/분 -중량 1,14ton
(35) 45mm 직사포 (소련)
북한공산군이 蘇聯으로부터 多量 공급받아 6∙25南侵時 사용했다. 이 장비는 국군 제6사단이
1951年初 龍門山戰鬪에서 노획하였다.
-射距離 8,000m -발사속도 16발/분 -중량 564kg.
(36) 37mm 直射砲 (미국)
6∙25전쟁 당시 美軍이 사용하던 火器로 敵 陣地, 車輛 및 裝甲車와 兵力集結地에 사격해 致命打를 입힌
我軍의 主力 野砲이다.
-사거리 9,500m -발사속도 25발/분 -중량 411kg
(37) T-37C TWEE 미국 CESSNA사가 개발한 雙發엔진의 基礎訓練제트機.
제트기의 조종과 야간비행술을 교육하도록 고안된 최초의 제트훈련기이다. 원 모델인 T-37C는 1955년
첫 비행했으며, 1957년(T-37A)과 1959년(T-37B)에 實戰配置되었다. 韓國空軍은 1973년에 武裝이 추가된
T-37C TWEET 20여 대를 도입한 이래 총 60여대를 도입해 전투기조종사 양성에 이용했다. 전시된 항공기는
1983년에 도입했으며, 국산훈련기인 KT-1(웅비) 항공기에 그 임무를 인계하고 2002년 퇴역했다.
=주요 제원 및 성능
-중량 3,628㎏ -최대수평속도 707㎞/h -최대航續距離 약 1,200㎞
-운용고도 13,502m -최대 滯空時間 3시간 40분 -무장능력 폭탄 1,250파운드 2발 -기관총 7.62mm 2문
-로케트 2기
*6∙25전쟁 초기에 美空軍이 사용한 비행기는 P-51 Mustang(나중에 F-51로 모델명 변경), Gruman社 제작
F-4U 콜세어 艦載 戰鬪機, F-80 Shooting Star 제트전투기, B-29 爆擊機(Boeing社 제작) 등은 전시되지 않았다.
*내가 6·25戰爭初期에 北韓에서 겪은 일
平壤을 美空軍飛行機가 처음 폭격한 것은 1950.06.28이었다. 폭격을 피해 70리 남쪽 黃海道 黃州 黑橋 고향집으로
피난 나왔는데 京義線鐵道의 黃海道 제일 북쪽鐵道驛으로 平南 中和驛과의 道界에 철도터널(낮에는 군용열차가
숨어있었다.)이 있고, 鐵道驛과 그 남쪽의 黑橋川의 橋梁을 폭격하느라고 하루도 쉬지 않고 미 공군비행기가
출격해 아침과 낮 두 차례에 걸쳐 폭격했다. 전쟁초기 북한에는 매일 쉬지 않고 아침에 ‘무스탕’이라고 부르던
P-51, ‘구라망’이라고 부르던 까만 색깔의 F-4U 콜세어 艦載機, ‘쌕쌕이’ F-80 등이 機銃掃射와 爆彈으로 공격하고,
낮에는 B-29 폭격기가 폭탄으로 공격했다.
그래서 주민들 사이에서는 ‘안 오면 보고 싶고, 오면 무서운 것이 뭐냐?’라는 수수께끼가 있었다.
북한공산정권이 빨리 망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폭격의 무서움을 표현한 것이었다.
- (5-8-2) 全國의 風景돌아보기, 慶北 漆谷 具常文學館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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