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회의 특성과 정구사와 해방신학의 이단성,
그리고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드리는 고언(苦言)>
1) 가톨릭 교회의 특성
먼저 가톨릭 교회는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과 국익을 추구하는 정부와는 다릅니다. 기업이나 정부보다는 진보적인 스탠스를 취할 수 밖에 없는게 숙명입니다. 이 점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 대수천에는 기업, 정부, 군대 등에서 고위직을 역임하신 분들도 많은 걸로 압니다만, 그분들이 평생 몸담았던 조직의 특성과 가톨릭 교회의 특성은 다릅니다.
이 점이 별거 아닌거 같아도 정말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부나 수도자들이 신학 공부만 해서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가톨릭 교회 특유의 분위기도 있습니다. 가장 보수적인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16세조차도 자본주의의 탐욕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가톨릭 교회는 사회복지와 해외원조 사업만 하는 진보적인 NGO (시민단체, 복지단체)냐? 그런 것도 아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른 교황들도 비슷하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심이 없으면 NGO와 다를 바 없다. 우리에겐 신앙심이 필요하다” 라고 합니다.
제가 중세 철학을 전공한 분에게 들었는데, 우리의 생각과 달리 ‘중세는 교황이 지배한 시대’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교황의 힘이 세속 권력을 이긴 적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교황 앞에 무릎 꿇었지만, 그 교황은 훗날 민심을 잃어 성난 백성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또한 교황이 프랑스 왕의 압력에 따라 두 명이 되어, 한 명은 로마에 한 명은 프랑스 아비뇽에서, 거의 100년 가까이 두 교황이 대립한 적도 있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때론 세속 권력과 맞서기도 했지만 몸을 낮추기도 하면서 2000년 넘게 생존해왔습니다.
2) 정구사와 해방신학의 이단성
정구사도 나름의 논리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해방신학’이라는 것입니다.
‘해방신학’은 남미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남미는 가톨릭 국가들이지만 빈부 격차나 원주민에 대한 백인의 탄압이 심했습니다. 이때 ‘해방신학’ 이 등장합니다.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분배하자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부자들이 저항할테니 폭력이라도 불사하자는 논리입니다. 즉 맑스주의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해방신학을 처음 접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요셉 라칭거(베네딕토 16세)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록 가난한 사람들을 돕자는 뜻은 존중하지만, 폭력이 개입된다면 비폭력을 주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은 이단이다.”
교황의 훈령 직후 해방신학자들의 신부 직위나 신학교수 지위가 박탈당했습니다. 그게 80년대의 일입니다.
그럼에도 해방신학을 추종하는 이들은 전세계적으로 은근히 많았습니다. 정구사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레오나르도 보프라는 해방신학자를 만났다는데,
현 교황은 아직까지 해방신학을 복권시킨 적은 없었고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의 훈령을 바꾼 적은 없습니다.
우리가 정구사를 비판해야 될 대목은 종북이나 현 정권 비판도 있지만, 폭력성 내지 폭력 선동을 비판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해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복음 18장 36절
3)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드리는 고언(苦言)
모든 사람이 성인 군자가 될 수 없고, 한국의 600만(실제로 활동하는 신자는 300만)명이 모두 신학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대목은 성당에서 고해성사가 있을 때, 성탄과 부활 시기 판공성사를 제외하면 텅 비어있습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를 하면 자기 삶의 어려움과 아픔을 하소연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미안한 얘기지만 잘못 되었습니다.
칠죄종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교만, 나태, 분노, 질투, 탐욕, 식탐, 색욕(칠죄종)
물론 모든 사람이 칠죄종에 걸립니다. 그래서 천주교는 어차피 사람을 죄인 만드는 종교이기 때문에 다닐 필요가 없다는 사람도 제가 봤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덕적인 성인 군자가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해도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 완벽할 수 없지만 - 최대한 깨끗한 영혼의 상태로 모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해성사’의 참된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고해성사’와 ‘칠죄종’에 대한 바른 성찰 없이 ‘미사’(성체성사) 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 자기 죄에 대한 성찰 없이 성체만 받아 먹으면, 비신자들보다 더 큰 죄를 짓는다고 비오 신부같은 성인들은 이야기하십니다.
제가 정구사에 화나는 것은 그들이 종북 좌파여서인 것도 있지만, 그들 스스로 ‘영혼에 대한 성찰’을 포기한 것도 있습니다.
신부도 인간인지라 고해성사도 드려야 되는데, 정구사 신부들은 ‘칠죄종’과 ‘자기 성찰’을 포기한거 같습니다.
어쨌든 한국 가톨릭이 달라지려면 ‘칠죄종’ 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고해성사’ 제대로 드리면 됩니다. 대단한 신학 이론이 필요없습니다. ‘칠죄종’만 알아도 우리는 달라집니다.
감사합니다.
강경훈 레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