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조성환(曺成煥,1875~1948)은 여주시 대신면 보통리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창녕, 호는 청사(晴蓑)이고, 다른 이름은 조욱(曺煜,曺旭)이다.
대대로 조선시대의 고관대작을 두루 역임한 명문대가 집안 출신으로,
한 집안에서 다수의 인재들을 탄생시킨, 모두가 부러워 했던 그 고택을 찾아본다.
여주 보통리 조성환 생가
이 고택은 경기 동부지역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으로
임진왜란때 조성환의 11대조인 조경인(曺景仁)이 전란을 피해
외가인 무송 윤씨의 터전인 이곳 보통리로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
이후 조선 순조 13년인 1813년 이조판서를 지낸 조윤대(曺允大)와
역시 공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낸 그의 아들 조봉진(曺鳳振)이
건립하여 후손들이 대대로 거주하였었다.
큰 사랑채(왼쪽)와 작은 사랑채(중간), 안채(오른쪽)가 보이는 측면
그러나 독립운동에 열망이 강했던 조성환의 부친 조병희(曺秉熹)가
독립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집을 매각하였으며, 그 뒤 주인이 몇차레 바뀌었다.
마지막 주인이었던 김영구씨 가옥으로 불리다가, 2019년 여주시에서
고택을 매입하여 본격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하며 "여주 보통리고택"으로 불린다.
큰 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사이의 안채로 들어가는 사잇문 입구
조성환은 1900년 11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한 이후
1907년 4월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 창립에 참가,
1915년 신한혁명당 가입, 1917년 "대동단결선언" 발의,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1923년 대한군정서 군사부장,
1925년 신민부 조직, 1927년 민족유일당운동 추진,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1931년 임시의정원 의원, 1935년 임시정부 군무장, 1935년 한국국민당 창당,
1939년 임시정부 군사특파단 주임, 1940년 임시정부 군무부장 및 통수부 막료,
194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통수부 주임 등을 역임하였다.
작은 사랑채
광복 후인 1945년 12월 2일 임시정부 요인 제2진으로 환국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군사후원회 총재, 간도협회(間島協會) 고문, 성균관 부총재
등을 역임하고, 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과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남은 삶을 오로지 나라를 반듯하게 만드는 데 쏟아 부었다.
독립운동가 조성환과 그의 장례식 때 추도사하는 김구선생(왼쪽 아래)
그러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두 달이 지난 1948년 10월 7일
마지막으로 머물던 종로6가 낙산장(駱山莊)에서
만 73세의 나이로 서거하여 효창공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안채
조성환의 가계를 잠시 살펴보면, 17대조가 집현전 부제학 (副提學)을 지낸
조상치(曺尙治)이고, 14대조가 공조판서를 지낸 조계상(曺繼商),
10대조가 공조참판을 지낸 조문수(曺文秀), 9대조는 예조참판을 지낸 조한영(曺漢英),
7대조는 대사간을 지낸 조하망(曺夏望), 5대조는 이조판서와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조윤대(曺允大), 고조부는 공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창녕조씨 시조 재각인 종덕재기와 시조 비문를 쓴 조봉진(曺鳳振)이다.
안채 동편
*참고로 조상치(曺尙治)는 창녕조씨 갱기 1세 송무(松茂)의 둘째 손자인
인탁(仁鐸, 첫째는 인취,仁取)의 7세손이며, 조한영(曺漢英)은 15세손,
조윤대(曺允大)는 19세손, 조봉진 (曺鳳振)은 20세손, 조성환은 24세손이다.
안채 서편
조계은(曺繼殷) · 조계상(曺繼商,1466~1543) 형제는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조계은은 정국공신(靖國功臣) 창산군(昌山君)에 봉해지고
벼슬은 종부시정(宗簿寺正)에 이르렀다.
조계상은 정국공신 창녕군(昌寧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안채 마루와 부엌과의 쪽문
조한영(曺漢英,1608~1670)은 인조(仁祖)15년(163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하였다.
척화파(斥和派)로서 김상헌(金尙憲) · 채이항(蔡以恒)과 청(淸)나라에 잡혀가
심한 고문 끝에 투옥(投獄)되었다가 의주(義州)로 이감(移監)되어 석방되었다.
하흥군(夏興君)에 봉해지고 벼슬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이르렀으며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자는 수이(守而), 호는 회곡(晦谷).
시호(詩號)는 문충(文忠)이다. 저서로는 회곡집(晦谷集)이 있다.
부엌과 고방으로 가는 문(왼쪽)
조봉진(曺鳳振,1777~1738)은 문장과 글씨에 능하여
창녕조씨 시조재각(始祖齋閣)인 종덕재(種德齋)의 기문(記文)을 지었고
시조묘단비명(始祖墓壇碑銘)의 글씨를 썼다.
벼슬은 공조판서, 대사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동래부 아관 마당의 비림과 동래부사 조봉진의 영세불망비(오른쪽)
부사 조공 봉진 영세불망비 (府使 曺公 鳳振 永世不忘碑)
안채 대청마루위의 대들보
안채뒤의 고방(창고)
뒤에서 보는 고택
북쪽지방이라 음지에는 눈이 남아있다
큰사랑채와 작은 사랑채
큰사랑채 쪽마루
큰사랑채 대들보
큰사랑채 대청마루
큰사랑채 전면
큰사랑채앞의 해시계(민속자료 제2호)
큰사랑채앞의 대소인하마비(大小人下馬碑)
이 하마비는 아마도 지금은 없어진 행랑채나 대문간채앞의
어느곳에 있던것을 이곳으로 옮겨 놓은것으로 보인다.
이곳 어디쯤인가 대문간채나 행랑채가 있었을법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