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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소리-설교나라 원문보기 글쓴이: 조성완목사
예수의 사랑(요13:1-11) /고난주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참사랑이십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하나님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하신 일이 곧 사랑이요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으로 대하시고 사랑으로 도우시며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눈높이 사랑이십니다.
눈높이 사랑을 아시지요?
1절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같은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마다하시고 천하 디 천한 이 세상에 오신 분이십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신적인 존재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으시고 사시다가 돌아 가셨습니다.
주님에게는 태어나게 하신 어머니도 있습니다.
태어나신 장소도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자라나신 고향도 집도 있습니다.
역사적인 기록이 다 있습니다.
그렇게 완전히 우리와 똑같으신 인간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아십니다.
우리가 겪는 아픔도 아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도 아십니다.(요4:6)
배고픔도 아십니다.(마4:2)
슬픔도 아시고, 외로움도 아시고, 괴로움도 아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쉬시기도 하셨습니다.(막4:38)
우리가 울면 왜 우는지를 아십니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습니다.(요11:35)
때로는 우리가 신음소리만 내어도 주님은 왜 신음을 하는지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이십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 되”
아무나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 보면 주님에게는 주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17장에서도 주님은 주님의 사람이 있음을 여러분 말씀하고 있습니다.
6절에,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9절에서도,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24절,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라고 하십니다.
여기 보면 아버지께서 주님에게 주신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릅니다.
이 세상 다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것을 교리적인 용어로는 “선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중에 선택하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엡1: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 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정하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선택하신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선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엡1:5절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여기 보면 선택된 결과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까?
예, 믿는 자들이지요!
요1:12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선택된 자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길은 주님이 믿어지는 가 믿어지지 않는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누가 주님의 사람인가도 알 수가 있지요?
믿는 자 입니다.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자가 주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내어주시기 까지 하신 사랑이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 일서 3:16절도 읽어 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생명까지 내어주신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피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세상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위인도 많습니다.
종교인도 많습니다.
공자나 석가모니나 마호멧 같은 유명한 자들이 있습니다.
훌륭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으로 자기의 덕을 세운 사람들일 뿐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수양을 해서 덕은 세웠을지라도 자기 목숨을 인류를 위하여 내준 일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 목숨을 인류를 위해 내주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 사형을 앞두고 빌라도가 예수를 마지막 신문하는 자리에서 “나는 너를 놓아 줄 권리도 있고 너를 죽는 데에 넘겨줄 권리도 있으니 나에게 협조하라”고 말했습니다.
조금만 양보하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고 하시며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인류의 모든 죄와 저주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끝내 버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받아들임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은 수양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도를 닦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나와 동행하시는 것입니다.
걸음걸음마다 인도하십니다.
지도하십니다.
왜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31:3절에서 다윗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사하소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자들을 보십시오.
이 땅에서의 성공을 위해서 몸부림치지만 결국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은 버린 바 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성공이 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는 영원한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세상의 사랑은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데도 한계가 있습니다.
요즘에 가정주부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얼마나 공생들을 하는지 모른답니다.
* 신문 배달, 둔산동에 아파트 단지마다 신문을 배달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 아파트에 사는 주부들이랍니다.
가정주부들이 새벽 2시부터 일어나서 아침6시까지 신문을 돌리는 겁니다.
한부를 돌리면 1500원 받는 답니다.
한달에 200부를 배달하면 한달에 30만원을 버는 겁니다.
* 대리 운전, 저녁 6시부터 새벽까지 대리 운전을 해서 한달에 100만원을 번답니다.
왜요?
아이들 학원에 보내려고요.
아이들 과외를 시키려고요.
그러나 부모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이상은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애를 써서 됩니까?
하나님이 사랑해 주셔야 합니다.
자녀들도 부모의 사랑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부부간의 사랑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알아주는가에 관심 갖지 말고 주님이 나를 알아주신다는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긍지로 삼고 무엇보다 그것을 귀하고 크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이름으로 구원도 받습니다.
응답도 받습니다.
치료도 받습니다.
축복도 받습니다.
천국도 가고, 영생도 얻습니다.
그 이름으로 부활의 잔치에 동참을 하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을 내게 주셨는데, 그까짓 것 누가 날 알아주던 말던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내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
“내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
“내게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
그뿐입니까?
우리에겐 보혜사 성령님이 계십니다.
이 성령을 주신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은 관념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속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 음식의 맛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그것을 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혀는 내 몸으로 들어가는 음식을 검증할 수 있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 이처럼 성령이 오시자 우리 혀끝에서 이상한 징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이지 않는 맛을 혀로 알 수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이 임하시자 그 증거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언을 합니다.
예언을 합니다.
은사가 나타나고, 권능이 나타납니다.
이 사실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감격하시기를 바랍니다.
찬송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까지 사랑하시는 사랑이십니다.
1절 하반 절에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오늘날 문제가 하다만다는 사실입니다.
하다맙니다.
사랑도 하다맙니다.
살다맙니다.
이젠 너무 많아 그런 설교는 할 수도 없습니다.
변질 됩니다.
사랑도 변질 됩니다.
돈 때문에 변질 됩니다.
직장 때문에 변질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주님의 사랑은 변질되시는 사랑이 아니십니다.
하다 마는 사랑이 아니십니다.
한번 하시면 끝까지 하시는 사랑이십니다.
제자들이 실수를 했을 지라도 사랑하시는 겁니다.
믿음이 떨어지고, 자리싸움을 할지라도 사랑하시는 겁니다.
그 주님은 지금까지 사랑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어디계십니까?
하늘에 가셨습니다.
그러나 가실지라도 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 들었나이다.” 하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장례를 치루고 썩은 냄새가 나는 무덤 속까지 찾아 들어가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그를 불러 내셨습니다.
그가 사랑하실 때 병들었으면 고치십니다.
죽은 자라도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 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떠나신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 곁에 오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가시는 날 말씀하시기를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20)
롬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주님은 한번 택하신 자들은 설령 우리가 살다가 실수를 해도 버리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히13:5~6을 찾아서 읽어 봅니다.
8절,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시121:1~4
사49:15과 43:1~2절을 읽어 보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잘 나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닙니다.
* 어떤 이들은 자기를 수양하고, 도를 닦는 정성으로 수양하는 일만 생각하다가 어려운 일이 생긴 다음에야 몸부림을 칩니다.
평소 아쉬움이 없을 때는 그저 편안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잘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왜 들 그렇게 유별나게 신앙 생활할 필요 있느냐?”고 하다가 막상 일이 닥쳤을 때는 “주여 도우소서!” “도우소서!” 몸부림을 칩니다.
그때는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느니라.”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를 끝까지 사랑해 주시지만, 사랑하시지 않는 자를 상관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간들의 의지를 존중하십니다.
그러기에 인간들이 그를 사랑하지 않는 한 그가 돌아오지 않는 한, 강제로 끌어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라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니까 베드로가 “주여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 하시리이다.” 합니다. “절대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영원히”라는 뜻으로써 영원히 제자 발을 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죄 사함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는 “나는 예수님이 필요합니다!”는 진실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진실이어야 합니다.
나와 내 집은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공로가 정말 필요합니다.
그 피 공로로 나의 온 몸을 씻기소서!
주님이 가장 좋아 하시는 사실이 우리의 고백입니다.
죄인임을 자백하는 고백 말입니다.
왜요?
주님이 오신 이유가 그것 때문이기 때문입니다.
요일1:8절에서 “만일 우리가 죄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그랬습니다.
또 10절에서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 하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랑하듯 죄인임을 자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분과 사랑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하는 말씀은 있습니다.
이는 죄를 많이 지은 자가 은혜를 많이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참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자복할 때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충만해 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가 깨끗해서 사랑하시는 게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깨끗했다면 주님이 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나를 잘 아십니다.
나의 죄인임을 아십니다.
나의 부족도 아십니다.
나의 실수도 아십니다.
나의 연약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오봉선생
대만 번인이라는 야만이 살고 있습니다.
1년에 수차례씩 사람을 죽여, 목을 잘라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봉선생이라는 분이 예수님을 만나 은혜를 받고 나서는 인간이 얼마나 고귀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천하보다 귀한 존재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분이 그 야만인들에게 시간과 몸을 드리고 자기의 모든 것을 투자하여 이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야만인들이 이 오봉선생을 절대적으로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이들이 와서 오봉선생에게 이제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제사를 드리고 그만하겠다고 허락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오봉선생은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존재들인데 어떻게 사람을 죽여 제사를 지내느냐?”고 절대로 안 된다고 말리는데도 도저히 말릴 수가 없습니다.
하는 수 없이 오봉선생이 허락을 하는데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내일 오정에 빨간 옷을 입고, 빨간 모자를 쓰고, 신발을 신지 않고 황급히 이 집 앞을 지나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 사람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는 겁니다.
다음날 정오시간에 그 집을 빨간 옷을 입고, 빨간 모자를 쓰고 황급히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정들이 그 사람을 잡아, 먹을 잘라 제사를 드리려고 빨간 모자를 벗겨 보니 세상에 이게 누굽니까?
자기들이 그렇게도 존경하고 따르는 오봉선생이었던 것입니다.
이 야만인들이 이 오봉 선생의 시신을 앞에 두고 몇날 며칠을 무릎을 꿇고, 통곡을 하는 겁니다.
이 오봉선생은 오직 사랑을 가지고 무조건적으로 자기를 희생하고 자기를 드려 이들을 가르친 것입니다.
마침내 번인들은 야만적인 제사를 드리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목숨까지 내어주신 사랑이십니다.
첫댓글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찐~~하게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퍼갑니다
오주님 감사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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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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