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앞에서
이남섭
혼자 술을 부어주고
부어주는 술을 혼자 받아마셨네
내가 나에게 말을 걸고
내가 나에게 고개를 끄덕였네
술이 깊을수록 그 깊이만큼 적막하고
밤이 깊을수록 그 깊이만큼 고요하네
이슬비는 너무 가벼워
내 어깨에 앉아도 그 무게를 모르겠네
전봇대 앞에 서있다가 고개를 드니
이발소가 앞에 있네
건물과 건물 사이 보이지 않던 이발소
미용실에서 커트를 하기 시작한 이후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지 않았네
이발소는 내 기억의 창고에서 사라졌던가
밤 열두 시
내린 커튼 사이 유리 출입문을 비집고
어둠을 들여다보네
영신 이발소
아이가 앉아있네
이발소에만 들어서면 울어재끼는 애들과 달리
바리캉을 들 때부터 조발 세발이 끝날 때까지
눈물 콧물 뿌려대는 애들과 달리
이발의자 팔걸이에 얹은 널빤지에 올라앉은
여섯 살 아이는 늠름하네
영신이 아버지 이한옥 씨가 머리를 다듬는 동안
잔뜩 겁은 먹었지만 결코 울지 않는 아이
벽에 등을 기대고 나무의자에 앉은 아버지가
아이를 바라보네
툭 툭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지며
단정하게 정리되는 상고머리
주머니를 뒤져 이발비를 주는 아버지
대견한 듯 아이의 깎은 머리를 쓸어주는 아버지
아버지 뒷모습이 저렇게 작았었나
돌아서는 아버지
아버지
나는 왈칵 문을 열고 들어갔네
어둠 속에 비누냄새 가득하네
거울 앞에 앉아있는
바리캉, 가위, 면도솔, 면도칼, 빗, 포마드
어긋남 없이 단정하네
내가 들어서자마자
이발사 이한옥 씨가 급히 돌아가고
아버지도 어디 가셨는지 보이지 않네
아이 혼자 널빤지 위에 앉아있네
대견하기도 해라
바닥에 깔린 머리카락 위에
나는 눈물을 떨구었네
위에 앉아있는 아이를 안아 바닥에 내리고
손을 꼭 쥐고 데리고 나왔네
술에 취해 전봇대 옆에 머리를 박고 앉아있는
한 남자를 보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