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와 장희빈
경술환국 이후 남인은 정계 진출을 위해 암중모색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50년 동안 정권을 잡아온 서인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따라서 미인계를 이용했으니, 당시 숙종의 총애를 받던 장희빈을 이용하여 권력 장악을 도모했다. 장희빈은 역관 장현의 질녀로써 장현이었다. 장현은 당시 국중거부로써 남인권력가들과 연줄을 있었던 사람이나 삼복의 난에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어 장희빈은 그 어머니와 함께 당시 예조판서였던 조사석의 침모로 들어갔다.
하지만 조사석과 장희빈의 어미가 관계를 맺었다는 추문이 떠돌면서, 장희빈 모녀는 결국 조사석의 본처에 의해 쫓겨나게 되고, 결국 장희빈은 동평군 이항에게 의지하게 된다. 동평군은 장희빈을 인조의 3왕후인 장렬왕후 장씨에게 소개시켜주게 된다. 장렬왕후 장씨의 후궁으로 있던 장희빈은 숙종과 만나게 되고, 서로 사귀게 된다. 하지만 장희빈이 곧 서인에게 사사당한 장현의 질녀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고, 곧 장희빈은 서인을 지지하던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에게 궁궐에서 내쫓긴다.
그 후 1683년 명성대비가 사망하자, 숙종은 다시 장희빈을 궁궐로 부르게 된다. 그 후 장희빈이 임신하게 되고, 1688년 10월 후일의 경종이 되는 균을 낳게 되자, 조정은 또 한번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된다. 장희빈의 산후조리를 위해 궁궐에 입궐하던 장씨의 모친이 천인이 옥교를 타고 왔다는 이유로 서인 교리들에 의해 옥교가 불살라지고 말았다. 비록 희빈 장씨의 모친이 천인이라고는 하나, 당시 종 1품 희빈에 봉해진 장씨에게 모욕을 가한 것이고, 또한 당시 유일한 종통인 왕자 균을 위해하는 행위로 판단한 숙종에게는 단순하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다.
숙종은 당장 왕자 균을 원자로 봉호하고, 곧 종묘에 고묘했다. 서인은 크게 반발했으나 숙종의 뜻이 확고한 이상 더 이상 반대는 불가능했다. 그런데 서인의 대부인 송시열이 즉각 상소문을 올려 반대상소를 올리게 된다. "신이 듣건대 제신 중에는 위호가 너무 빠르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대개 송나라 철종은 열 살이었는데 기왕과 가왕의 핍박이 있었음에도 번왕에 책봉하였다가, 신종이 병이 들어서야 태자에 책봉되었는데, 이와 같이 천천히 한 것은 제왕의 큰 거조는 항상 여유 있게 천천히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협핍의 염려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제신들이 또한 "정후께서 경사가 있을 때"라고 하는 말이 있는 것은 대개 사전에 주밀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숙종실록 15년 2월 1일)
이 상소는 곧 풍지풍파를 일으키고야 말았다. 숙종은 "명나라 황제도 탄생 넉 달만에 봉호를 받은 일이 있다"는 말로 반박한 것처럼 송시열의 주장에 반박할 근거는 얼마든지 있는 상태였다. 더구나 굳이 송시열이 송나라의 예를 들어 반대한 것은 조선 성리학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송나라의 주자학을 그 기본으로 삼기 때문에 송나라 황제가 그렇게 했으니, 숙종 당신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따지고 보면 송시열의 본심은 "정후가 경사가 있을 때" 즉 인현왕후가 애를 낳아서 서인정권이 유지되는 것을 바라는 것이었다. 이런 속셈을 숙종이 못 알아챌리 없었고, 곧 옥사가 단행된다.
숙종은 즉시 송시열의 주장을 옹호하는 서인들의 대신들을 경질하기 시작했다. 영의정 김수항을 파직하고, 남인 권대운을 영의정에 남인 목래선을 좌의정, 김덕원을 우의정에 임명하는 환국을 단행한다.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이었다. 다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지난 경술년에 당했던 보복을 그대로 서인에게 보복하기 시작했다. 남인은 여든 셋의 송시열을 정읍에서 사사했고, 김수항도 진도의 귀양지에서 사사되었고, 효종의 외손자 홍치상을 비롯해 18명이 사사,교형, 참형에 처해지고, 100여 명이 유배, 삭탈관직에 처하게 된다.
남인의 보복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미 죽은 서인 종주인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서 출향시켰다. 이이와 성혼의 문묘 출향은 남인은 서인 자체를 부정하고 나선 것이었다. 숙종은 한술 더떠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키게 된다. 서인은 즉각 반발에 나서게 되고, 서인 박태보 등을 비롯하여 고문의 휴유증으로 사망한다. 쫓겨난 서인들은 절치부심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남인들은 왕비 장씨를 이용해 정권을 획득한 것처럼 서인도 숙빈 최씨를 이용하여 권력 획득을 노렸다. 한편으로 민심을 이용한 방법으로 김만중이 지은 <사씨남정기>를 배포하는가 하면, "장다리는 한철에 나고, 미나리는 사철에 난다."는 민요를 퍼뜨리게 된다. 이 모두가 장희빈이 쫓겨나고, 폐비 민씨가 복위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쫓겨난 인현왕후에게 동정적이던 민심은 더욱더 인현왕후에게 쏠리게 된다. "장다리"민요는 한양 사방에 널리 퍼져 정권을 잡고 있던 남인으로써도 속수무책인 상태였고, 당시 숙빈 최씨를 통해 민심을 전해 듣던 숙종 또한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남인은 이런 서인들의 움직임에 함이완을 시켜 서인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서인 또한 유학, 김인 등을 시켜 왕비 장씨의 오라비인 장희재가 숙빈 최씨를 독살하려고 있으며, 우의정 민암 등이 역모를 꾸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권을 잡고 있던 것은 남인, 결국 남인의 의도대로 서인은 위기에 처해있을 무렵, 숙종은 돌연 비망기를 내렸다. 국청에 참여한 대신 이하는 모두 관작을 삭탈하고 문외출송하며, 민암과 금부당상은 절도에 안치하라는 내용이었다. 갑작스러운 숙종의 명에 따라 남인은 하루아침에 몰락하고, 서인이 재집권한 사태, 이 사건을 갑술환국이라고 일컫는다. 재집권한 서인은 즉시 기해환국 때 죽은 서인들의 복권에 서두르는 한편, 남인에 대한 보복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폐위당한 민씨도 복위되었고, 동시에 왕비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이런 환국과 왕비 교체는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으로도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당시 "열 정승이 한 왕비만도 못하다."는 우스갯소리를 낳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권력의 안정적 유지를 위해 왕위 차기 유력자와 혼인을 맺어놓게 되는데, 조선 후기에 서인(노론)이 일당 정권을 유지하게 된 원동력이 된다.
1701년 온갖 병에 시달리던 인현왕후는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된다. 이렇게 되자, 희빈 장씨는 복위를 꿈꾸게 되고, 남인 또한 다시 정권 획득을 노리게 된다. 하지만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은 희빈 장씨를 죽임으로써 남인의 재기를 무산시키고 만다. 숙빈 최씨는 장희빈이 궁궐에 신당을 차려놓고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무고하게 된다. 이에 노한 숙종은 즉각 장희빈에게 자진을 명했다. 동시에 오라비인 장희재는 참형에 처하게 되었다. 장희빈의 죽음은 사실상 남인의 완전 몰락을 의미했고, 숙종 이후 남인은 영원히 재기에 실패하게 된다.
글/학술마을지기 박종국
첫댓글 희빈장씨라 해주었으면 합니다....
무고
남에게 형사 처분 또는 징계 처분을 받게 할 목적으로 허위 사실을 날조하여 경찰서나 검찰청 등의 관공서에 고발함
숙빈 최씨가 희빈 장씨를 무고하였다면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는 애기인데...이상하군요?
인현왕후와 장희빈에 대한 조선사를
잘 읽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