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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의 격차 속에 격전지가 된 학교, 이제는 가정과 사회가 바뀔 차례
이현미 대전 문지초등학교 교사.
[교육플러스] 안녕하세요? 저는 29년차 평범한 교사입니다. 강산이 3번은 바뀔 시간이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날이 갈수록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교사의 말을 따르지 않는 학생들을 지도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보니 교사로서 한계가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거나, 나와 남에게 위험한 행동은 단호하게 지도해야 학생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일부 학생이 교사 말에 따르지 않을 경우 지도를 안 하자니 학교폭력이나 안전사고가 나겠고, 하자니 아동학대범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2년차 꽃도 피어보지 못한 교사의 싸늘한 죽음 그리고 연이은 많은 교사들의 죽음 앞에 대한민국의 교사들은 슬픔을 넘어서 분노를 느낍니다. 모두 자신들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동료 교사를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 그러나 여전히 대안 없는 학교 현실이 자괴감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과연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슬픔과 분노를 넘어 선배 교사로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근본적인 원인을 화두로 던지고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미지=픽사베이)
그곳에, 행복은 없었다
가장 큰 원인은 우리나라 교육의 이상과 현실의 격차에서 격전지가 된 곳이 학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공부순위와 행복순위를 혹시 알고 계십니까? 우리나라의 공부순위는 핀란드에 이어 세계 2번째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육을 닮고 싶어 하는 나라가 많은 이유입니다. 그러나 행복순위는 매년 60위권 밖입니다. 핀란드는 행복순위 마저 1위인데 말이죠.
이유가 뭘까요? 그건 핀란드에는 없는 게 우리나라에는 있어서입니다. 핀란드 아이들은 오전에는 학교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학교에서 배운 것을 직접 체험하러 다닌다고 합니다. 그에 비해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학교가 끝나도 학원으로 향합니다. 학생들이 공부에 들이는 시간을 보면 기괴할 정도입니다.
이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영국 옥스퍼드대 사회학과 조너선 거슈니 교수의 말입니다. 2019년 1월 30~31일 영국 옥스퍼드대 너필드칼리지에서는 ‘생애 주기별 시간 압박과 스트레스 : 한영(韓英) 비교 연구(Time Pressure and Stress through the Life Cycle: a UK-Korea Comparison)’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이 자리에서 조너선 거슈니(Jonathan Gershuny) 교수는 한국과 영국 청소년의 시간 사용을 비교, ‘교육 압박(Educational Pressure)’이 청소년 일상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해 발표했습니다.
‘주간동아’의 인터뷰에 응한 거슈니 교수는 “한국 청소년이 공부에 들이는 시간은 놀라운 수준을 넘어 기괴하다(grotesque)고 느껴질 정도”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교육열은 냉전시대의 군비경쟁을 떠올리게 한다고도 했습니다.(출처 주간동아 1175호)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나라는 초저출산 국가가 되었고, 학교는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이는 대한민국 교육의 목표와 대학입시의 성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교육의 목표는 바른 인성과 창의성을 갖춘 세계시민 육성입니다. 그러나 대학입시는 여전히 성적우선입니다. 그러니 부모는 성적향상이 유리한 학원을 선택했고, 남보다 빠르게 남보다 더 많은 지식을 집어넣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처음에는 앞서가는 아이인 것 같았는데 점점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아이가 되더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냉전시대의 군비경쟁처럼 과열되다보니 이제는 돈을 들여 아이를 키워도 돈 들인 값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학교에 가는 나이가 되면 내 행동을 어느 정도는 조절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 다른 아이들과 싸우고, 다른 아이를 다치게 해서 선생님의 전화를 받게 됩니다. 대부분의 학부모님들은 이제라도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만 일부 학부모는 ‘1년 담임이 뭘 알아! 내 모든 것을 바쳐 키운 내 자식인데 왜 선생님이 상관이야!’ 하면서 민원을 넣고, 그게 분이 안 풀리면 아동학대로 신고를 합니다. 일명 진상 학부모이지요.
그러나 잘못은 선생님에게 있는 게 아니라 내 자식의 그릇은 생각하지 않고 과도한 경쟁으로 과잉교육을 시켰기 때문이란 걸 알아야 합니다.
(이미지=픽사베이)
학교교육은 변했다, 가정교육은 변했나
공부도 행복도 세계 1위인 핀란드에서는 ‘경쟁은 바람직한 시민이 되고 나서 해도 충분하다’고 합니다. 바람직한 시민이 되기 전에 경쟁을 하게 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될 테니까요. 그래서 학교는 이미 예전에 바뀌었습니다. 학교는 민주적이고, 학생들의 다양한 재능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바람직한 시민의식과 문화강국이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니라 학교교육의 결과라고 자부합니다.
대한민국 학교는 바른 인성과 창의성을 갖춘 세계시민 육성이라는 목표아래 변화하는 21세기에 적응할 수 있도록 역량 교육을 합니다. 역량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현재 적용되는 교육과정은 2015 개정 교육과정인데 ‘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사고 역량’, ‘심미적감성 역량’, ‘의사소통 역량’, ‘공동체 역량’을 교육과정을 통해 학습자들이 함양해야 하는 역량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량을 키우기 위해 학교는 교육과정을 편성하고, 각 학급에 맞게 재구성의 과정을 거쳐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쟁 보다는 상생을 가르치기 위해 평가 시스템도 개선하여 지필 평가보다는 수행평가나 과정중심평가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수행평가는 지식, 기능, 태도 등을 포함하여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고, 과정중심평가는 처음 평가 시 좋은 결과를 받지 못한 학생도 다시 가르쳐서 목표에 도달했다면 좋은 결과를 줄 수 있는 평가 방식입니다. 모두 경쟁을 최소화하면서 학생들을 바르게 성장시키고자 하는 훌륭한 제도입니다.
그러나 딱 학교만 변한 겁니다. 대학입시제도가 변하지 않자 가정과 사회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상적인 제도와 현실적인 입시의 격차로 학교는 격전지가 되었고, 교사는 일선에 있다는 이유로 이 불만을 다 당해내야 하는 것입니다.
학교가 하는 교육은 매우 필요하고 가치 있는 교육이지만 학교 안에서만 경쟁을 멈추면서 오히려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고 학교에서 내신을 받아 상급 학교에 진학을 하는 불공정한 경쟁의 장이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더구나 대학입시는 공정해야 한다는 미명 아래 아직도 지식암기에 머물러 있으니, 학교의 인성과 창의성을 기르기 위한 역량 교육은 대입에 직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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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벌 사회, 경쟁 사회 그리고 학부모의 교육열
대한민국 교육의 수요자는 바람직한 시민을 필요로 하는 사회가 아니라 학생과 학부모입니다. 수요자인 학부모가 학벌사회인 대한민국에서 대학입시를 학교에만 맡겨둘 수 없어진 겁니다. 눈에 보이는 성적향상을 이뤄주는 학원을 찾아다니며 각개전투처럼 자기 자녀를 자기가 알아서 교육시키게 되었고, 군비경쟁처럼 이어져 지금의 교육현실이 오게 된 것입니다.
‘남보다 빨리 남보다 많이!’ 그런데 너도나도 선행학습을 시키는 바람에 과잉교육이 되었고, 돈은 들였는데 돈값을 못하는 자식을 보며 부모는 자식을 잡고, 학교에 민원을 넣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부모의 교육열을 고려하지 못한 이상적인 제도로 교육계의 붕괴는 정해진 수순이었던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사회를 이끄는 나이가 되었을 때 사회마저 붕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학교교육이 잘못된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학교는 바른 목표를 설정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할 수 있는 인재를 기르고 있습니다. 이건 모든 선진국들의 교육 방향이고, 미래인재는 그래야 합니다, 왜냐면 이제 AI가 인간의 지적인 영역을 많이 대신할 테니까요.
교육은 멀리 볼 수 있어야 하지만 우리나라 부모님들의 교육열은 그걸 기다리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과거 교육열이 우리나라를 눈부시게 발전하게 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과잉교육이 나라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과잉교육의 늪에서 정작 더 중요한 인성과 창의성을 잃어가고 있는데, 이런 아이들에게 바른 인성과 창의성을 갖춘 세계시민교육을 해야 하는 게 교사입니다.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불 보듯 뻔한 공교육의 실추를 보면서 왜 어른들은 아무 말 안하는 걸까요?
돈 있는 부모만 할 수 있는 사교육으로 학교 내신을 받고, 수능을 보고 이 결과가 대학을 결정하는데 역할을 한다면 동의가 되십니까? 저는 동의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렇게 되면 부모의 부가 그대로 자식에게 물려지는 것인데 그게 신분제도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교육은 계층 간의 사다리 역할을 해줄 수 있어야 하고,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사교육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선행학습으로 인한 불공정함이 과잉교육으로 이어져 학생들을 바르게 성장시키지 못하고, 대한민국을 망하게 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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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기관인 학교를 보육의 장으로 몰아 간다
그래서 교육부는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자고 학교에 방과후 학교를 들여놨고, 돌봄교실을 들여 놓았습니다. 이제는 늘봄 교실로 학교에서 아이가 12시간을 있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학교의 보육기능이 확대될수록 부모는 보육은 학교에서, 공부는 학원에서 시킨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사교육비가 부담이 되니 아이를 낳지 않게 되는 악순환의 반복이지요.
학교는 보육하는 기관이 아니라 교육을 선도하는 기관이어야 합니다. 교육은 학원에서의 각개전투가 아니라 학교 교육만으로 충분해져야 합니다. 왜냐면 과잉교육은 결핍교육과 결과가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과잉교육과 결핍교육이 왜 비슷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건 임신검사 키트에 두 줄이 생기면서부터 경쟁이라고 합니다. 산후조리원부터 어린이집, 유치원까지 일류로 키우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공략하는 세상에 부모는 자식을 ‘일류’로 키우면 ‘일류’가 될 거라 믿습니다.
그러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자녀가 자기만 아는 천덕꾸러기라는 걸 알게 되기도 하지요. 내가 그렇게 돈을 들여 최선(?)을 다해 키웠는데 감히 선생님이 내 아이에 대해 뭘 안다고! 민원을 넘어서 교사를 아동학대범으로 신고하는 겁니다.
불안하니까 계속 선생님한테 정서적 학대를 받아서 내 아이가 그렇다고 핑계를 대고 있지만 아이는 부모의 욕심 속에서 그렇게 자란 것이고, 부모의 행동을 보고 배운 것입니다.
때로는 교육이 결핍되거나 자기가 낳은 아이마저 학대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기본적인 욕구를 만족하지 못해 성장의 욕구를 가질 수 없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학자인 에이브러헴 매슬로우(Abraham Maslow)의 욕구이론은 인간의 동기이론으로 지금도 각종 분야에 활용되는 이론입니다.
설명하자면 인간의 욕구에는 생존욕구부터 시작해 안전의 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 욕구에 이르기까지 5단계 있다고 합니다. 이 다섯 가지 욕구에는 우선순위가 있어서 먼저 아래 단계의 욕구가 만족되어야만 위의 욕구로 올라간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존경의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는 자신을 성장 시키고자 하는 욕구로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소속과 애정의 욕구가 결핍되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거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초일류로 키우고자 하는 부모가 아이를 재우지 않고 숙제를 시킨다거나, 공부를 못하면 체벌을 하고, 공부를 잘 하는 자녀에게만 선물을 사줘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낀다면 학대 받은 가정의 아이들처럼 욕구가 결핍된 증상을 보이게 됩니다.
이런 결핍 또는 과잉된 교육으로 욕구 불만이 된 모든 아이들이 만 6세가 되면 모두 학교에 옵니다. 그러니 교실에 정서적으로 불안한 학생이 점점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왜곡된 존경을 받고자 친구를 협박하는 게 학교폭력의 시작이고, 공부는 잘하는데 자아실현의 욕구가 없는 학생도 많아지는 것이지요.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자녀를 보면서 불안해진 부모는 대학에도 전화를 하고, 군대에도 전화를 해서 자기 자녀만 특별대우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애초에 공부보다는 자기 일을 스스로 하게 키웠으면 좋았겠지만 부모는 그 원망을 자식에게 돌리고, 자식은 부모에게 돌리고 그래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마저 틀어집니다. 그렇게 자란 자녀가 사회의 바람직한 구성원이 될 리 없고, 부모는 아이를 평생 돌봐야 합니다.
그러나 자녀의 이기심 속에 부모는 없습니다. 교육도 과한 것은 부족한 것과 같으니 가정에서는 내 자녀에게 과잉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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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학교답게, 가정을 가정답게 꾸릴 대안은?
그럼 해법은 없을까요? 아니요, 있습니다. 이제는 이상적인 제도를 학교에만 강조하지 말고 가정과 사회가 함께 변해야 합니다.
첫째, 교육의 수요자를 학생과 학부모가 아닌 바람직한 시민을 필요로 하는 사회로 규정해야 합니다.
공교육은 서비스가 아니라 미래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강력한 근간이어야 합니다.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학교가 학생을 바람직한 시민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인성교육과 창의성 교육을 강화할 수 있도록 관련법을 개정해서, 교사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학생도 보호하고, 이 사회의 미래도 있는 것이니 아동학대법 개정이 우선입니다.
둘째, 초등학교 때까지는 공부보다는 사회성을 키우기 위해 학교와 가정 그리고 사회가 모두 노력해야 합니다.
학교는 이미 그렇게 노력하고 있지만 학교만의 변화로 학교가 마치 무능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지만 실상은 아닙니다. 아이가 바르고 따뜻하게 세상을 살 수 있도록 인성을 가르쳐야 하는 것은 부모의 의무지만, 누구보다 잘난 아이로 키우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부모의 욕심입니다.
처음에는 먼저 시작했으니 잘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공부에 호기심을 잃은 아이들은 정작 중요한 시기에 번 아웃이 되는 경우도 많고, 대학가면 공부를 안 해도 되는 줄 아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회적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걸 이미 알기에 서구 선진국들은 사춘기 이전에 과잉하게 공부를 시키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사회성을 키웁니다. 사회성이 잘 키워지면 사춘기 이후 아이들은 스스로 알아서 공부합니다. 그게 진짜 공부입니다.
학교는 이미 이 진짜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협동해서 학습하고, 토론을 통해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내고, 바람직한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 등을 체험을 통해 배웁니다. 물고기를 잡아주기 보다 물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지요.
그런데 대학입시가 개선되지 않으니 부모님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상적인 제도와 과열된 대학입시의 격차 사이에 사교육이 들어오면서 과잉교육으로 아프고, 과잉교육으로 싸우고, 과잉교육으로 인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는 순간 부모는 가난해지고, 아이는 불행해 지는 세상에 왜 아이를 낳겠습니까? 기괴하리만큼 공부를 하지만 대학에는 학구적인 학생이 없고, 회사에는 문제해결력을 가진 어른이 없다고 하니 이제는 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합니다.
셋째, 모든 사람의 인권은 소중하니 교사의 말을 따르지 않거나 다른 학생에게 피해를 주는 학생을 지도할 수 있는 권한을 학교에 주어야 합니다.
잘못하면 혼나는 게 책임의 시작이고, 잘못했으면 반성할 줄 알아야 바른 시민으로 성장 합니다. 물론 아이는 미성숙하므로 실수할 수 있지만 그 실수에는 책임을 져야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행동은 혼나가면서라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수업을 방해하거나 다른 친구에게 피해를 주는 학생을 지도해도 따르지 않아 재차 지도하다보면 아동학대범이 될 수 있고, 지도를 안 하면 학교폭력이나 안전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니 교사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교사를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교육할 수 있는 권리는 법적으로 보장되어야 합니다. 학교 안에서 구성원끼리 알아서 해결하라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마십시오.
넷째, 가정은 아이가 최초로 어른을 경험하는 곳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는 정말 중요한 장소입니다.
부모가 어린 자녀에게 공부 공부만 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고, 자연에서 놀면서 부모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추억입니다. 그렇게 부모와 애착관계가 잘 형성된 아이들은 선생님도 친구들에게도 우호적이어서 우호적인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나 경쟁적으로 자란 아이들은 나만 최고여야 하니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건 다른 사람이 참아야 하고, 다른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주는 건 참지 못하는 아이를 참아줄 세상은 없습니다.
결국 문제 행동을 가진 아이의 행동은 학교에서 벌어졌을 뿐 그 뿌리는 가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교육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가정의 역할을 자꾸 학교에 맡기려고 합니다. 그럴수록 가정은 와해되고, 가정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학생의 학부모가 교사를 아동학대범으로 몰아 학교교육마저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사회에 나간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모는 보육의 기능을 찾고, 학교는 교육의 기능을 찾아야 합니다.
다섯째, 교육부와 교육청은 학교를 바꿔야 한다는 말씀은 이제 그만 하시고, 교육부가 만들어낸 이상적인 교육제도와 냉혹한 대학입시라는 현실 사이에서 격전지가 된 학교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셔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역량을 가르치고, 학원에서는 공부를 가르쳐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착각이십니다. 대학의 서열화를 해결하던가 해결할 수 없다면 대학입시와 연결될 수 있는 학교 교육목표를 설정하시던가 아니면 학교 밖에서의 선행교육을 막아서 교사와 학부모가 더 이상의 ‘을’들의 싸움을 하는 상황을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학교를 탁아소로 만드는 늘봄학교에 쏟아 붓고 있는 예산을 정규 교사 수 확보에 써서 양질의 교육을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학생 수가 줄었으니 교사도 줄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교사 1인당 학생 수를 줄여서 학교교육만으로 충분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주십시오.
"부모는 아이에게 보육을, 교사는 아이에게 교육을"
교육의 개념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education의 어원은 라틴어의 에듀카레(educare)‘이끌어내다’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즉, 학생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도록 돌보는 것이 교육입니다. 양질의 토양에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고, 햇빛을 받게 하여 비바람을 이겨내면서 스스로 잘 자랄 수 있도록 기다리는 것이 교육인 것입니다.
자녀를 부모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도록 억지로 키우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성장할 수 있게 격려해주면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안정된 아이로 자라 자신의 꿈을 찾아갑니다.
부모는 그렇게 아이에게 보육을, 교사는 아이에게 교육을 시킬 수 있어야 경쟁의 악순환의 고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사회는 이런 변화가 시스템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법제화를 해야 합니다. 학교만의 변화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가정과 사회가 바뀔 차례입니다.
원본 링크 [이현미 칼럼] 과잉교육, 학교와 가정 파괴의 주범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교육플러스 (edp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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