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경문(淸州慶門)경복흥(慶復興, ?∼1380) 경복흥의 처음 이름은 천흥(千興)으로 청주(淸州) 사람이다. 부친 경사만(慶斯萬)은 소탈한 사람이었지만 명덕태후의 조카딸에게 장가들었기 때문에 대궐에서 태후를 가까이 모시면서 환관과 다름없이 굴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우대언(右代言)까지 지냈는데, 한번은 명을 받고 마리산 첨성(塹城)에서 초제를 올리는 도중 공중에서 “경대언은 불행하게도 일찍 죽을 것이다!”라고 두 번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돌아와서 친구들에게, “나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더니 과연 얼마 뒤에 죽었다. 경복흥은 성품이 청렴하고 곧았으며 거듭 승진해 감찰장령(監察掌令)이 되었다. 공민왕 초에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임명되었으며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참지문하정사(叅知門下政事)를 거쳐 지정사상의(知政事商議)로 승진하였다. 당시 수도에 성곽을 수축하자는 논의가 일자, 경복흥은 정세운 · 유숙과 함께, “지금 사방에서 병란이 일어나 백성들이 만신창이로 굶주리고 있는 판에 성을 쌓게 되면 백성들이 견뎌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반대하자 왕이 중지시켰다. 기철을 처형해 일등공신이 되었고 벼슬도 참지중서성사(叅知中書省事)로 올랐다. 어사대(御史臺)에서 황상(黃裳)과 양백연(楊伯淵)이 판밀직(判密直) 신귀(辛貴)의 처 강씨(康氏)와 간통한 일을 탄핵하니 경복흥이 이렇게 변호했다. “강씨가 절개를 잃은 것은 지아비가 유배되어 있어 무료함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병신년이래로 유배된 사람이 너무 많아 그 처들 가운데 독수공방을 원망하며 절개를 잃어버린 경우가 많으니 바라옵건대 모두 석방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소서.”이에 왕이 허락하였다. 홍건적이 침략해오자 경복흥을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로 삼았다가 곧이어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했다. 군사 1천여 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 : 평안남도 안주시)에 진을 쳤지만, 적을 두려워하며 감히 싸우지 못했다. 왕이 노해 군법으로 논죄하려 하자 홍언박이 “경복흥은 공평하고 청렴하며 조심스럽고 성실하지만 전략에는 익숙하지 못하니 이것은 등용한 자의 잘못입니다.”라고 변호해 주어 왕이 노여움을 풀었다. 적이 물러가자 진충동덕협보공신(盡忠同德協輔功臣)의 호를 하사하고 곧이어 평장사(平章事) ·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임명했다. 기해년(1359)에 홍건적을 격퇴한 공과 신축년(1361)에 왕을 호종했던 공을 모두 일등으로 기록하였다. 원나라에 있던 최유(崔濡)가 황제에게 참소하여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을 옹립하려는 음모를 꾸미면서 요양성(遼陽省)에 있는 원나라 군대를 출동시키라고 건의하자 황제가 그것을 허락하고 이가노(李家奴)를 보내서 왕의 인장을 회수하려 하였다. 왕이 경복흥을 서북면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안주에 진을 치게 하였고, 우제(禹磾)와 박춘(朴椿)을 도병마사(都兵馬使)로 삼아 강계(江界 : 자강도 강계시)와 독로강(禿魯江 : 강계시를 관통하는 압록강의 지류) 등에 나누어 진을 치게 했다. 또 밀직부사(密直副使) 정찬(丁贊)을 서북면도안무사로 삼았다. 박춘은 이가노가 온다는 말을 듣자 병졸 수천 명과 갑사(甲士) 2백여 명을 모아들인 다음 노루 두 마리를 산 채로 잡아 이가노의 막사로 갔다. 박춘이, “지금 왕을 폐위하고 새 왕을 옹립한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러합니까? 저는 우리 왕을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라고 울면서 말한 다음 노루를 잡아 대접하니 이가노가 탄식하면서도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 경복흥이 덕흥군을 따르는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격문을 보냈다. “ 남의 교묘한 말을 듣고 가짜 왕을 추종하면서 몸을 보호하려고 무기와 갑옷을 두르고서 곁에는 잔인무도한 도적떼를 불러다 놓고 망령되게도 같은 패거리라 부른다. 바람 몰아치는 벌판에서 자고 먹으면서 안정된 거처도 없이 낙심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이 격문을 보거든 사흘 안에 너희 무리들을 잘 타일러 신속히 우리에게로 투항해 옴으로써 고기가 물을 만나고, 새가 숲으로 돌아가는 듯 편안한 삶을 누리도록 하라. 아아! 내 충고를 듣지 않으면 너희들과는 영원히 갈라설 것이다.” 최유가 덕흥군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넜는데 최영 · 안우경 등 여러 장수가 격퇴시키자 최유가 강을 건너 달아났다. 경복흥이 녹사(錄事) 김남귀(金南貴)를 보내어 승전보를 올리자 왕이 김남귀에게 은 한 덩이를 하사하고 사람을 보내어 경복흥에게 술을 하사하였으며 좌시중(左侍中)으로 임명하였다. 개선하자 왕은 해당 관청에 명하여 왕을 영접하는 의례와 동격으로 의식을 치르게 했으며, 백관에게 명해 국청사(國淸寺)의 남쪽 교외에서 위로연을 베풀게 했다. 또, 모든 장수들에게는 역적들로부터 몰수한 토지와 가옥 및 재물을 나누어 주었다. 신돈이 권세를 잡자 경복흥은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었으나 정사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결국 신돈에게 배척당해 파직되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뒤에 오인택 등과 함께 신돈을 제거하려고 모의하다가 일이 누설되어 곤장을 맞고 흥주(興州 : 경북 영주시)로 유배되었으며 가족은 적몰되어 노비가 되고 가산은 전부 몰수되었다. 신돈이 처형당한 후 소환되어 다시 좌시중(左侍中)에 올라 정방제조로 임명되었다. 공민왕이 시해되자 경복흥은 왕족 중에서 왕을 맞으려고 했지만, 이인임이 우왕을 옹립하였다. 우왕이 처음 서연(書筵)을 열었다가 다음날 병을 핑계하고 강론을 중지시키자 경복흥이 “성현의 글은 비록 읽지 않더라도 항상 손에 가지고 있기만 해도 저절로 도움이 됩니다.”라고 타이르니 그제야 강론을 재개했다. 한략(韓略)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말솜씨는 그럴 듯 했지만 재주와 행실은 보잘 것 없었다. 애초 사헌영사(司憲令史)를 지내다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했는데, 우왕의 외척이었기 때문에 등급을 넘어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가 다시 우왕의 유모와 환관에게 청탁하여 지평(持平) 자리를 구하자 우왕이 어느 날 대관(臺官)에 한략을, 중방(重房)에 김선(金瑄)을, 전법(典法)에 한충(韓忠)을 임명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의 소첩(小帖)을 정방(政房)에 내려주었는데, 김선과 한충도 우왕의 외척이었다. 경복흥이, 관리의 임명은 이미 끝났으므로 고칠 수 없노라고 반대하자 우왕이 “종이와 먹이 있는데 고치기가 무엇이 어려운가?”라고 윽박질렀다. 경복흥이 다시, “예로부터 외척은 언관(言官)으로 임명하지 않는 것이 상례이니 다른 관직으로 임명하십시오.”라고 건의하자 왕은 “왜 명령을 따르지 않는가?”며 억지를 썼으나 경복흥이 극력 간쟁한 결과 마침내 임명하지 못했다. 경복흥이 이인임 · 최영 · 지윤(池奫)과 함께 관리를 선발했는데, 지윤은 “전쟁에서의 공로를 먼저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경복흥은 “이것은 도목(都目)이니 전쟁에서의 공은 나중으로 고려해야 한다.”라고 주장해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당시 지윤과 이인임이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르자 온 나라 사람들이 그들에게 아부하였지만 경복흥은 스스로 청렴결백을 지켰다. 비록 그들의 탐욕스러운 행태를 혐오했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날마다 술에 취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관리를 선발 임명할 때마다 현명한 사람을 추천해서 뇌물을 쓰는 무리들을 등용시키지 않으려 했으나 두 사람의 방해를 받아 자기의 뜻을 실행하지 못했고 어떤 때는 박차고 나가 아예 참여하지 않기도 했다. 도당(都堂)에서 행성(行省)에 보낼 글을 의논하는 자리에 경복흥이 술에 취하여 오지 않자, 최영이 도당의 서리를 불러 “아예 술을 금하는 포고를 없애야지, 어찌 수상이 이와 같이 구는가?”라고 비난했다. 재상들이 경복흥의 집으로 갔더니 경복흥은 낯이 벌개지며 “내가 약을 마셨기 때문에 취해서 나갈 수 없었소.” 하고 부끄러워하였다. 한번은 친구와 함께 밤에 술을 마시면서 시를 주고 받았는데, 전객령(典客令) 김칠림(金七霖)이, “내가 최근 외지에 나갔다 왔는데 백성들의 고생이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없었소. 지금이 어찌 시나 주고받으면서 노닥거릴 때이겠소?” 하고 꾸짖으니 경복흥이 아무 말도 못했다. 또 한번은 최영과 함께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동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크게 벌였는데, 그때 한창 가뭄이 들고 누리의 피해가 심해 식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우왕6년(1380) 명나라의 요동군(遼東軍)이 나하추(納哈出)를 정벌하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그들이 우리 국경을 침범할까 우려해 사람을 보내 엿보게 했다. 척후가 돌아와서 요동 총병(摠兵)이 벌써 출병했다고 보고하자 도당에서 급히 회의를 열었으나 경복흥은 술에 취해 또 오지 않았다. 이인임과 임견미가 경복흥의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을 꺼려 왕에게 그가 술에 빠져 정무를 보지 않는다고 헐뜯으니 그를 청주(淸州)로 유배보냈다. 경복흥은 유배지에서 죽으니 시호를 정렬(貞烈)이라고 하였다. 창왕이 즉위하자 다음과 같은 제문을 내렸다. “ 계묘년(1363)에 이르러 역적 최유가 기철의 일당과 결탁해 추악한 서자 덕흥군을 내세우고서 원나라 조정에 원병을 요청해 압록강으로 쳐들어 왔다. 우리 선조께서 경에게 군사를 지휘할 권한을 주시니 경은 최영과 함께 격퇴하여 우리 사직을 보존하게 하였으므로 영원불멸할 그 공을 기려 녹권을 하사하고 초상을 그려 공신각에 안치했다. 역적 신돈이 그릇된 논리로 우리 선조를 미혹시켜 영첨의사(領僉議事)가 되자, 우리나라의 높은 벼슬아치들이 남에게 뒤질세라 밤낮으로 달려가 만나서 절을 올리니 그 집 문전은 사람으로 들끓었다. 신돈도 경의 청렴 충직함과 굳은 절개를 흠모한 나머지, 굴복시켜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의지해 보려고 경을 매우 우대하였다. 여러 차례 자기 사람을 보내어 간절한 뜻을 경에게 전하게 했으나 경은 한 번도 그 집에 가지 않았다. 이에 신돈이 경을 참소하였고, 우리 선조께서는 당시 신돈에게 정사를 맡겨 두었으므로 그 말을 어기기가 어려웠다. 그리하여 경이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되자, 우리나라 사람 치고 경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간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아아! 경의 지위는 신하 가운데 으뜸이었는데도 수도 근방에 한 이랑의 밭도 없었고 집의 항아리에는 한 말의 곡식도 없었다. 도시락 밥에 물을 마시면서 해어진 갓옷을 입고 여윈 말을 탔으니, 천년 역사에서 찾아본들 경만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경의 충성과 청렴함과 의열은 우리나라의 모범이 될 뿐만 아니라 만세토록 우뚝할 것이다. 이제 경의 묘에 제사를 올리니 영혼이 안다면 나의 각별한 예우를 흠향하고, 나의 지극한 마음을 헤아려 길이 우리 왕가를 도우라.” 아들은 경보(慶補)와 경진(慶臻)과 경의(慶儀)다. 출전- 고려사 열전 [출처] 청주경문(淸州慶門)경복흥(慶復興, ?∼13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