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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大秦)과 해동제국(海東諸國)의 모직물(毛織物) [3편]
[緋緞·氍毹·毾㲪·罽帳]
2020년 05월 18일
○ [2편]에서, 「대진(大秦)의 잠상(蠶桑)과 관련(關聯)된 기록(記錄)과 “로마제국(羅馬帝國)=동로마제국(東羅馬帝國)”의 중국(中國), 중국인(中國人), 그리고 동서(東西)쪽에서 서로 바라볼 수 있는(相望) 발해(渤海), 그리고 해동제국(海東諸國)의 모직물(毛織物)과 실크로드(Silk Road)에 대한 것」들에 대해, 옛 고전(古典) 중심(中心)으로 설명(說明)하였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요점(要點)을 정리(定理)해 보면 :
➊ 대진(大秦)은, ‘로마제국(羅馬帝國)=동로마제국(東羅馬帝國)’이고, 중국(中國)이다.
대진(大秦)은, ‘로마제국(羅馬帝國)=동로마제국(東羅馬帝國)’의 이스탄불(Istanbul)을 말하는 것이며, 이곳 ‘로마제국(羅馬帝國)=동로마제국(東羅馬帝國)’에서는, 양잠(養蠶)이 성행(盛行)했고, 마(麻)가 재배되었으며, 또한 모직물(毛織物)인 구유(氍毹), 탑등(毾㲪), 계장(罽帳)등은, ‘해동제국(海東諸國)에서 만들어진 것들보다 더 좋다’고 하였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은,「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재위 AD 306~337] 황제(皇帝)가 최초(最初)의 비잔티움(東羅馬帝國)의 황제(皇帝)일 것이다.」라고 주장(主張)하지만, ‘전한(前漢)·후한(後漢)·위략(魏略)’등의 원전(原典)에서는, 대진(大秦)을 오늘날의 ‘이스탄불’을 말하고 있다.
※ 실크로드(Silk Road)를 보자.
► 로마제국(羅馬帝國)에서는, 중국(中國)으로부터 비단길(Silk Road)을 통해, 다량(多量)의 비단(緋緞)이 들어와 소비(所費)되었다는 것,
► 또한 이곳(東羅馬帝國)에서 다량(多量)의 잠상(蠶桑)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說明)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미 대진(大秦)【로마제국(羅馬帝國)=동로마제국(東羅馬帝國)】에서는, 잠상(蠶桑)을 통해 많은 비단(緋緞)을 생산(生産)하고 있었고, 또한 마(麻)를 재배하여 마포(麻布)와 모(毛)를 이용(利用)한 모직물(毛織物) 생산(生産)도 다량(多量)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때, “실크로드(Silk Road)란 무엇인가?” 하는 의심(疑心)이다.
대진(大秦)은, 즉(卽) 중국(中國)이라고 하였다. 중국인(中國人)은, 중토인(中土人)이다. : 대진(大秦)의 설명(說明)에 있어, 역사서(歷史書)마다 빠지지 않고 기록(記錄)하고 있는 것이, 「대진(大秦)은, 즉(卽) 중국(中國)이다. 본래(本來)의 중국인(中國人)이다. 중토인(中土人)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당시(當時) 중국(中國)은, 중토(中土)였고, ‘로마제국(羅馬帝國)=동로마제국(東羅馬帝國)’이었던 대진(大秦)이 곧 중국(中國)이었다.」는 말과 같다.
원전(原典) 기록(記錄)으로 보면 : 「본시(本是) 즉(卽) 본래(本來)의 중국인(中國人)이란 대진인(大秦人)을 말하는 것이고, 중국(中國)이란 대진국(大秦國)」을 말하는 것이 된다.
이를 적용(適用)시키면 : 《해동제국(海東諸國)이란 : 중국(中國) 곧 대진(大秦)의 동(東)쪽【지중해(地中海)=발해(渤海)】땅에 있는 여러 나라들을 지칭(指稱)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➋ 해동제국(海東諸國)과 비단길(Silk Road)
아주 중요(重要)한 문제(問題)제기(提起)다. 어디에도 중국(中國)에서 서역(西域)으로 수출(輸出)되는 비단(緋緞)에 대한 기록(記錄)이 없다. 물론 후대(後代)의 일이지만, 독일(獨逸)인 지리학자(地理學者)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실크로드(Silk Road)란 이름을 만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고전원전(古典原典)의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 비단길(Silk Road)은, 중국(中國)이 아닌 “해동제국(海東諸國)의 비단(緋緞)이나 구유(氍毹), 탑등(毾㲪), 계장(罽帳)등의 모직물(毛織物)을 실어 나르는 길(道)” 을 말하는 것이 된다.
➌ 해동제국(海東諸國)의 모직물(毛織物)
중국(中國)에 대해서는 언급(言及)조차 없다. 왜냐하면 이는 “대진(大秦)이 곧 중국(中國)이다.”라고 했기 때문일 것 같다. 당시(當時)에 해동제국(海東諸國)에서 만들어진 “비단(緋緞), 구유(氍毹), 탑등(毾㲪), 계장(罽帳)”등이 ‘로마제국(羅馬帝國)=동로마제국(東羅馬帝國)’으로 많이 들어와 소비(消費)되었는데, 모직물(毛織物)에 있어, 당시(當時)에 아주 중요(重要)하게 여겼고 사용(使用)했던 “구유(氍毹), 탑등(毾㲪), 계장(罽帳)”등은, “해동제국(海東諸國)에서 만들어진 것들보다 더 좋다” 또는 “견줄 만하다, 닮았다”고 기록(記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러한 모직물(毛織物)의 제작(製作) 시원(始原)은 「해동제국(海東諸國)이다」라는 것을 말해준다. ‘대진(大秦)에서 제작(製作)된 것과 해동제국(海東諸國)의 것을 비교(比較)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훌륭한 제품(製品)이 있어야 비교(比較)가 가능(可能)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조선사(朝鮮史)에서 「특히 구유(氍毹)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新羅)에서 제조(製造)된 기록(記錄)이 있는데, ‘오색(五色)구유(氍毹)’라고 한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보면, 「於」자의 용법(用法)이 당시(當時)에 어떻게 쓰였을까? 궁금하다. 즉(卽) 당시(當時)에도 「於)」의 용도(用途) 중 《“∼보다”》라는 비교용법(比較用法)으로도 사용(使用)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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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유(氍毹)【출처(出處) :패션큰사전】 : ‘삼국유사’의 만불산조, ‘두양잡편’에 신라의 구유(氍毹)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 잡지의 기용에 구유(氍毹), 답등에 대한 금제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남국이물지’에서 구유는 양모와 여러 짐승의 털로 조, 수, 인물, 운기, 앵무 등의 문양을 제직한 것이라고 하였다. 《집운》에서는 ‘깔개’라고 하였다. 곧 각종 문양을 각종 모로 제조한 카펫, 러그 종류이다. (인용 / 끝).
● 계담(罽毯)【출처 : 위키실록사전 / 집필자 : 이민주】 : “직물(織物) : 구유(氍毹), 모담(毛毯), 융담(絨毯), 탑등(毾㲪) / 모석(毛席), 모욕(毛褥), 조선모철(朝鮮毛綴), 조선철(朝鮮綴)”
계담(罽毯)은, 모직물로 만든 우리나라의 전통 융단이다. 깔개, 방장(房帳), 자리, 요 등으로 사용하였으며, 탑등(毾㲪), 모담(毛毯), 융담(絨毯)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조선철(朝鮮綴) 또는 조선모철(朝鮮毛綴)이라고 하는데, 이는 날실을 팽팽하게 건 곳에 색이 있는 씨실을 무늬의 색에 따라 꿰매 가듯이 짜 넣는 평직의 변화 조직으로 태피스트리(tapestry) 기법을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청동기시대 때부터 모직물로 만든 깔개가 있었다. 청동기시대 유적지로 알려진 평안북도 강계시 공귀리 유적에서 흙으로 빚어 만든 수직식 직기의 추가 발견되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당나라 태종에게 ‘오색구유(五色氍毹)’를 보냈다고 하였는데, 광운(廣韻)에 구유(氍毹)는 모석(毛席) 또는 요(褥), 즉 털방석 또는 담요를 의미한다고 했다.
고려시대 삼도부(三都賦)에도 고려의 귀족들은 바닥에 채담(彩毯)을 깔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역시 다채로운 무늬를 넣어 짠 융단이었다. 이처럼 화려하게 만든 깔개 내지 담요는 조선시대에도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계담은 사치 품목으로 규정되어 여러 차례 금지하는 명이 내려졌다. 중략(中略). 계담은 주로 깔개, 방장, 담요 등으로 사용하였으므로 그 형태는 네모난 방형이 주를 이룬다. 계담에는 호랑이, 사자, 봉황, 매화, 기타 초목 등의 무늬를 넣었으며, 남색을 기본으로 짙은 갈색, 연갈색, 주황색, 연두색, 흰색 등을 섞어 조화를 이루었다. 한국적 색채의 조화가 잘 드러나는 물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인용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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➍ 위와 같은 기록(記錄)등으로 미뤄보면
신라(新羅)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모직물(毛織物)을 생산(生産)했다고 보아야 하며, 위략(魏略)에서 말하는 : 〈亦用木皮或野繭絲作,織成氍毹,毾㲪,罽帳之屬皆好,其色又鮮于海東諸國所作也. : 또한 나무껍질을 이용하거나 혹은 멧누에서 나온 고치(야견:野繭)로 실을 만든다. 구요(氍毹), 탑등(毾㲪:깔개)을 짜 만드는데, 계장(罽帳)의 종류로 모두 좋아한다. 그 색깔이 또 곱고 뚜렷하며, 깨끗하여 해동제국(海東諸國)에서 만들어진 것과 닮았다.(비슷하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 중요(重要)한 것은, 해동제국(海東諸國)에서 먼저 제작(制作)된 것이 있기 때문에 비교(比較)가 가능(可能)하다는 점이고,
► 그 유명(有名)한, 단 하나밖에 없었다는 존귀(尊貴)한 존재(存在)였던 ‘중국(中國)’은 없고, 해동제국(海東諸國)만이 기록(記錄)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 동서(東西)쪽에서 사로 바라볼 수 있는 바다(地中海)의 동(東)쪽에, “중국(中國)은 없다.” 다만 “해동제국(海東諸國)만이 있을 뿐이다.” 라는 것을 증거(證據)하는 기록(記錄)이라고 보는 것이다.
► 원전(原典)에서 말하는, “닮았다, 더 좋다”등은, 번역(飜譯)상의 문제(問題)일 뿐이다. 위략(魏略)에서는 “우(于)”로, 〈色又鮮于海東諸國所作也 : 색깔과 선명함이 해동제국(海東諸國)에서 만든 것과 비슷하다(닮았다).〉【魏略 : 西晉 武帝 太康 연간(280-289)에, 위(魏) 나라의 낭중(郞中)이었던 어환(魚豢)이 지었다고 전한다.】고 하였고,
► 통전(通典)에서는 “어(於)”로. 〈其色又鮮於海東諸國所作也 : 그 색깔이나 선명함이 해동제국(海東諸國)에서 만든 것 보다 낫다(좋다).〉【通典 : 唐 宰相 杜佑가 801년(정원17) 편찬(編纂)했다고 전한다.】고 하였다.
똑같은 어조사(語助辭)로, 그 뜻은 조금 다르다. “어(於)”는 비교용법으로 “∼보다”로 쓰였고, “우(于)”는 문맥(文脈)상으로 보면, “닮다. 비슷하다”라고 봐야 한다는 뜻이다. 기록(記錄) 당시(當時)에도 그렇게 쓰였을까? 아니면 그냥 어조사(語助辭)로만 쓰였을까?
기록(記錄)은, 위략(魏略)과 통전(通典)은, AD 289 / AD 801 : 이라고 했으니 시차(時差)가 500년(年)이 넘는다. 그렇다면 통전(通典)의 것보다는 ‘위략(魏略)의 기록이 더 신뢰(信賴)할 수 있다’는 뜻이 될까? 알 수 없는 일이다.
● 가장 중요(重要)한 핵심(核心)은, 「해동제국(海東諸國)에서 최초(最初)로 모직물(毛織物)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먼저 만들어진 것이 있어야 비교(比較)기 되는 것이 아닌가! 당시(當時)에 해동제국(海東諸國)에서 만든 것과 “닮았다”던가, 또는 “그것보다 더 좋다”던가 하는 이야기는, 당시(當時)의 대진(大秦)은, “후발주자(後發走者)였다”는 뜻이다.
➎ 이러한 모직물(毛織物)이 신라(新羅)에서 먼저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신라(新羅)의 선대(先代)는 누구였는가? 하는 것이다.
〈걸의식국(乞衣食國)-비집기국(飛集其國)-유잠국(有蠶國)-호라국(尸羅國)-사라국(斯羅國)-사로국(斯盧國)-시림(始林)-유림(有林)-유계국(有鷄國)-시림(始林)-계괴국(鷄怪國)-계림국(鷄林國)-서야벌(徐耶伐)-서라벌(徐羅伐)-신라(新羅 : AD295)〉라고 하였는데,
위의 신라(新羅)의 이름 중에서, 사라국(斯羅國) 혹은 사로국(斯盧國)은, 진한(秦韓) 또는 진한(辰韓)의 12개 나라 중에 포함(包含)되어 있는 이름이다. 이들이 “어디에서, 언제부터 떠돌기 시작했는지는 정확(正確)한 기록(記錄)이 없어 현재(現在)로써는 알 수 없지만, 진(秦)의 망인(亡人)이라고 하였다.”는 것을 참고(參考)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특히 양잠(養蠶)과 모직물(毛織物)에 대한 신라(新羅) 이야기는,
“유양잡조전집속집(酉陽雜俎前集續集) 券 一, 支諾皐 上, 本文 中”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 《新羅國有第一貴族金哥其逺祖名旁㐌有弟一人,甚有家財其兄旁㐌因分居乞衣食國人有與其隙地一畆乃求蠶榖種於弟弟蒸而與之㐌不知也.至蠶時有一蠶生焉日長寸餘居旬大如牛食數樹葉不足其弟知之伺間殺其蠶經日四方百里内蠶飛集其家國人謂之巨蠶意其蠶之王也.中略.》구절(句節)을 보면, 충분(充分)히 납득(納得)되는 이야기다.
신라(新羅)의 선대(先代) 나라이름 중에서 “비집기국(飛集其國)이나 유잠국(有蠶國)”이란 나라이름은, 모두가 잠상(蠶桑)과 직접(直接) 관련(關聯)되는 것들이다. 위 기록(記錄)을 보면, “누에를 길러 그 나방들이 사방 4백리를 날아다닌다.”고 해서 ‘비집기(飛集其)국가(國家)’라고 불렀고, ‘거잠(巨蠶)’이란 ‘양잠(養蠶)의 왕(王)’이란 뜻이라고 하였다는 것을 볼 때,
당시(當時)의 “신라(新羅) 즉(卽) 비집기국(飛集其國)이나 유잠국(有蠶國)【이때는 신라(新羅)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치 않았다.】에서는 백성(百姓)들에 의해 대대적(大大的)인 양잠(養蠶)이 행(行)해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동제국(海東諸國)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신라(新羅)”에서 유독 잠상(蠶桑)이 대대적(大大的)으로 행하여졌고, 생산이 다량(多量)으로 이루어졌다고 했을 때, “비단길(Silk Road)”이란 말은 곧 “신라(新羅)의 길(道)”이란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신라(新羅)에서만이 “잠상(蠶桑)”이 대대적(大大的)으로 행해졌다는 이야기는 이후(以後)의 신라(新羅)와 관계(關係)가 있는 것으로 보이며, 마한(馬韓)이나 변한(弁韓)등지(登地)에서도 당연(當然)히 잠상(蠶桑)이 성행(盛行)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 ‘비단길(Silk Road)’이란 중국(中國)에서 서역(西域)으로 가는 것이 아닌, “해동제국(海東諸國)에서 ‘서역(西域)=서구(西歐)’의 지중해(地中海)로 가는 길(道)이었다.”는 것으로 이해(理解)되어야 한다.
신라(新羅)라는 국호(國號)는 “AD 295년”부터다. 따라서 그 이전 세월(歲月)을 알 수 없는 오랜 기간(期間) 동안을 다른 나라이름으로 살았다는 이야기다. [4편으로 계속(繼續)]
2020년 05월 18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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