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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집이 둘인 신부의 사연
2013년 1월 11일
글/ 연성(蓮成)
[정견망] 내가 일하는 하북 낭방의 장촌에 왕연(王娟)이라는 처녀가 작년에 결혼을 했다.(마을 이름과 인명은 당사자들의 신변안전을 위해 모두 가명으로 함)
보통 결혼하는 처녀는 당연히 부모가 각각 한 명씩인데 왕연은 부친 모친이 각각 두 명이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왕연은 어릴 때부터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는데 매우 성숙했고 말하는 것도 어른 같았다. 그녀가 매우 어렸을 때 어느 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빠, 나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니고 조촌 사람이예요. 제 이름은 조연이예요. 아버지는 조호라고 하고요, 엄마는 허영이라고 해요.”
왕연은 당시 겨우 몇 살이었기에 왕연의 아버지는 그저 헛소리를 한다고 여겨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왕연은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시일이 지나 왕연의 부친도 호기심이 일어나 마침 출장가는 길에 사람들에게 알아보았더니 20여 킬로미터 밖에 조촌이라는 마을이 실제 있었다.
왕연이 초등학교에 들어간 어느 날 왕연의 아빠는 왕연을 데리고 조촌으로 갔다. 마을로 들어가자마자 왕연은 매우 흥분했으며 그녀의 아빠에게 한집 한집 소개하며 저건 누구의 집, 저건 누구의 집이라고 알려줬고 또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인사를 했다.
어느 집 입구에 도착하자 큰소리로 말했다 “여기가 우리집이예요.”
왕연은 자전거에서 내려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조호와 허영을 보자 아빠, 엄마 하면서 불러 조호 부부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 어린 아이가 왜 우리를 엄마 아빠라고 부를까?
왕연은 “아빠 엄마는 나를 몰라보겠지만 저는 조연이예요. 저는 9살 때 병에 걸려 죽은 후 현재의 나로 태어났어요.”
이때 조호와 허영은 비록 사람이 환생한다는 일을 들은 적이 있지만 공산당의 무신론 세뇌를 받아 이를 믿지 못했다.
이때 왕연이 자기가 원래 살던 방으로 들어가 자기가 사용했던 탁자와 서랍이 아직 잠겨 있는 것을 보고 열쇠를 찾아 열었는데 그 속에는 모두 왕연이 사용했던 교과서와 문구류가 들어 있었다.
알고 보니 조호와 허영은 조연이 죽은 후 딸을 잊지 못해 그녀가 살던 방을 조금도 건드리지 않고 남겨 두었는데 나중에 책상서랍을 열려고 했으나 열쇠를 찾지 못해 그냥 두었다.
뜻밖에 왕연이 단번에 열쇠를 찾아 서랍을 연 것이었다. 이때 이웃에서 조호의 집을 알아보는 딸이 왔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모두 보러왔다.
그 사람들이 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왕연은 숙모, 큰어머니 하고 외쳐부르며 아울러 이름을 모두 알았는데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처음에 반신반의 하던 조호와 허영 부부는 이때 왕연이 죽은 조연임을 완전히 믿고 왕연을 안고 울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왕연은 집이 2개 생겼다. 평소에는 장촌에서 학교를 다녔고 명절이 되면 조촌에 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래서 작년에 결혼할 때 혼수도 두 집이 반으로 나누고 혼례식에도 두 부모가 참석한 것이었다. 이 일은 당시 마을에서 아주 시끌벅적했다.
중국 공산당이 1949년 대륙을 점거한 후 무신론 세뇌교육을 대대적으로 진행해 사람에게는 내생이나 윤회가 없다고 말했다.
즉, 사람이 죽으면 마치 등불이 꺼진 것처럼 아무 것도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함부로 하늘과 싸우고 땅과 싸우며 사람과 싸웠다.
사람에게 영혼도 없고 하늘에 神佛도 없고 미신이라고 세뇌시켰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인과응보를 믿지 않고 믿은 것은 흑묘백묘(검은 고양이든 흰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 즉 돈만 벌면 된다)론이었다.
공산당 통치하의 사람들이 숭상하는 것은 투쟁, 금전, 권력, 색정이다.
지금은 부패하지 않은 관리가 드물고 억울하지 않은 백성이 거의 없으며 오염되지 않은 강, 독이 없는 식품이 거의 없다. 외국은 우유 한잔이 건강하게 하지만 중국은 우유 한잔에 결석이 생길 수도 있다.
우리 고향의 노서에 알루미늄 공장이 있는데 기업의 신조는 “중독되어 죽는 한이 있어도 굶어죽을 수는 없다”이다.
알루미늄을 생산하는데 대량의 담수가 필요하며 동시에 대량의 오염된 물을 내뿜는다. 그 오수는 처리하지 않고 전부 지하수 속으로 흘러들어가게 해 지하수를 전부 오염시켰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웃 마을에서 물을 사먹는다.
공산당의 폭정은 사람과 하늘이 모두 분노하게 만들었다.
2002년 6월 귀주성 평당현에서 발견된 큰 바위에는 ‘중국공산당망(中國共産黨亡)’이라는 6글자가 자연적으로 새겨 있었다.
이는 하늘이 사람들에게 계시하는 천기(天機)이다. 길을 잃은 사람들이여 빨리 공산당 조직에서 탈출하고 眞善忍에 동화하면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다.
발표시간: 2012년 9월 20일
정견문장: http://www.zhengjian.org/node/113153
동방여성(東方女性)》 잡지 2002년 7월호에는 해남(海南)성 동방(東方)시 감성(感城)진에 사는 ‘이세(二世) 기인’ 당강산(唐江山 탕장산)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당강산의 부모와 마을 노인들에 따르면 그는 세 살 때(1979년)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께 이렇게 말했다.
“저는 당신들의 아이가 아닙니다. 전생에 진명도(陳明道)였고 부친은 삼야(三爹)입니다. 우리 집은 담주(儋州)에 있는데 바닷가 근처입니다.”
그는 또한 당시 문화대혁명 기간에 무장 투쟁에서 칼과 총에 맞아 죽었다고 말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가 담주 방언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원주: 담주 사람들이 쓰는 말은 복건 방언을 사용하는 해남과 다르다). 그의 허리에는 또 전생에 벤 칼자국이 남아 있었다.
당강산이 6살이 되던 해 부모는 그의 재촉을 견디지 못해 차를 타고 아들이 전생에 살았다고 주장하던 담주시 신영진(新英鎮) 황옥촌(黃玉村)에 갔다. 당장산은 곧장 진찬영(陳贊英) 노인의 집을 찾아가 담주 방언으로 ‘삼야(三爹)’라 불렀다.
그러면서 아들 진명도가 죽은 후 동방시 감성진에서 탁생했고 지금 전생의 부모님을 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의 두 누나와 두 여동생 및 마을의 다른 친지들을 알아보았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가 전생의 여자 친구를 알아 본 것이다.
6살 당강산이 말한 전생이야기, 그가 기억한 전생 장면 및 친인척들의 확인을 통해 자신이 전생에 진명도였다고 설득하자 진찬양 노인은 그 자리에서 당강산을 부둥켜안고 울었고 그가 자신의 아들 진명도가 환생한 인물이라고 인정했다.
그 이후 당강산은 매년 동방과 담주를 왕래하며 두 집과 두 부모를 갖게 되었다. 진찬영 노인과 가족 및 마을 사람들은 그를 진명도로 여겼다. 진 노인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당강산은 줄곧 아들 노릇을 했으며 1998년 진 노인이 사망할 때까지 효도를 다했다.
이 잡지사 편집부 직원들도 처음엔 이 일을 믿지 않았지만, 반복적인 조사와 검증 끝에 이 일의 진실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같이 전생을 기억하는 사례들이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에 다 있다. 또 동양의 전통문화에서만 윤회를 말하는 게 아니라 서양에도 관련 보고가 있으며 또 많은 학자들이 윤회를 연구하고 있다.
서양 의학에서 윤회전생(輪回轉世)에 대한 연구는 1960년대 무렵부터 시작되어 줄곧 발전해 왔으며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전생을 기억하는 아동들의 사례를 수집하고 검증하여 전생 가능성과 관련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 방법의 절차는 먼저 대상자를 발견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의혹 제기하고, 직접 만나 증거를 수집하고 추적 관찰한 후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실행이 간단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또 누구나 이해하고 검증할 수 있다. 때문에 객관성과 신뢰성이 높으며 발굴된 일부 사례들은 아주 놀랍고 또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추적 및 관찰이 일반적으로 몇 년 이상 지연되기 때문에 이 방법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또 다른 유형은 정신과 의사의 지도하에 최면 상태에서 전생을 회상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법은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이안 스티븐슨 교수가 대표적이다. 1960년 스티븐슨 교수는 미국심령연구협회(The American Society for Psychical Research) 저널에 《전생 기억 증거》라는 파격적인 문장을 발표했다. 이 글은 현대 서양 윤회 연구의 서막이 되었다. 이후 스티븐슨 교수는 윤회전생(輪迴轉生) 연구에 자신의 모든 정력을 집중했다.
지금까지 40여 년 동안 전 세계에서 2,600건의 사례를 수집하고 10권의 전문 저서와 수십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는데 그 중 많은 것들이 연구자들에 의해 고전으로 인용되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연구를 수행했는데 어떤 유형의 연구자든 그의 저서와 논문들을 인용한다.
특히 《환생을 암시하는 20가지 사례》(Twenty Cases Suggestive of Reincarnation)와 《어떤 아이들의 전생 기억에 대하여》(Children Who Remember Previous Lives)가 흔히 인용된다. 그는 윤회전생 연구 분야에서 엄숙한 태도와 스타일 및 두드러진 학술적 지위 때문에 사회적으로 전례 없는 존중을 받았다.
두 번째 전생 추적 방법 연구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브라이언 와이즈 박사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저서 《나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Many Lives, Many Masters)》는 이미 200만 부가 발행되어 20여 종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중국어 번역본 《전세금생(前世今生)》도 대만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나중에 윤회전생 연구에서 유명한 인물이 된 많은 전문가와 의사들이 애초 전생(轉生)을 믿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신들이 직접 도출한 결과를 앞에 두고 회피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었으며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대부분은 불신, 충격, 동요를 거쳐 마지막으로 믿게 되었고 적극적으로 연구에 임하는 과정을 거쳤다.
또 한 가지는 서방 특히 미국에 특이공능자(psychic 초능력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비록 직접 윤회전생 연구를 하진 않았지만 윤회전생이란 사실을 사회에 널리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 중 일부는 앞서 언급한 주류 연구 중의 일부 과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기이한 질병을 치료하거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대부분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을 지니고 있으며 일부는 아주 유명하다.
앞에서 언급한 두 번째 유형의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다른 사람의 질병을 치료해주거나 생활속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전생을 관찰한다. 차이점이라면 의사들은 ‘전생회귀’를 통해 환자 스스로 자신의 전생을 볼 수 있지만 이들은 자신의 공능(초능력)을 사용해 환자의 전생을 본다.
아래에서는 서양에서 유명한 윤회 사례에 대한 보도와 연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006년 9월 8일 영국의 ‘더 선’ 온라인에서 전생을 기억하는 남자 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보도했다. 당시 6살이었던 캐머런 맥컬리(Cameron Macaulay)라는 소년은 겉으로 보기엔 보통 아이와 별 다른 차이점이 없었다.
유일한 차이점이라면 늘 전생의 엄마와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고 또 바닷가에 있는 하얀 집을 그리기 좋아했다는 점이다. 이는 모두 그의 현재 생활과는 전혀 무관한 것들이었다.
캐머런이 말한 장소는 모두 가족들이 가보지 못했던 곳이었는데 현재 그가 사는 글래스고에서 257km나 떨어진 바라 섬이었다.
그의 현생의 어머니인 노마의 소개에 따르면 캐머런은 말을 처음 배울 때부터 바라 섬에 살던 시절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의 전생의 아빠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형과 누나가 있었다고 했다. 심지어 아빠 이름이 셰인 로버트슨(Shane Robertson)이라고 했다. 그는 또 자신이 말한 엄마는 전생의 엄마이며 자신은 전생을 진실로 믿으며 전생의 엄마와 가족들이 자신을 그리워한다면서 걱정했다.
집에 대한 묘사도 매우 구체적이었다.
“지금 집에는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지만 바라 섬 집에는 세 개나 있어요.”
“그 집에서는 비행기가 해변에 착륙하는 장면을 침실 창문으로 볼 수 있어요.”
캐머런은 끊임없이 노마에게 바라 섬에 데리고 가달라고 간청했다.
이혼녀였던 노마는 수년간 캐머런의 이야기로 고통을 받아왔다. 그녀는 캐머런이 말한 것을 전혀 믿지 않았으며 동생 마틴까지 영향을 받을까 두려웠다.
노마는 결국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아들을 데리고 바라 섬에 가보기로 했다. 마침 아동의 전생을 연구하던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심리학자 짐 터커(Jim Tucker) 박사가 동행했다.
캐머런에게 바라 섬으로 간다고 알려주자 아이는 기뻐서 펄펄 뛰었다. 캐머런 가족이 바라 섬에 도착한 것은 2006년 2월이었다. 노마와 터커 박사는 바라 섬에 도착하자마자 놀랐다. 비행기가 정말로 해변에 착륙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캐머런이 말한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캐머런은 비행기에서 내릴 때 두팔을 휘두르며 “내가 돌아왔다!”며 큰소리로 외쳤다. 동시에 일행은 인근 호텔에서 로버트슨이라는 사람이 바닷가 흰 집에 살고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노마 일행은 캐머런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채 흰 집이 있는 장소로 가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 했다. 그 장소는 매우 편벽한 곳이었으나 캐머런은 단번에 그 집을 알아보았다. 뛸 듯이 기뻐하던 캐머런은 막상 집 가까이 가자 흥분한 기색이 사라졌으며 안정을 되찾았다. 이전 집 주인은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캐머런은 슬픈 기색이었다.
열쇠를 보관하고 있던 사람이 그들에게 집안으로 들어가 보게 했다. 집안에는 캐머런이 말한 대로 정말 화장실이 세 개 있었고 또 침실에서 바닷가 경치를 볼 수 있었다.
캐머런은 글래스고의 집으로 돌아온 후 많이 안정됐다. 바라 섬 여행은 캐머런의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었으며 더 이상 바라 섬을 그리워하지 않게 했다. 가족들은 더 이상 캐머런이 한 얘기가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캐머런의 경험은 이후 영국 TV방송국에 의해 ‘이 소년의 전생’이란 다큐멘터리로 방영되기도 했다.
전생을 기억하는 그나나틸리카.
그나나틸리카는 1956년 2월 14일 스리랑카(실론)의 헤두나훼와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두살이 조금 지나면서 전생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종합해 보면 대략 이런 내용이다.
'아버지는 우편배달부다. 어머니는 뚱뚱하다. 다아다사라는 형이 있는데 개에 물린 적이 있다. 누이 한 사람과 함께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자주 땔감을 샀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 마을 사람이 찾아왔다. 그는 약 30㎞ 떨어진 탈라와켈레에 갔다온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에서 돈을 주고 땔감을 산다는 얘기는 전에 그나나틸리카가 말했던 것과 같았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의 얘기를 듣고 그녀의 아버지는 속으로 깜짝 놀랬다. 그뿐만 아니라 이 마을 사람의 이야기가 그나나틸리카를 강하게 자극한 듯했다. 그 때부터 더욱 상세하게 전생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나는 전생에 탈라와켈레에 살았다. 거기에는 야자나무가 없다. 학교 갈 때 기차를 타고 간다. 긴 터널을 지나간다. 누나인 수두아카도 학교에 간다.'
그나나틸리카가 네살 때에 아버지는 그를 데리고 탈라와켈레에 찾아갔다. 전생의 집이 있었다는 우체국까지는 잘 찾았는데 막상 그 집은 찾지 못했다. 그곳은 건물이 없는 빈터였다.
그녀가 전생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전해들은 데라 스님은 전생 발언을 토대로 하여 그녀의 전인격(前人格)을 찾아냈다.
그는 탈라와켈레에 살았던 소년으로, 틸레케라트네라고 했고 1954년 11월 9일 열세살로 죽었다.
이런 소문을 전해듣고서 텔레케라트네가 다니던 중등부의 교사가 그녀를 찾아왔다. 그나나틸리카는 금방 그 선생님을 알아보면서 이름도 기억해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는 한번도 꾸중을 듣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을 한번도 야단친 일이 없는 특이한 교사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선생님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부처님이 고행에서 성불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도 이야기합니다.' 그 이야기는 이 선생님이 학교에서 가르친 것이었다.
또 그나나틸리카가 '기차를 타고 학교에 통학했고 긴 터널을 지나갔다'고 한 전생 발언도 이 선생님의 방문으로 입증되었다.
틸레케라트네는 햇튼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학교 가는 길에 실론에서 가장 긴 터널이 있어서 그는 학교를 다니느라 하루에 두번 이 터널을 통과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또 아직 보지도 못한 햇튼 시(市)의 거리 모습을, 특히 학교와 역을 중심으로, 정확히 그려보였다. 또 그녀의 오빠가 어느 큰 행사 때에 춤을 보이러 탈라와켈레에 간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 행사는 실론의 독립을 축하하기 위한 영국 여왕의 방문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때에 여왕이 타고 있던 기차의 창너머로 엘리자베스 여왕을 본 일이 있다고 말했다.
또 이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생전의 틸레케라트네는 인간은 죽어서 환생하는가를 묻고 환생할 때에 남자가 여자로 태어날 수도 있는가를 물었다고 한다.
1961년 초 그나나틸리카가 다섯살일 때 그녀는 다시 틸라와켈레에 왔다. 그녀는 부모와 스님, 그리고 선생님들이 모인 곳에서 전생 가족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는 이들을 모두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 때 특기할 것은 틸레케라트네가 좋아했던 누이에게는 특별히 친밀감을 보이고,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아 불상(佛像)을 깨뜨린 형에게는 반감을 보인 것이다. 이것은 모두 틸레케라트네의 전생의 태도와 상응하는 것이다.
그 후 열네살이 될 즈음 그녀는 극히 평범한 소녀가 되었다. 머리 모양이나 체격 등 어디로 보나 남자의 환생이 아니라 정상적인 여자 아이였다. 그러나 언제나 파란 하늘 빛깔을 좋아했다. 그것은 틸레케라트네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