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3일 [연중 제11주일]
마르코 4,26-34
하느님 나라를 바란다면 말씀 하나라도 끝까지 키워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자기도 모르게 자라나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겨자씨처럼 작은 씨앗이라도 새들이 깃들일 나무로 성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씨를 뿌려놓으면 그 씨가 저절로 자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농부들이 굳이 일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씨가 뿌려져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땅을 일궈야 하고 고랑을 파야 하고 물을 주어야 하고 병충해와 짐승, 잡초 등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매일매일 열심히 신경 써 주면 씨는 씨 나름의 일을 해서 커다란 나무가 된다는 뜻입니다.
씨는 말씀을 상징합니다. 어떠한 한 말씀이 내 안에서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씨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좌우명’(motto)과 같습니다.
좌우명의 뜻은 “살아가면서 도움이 되는 혹은 나의 목표가 되는 좋은 글귀, 좋은 이야기”를 말합니다.
한자 ‘좌우명’(座右銘)이 나온 유래는 이렇습니다.
공자가 제자들과 함께 제나라의 유명했던 환공의 묘당을 찾아가게 됩니다.
묘당에는 환공이 사용하던 책과 옷 등이 있었는데, 환공의 책상 옆에 기울어진 항아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술독에는 ‘좌우명’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좌우명은 “자리 오른쪽에 두고 마음을 새기던 술독”이란 뜻입니다.
공자가 집사에게 기울어진 좌우명이란 술독은 무엇 하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집사는 말했습니다.
“이 기울어진 술독은 술을 담으면 제대로 섭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가 차면 조금씩 기울어져서 넘어지게 됩니다.”
공자는 제자들을 시켜서 그 기울어진 술독에 술을 부어보았더니 정말 기울어졌던 술독이 바로 섰고
또 어느 정도 지나니 다시 기울어져서 술이 쏟아져버렸습니다.
공자는 크게 깨우침을 얻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학문(공부)을 한다는 것은 이 술독과 같다. 배웠다고 교만하게 군다면 자신도 모르게 넘어지는 법이니 명심들 하라.
아마도 환공은 이를 잊지 않기 위해 책상 우편에 이 술독을 두고 좌우명이라 써 놓았을 것이다.”
공자도 같은 술독을 만들어 좌우명으로 써 둔 다음 책상 우편에 놓고 공부하면서도 겸손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이렇듯 ‘겸손’이라는 단어 하나만이라도 기억하려고 매번 노력한다면 분명 오랜 시간이 지나 그렇게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한 거지가 누추한 모습으로 볼펜을 팔고 있었습니다. 한 회사의 사장이 길을 가다 돌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장님, 볼펜 한 자루 주세요. 얼마에요?”
사장님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거지는 “아…. 그냥 내키는 대로 주시면….”이라고 말합니다.
사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사장님이에요.
정당하게 볼펜을 팔아서 사업을 하는 사장입니다. 저도 가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이미 저는 한 회사의 사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죠.
당신도 정당하게 볼펜을 팔아 돈을 받는 사장이고 지금 사업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장이 볼펜의 값을 정확히 말해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며 볼펜을 사고 돈을 놓고 갔습니다.
그 거지는 한참을 되뇝니다.
“사장? 내가? 사장이다. 그래 난 사장이야. 난 지금 장사를 하는 거야. 나는 사장이야.”
그리고 몇 년 후 그도 재기에 성공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되었고 그때의 그 사장을 찾아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고 합니다.
사람을 바꾸는 것은 큰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떨어진 말을 내가 키우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 우리가 받아들이고 키우고 열매 맺기를 바라는 말씀의 씨를 뿌리고 계십니다.
저는 ‘행복’이라는 말씀의 씨를 지금까지 키워오고 있습니다.
더 행복하기 위해 살아왔더니 지금의 저가 되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제 나무 그늘에서 쉬는 분들도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이라는 씨앗으로 비롯된 하느님의 나라가 제 안에서 나름대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앞으로도 더 자라야 하지만 유일하게 잘한 일은 행복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키워왔다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첫 기억 때문에 죽음이 두려워 행복이란 단어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지금 보니 그 행복이라는 단어가 결국엔 세속-육신-마귀의 욕정을 이기고 사제가 되게 했으며 사제가 되어서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습니다.
그때 알던 행복이란 단어는 분명 지금 아는 행복이란 단어와 같지 않습니다.
그건 아마 제가 지금까지 그 행복이란 씨를 나무로 키워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분명 주님께서 많은 씨를 뿌리고 계실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일 수도 있고, 선교일 수도 있고, 감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은 은총이라는 작은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하나만 끝까지 키워나가면 됩니다.
그러면 분명 누군가를 쉬게 해 줄 수 있는 하느님 나라가 자신 안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면 그분은 헛되게 씨를 뿌리고 계신 것이 됩니다.
단 하나의 말씀의 씨앗이라도 그것만큼은 누구보다 내가 잘 키울 수 있다고 믿고 가장 훌륭한 나무로 키워보십시오.
그러면 가장 훌륭한 하느님 나라가 내 안에 세워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식물이 자라지만 실제로 그 많은 식물이 하늘에서 떨어진 하나의 작은 씨앗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3일 [연중 제11주일]
마르코 4,26-34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
오늘 나로부터
우리는 작다는 것을 강조할 때 어떤 표현을 합니까?
그 표현이 상황 상황에 따라 참으로 다양합니다.
봉급이 작을 때 ‘쥐꼬리만한 봉급’,
방이 작을 때 ‘콧구멍만한 방’,
가게가 작을 때 ‘구멍가게’,
눈이 작을 때 ‘단추 구멍만한 눈’
밭이 작을 때 ‘손바닥만한 밭뙈기’
유다인들은 작은 것을 말할 때 겨자씨 만하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만큼 겨자씨는 크기가 작습니다.
씨앗의 직경은 대개 0.2mm정도랍니다.
11월경에 씨앗을 뿌리는데, 씨앗에서 싹이 나오면 채소처럼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키가 커가면서 한 가운데 줄기가 점점 굵게 자리 잡으면서 마치 나무처럼 커지기 시작합니다.
겨자나무는 이스라엘 전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자라지만,
특히 예수님 활동의 주 무대였던 갈릴래아 지방에서 많이 서식합니다.
유채꽃 빛깔의 길쭉하고 재미있는 꽃도 피는데, 2-3월경 갈릴래아 호숫가를 산책하다보면 온 산과 들이 겨자 꽃으로 인해 노랗게 물듭니다.
너무나 놀라운 것 한 가지는 그 작은 씨앗이 특별한 투자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성장을 해나간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 자라면 2-3미터는 물론이고, 기후가 좋은 요르단 강 기슭이나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서는 3-4미터 높이까지 자라나 무성해진 가지 사이로 새떼들이 날아와 앉기까지 한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가시적이고 현세적인 하느님 나라인 교회, 그리고 하느님 말씀의 폭발적인 확장성을 설명하기 위해 성장의 속도나 위세가 대단한 겨자씨를 비유로 드신 것입니다.
결국 언젠가 도래하게 될 최종적이고 궁극적 구원, 결정적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 완료될 때 까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성장, 말씀의 성장, 교회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헌신해야 할 예수님의 협력자들인 것입니다.
엄청난 하느님 나라이지만, 그 시작은 바로 ‘오늘 날의 겨자씨 한 알’인 우리 각자로부터 시작됩니다.
나란 존재, 때로 죄투성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이고, 언제 인간될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바로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우리 각자 안에는 은총의 겨자씨 한 알이 뿌려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사랑의 씨앗을 싹 틔어야겠습니다.
멋진 나무로 성장시켜야겠습니다.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매달고 그늘도 만들어 세파에 지친 어린 새들이 날아와 쉬도록 만들어야겠습니다.
오늘 나의 작은 회심, 오늘 나의 새 출발,
오늘 나의 결심이 별 것 아닌 것처럼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참으로 의미 있는 몸짓입니다.
나의 작은 시작에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의 손길이 보태지면 엄청난 에너지가 작용하기 시작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021년 6월 13일 연중 제11주일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하시는 주님의 전지전능을 관상합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예수님께서 땅에 뿌려진 씨가 수확에 이르는 과정으로 하느님 나라를 비유하십니다. 태초부터 인간은 자연의 흐름을 체험적으로 인식해 왔지요. 그리고 그 체험을 데이터 삼아 지식으로 축적해 생존에 이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창조주이시고 만물의 제1원인이신 하느님을 빼면 실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과 기술로 치장하고 분석해도 그렇지요. 하느님 없이 생성과 성장과 소멸의 원리에 대해서는 설명할 길이 없으니까요. 하느님의 섭리는 믿지 않는 이에게 "저절로", "우연", "자연발생"일 뿐이지만, 여기에 당신의 의지와 계획과 행위를 "우연" 뒤로 감추시는 하느님의 겸손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스라엘을 살리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시는 주체가 드러납니다.
"내가 손수... 심으리라."(에제 17,22)
주님께서 당신 "손수" 하셨다고 두 차례나 반복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스라엘이 겪는 패망과 유배의 고통을 그저 단순히 누군가의 무능이나 국제정세의 결과 정도로 이해해서는 곤란하지요. 그 안에서 움직이시는 하느님의 힘과 그분의 의지를 깨닫고, 끝내는 그분 마음에까지 가닿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제야 ...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에제 17,24)
주님은 무지하고 완고한 이스라엘 백성이 언젠가는 당신을 알아보게 되리라고 기대하십니다. 역사의 흥망성쇠, 인간의 생로병사에서 높이기도 낮추기도 하시고, 무성하게도 시들게도 하시는 분이 바로 당신이심을 밝히시는 겁니다.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에제 17,24)
주님은 말씀하시고 이루십니다. 그분의 의지가 말씀으로 발설되어 그대로 완성이 이르지요. 온 우주 안에서,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섭리는 무지한 우리의 "우연, 저절로"라는 오해 이면에서 섬세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에서 하느님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려 줍니다.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2코린 5,6-7)
복음 속 농부는 어떻게 그리되는지 몰라도 곡식이 영글면 낫을 대어 수확을 할 줄은 압니다. 알곡이 영근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육의 사람은 실제 육안으로 보이는 것을 보고 판단해 움직입니다. 그 이면의 원리와 본질을 보는 영의 눈은 믿음으로 떠집니다.
영과 육의 실존을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가는 우리는 세상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때로는 실감하고 또 때로는 놓칩니다. 우리 믿음이 약하고 한결같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고, 욕심과 이기심, 정욕이 이제 겨우 실낱처럼 열린 영의 눈을 가리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하루에도 여러 차례, 우리 내면과 관계와 세상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 속에서도 믿음을 견지할 때, 그 안에서 당신 의지를 완성하시는 하느님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성공도 실패도 하느님의 일임을 깨닫고 동의하면 "주님이 손수 하신다"는 믿음이 확신으로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줄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온 세상, 온 우주, 모든 피조물, 모든 형제자매들 안에서 손수 움직이시는 하느님을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때로는 일그러지고 파괴되는 듯 보여도 부족하나마 선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우리를 통해 하느님 나라는 완성을 향해 가고 있답니다. 우리가 '숨은 하느님 찾기'를 멈추지 않으면, 주님께서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마르 4,34) 주실 것이니 지치지 말고 함께 나아갑시다.
♡알타반의 말씀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