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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73
11월13일[연중 제3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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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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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DqyqfHTP-7Y
[인천교구 김동완 니콜라오 신부님 집전(김포성당 보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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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는 표현을 자주합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똑같은 제목으로 쓴 책들이 돌아다닙니다. 길지 않지만,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 누구에게나 삶이 크게 전환되는 반전의 기회가 몇 번씩 찾아옵니다.
때로 한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때로 예기치 않았던 사건 사고를 통해, 때로 깊은 바닥 체험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 우리네 삶은 크게 출렁거리지만, 그로 인해 우리 삶이 크게 변화되기도 하고, 크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돌아보니 제 경우도 여러분 그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사방이 높은 벽으로 가로막힌 듯한 느낌 속에 삶이 온통 짙은 회색빛이던 젊은 시절, 한 고마운 존재와의 만남은 저를 근본적으로 뒤흔들어놓았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갖게 했습니다.
난데없이 내게 다가온 병고라든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가까운 사람들과의 사별, 그로 인한 쓰디쓴 바닥 체험은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임을 알게 해주었고,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돌아보니 하느님께서는 우리네 인생 여러 길목에 꼭 필요한 순간, 꼭 필요한 맞춤형 터닝 포인트들을 준비해주셨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님의 생애 역시 이런저런 인생의 티닝 포인트들이 즐비했습니다. 보통 주교님들은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앙인 가정 출신이 대부분인데, 마르티노 주교님은 이교인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젊은 시절 마르티노의 꿈은 군인으로서 성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유학을 끝낸 다음 장교가 되어 승승장구하는 장밋빛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인생을 확 뒤집어놓는 터닝 포인트라고 할 수 있는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 말을 타고 가던 청년 장교 마르티노는 추위에 와들와들 몸을 떨고 있던 걸인을 만나게 됩니다. 따뜻한 측은지심의 소유자였던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좌절합니다.
그러자 마지막 방법을 선택합니다.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꺼내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반으로 자른 다음, 반은 자신이 걸치고, 반은 그 걸인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마르티노의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는데, 자신이 반으로 잘라 걸인에게 준 바로 그 옷을 걸치고 계셨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큰 충격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을 스스로 뒤집습니다.
이 특별한 사건은 마르티노의 삶을 성직에로 이끌었습니다. 사제가 되고 파리 근처 투르의 주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체험이 남긴 교훈을 평생토록 잊지 않고 자신의 사목 생활에 충실히 반영했습니다.
한평생에 걸친 마르티노 주교님의 모토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 34-36)
사제가 된 마르티노는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이웃 사람들을 개종시키는데 헌신했습니다. 당시 아리아파와 같은 이단이 횡행하던 시절이었기에 그의 복음 선포 활동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교도들에게 매를 맞고 쫓겨나는 봉변도 부지기수로 당했습니다. 이교도들의 탄압이 극심할 때면 그는 깊은 산속에 들어가 기도 생활에 전념했습니다. 이때 그의 탁월한 인품과 영성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많은 청년들이 찾아와 수도공동체가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마르티노 주교님이 지니셨던 가난한 이웃을 향한 따뜻한 마음, 큰 측은지심이 오늘 우리네 마음 깊은 곳에 큰 울림으로 남아, 작은 사랑의 실천을 계속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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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날이 잔뜩 선 예수님 말씀 앞에서…>
평소 사랑과 자비, 용서와 인내를 목청껏 외쳐왔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왠지 말씀에 날이 서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 발언의 강도나 수위가 꽤 높습니다.
어떤 말씀은 너무나 섬뜩해서 듣기조차 거북스럽기까지 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연자매란 돌로 만든 방아입니다. 크고 둥근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는 것이지요. 이것을 소나 말이 끌어 돌려서 곡식을 찧고 빻습니다. 따라서 연자매 사이즈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즉시 사망이었습니다.
강경한 예수님 말씀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참으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마냥 오냐 오냐 하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자녀를 위해 헌신합니다.
그러나 때로 자녀가 그릇된 길을 갈 때, 그 길이 정말 가지 말아야 할 길이라 할 때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그 길에서 되돌리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타일러보기도 하고, 눈물로 호소도 하겠지만,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면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강하게 외쳐보기도 하고 정신 번쩍 들게 혼도 낼 것입니다.
이런 극진한 자녀 사랑을 배경으로 예수님께서는 손을 잘라버려라, 발을 잘라 버려라, 눈을 빼 던져버리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형 방법이 없었지만, 로마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사형을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형과 함께 로마로부터 도입된 끔찍한 사형 방법 중에 하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러한 사형 방법을 끔찍이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수장 후 시신을 되찾을 수 없어서였습니다. 차라리 연자매를 선택하라고 강조할 만큼 예수님께서는 이웃에게 죄를 짓게 하는 죄를 중히 여기셨습니다. 일시적인 쾌락으로 지옥을 얻기보다는 불구가 됨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게 더 낫다고 역설하셨습니다.
죄를 짓게 되면 다른 무엇에 앞서 가장 가치 있고 고귀한 영혼의 구원, 하느님 나라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그토록 강조점을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 한 가지 있습니다. 새삼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글자 그대로 손발을 잘라버리고 눈을 뽑아버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밥먹듯이 일상적으로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다들 불구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 앞에서 있는 힘을 다해서 투쟁하라는 권고 말씀입니다. 죄 앞에서 목숨 걸고 맞서 싸우라는 격려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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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3)‘허허’의 멋과 여유>
언젠가 한 그룹의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영성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여러분들 내면 안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작업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이 뭐냐?”는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는데, 다들 하나같이 ‘용서’라고 대답하시더군요.
용서의 당위성, 중요성, 필요성에 대해서는 하도 많이 들으셔서 다들 잘 알고 계셨지만, 정적 내게 지독한 아픔을 던져준 ‘그 인간’과 다시 대면할 때, 그 숱한 다짐들, 그 굳은 결심들은 즉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가 내게 안겨준 깊은 상처들만이 하나하나 되살아나 분개하게 되고 내적인 평화를 잃곤 한답니다.
용서를 제대로 하기 위한 비결이 없을까요?
한 훌륭한 영적 스승은 용서와 관련해서 참 의미 있는 가르침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상처니, 아픔이니, 용서니 하는 말이 더 이상 우리 안에 문제되지 않게 원천적인 문제를 먼저 해결하길 바랍니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잘 갈고 닦아 미움이나 분노, 실망과 좌절 같은 감정들에 더 이상 좌지우지되지 않도록 무장하길 바랍니다.
우리 내면이 튼튼하면 튼튼할수록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이나 모욕에도 크게 영향을 받지 않게 됩니다. 쉽게 넘길 수 있습니다. 당당하게 맞설 수 있습니다. 쉽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 하느님께서 든든하게 자리하시면 어떤 사람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상처나 아픔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이 잘 잡혀있는 사람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가하는 어떤 충격에도 동요되지 않습니다. 분노하지 않습니다. 미워하지 않습니다. 판단하지도 않습니다. 쉽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저 ‘허허’하고 웃어넘길 수 있는 멋과 여유를 지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내면의 상태에 도달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엄청난 자기 수행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지속해서 노력하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용서 잘하는 비결’을 체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수행자가 대 스승 포이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부님, 제가 깊은 슬픔에 빠져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아무것도 바라보지 말고 누구도 판단하지 말며 누구도 비방하지 말게. 그러면 주님께서 평안을 주시게 된다네.”
사막의 교부들 가운데 모세란 큰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출신으로 수행의 길을 걷기 전에 도둑이었으며, 검은색 피부 때문에 수도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도 수도자들 사이에서 종종 놀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내공이 워낙 탄탄했기에,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상처나 공격에도 평온할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가 어떤 수행자들의 모임에 갔었는데, 몇몇 스승들이 그를 시험해보려고 그의 면전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던졌답니다.
“도대체 이 에티오피아 사람은 뭣 하러 여기 우리 가운데 와 있는가?”
모세 아빠스는 그저 묵묵히 그 말을 듣고만 있었습니다.
모임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제자들이 “스승님,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듣고도 화가 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화가 났지요. 하지만 나는 그 말을 ‘건방지게 말하지 말라’ ‘주제 파악을 잘 하라’는 말로 알아들었다오. 그 말은 ‘나를 더욱 낮추어 겸손한 사람으로 처신하라’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사실 모세 아빠스 역시 인간이었기에 사람들이 던진 모욕적인 말 때문에 우선 상처를 받고 흥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내면 안에 일어나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단 의식적으로 침묵했습니다. 침묵으로 자신의 내면을 다독거렸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상처를 꿀꺽 삼켜 자기 안에 저장하지 않고 상처를 침묵으로 치유하고자 노력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정신 요법이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상처를 말로 표현하는 것은 확실히 한 좋은 수단입니다. 그러나 침묵을 통한 치료법도 있습니다.
침묵으로 소용돌이치는 먼지를 가라앉게 하여 내면의 흥분을 안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가만히 둠으로써 앙금을 가라앉혀 맑아지는 탁한 술처럼 내면을 깨끗하게 합니다. (‘하늘은 네 안에서부터’, 안셀름 그륀, 분도출판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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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q4ucaZk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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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에 믿음이 끼어드는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 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라고 하십니다. 남을 죄 짓게 하는 가장 큰 일은 무엇일까요? 미운 감정이 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에 미운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 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더라도 이 지상에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용서를 배우는 일입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청하는 사람이 있다면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역할이 강조됩니다. 사도들은 용서 이야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용서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해도 잘 안 되는 예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믿음의 역할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삼례 나라슈퍼 사건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잘못된 처벌의 사례 중 하나로 꼽힙니다. 1999년 9월 28일,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의 나라슈퍼에서 할머니 한 분이 살해되었습니다. 조카 부부와 어린아이도 있었는데 그들에겐 눈을 가리고 위협만 하고 상해를 입히지는 않았습니다. 경찰은 가까운 곳에서 찾아낸 세 명의 용의자를 범인으로 몰아갔고 심한 고문과 가혹행위를 이기지 못한 청년들은 자기들이 범인이라고 허위 자백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양심의 가책으로 진범 세 명이 자수하였지만, 경찰과 검찰, 그리고 판사는 그들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진행된 것을 번복하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 복역을 마치고 공소시효도 지난 시점에서 한 진범이 악몽에 시달려 자수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용서하지도 않는데 자신이 그러면 뭐 하겠느냐며 다시 그 말을 번복했습니다. 그래서 변호사는 당시 아이 엄마였던 최성자 씨에게 할머니를 살해한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느냐고 했습니다. 최성자 씨는 망설였습니다.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최성자 씨는 스무 살이 된 아들에게 할머니가 그때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말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강도가 들어올 때 아들은 다행히 잠이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 아들을 위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어떻게 해야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들이 “했어야지!”, 곧 재심을 도와주었어야지 않느냐고 말했습니다. 최성자 씨는 여기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아이에게 피해가 갈 줄 알고 용서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 용서가 아이에게 오히려 인정받는 행위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가해자를 만나서 용서해 주었고 가해자는 그것에 힘입어 증언하여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세 명의 누명을 풀어주었고 나라로부터도 보상받게 했습니다.
용서는 사실 나의 죽음입니다. 그러면 부활의 보상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란 용서의 십자가를 지면 부활의 기쁨을 준다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다면 못 할 게 없다는 것입니다. 고통은 쓰지만 그 열매는 반드시 달다는 것만 믿는다면 이 세상에서 이뤄내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최성자 씨는 아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그 부활의 기쁨이었습니다.
에바 모제스 코어(Eva Mozes Kor)는 악명 높은 나치 전범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에 의해 자행된 실험의 생존자였습니다. 멩겔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쌍둥이에 대한 잔인한 의학 실험을 실시했고, 코어와 그녀의 쌍둥이 자매 미리암은 그의 실험 대상이었습니다. 에바 코어는 수십 년 동안 요제프 멩겔레에 대한 깊은 증오와 분노를 품고 살았습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멩겔레의 실험으로 인한 고통과 트라우마로 얼룩졌고, 그 기억은 그녀가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그녀를 괴롭혔습니다. 그녀의 쌍둥이 자매 미리암도 실험으로 인한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고, 이로 인해 코어의 분노는 더욱 굳어졌습니다. 코어가 용서하기로 한 것은 1995년, 아우슈비츠 해방 50주년 기념식이 있기 전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자매가 겪은 고통에 대한 멩겔레의 인정과 사과를 원했지만, 그는 이미 사망한 후였습니다. 그러나 코어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내면의 평화를 찾기 위해 용서라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용서하기로 한 코어는 용서의 선언문을 작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이 선언문을 통해 멩겔레에게 자신이 느낀 모든 고통과 분노를 용서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행위는 그녀에게 적극적인 선택이었으며, 그녀는 용서를 자신의 힘을 되찾는 행위로 보았습니다. 그녀는 용서를 통해 멩겔레가 그녀의 삶에 더 이상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녀 자신을 그녀의 과거로부터 해방하기를 원했습니다. 용서의 선언은 에바 코어에게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녀는 이 용서를 통해 해방감을 느꼈고, 증오와 분노의 감정에서 벗어나 내면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만든 선택이 자유를 의미한다고 느꼈으며, 더 이상 희생자로 정의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코어는 이러한 용서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녀는 나머지 생애를 교육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바쳤습니다. 만약 용서를 통한 평화를 믿었다면 50년 동안 미움과 증오로 살며 고통을 겪지 않았어도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에는 부활이 있음을 믿고 십자가를 져 봐야 합니다. 손해를 볼 게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뒤에 오는 부활의 기쁨을 자주 체험하다 보면 내가 하느님의 뜻을 위해 죽는다는 그 믿음이 확고하게 자리함으로써 참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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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한국에서 휴가 중에 동창 신부님의 숙소에서 머물렀습니다. 저를 위해서 기꺼이 방을 내어준 동창 신부님이 고마웠습니다. 신부님의 성격만큼이나 방도 아주 정갈했습니다. 책상 위에는 선종사제들의 사진이 담긴 책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선종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부터 150번째 선종 사제까지의 사진이 담긴 책입니다. 신부님들의 사진 아래에는 출생 연도와 선종 연도가 있었고, 신부님들의 사목 성당이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님은 모든, 신부님들의 기록을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고, 신부님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온 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입니다. 침실 옆 작은 탁자 위에는 묵주가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매일 기도하였을 신부님을 생각하니 절로 마음이 숙여졌습니다. 신부님의 서가에는 ‘도교와 그리스도교,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와 같은 책이 있었습니다. 동양의 사상과 그리스도교의 관계를 통해서 영적인 풍요로움을 키웠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 선조들의 뜨거운 열정과 헌신을 따르려는 신부님의 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의 숙소에서 편안한 잠자리를 얻은 것도 좋았지만 사랑하는 동창 신부님의 영적인 그늘에 쉬다 온 것이 더욱 좋았습니다.
손님 신부님들이 오면 가끔 뉴욕의 제 숙소를 내줄 때가 있었습니다. 며칠 쉬다가 갈 수 있는 숙소는 되었겠지만 제 방이 영적인 그늘이 되어 주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제 방에는 벽걸이형 시계가 있고, 그 아래에는 성당 달력이 있습니다. 매달 달력을 넘기지만 큰 의미를 주지는 않았습니다. 달력에 묵주를 걸어 놓았지만 묵주를 꺼내서 기도한 적도 없었습니다. 한국에서 보내온 책도 있고, 서점에서 주문한 책도 있지만 친구처럼 형광 팬으로 밑줄을 그으면서 마음의 양식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책상에 놓인 노트북으로 매일 강론을 준비하고, 말씀을 묵상하지만, 더 많은 시간은 검색으로 세상과 소통하려고 했습니다. 동창 신부님의 숙소를 보면서 세상과의 소통 시간은 줄이고 하느님과의 소통을 더욱 늘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의 몸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 네가 자주 찾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 네가 주로 사용하는 돈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도 의미가 있지만 신심불이(身心不二)도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구 선생님도 이런 글을 늘 마음에 새겼다고 합니다. “눈 덮인 길을 걸을 때면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말라. 지금 네가 걷는 그 길이 뒷사람에게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혹여 누군가 저의 숙소에 머물면 영적인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가다듬으려고 합니다.
종교가 없는 가정에서 종교를 선택하려고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엄격한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왕 종교를 가지려면 ‘천주교’를 믿어라!” 이 말은 천주교회가 한국사회에서 많은 신뢰를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비자 교리를 하면서 예비자들에게 성당에 오게 된 이유를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성당에 다니는 분들이 선교해서 온 예도 있지만, 대부분은 성당에 다니는 친구들이 열심히 살고, 성당에 오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진실해 보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종교가 없었을 때도, 이왕에 종교를 가지려면 천주교회를 택하겠다고 생각했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사제들을 비롯한, 천주교회에 다니는 신앙인들이 좋은 모범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직장에서도 솔선수범을 하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기쁘게 하기 때문입니다. 조용하고 엄숙한 천주교회의 분위기는 분주하고, 바쁜 현대인들에게 삶의 안식과 평화를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칼 날 위에서도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아무리 넓은 방이라도 쉽게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때로 저를 믿어 주는 분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실수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 역시도 저와 함께하는 분들을 끝까지 믿어 주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말과 행동은 좀 더 신중해야 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용서는 영어로 ‘Forgiveness’입니다. 용서는 누군가를 위해서 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주는 것만이 용서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나의 재능을 나누어 주는 것,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주는 것, 소중한 목숨까지 내어 주는 것이 용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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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1-6: 죄의 유혹과 용서, 믿음의 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하신 다음 형제자매를 용서하라고 하신다. 나약한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고, 그래서 많은 일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1절)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란, 남을 유혹에 빠지게 하고, 피곤하게 하며, 넘어지게 하고, 모든 일을 어지럽히고, 모든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다. 죄짓게 하는 일이 있어서 죄가 생겨나기 때문에 죄를 짓게 하는 일이 곧 죄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잘못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수님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19-31)에서 벌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부자 이야기에 이어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용서하라고 하신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3절) 만일에 용서해 주지 않아 절망한다면 한 사람을 죄악에서 소생시킬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4절) 우리는 병을 한두 번 치료해주고 마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이라도 아플 때마다 치료해주는 의사들과 같아야 한다. 우리가 모두 나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를 꾸짖고 벌할 수 있는 이들이 자비롭고 쉽게 용서하는 사람이기를 기도하여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사도들은 믿음을 더해 주십사고, 그래서 믿음 안에서 더 강하게 해 주십사고 청한다. 믿음은 우리에게 거룩한 은총의 선물이다. 믿음의 시작은 우리에게 달려있고,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는 가운데 유지되지만, 그러기 위한 확신과 힘은 거룩한 은총에서 온다. 그래서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르 9,23) 겨자씨 한 알은 아주 작아 보인다. 겉모습은 보잘것없어도 맛은 이보다 강한 것이 없다. 교회가 지닌 신앙의 뜨거운 열정과 내적인 힘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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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공동체 생활에 관한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소개합니다.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는 경고, 형제의 죄를 몇 번이고 용서하라는 권고, 믿음의 힘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 번째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남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됩니다. 스스로 죄를 짓는 것도 문제지만 권모술수로 형제를 구원의 길 위에서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입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그만큼 형제를 죄짓게 하는 행위가 얼마나 무거운 죄인지 강조하시는 대목입니다.
두 번째로,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라는 권고가 등장합니다. 여기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일곱 번만 용서하면 된다는 가르침이라기보다, ‘완성’을 나타내는 숫자 ‘일곱’이 드러내듯 회개하는 형제를 제한 없이 용서하라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힘에 관하여 역설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돌무화과나무는 상대적으로 웅장합니다. 그만큼 작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그 믿음으로 공동체 안에서 큰일을 실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속한 공동체도 여러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가정 공동체, 직장 공동체, 본당 공동체가 구원의 길 위에서 바로 서도록 예수님의 세 가지 말씀을 새겨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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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 가지 가르침>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루카 17,1ㄴ-3ㄱ)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은 유혹, 박해와 압박, 잘못 인도하는 일 등을 모두 가리킵니다. 죄를 지으라고 부추기는 유혹은 아담과 하와 때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이 일은 죄가 아니다. 해도 된다.”라고 속이는 유혹도 있고, “죄가 되긴 하지만, 벌은 받지 않을 것이다. 벌을 받더라도 엄한 벌은 아니다.”라고 속이는 유혹도 있고,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산다.”라고 속이는 유혹도 있습니다. 남을 유혹해서 죄짓게 만드는 자는, 유혹에 넘어가서 죄짓는 사람보다 훨씬 더 엄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유혹을 받는 처지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유혹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기도의 힘’으로 그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혹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또 순수한 마음으로 도와주는 ‘선한 권고’라고만 생각한다면,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되나? 유혹인 줄 몰라서 그 유혹에 넘어가고, 그래서 죄를 짓게 되었다면, 무죄인가? 유죄인가? 몰랐다고 해도 죄가 죄 아닌 것으로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런 문제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루카 12,47-48ㄱ)
이 말씀에서 “적게 맞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정상참작이 되긴 하겠지만 무죄가 되지는 않고, 죄에 대한 처벌을 피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 자체가 죄가 되는 일도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ㄴ-4)
이 말씀은 마태오복음 18장에 있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오복음 18장에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5-16ㄱ.17)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죄지은 형제를 꾸짖고 타이르는 것은 그를 회개시키기 위해서이고, 그를 회개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가 구원받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구원받기를 바라는 것은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꾸짖고 타이르는 일도 사랑이고, 용서도 사랑입니다. 앞에서 말한 ‘남을 죄짓게 하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사랑입니다.>
우리는 용서에 관한 말씀을, 용서하는 태도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용서를 청하는’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용서할 일보다 용서를 청할 일이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용서를 청하는’ 처지에서 생각할 때, 하루에도 일곱 번씩이나 죄를 짓고, 일곱 번씩이나 회개한다고 말한다면, 그 회개가 정말 회개일까? 그것은 진정성 없이 습관적으로, 또 형식적으로, 또 말로만 하는 회개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5-6)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사도들의 요청은, 믿음도 은총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을 나타내는데, 인간 쪽에서도 ‘믿으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믿음의 은총’을 주시고 우리가 믿으려고 노력할 때 믿음이 완성됩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이라는 말씀은, ‘믿음이 있으면’이라는 단순한 뜻입니다. 믿음이란, 크거나 작은 것이, 또는 많거나 적은 것이 중요하지 않고, “있는가? 없는가?”가 중요합니다.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믿음만 있으면 누구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우리가 할 일은 그 주님을 믿는 일입니다. <기적은 내가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내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지 않을 때, “나의 믿음이 너무 부족한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 일이 정말 주님 뜻에 합당한가?”부터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믿음의 힘’이라는 말은, “내가 내 믿음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나에게 해 주신 일을 알아보는 힘”을 뜻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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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그리스어로 ‘스칸달론’, 영어로는 ‘스캔들’인데, 이 구절을 좀 더 분명히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스캔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들을 통하여 스캔들이 오는 자(스캔들을 일으키는 자).
’여기서 스캔들이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일종의 ‘걸림돌’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 복음의 첫 구절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을 만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런 걸림돌을 놓는 자는 참으로 불행하다고 선언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믿음이 약한 이들은 스캔들에 쉽게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쉽게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런 이들로 말미암아 공동체에 분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언제나 오늘 지혜서가 이야기하는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으로 죄를 분명하게 죄로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형제가 회개하여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살아가고자 한다면, “다정한 영”으로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를 용서해 주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합니다.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식별과 “다정한 영”을 바탕으로 하는 용서의 경계를 결정하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늘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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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지 말라고 강하게 이르십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남을 죄짓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행위입니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다른 이들을 걸려 넘어지게 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전혀 의식하지 않고 행한 말이나 행동 때문에, 상대방이 상처받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남에 대한 배려가 절실하기만 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잘못을 끝까지 용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용서하는 힘은 하느님을 신뢰하는 데서 나옵니다. 하느님을 신뢰하기에, 상대방이 어떠한 잘못을 했다 하더라도, 그가 회개함으로써 변하리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고, 그 믿음을 끊임없이 보여준다면 상대방은 언젠가, 반드시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일을 하면서, 처음부터 불가능하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면, 끝까지 불가능한 일로 남아 있을 것이 아닙니까?
반면 무슨 일을 할 때, 꼭 성취해야 한다는 태도로 끝까지 임하면, 가능한 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 경우 나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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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많은 이의 신앙생활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사제로서 가장 두려운 것은 공동체의 분열입니다. 내 선택과 결정이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것은 아닌지, 내 아집과 욕심 때문에 공동체가 갈라져 싸우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공동체의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겠다는 생각이 오만인 줄은 압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라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음을 압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책임자인 사제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는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면서 오히려 공동체를 분열시킬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옳음’이 있겠지만, 그 ‘옳음’ 때문에 공동체가 화합하지 못하고 평화롭지 못하다면, 그 옳음은 아마도 ‘그른 것’일 것입니다. 또한 공동체를 책임지고 있는 사제로서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오늘을 살아가는 사제들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사제는 공동체를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생각은 “비뚤어진 생각”이며 “미련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공동체가 분열하여 그 구성원들이 하느님을 불신하거나 서로 미워하게 된다면, 그 책임은 누구보다도 사제에게 있을 것입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사도들이 예수님께 드렸던 청원이 바로 저의 청원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자신만이 옳다는 고집과 아집에서 비롯된 굴레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위하여 한 발짝 물러서는 용기 안에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신다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연자매를 걸고 바다로 내던져지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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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받은 용서를 기억하라>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유혹을 받지 않고는 자기 자신에 대해 완전히 알 수가 없다.”라고 고백하였고,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다.”라고 말했습니다.
유혹은 극복하면 은총이고 넘어가면 죄입니다. 그러나 유혹은 언제나 삶의 자리에 있습니다. 때때로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지만, 유혹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하물며 인간에게 유혹은 얼마나 더 심하겠습니까? 우리는 유혹에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혹이 없기를 바라지 말고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성경은 용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용서가 말 같이 쉽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모범을 보여주셨기에 우리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셨고 당신에게 못을 박는 이들을 위하여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하시며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한 자비의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내가 하느님 안에 강해지고 뿌리를 내리면 그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은‘나는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삶의 여정 안에서 크든 작든 알게 모르게 많은 잘못과 허물을 안고 살아왔고, 또 앞으로의 여정 안에서도 끊임없는 자비와 용서를 입어야 할 연약함을 지녔습니다.
결국 우리 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임을 인정한다면 타인을 용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느님께 그리고 누군가에게 여러 번 용서를 받았고, 또 용서를 청했던 자기를 기억한다면 남을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아니 내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것보다 알게 모르게 잘못한 것에 대해 오히려 용서를 청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잘한다고 했는데 상대방에게는 결정적인 상처가 될 때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내가 잘한다고 생각한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움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피조물인 한 끊임없는 자비가 필요합니다. 어떠한 상황이나 처지에서든지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루카 17,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호한 결단으로 유혹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에 따르는 단호한 결단은 유혹을 이깁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환영받지 못할 일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힘, 용서해 주는 힘은 어디에서 옵니까? 신앙에서 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어 평화와 기쁨, 자유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용서가 어렵다면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울러 미운 상대를 만나 괴로워하지 말고 그 사람 안에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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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괴테 연구가 전영애 선생님의 말씀입니다.
“파우스트에 나오는 말입니다. 사람을 마지막 실족에서 물러서게 하는 것. 마지막 걸음을 못 내딛게 뒤로 불러들이는 것, 이게 유년 시절 사랑의 기억이거든요. 얘들은 많이 사랑해 줘야 합니다. 어렸을 때 받았던 그 절대적인 사랑은 어디 가지 않거든요. 그게 몸에 남아 있어서 그 힘으로 사는 것 같아요.”
괴테는 죽기 2년 전에 인생은 결국 ‘사랑이 살린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사랑은 지금 삶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열쇠가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실천하는 사랑의 크기는 어마어마합니다. 더군다나 이 사랑의 확장성은 대단합니다. 나만이 아닌 우리가 지금 삶을 잘 살게 해주고,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함께 갈 수 있게 합니다. 그런데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만 찾는 우리는 아니었을까요?
아이가 너무 예쁩니다. 이렇게 예쁜 아이도 때로는 무례한 말과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말과 행동을 해도 여전히 예쁩니다. 신부 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아이들을 교육의 대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이때 아이들은 그렇게 예뻐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어떤 말과 행동을 해도 다 예쁩니다. 예쁘니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사랑의 기억을 많이 남겨 주고 싶습니다. 사랑받은 아이가 또 사랑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을 늘 강조하셨습니다. 이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사랑의 극치가 바로 용서입니다. 자기에게 잘한 사람에게는 누구나 잘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사랑으로 다가서기란 쉽지 않지요. 그 모범을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모두 다 용서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주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만이 우리 공동체가 하나 될 수 있으며, 사랑만이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갖고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특히 세상 속에 살면서 무조건 용서하기가 쉽지 않지요. 그래서 주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주님께 대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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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물들임과 물듦>
루카 17,1-6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믿음의 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주어야 한다.”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물들임과 물듦>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짓을 저지르는 자!”(루카 17,1)
나는 너를 물들이고
너는 나를 물들인다
나는 너에게 물들고
너는 나에게 물든다
물들임과 물듦이
너와 나에게
오직 믿음이기를
나는 너를 물들이고
너는 나를 물들인다
나는 너에게 물들고
너는 나에게 물든다
물들임과 물듦이
너와 나에게
오직 희망이기를
나는 너를 물들이고
너는 나를 물들인다
나는 너에게 물들고
너는 나에게 물든다
물들임과 물듦이
너와 나에게
오직 사랑이기를
나는 너를 물들이고
너는 나를 물들인다
나는 너에게 물들고
너는 나에게 물든다
물들임과 물듦이
너와 나에게
오직 살림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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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용기 내어 꾸짖으라고 하시는데>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남을 죄짓게 하는 나의 죄와 나에게 지은 남의 죄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입니다.
그런데 오늘 가르침을 보면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두 가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보통 남이 내게 죄를 지었을 경우 그 죄를 용서하는 것만 생각하거나 거기에 초점을 두는 것이 보통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용서하기 전에 꾸짖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하시고 남이 내게 지은 죄를 꾸짖기 전에 내가 그에게 지은 죄를 보려고 하는데 그것 말고도 남을 죄짓게 하는 나의 죄에 대해서도 보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직접 지은 죄에 대해서만 반성하기 쉽습니다. 아니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아채더라도 인정하려고 들지 않기에 그것을 알아채고 인정하는 것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겨우 애씁니다.
그런데 부지불식간에 남을 죄짓게 하는 죄도 있으니 그 죄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저는 두 단어 ‘부지불식 간에’와 ‘조심’에 대해 유의합니다. ‘부지불식간에’란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않는 사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내가 무심코 한 말이 남을 죄짓게 한다는 것을 모르고, 내 행위가 남을 죄짓게 하는 죄라는 것을 아예 모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조심하라는 것인데 조심(操心)이란 방심(放心)의 반대말로서 ‘操’자가 ‘잡다’ 또는 ‘쥐다’는 뜻이니, 방심하지 않고 곧 마음을 놓지 않고 마음을 다잡거나 꽉 움켜쥔다는 뜻이지요.
아무튼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남을 죄짓게 할 수 있음에 대해 방심하지 말고 조심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용서 못지않게 꾸짖는 것도 해야 하고 잘해야 합니다. 사실 용서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꾸짖는 것이 실은 더 쉽지 않고, 잘 꾸짖는 것은 더 쉽지 않기에 우리는 꾸짖지 않으려고 하기 쉽습니다.
더욱이 나도 죄를 짓는 놈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 주님 말씀처럼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빼주려는 것만 같겠지요.
그렇기에 우리가 남의 죄를 감히 꾸짖기 위해서는 겸손과 사랑에서 비롯된 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용서하는 것보다 꾸짖는 것이 더 어렵고 그래서 어쩌면 더 큰 사랑이고 그래서 용기가 필요합니다. 사실 용서하는 것은 용기를 낼 필요까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꾸짖는 것은 용기를 내야 하고 반드시 겸손과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많은 기도 뒤에 꾸짖어야 할 것입니다.
그에 대한 사랑이 내 마음 안에 차오르도록 기도하고, 내가 꾸짖거나 충고할 때 그가 받아들일 마음이 생기도록 기도한 뒤에.
이런 준비를 거쳐서 잘 꾸짖는 사람은 용서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고, 용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용서는 이미 이루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꾸짖으라고 하셔도 저는 감히 꾸짖을 사람은 못되고 충고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용감히 꾸짖으라시는데 저는 감히 그러지 못하겠다는 오늘 저입니다.
사랑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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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무지에 대한 답은 지혜다>
-지혜의 사랑, 지혜의 훈련, 지혜의 습관-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걸을 제도 누울 제도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위를 아시나이다.”(시편139,1-3)
오늘 화답송 시편 139장은 제가 좋아하는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24절까지이며 우리는 매4주간 수요일 저녁성무일도 시간에 노래합니다. 이런 사랑의 하느님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랑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지혜문학에 속하는 시편입니다. 하느님은 지혜의 원천이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예수님을 사랑하여 알아 닮아가는 것이 지혜의 첩경이요, 이런 지혜야 말로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 지혜를 사랑하고 지혜의 책인 성서를 사랑합니다. 새삼 우리가 하루하루 평생 날마다 바치는 시편 전례공동기도와 미사공동전례 시간은 지혜를 사랑하는 시간, 지혜를 훈련하는 시간, 지혜를 습관화하는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공동전례기도 수행에 온 힘을 다할 때 지혜로워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더불어 한결같은 성서 렉시오 디비나 수행이 지혜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의 시작도 지혜를 사랑하는 우리에게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정말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이 귀를 기울여 경청해야 할 말씀입니다.
“세상의 통치자들아, 정의를 사랑하여라. 선량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찾아라. 지혜는 간악한 영혼 안으로 들지 않고, 죄에 얽매인 육신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가르침을 주는 거룩한 영은 거짓을 피해가고, 미련한 생각을 꺼려 떠나가 버리며, 불의가 다가옴을 수치스러워한다.”
말 그대로 사랑의 지혜입니다. 마치 의인화된 지혜로 그대로 주님의 현존처럼 생각되는 지혜입니다. 참으로 지혜를 모신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영혼과 육신이 깨끗해야 함을 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지혜로 오시는 주님을 모시는 시간이요, 이 미사은총이 우리를 날로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은혜롭습니다.
“지혜는 다정한 영, 하느님께서 그의 속생각을 다 아시고, 그의 마음을 샅샅이 들여다보시며, 그의 말을 다 듣고 계신다. 온 세상에 충만한 주님의 영은 만물을 총괄하는 존재로서 사람이 하는 말을 다 안다.”
참으로 이런 지혜로서 충만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공동생활에 참 필요한 지혜 셋을 가르쳐 주십니다. 추상적인 애매한 지혜가 아니라 구체적 공동체 삶의 현장에서의 실천적 지혜입니다.
첫째, 남을 죄짓게 하지 않는 것이 지혜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충격 요법적 표현입니다. 본의 아니게 이런저런 걸림돌로 알게 모르게 이웃을 죄짓게 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겠는지요! 스스로 조심하고 깨어 있어,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 하시니 이 또한 지혜의 훈련입니다.
둘째, 형제들을 끝없이 용서하는 것이 사랑이요 지혜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어찌 일곱 번뿐이겠습니까? 비록 용기 부족이나 무지로 ‘회개한다’는 말은 못하더라도 관대한 마음으로 내심 그를 용서한다면 언젠가 때가 되면 깨달아 회개할 것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72장5절, “형제들의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셋째, 믿음의 힘을 키우는 것이 지혜입니다. 믿음의 힘은 기도의 힘이고 하느님의 힘입니다. 인내의 믿음, 경청의 믿음, 겸손의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 비로소 존엄한 인간의 품위입니다.
믿음의 빛, 믿음의 지혜요 이런 믿음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참으로 부족한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믿음의 초보자입니다. 날마다 미사은총이 우리의 믿음을 날로 튼튼히 합니다. 그러니 부단히 청해야 할 믿음의 은총, 믿음의 힘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새삼 참 권위는 이런 믿음의 권위임을, 더불어 우리 삶의 여정은 날로 성장, 성숙해져야 할 믿음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진인사대천명,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자세입니다. 지혜와 믿음의 훈련과 습관과 함께 가는 주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지혜로운 믿음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시편 화답송 139장 나머지도 너무 은혜로워 나눕니다. 이런 하느님을 순수하고 열린 마음으로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여 아는 것이 그대로 참 지혜입니다.
“주님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 곳 어디리이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새벽의 날개를 이 몸이 친다하여도, 저 바다의 먼 끝에 산다 하여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 이몸을 잡아주시리다.”(시편139,7-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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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17,4)
<믿음의 힘!>
오늘 복음(루카17,1-6)은 짧은 말씀이지만,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남을 죄짓게 하지 마라.'는 말씀이고, 두 번째 단락은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락은 '믿음의 힘'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남을 죄짖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라고 전제하시면서도, 너를 죄짓게 하는 것이 참으로 큰 죄이며 불행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형제가 죄를 지으면 용서해 주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용서'는 '우리의 가장 큰 딜레마'입니다. 구원의 절대적 전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의 삶 속에서 '가장 실행하기가 어려운 딜레마'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복음 안에서 '7과 77'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의 의미를 지닌 숫자'로서, 무한정 용서의 의미, 조건 없는 용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참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무장되어 있는 이들에게는 불가능의 의미를 지닌 숫자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단락이 전하고 있는 '믿음의 힘'이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17,5)라는 사도들의 말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르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17,6)
믿음은 '크고 작고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라, '있고 없고의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내 안에 '참 믿음'만 있다면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가 가능한 것으로 바뀌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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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YrhSWhlZGQ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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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 4)
가을도
가을을 껴안으며
늦가을로
깊어집니다.
용서와 회개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갑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용서와 회개입니다.
회개와 사람
사람과 용서는
가장 아름다운
우리들의
사랑법입니다.
비로소
사람이 보일 때
더 뜨겁게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용서는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되찾게 합니다.
그러기에
용서는
우리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사랑이며
가장 많이
하느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용서의 시작과
용서의 끝
이 모든 여정과
함께하시는
용서의
하느님이 계십니다.
회개가
자라는 만큼
사랑도
깊어집니다.
고통을 모르면
슬픔을 모르면
우리는 결코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의 길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십니다.
길이 없으면
갈 수 없지만
길이 있기에
우리는
갈 수 있습니다.
회개와 용서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게 하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용서는
하느님을 향한
가장 좋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기도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회개이며
용서입니다.
회개와 용서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기도로
이 좋은 날은
밑겨드립니다.
가장 좋은
회개와 용서가
시작되었습니다.
회개와 용서가
하나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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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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