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리 지석묘를 지나면 함안군 함안면 소재지이다. 한국전쟁으로 군청건물이 소실되어 1954년 가야읍 현재의 위치로 군청이 이전하기 전까지는 함안군의 중심지였다. 함안면의 이름도 함안군청의 소재지면이라 해서 지은 것이다.
함안면 북촌리 1002-3번지 함성중학교 교정에 경남유형문화재 제8호 함안주리사지사자석탑(咸安主吏寺址獅子石塔)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주리사는 여항산 서남쪽 계곡 주서리 좌측 마을에서 2km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주리사가 폐사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석탑은 일제시대 함안면 사무소로 이전하였다가, 1945년 해방 후 함성중학교 교정으로 다시 이전하였다.
이 탑은 여러 번 옮긴 탓에 본래의 모습이 변형된 것 같다. 조성방식이나 규모로 보아 원래 5층 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탑신(塔身)은 완전하게 남아있지 않지만 층수에 따라 체감 비율을 두었던 것 같다. 지붕돌(屋蓋石)의 윗면은 완만한 경사를 두어 균형을 이루게 하였고, 네 귀퉁이의 처마를 살짝 들어올려 곡선의 아름다움을 잘 살리고 있다.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은 탑신을 떠받치는 받침부분(基壇部)을 네 마리의 사자로 구성한 것이다. 이런 모양의 탑은 매우 희귀한 것으로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華嚴寺)의 4사자석탑(四獅子石塔)과 충청북도 제천(提川)의 사자빈신사(獅子瀕迅寺) 터 석탑에서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네 마리의 사자는 모두 앉아있는 모습이며, 드러낸 이빨에서 사자의 위용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부드럽고 도톰하게 처리한 귓불은 오히려 친근감을 갖게 한다. 탑재와 조성방식으로 보아 신라(新羅) 하대(下代)의 양식인듯 하다. 기단부(基壇部)에 네 마리의 사자(獅子)를 배치한 일반적인 석탑과는 다른 이형석탑(異形石塔: 평면구성이나 입면 구성이 이른바 신라 전형양식의 석탑과 다른 석탑)이다.
현재 함성중학교 교정에 있는 함안주리사지석탑에는 사자석상이 없다. 문화재 절도범이 1999년 7월 석탑을 무너뜨리고 사자 석상 4개중 2개를 훔쳐갔다. 다행히 수사를 하던 중 이를 찾을 수 있었다. 현재 주리사지석탑은 4사자 석상없이 복원되어 있다.
사자 석상은 무려 3년이 넘도록 제자리를 찾아가지 못하고 함안면 사무소 창고 구석진 곳에 보관되어 있다. 함안군에서는 도난의 위험이 있어 함안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복원하려 했으나, 지역주민들의 의견이 원래 자리에 있기를 원해 함성중학교에 다시 복원하기로 했다고 한다.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 복원되기를 기원한다.
국가지원지방도로 67호인 큰길로 나서면 함안면 파수리로 가는 길이 나온다. 곶감이 유명한 파수리 가는 길에 유형문화재 211호 함안향교(咸安鄕校) 이정표가 서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봉성리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함안향교가 있다.
함안 향교는 조선 태조(太祖)원년에 파수리에 건립되었으나, 1600년(선조33년)에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선생이 지금의 위치인 봉성리로 이전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를 하였으며, 한국 전쟁 때 대성전(大成殿)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화재로 전소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그 이후에 중수한 것이다.
향교의 공간은 교육과 제례(祭禮)의 두 영역으로 나뉜다. 함안 향교의 건물 배치는 교육공간을 앞쪽에, 제례공간을 뒤쪽에 두는 향교 건물배치의 일반적 형태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향교가 있는 장소가 들판의 끝과 야산이 만나는 지형인 탓에, 교육영역은 평지에 배치되고 제례영역은 급경사 지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므로 교육영역과 제례영역의 중심 축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이는 매우 예외적인 구성으로 아마도 중수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여진다.
석축을 쌓는데 쓰인 석재(石材) 가운데에는 연화문(蓮華紋)이 양각(陽刻)된 사찰(寺刹)의 기단 면석(面石) 등이 혼용(混用)되어 있어 매우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