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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머지않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폴 부르제의 《정오의 악마》(1914) 중 나오는 구절이다. 마차를 끄는 것은 말(馬)이다. 말이 마차를 끌어야지 마차가 말을 끌고 가서는 안 된다. 사람이 말을 타야지 말이 사람을 타고 가서는 안 된다. 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삶은 엄청난 악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600여만 명이 학살당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당시 나치 독일 친위대 장교로, 유대인의 체포, 강제 이주, 살해 등 유대인 학살에서 ‘최종 해결책’을 수립하고 지휘 집행한 악마 같은 자다. 그는 종전 후 아르헨티나에 은신해 있다가 이스라엘 비밀정보부 모사드에게 체포돼 세기의 재판을 받게 된다. 지난 100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은 재판 중 하나가 바로 1961년 이스라엘 법정의 아이히만 재판이다. 37개국 TV로 생중계될 정도였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뉴요커〉 잡지의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아이히만이 재판받는 과정을 참관했다. 이를 바탕으로 1963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저술했다. 이 책은 원래 제목보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부재가 훨씬 더 유명하다. 부제가 이 책의 주제 의식이나 핵심 문제를 훨씬 더 잘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20세기를 살아간 철학자와 사상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러시아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하마스 전쟁이 시작되자 더욱 주목받게 됐다.
모두들 궁금했다. 과연 아이히만은 어떤 악마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전후 연합국에서 히틀러로부터 아이히만에 이르는 인물들을 지옥 깊은 곳에서 온 야수로 봤다. 그러나 법정의 아이히만은 동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외모와 말투조차 저지른 범죄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평범했다. 정신과 의사 6명이 아이히만의 정신 상태를 점검해 본 결과 정상이었다. 그중 한 의사는 “적어도 내 상태보다도 더 정상이다”라고 말했다. 그를 정기적으로 방문한 성직자는 그를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이렇듯 평범했다. 가족을 생각하는 가장이었으며, 탁월한 행정 능력을 보여 준 공무원이었다. 그가 악마 같은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나 의외였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은 이 재판에서 무슨 말을 했을까? 그는 줄곧 이렇게 주장했다.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중략) 나는 유대인이든 비 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p. 74).
자신이 유대인을 죽이라고 명령한 게 아니라 국가의 명령에 따른 것이며, 부서 책임자로서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논지는 이것이다. “나는 나치 독일의 군공무원으로 유대인을 수송하고 처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상부에서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고, 그것은 당시 우리나라의 합법이었다. 내가 만약에 그 일을 게을리했다면 그건 죄일 것이다. 그런데 내 나라에서 인정한 합법적인 일을 성실하게 따른 것이 무엇이 죄가 되는가?” 그러면서 심지어는 “신 앞에서는 죄가 있을지 모르나 법 앞에서는 죄가 없다”고 말했다.‘생각 없음’과 ‘악의 평범성’그렇다면 그는 무죄일까? 당연히 아니다. 그는 사형 언도를 받았다. 한나 아렌트 또한 그는 유죄라고 했다. 6백만 명이 죽었다. 아이히만은 나치가 지시한 일만 숙지했지 그 집단의 의도가 무엇을 향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죽어 간 사람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지 않는 ‘생각 없음’(thoughtlessness)이 악을 낳았고, 이러한 ‘생각 없음’이 유죄라고 했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p. 391).
그는 상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평범한 인간이 아무런 ‘생각 없이’ 악한 집단의 명령대로 행동했을 때 6백만 명의 유대인 학살 같은 악이 발생했다. 그는 그저 뛰어난 성과를 거둬서 조직에 인정받아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싶었다.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사적인 이성’으로만 사용한 것이다. ‘이성의 공공성’, 즉 희생자 상황과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잘잘못도 따지지 않았다. 이러한 평범한 개인의 ‘생각 없음’에서 상상할 수조차 없던 악이 출연한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이런 아이히만의 악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선언을 했다. ‘악행’이란 악마 같은 괴이한 존재가 아닌, 평범한 인간도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평범한 사람이 거대한 악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대학살 같은 것을 가리켜 ‘절대악’, ‘근본악’이라고 부른다. 아이히만 같은 죄는 그와 비견해 ‘평범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뤄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p. 349).현대적 의미1. 말의 힘아렌트는 아이히만에게서 서로 긴밀히 연결된 세 가지의 무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말하기의 무능성, 생각의 무능성, 그리고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의 무능성이 그것이다. 첫째가 말의 무능성이다. 하이데거의 선언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말이 존재를 만들어 간다. 누에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실을 가지고 자신이 살 집을 짓는 것과 같이, 사람은 자신이 하는 말로 존재의 집을 짓고, 그 집에서 살게 된다. 우리가 활용하는 언어의 세계가 바로 자신이 사는 세계의 크기가 된다. 말은 먼저 생각을 만든다. 언어에서 생각이 나온다. 언어의 한계가 생각의 한계다. 말이 허망하면 생각도 허망하고, 끝도 허망하다. 아돌프 히틀러는 말의 힘을 가장 잘 이용한 사람 중 하나다.
“말의 힘을 가장 잘 이용한 사람이 바로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그가 사용한 특유의 나치 언어는 독일 국민 전체를 나치즘에 열광하게 만들었습니다. ‘복수는 우리의 미덕, 증오는 우리의 의무’와 같은 선동적인 나치 언어는 결국 전 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1 나치의 선전부장이었던 요제프 괴벨스는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 한 문장만 달라. 그러면 누구든지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Gib mir nur einen Satz. Ich werde jeden zum Verbrecher machen)”2
이것이 말의 힘이다. 즉 아이히만은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에 젖어 나치가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를 자신의 언어로 내면화했다. 그에 따라 생각이 무능해지고, 타인을 공감하는 능력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7개월 동안 진행된 예루살렘의 법정 심리가 끝나고 교수대로 향하는 아이히만을 관찰했다. 아이히만은 근엄한 태도로 교수대로 걸어갔다. 붉은 포도주 한 병을 요구해 절반을 마셨다. 그는 성경을 읽어 주겠다는 윌리엄 헐 목사의 제안을 거절했다. 2시간밖에 더 살 수 없기 때문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그는 감정의 무너짐 없이 말했다. “잠시 후면,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 독일 만세, 아르헨티나 만세, 오스트리아 만세. 나는 이들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p. 349). 죽음을 앞두고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사실을 잊은 듯이,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내뱉었다.
이렇듯 아이히만은 먼저 말(言)이 무너져 갔다. 나치는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해 ‘언어 규칙’을 바꿨다. 유대인의 ‘강제 이송’은 ‘재정착’으로, 유대인 학살은 ‘최종 해결책’이라 불렀다. 더군다나 강제 수용소 입구에는 말도 안 되는 간판을 걸어 놓았다. ‘Arbeit macht Frei’(노동이 자유케 하리라). 이 문구는 독일의 문헌학자 로렌츠 디펜바흐의 소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독일 사회에서 속담과 같은 경구가 됐던 문장이다. 나치는 이 말을 수용소 간판에 새겨 놓고 실제로는 유대인을 일을 통해 몰살시키려 했다. 아렌트는 나치가 이렇게 말을 바꿈으로 얻은 효과를 이렇게 말했다. “말은 우리를 현실과 연결시켜 준다. 나치스가 언어 규칙을 만든 이유는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p. 21)
최상의 것은 최악의 것과 통한다. 천국도 말에 있고, 지옥도 말에 있다. 다시 말해 ‘말’은 최상의 천국이 될 수도, 최악의 지옥이 될 수도 있다. 말로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말로 천냥 빚을 갚을 수도, 천냥 빚을 질 수도 있다. 마귀도 말의 힘을 알고 있다. 우리를 멸망시키려고 획책하는 악한 마귀는 먼저 따뜻한 말로 우리를 중독시키려 한다. 하나님은 ‘혀의 힘(혀의 권세)’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잠 28:21a). 하나님의 평화의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은 살리는 말을 한다. 마귀의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은 죽이는 말을 한다.2. 생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되자“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는 진실이다.” 소포클레스의 스승이며 그리스 비극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아이스퀼로스의 이 선언에 반박하자. “전쟁의 첫 번째 희생자는 사람이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미화될 수 없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이스라엘인 하마스 사람이 군인이나 민간인, 심지어는 어린아이까지도 죽어 간다. 전쟁 후에는 전범을 잡아 법정에 세우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람 죽이는 데 앞장섰던 전범들은 거의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나는 국가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제2, 제3의 아이히만이 줄 지어 나타날 것이다.
아이히만은 너무나 평범했다. 그런데 결정적인 것 하나가 빠졌다. ‘생각하는 것’이다. 건기로 인해 예민해진 스프링복 무리 중 갑자기 어떤 한 마리가 무언가에 놀라서 뛰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 채 다른 영양도 놀라서 뛰기 시작한다. 그러다 맨 앞에 있는 놈이 낭떠러지를 발견하고 멈추려 할 때는 이미 늦었다. 뒤에서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는 무리도 멈추지 못한 채 서로에게 밀려 다 같이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만다. 생각 없이 뛰다 보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
디지털, 4차 산업혁명, 인공지능 시대 속 현대인은 인공지능에게 자신의 생각까지 맡기고 생각 없이 살아갈 위험이 크다. 사색은 멀리하고 검색만 주로 한다. ‘확증 편향’, ‘반향실’(反響室)에 빠져 아무런 반성 없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그것이 옳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면서 극단적인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이다. 비대면 디지털 공간에서는 언어 폭력, 따돌림, 명예 훼손, 성폭력, 스토킹, 개인정보 유포 등을 쉽게 저지르기도 한다. 이렇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인륜적 악이 발생할 수 있다.
신앙인의 고전(古典)인 고든 맥도날드의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 성장》에는 두 종류의 삶이 나온다. 하나는, 충동에 이끌리는 삶이고, 또 하나는 소명에 붙들린 삶이다. 충동에 이끌리는 삶(driven life)은 이리저리 부딪히며 그저 눈앞에 다가온 문제 해결을 하면서 사는 사람의 삶이다. 세상 가치관을 좇아가는 삶,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삶,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삶’, ‘생각 없이 사는 삶’이다.
반면 소명에 이끌리는 삶(called life)은 말 그대로 자신이 태어난 목적과 비전을 깨닫고 그 비전을 좇아 사는 삶이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계획과 생각대로’ 사는 삶이며 ‘삶을 산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내면의 질서가 조화롭고 평화로운 사람이다. 주님이 주신 생각대로 살아야 한다. 이를 믿음의 삶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가치관대로 끌려 다니며 종의 삶을 살게 된다. 살아 있는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이다. 살아 있는 나침반의 초침은 무엇이 그리도 경외스러운지 늘 떨고 있다. 초심의 떨림이 있는 한 믿을 수 있다. 떨림이 울림이 된다. 울림이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공감이 된다. 삶에 매몰되지 않고 항상 영원을 생각하고 비전을 생각하고 의미를 생각할 때, ‘악의 평범성’에 빠지지 않는 ‘살아 있는 사람’이 된다.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2).
첫댓글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생각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