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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眞城李氏 溫溪先生 後孫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병은(我虛軒)
임청각 (臨淸閣)
임청각은 세종조에 좌의정을 역임한 용헌공(容軒公)의 손자인 참판공(參判公)의 삼자인 임청옹(臨淸翁)께서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1519년(중종 14)에 창건하였으며 당초 민가로서는 최대 규모인 99간으로 건축하였으나 행랑채와 정문누대(正門樓臺), 별묘사당(別廟祠堂)은 임진란과 일제 때 중앙선 철도 건설로 소실 또는 철거되고 현재 군자정(君子亭), 정침(正寢), 사당(祠堂) 등 60여칸이 보존되고 있다. 임청각의 지형을 살펴보면 영남산 기슭으로 앞에는 낙동강이 흘러 반변천과 합수되어 문자 그대로 배산임류(背山臨流)에다 대안에는 일월산(日月山)이 뻗어내려 여기서 그친 무협산(巫峽山)이 정답고 멀리 강 건너 저편에는 문필봉 낙타산(駱駝山) 연봉이 수려하게 에워 둘러 그 아름다운 풍경은 화산절경(花山絶景)이라 칭하며 안동팔경으로 지정되어 있다. 목조 건물로는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임진란을 겪어온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가지가지 전설과 일화를 간직하며 480여 년 22대 동안 보존하고 있다. 전면 도로 중간에 서있는 고목은 정문 옆에 있는 나무였다. 정문은 2층 누대로 건축되어 옛날에는 낙동강 물이 누대 앞으로 흘러 누대 2층에서 낚시를 하였다. 이 집의 특기할 만한 세 가지 사실은 첫째, 20대까지 양자 한번 없이 종자종손으로 계계승승 이어지다가 국권회복운동 와중에서 종자 횡위(橫位)로 21대만에 조카 양자가 처음이며 둘째, 인물이 연면배출(連綿輩出)되어 문학석학이 대대로 이어졌는데 한말에는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선생이 여기서 탄생하였으며 일가 9위(位) 가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셋째, 재산이 부절(不絶)하여 수백 석, 때로는 수천 석의 부를 유지하여 임진란에는 이 집에 주둔한 명군을 상당기간 먹인 일도 있으며 흉세에는 기민구휼에도 힘썼다.
임청각 군자정(臨淸閣 君子亭)
군자정은 丁자형 다락집이며 내부에 임청각 현판과 농암 이현보, 백사 윤훤, 재봉 고경명, 송강 조사수, 파서 이집두, 구포 나만강, 석주 이상룡 시판이 걸려있다. 고려시대 건축형으로 진기하다. 중, 하방이 벽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 이 건물의 특징이며 현판글씨는 퇴계선생의 글씨로 단아한 서체가 아름답다. 정자 옆에는 방형의 연못을 조성하여 군자의 꽃, 연꽃을 심어 군자의 심성을 닦고자 하였다.
임청각 정침(臨淸閣 正寢)
임청각 정침(正寢)은 지리학적으로 일월이 합친 형국이라 일(日)자와 월(月)자를 합한 용(用)자형으로 지형을 이용하여 계단식으로 건축하여 어느 방이라도 광선이 들어 밝으며, 장방과 도리 사이에 옆방을 끼운 것과 중, 하방이 벽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 이 건물의 특징이며, 한 채의 가옥을 용(用)자형으로 건축하였기에 뜰(中庭)이 다섯 개로 지은 집은 임청각 외에는 볼 수 없는 특수한 건물이다. 2층으로 된 다락 부분이 곡간으로 많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임청각(臨淸閣)우물방
우물방은 정승이 세분이 나온다고 전해 오고 있다. 본손(本孫)으로는 상해임시정부 초대국무령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선생과 외손으로는 문헌공(文軒公)이 이 방에서 탄생하였으며 앞으로 한 분이 더 나신다고 한다. 이 우물은 집안에 있는 것이 진기하며 영천수(靈泉水)라 하여 장마가 계속되거나, 가뭄이 계속되거나 하여도 일정한 수량이며 수질과 물맛이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법흥동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 (法興洞 固城李氏 塔洞派 宗宅)중요민속자료 제185호
조선 숙종때 좌승지로 증직된 이후식(李後植 1635-1765)이 안채를 건축하고 이어서 사랑채와 대청(永慕堂)을 그의 손자 원미(元美 1690-1765)대에 완성한 가옥이다. 대청의 북쪽에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는 북정(北亭)은 7대조인 진사 이종주(李宗周)가 1775년(영조 51)에 건립하였다. 영남산의 동쪽 기슭에 좁은 계류를 끼고 넓직히 동남향으로 자리 잡았다.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마당에는 연못이 있고 건너에는 대청이 높게 자리 잡았고, 연못 동쪽에는 사랑채가 있으며 그 곁에 口자 평면으로 구성된 안채가 있다. 안채의 동쪽에는 3칸 사당이 있고, 대청 북쪽 좀 떨어진 숲 속의 계류옆에 북정이 서 있다. 대청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정면의 좌측 2칸은 큰 마루방이고 우측 1칸은 1칸반 온돌방 뒤에 반칸 골방을 두었으며, 전, 후면과 서측면에는 길게 동마루를 달아 내외부 공간을 연결하였다. 방과 마루방의 창문틀에는 가운데 설주가 서 있으며, 마루방에는 큰 범살문을 달아서 바깥으로 들어 열게 하였다. 마루방은 연등천장으로 5량가인데 종보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웠다. 사랑채는 정면과 측면이 2칸으로 서쪽에 2칸 크기 마루방이 있고 동쪽에 온돌방 두 칸이 앞뒤로 놓였다. 마루방 주위와 남쪽 온돌방 앞까지 동마루를 깔고 난간을 돌렸는데 마루방 북쪽과 남쪽 온돌 앞 동마루 끝에 계단을 쌓았다. 마루방과 온돌방의 살창문은 영쌍창이고, 5량가인데 충여 위에 첨차와 초각한 대공을 놓아 외기틀을 올리고 눈섭천장을 꾸몄다. 안채는 정면 8칸 측면 6칸으로 경사지의 높은 자연석 축대 위에 앉은 서산각지붕집이다. 중문간을 들어서면 방형의 안마당에 이르는데 정면 기단 위에 마당폭 가득히 4×2칸의 큰 안대청이 자리 잡았으며 방주에 5량가로 동자주대공을 세웠다. 대청 우측에는 직교하여 골방과 안방이 도합 4칸 길이로 마당쪽을 향하여 늘어섰고 그 앞에 부엌을 2칸 더 달아내어 중문간채에 관입되었다. 대청 좌측에는 2칸통 서녁방을 두고 그 앞으로 누다락집으로 3칸을 뻗어 중문간채에 접하였는데 누하에는 통래간과 헛간 2칸을, 누상에는 3칸의 긴 고방을 두었다. 중문간의 좌측에는 방과 부엌에 고방 2칸이 배치되었고, 우측은 관입된 안방부엌 오른쪽으로 봉당 1칸과 부엌방 1칸을 두어 중문간채가 우측으로 2칸 연장 돌출되었다. 이것과 대칭으로 안방과 뒤쪽 골방 오른쪽으로도 마루방과 동녘방을 돌출시켰는데 이들 단부를 사주문과 토담으로 연결하여 장방형의 내밀한 살림마당을 구성하고 한구석에 장독대를 꾸몄다. 안채 대청 뒷벽의 널청문과 안방 등의 살창문도 대부분이 영쌍창으로 되어 있다. 이 집은 숲이 우거진 야산과 계류 등 자연환경과 연못과 건축을 잘 조화시킨 사대부 저택으로 독특한 구조수법과 전통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이상룡(李相龍 1858-1932)
본관은 고성(固城). 초명은 상희(象羲). 이명(異名)은 계원(啓元), 계원(啓源).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洲). 출신지는 안동면(安東面) 법흥동(法興洞: 현 안동시 법흥동).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가의 멸망으로 인식하고 일제를 토벌하기 위해 군자금 조달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방략과 대책을 제시하면서 적극적으로 투쟁하였다. 그 해 겨울 매제 박경종(朴慶鍾 : 영해출신)과 함께 1만 5천원을 모아 가야산에서 거병한 차성충(車晟忠)을 지원하는 한편 신돌석(申乭石), 김상태(金相台) 등과도 연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차성충의 기병이 실패로 끝나자 자신을 포함한 유림계의 대응태도와 입장에서 근본적인 회의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새 방략을 모색하던 중 1909년 4월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여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10년 8월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이상룡은 신민회와 더불어 서간도 이주 계획을 세우고 1911년 2월 3일 가솔과 가까운 친척을 이끌고 서가도로 망명하였다. 서간도로 망명한 후 이상룡은 오로지 이주한인의 자치와 독립운동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1911년에서 1918년까지는 서간도로 이주해온 우리 민족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면서 독립운동지사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으며, 이후 1930년경까지는 항일독립운동세력의 구심점으로서 중국 각지에 흩어진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결속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상룡은 서간도 망명 직후인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포에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류인식은 교육부장을, 김동삼은 조직과 선전을 담당하였다. 경학사는 1913년 공리회(公理會)를 거쳐 1916년에는 부민단(扶民團)으로 개편하였다. 이런 일련의 조직들은 서간도로 망명한 애국지사들의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한 것이었다. 이 무렵 국내에서 이주해 온 한인들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곤란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상룡은 당시 중국인들이 버려두었던 저습지를 헐값에 빌려 개간하였다. 몇 차례 시도 끝에 1914년경부터 벼농사를 지어 큰 수확을 올리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서간도 각지에 논이 개발되고 비로소 한인의 생활이 안정되었다. 서간도로 이주해 온 한인들의 경제생활이 안정되면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실천운동도 구체적으로 행동에 옮겼다. 서간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청년들을 모아 경학사 부속기간으로 설치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통해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그 후 고산자에 토지를 구입하여 학교를 신축하고 본교를 두었다. 이것이 뒷날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상룡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대동역사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역사관련 저술을 남겼다. 그는 민족정신과 주인정신을 동포들에게 심어주고자 우리 역사를 서술하였다. 그래서 한국고대사를 만주를 중심으로 단군→부여→고구려→발해의 흐름과 한반도를 중심으로 삼한→신라, 백제, 가야로 연결시키는 이원적인 구도를 체계화시켰으며, 그 중에서도 만주에서 이루어진 역사에 무게 중심을 두었다. 이것은 만주와 중국 북부가 고대 우리 민족의 영토였다는 점을 부각시켜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고 그를 통해 독립에 대한 신념을 동포들에게 주입시켜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다. 1919년 국내에서 3, 1운동이 일어나고, 이를 전후하여 국외에서도 독립운동의 열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이에 남만주 일대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들은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에 이상룡은 김동삼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만주 한인사회의 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다. 이 한족회는 경학사(1911-1913), 공리회(1913-1916), 부민단(1916-1919)의 정신을 계승하여 결성된 만주 한인사회의 자치기구였다. 여기에서 이상룡은 중앙위원회 위원을, 김동삼은 서무사장(김동삼이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맡으면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김성로(金聲魯)가 서무사장에 기용되었다)을, 김형식(金衡植)은 학무사장을, 김규식(金圭植)은 학무부장을 각각 맡아 활약하였다. 또한 이상룡은 1919년 4월 유하현 고산자에서 서간도 한족대표를 모아 독립전쟁을 주도해 나갈 군정부 즉 군사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그런데 마침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은 임시정부의 산하 조직으로서 군정서 조직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것이 바로 1919년 4월에 조직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였다. 이상룡은 서로군정서에서 최고 대표인 독판으로, 김동삼은 군사 지휘를 총괄하는 참모부의 대표인 참모장으로 선임되었으며, 이외에도 김성로는 서무, 김응섭(金應燮)은 법무, 김형식은 학무를 담당하였다. 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일제와의 항쟁을 계속하던 이상룡은 국내에 조직된 의용단(義勇團)과 연결을 꾀하여 그것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그는 1921년에 북경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하였고, 이어서 남북 만주와 연해주에 각기 일어나고 있던 독립군단과 항일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하여, 1922년 6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비롯한 8단 9회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상해에서 개최되자 김동삼을 비롯한 핵심운동가들을 파견하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면직안이 통과되었다. 임시대통령으로 추대된 박은식은 헌법개정을 추진하여 대통령 중심제를 국무령체제로 바꾸었다. 그리고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대하였다. 그 해 9월 9일 국무령에 취임한 이상룡은 당시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독립군을 이끌며 항일 투쟁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각(組閣)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단체나 독립군 양성을 통해 활발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던 다수의 운동가들은 이미 임시정부의 독립운동노선에 비협조적이었다. 6개월 가량 독립운동세력의 조정과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뜻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자, 1926년 국무령직을 사임하였다. 임시정부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1926년 2월 만주로 다시 돌아온 이상룡은 우선 만주내 독립운동단체만의 통합이라도 먼저 이루려는 생각에서, 정의부(正義府), 신민부(新民府), 참의부(參議府) 3대 재만광복단체의 통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일제의 만주와 중국대륙침략은 더욱 가열되었다. 1932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만주에서의 항일운동도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런 와중에 그는 그만 병석에 눕게 되었다. 병으로 여러 달째 일어나지 못하고 있던 이상룡은 1932년 5월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순국하였다. 의병에서 시작된 석주의 독립운동은 끝까지 무력항쟁론, 독립전쟁론을 고수해 나간 것으로 평가된다. |
4.의성김씨종택(내앞,천전)
의성 김씨종택 (義城 金氏宗宅) 보물450호
의성김씨 종택은 전면 11칸, 측면 8칸 모두 55칸 규모로 건물의 모든 방에 햇볕이 잘 들어오게 한 특색을 지니고 있다. 본채의 전체적인 평면 구성은 동쪽 口자형 안채와 서쪽 일(一)자형 사랑채(4칸X2칸)가 나란히 서있다. 그 두채를 일(一)자형의 큰사랑채행랑(서고, 누다락)과, 일(一)자형의 행랑채가 이어져서 이것을 합친 ‘ㄴ’자형을 이룬다. 그러므로 종택은 전체적으로 ‘巳’자 형상을 하고 있다. 종택의 입구를 들어서면 앞쪽으로 담이 있고 그 안쪽으로 행랑마당을 지나 행랑채와 작은사랑채가 길게 가로 놓여있다. 행랑채와 작은사랑채를 연결하는 중문을 들어서면 동쪽으로 안채의 외곽부, 서쪽에 사랑채와 사랑채행랑의 전면 내곽부가 자리한다. 이 곳 안동지역의 사대부가옥의 배치형태에서 남자들이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로 사랑채를 이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안채보다 낮은 앞쪽에 배치되는데 반해 안채와 나란하게 다소 위쪽에 배치되어있다. 그러면서도 안채는 口자형 평면으로 사랑채와 격을 두어 배치되고, 사랑채는 대청에서 앞에 있는 행랑채와 길게 연결되었다. 중간마당(뜰)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안채, 북서쪽으로 큰사랑채가 배치되어있으며 서쪽으로는 중층으로된 누마루(하층은 광으로 사용)를 지닌 큰사랑채행랑이 작은사랑채에서 오름계단으로 연결되고, 행랑채는 행랑마당쪽 중문에서 작은사랑채와 연결되고 있다. 안채는 중문부엌, 안방(큰방), 대청, 건넌방들과 헛간, 방 등이 대청을 중심으로 구성되어있다. 다른 口자형 양반주택의 평면과 달리 안방이 바깥 중문쪽으로 높게 자리 잡고, 대청은 안방에 직교해서 동향하고 있으며, 마루바닥이 세 개의 단(三段)으로 층으로 이루고 있다. 행랑채에서 바로 안채를 통하는 문이 없이 중간마당에 작은 중문을 두게 만들어 외부인의 출입이 불가능한 점은 조선시대 유교의 남녀유별, 내외사상을 철저히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리고 안채에서는 안대청이 내외 구별이 없이 생활의 중심이 되도록 이웃해서 방의 배치와 구조가 계획되었다. 큰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커다란 사랑대청과 사랑방과 침방이 일자형으로 구성되어 집주인은 중간마당을 통하여 안채에서 큰사랑채에 이르지만 내객은 행랑채의 중문을 들어서지 않고 곧바로 서쪽의 작은사랑채를 돌아 넓은 사랑마당을 통해서 큰사랑채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사랑채가 갖는 남자 주인방으로서 기능은 약하다. 큰사랑채와 행랑채를 잇는 부속채는 완전한 좁고 긴 2층 누다락 구조로 되어 윗층은 서고로서 큰사랑채의 대청과 이어지고 아래층은 헛간으로 쓰인다. 이 같은 2층 구조의 부속건물는 16세기 당시의 다른 주택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즉 중국 명나라 재상가의 집에서 응용되어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행랑채는 작은사랑채 부분의 서쪽 끝에서부터 누마루, 부엌, 대문(중문)․그리고 행랑채 부분이 되는 마구간, 마루, 함실부엌방, 마루들이 일(一)자형으로 되어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커다란 사랑대청과 사랑방․침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중문부엌으로부터 안방, 대청, 태실, 작은대청, 건넛방, 부엌, 헛간 등이 口자로 배치되어 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이 집의 기밀성을 가지는 공간이다. 특히 안대청의 높이는 매우 높아 대청과 붙어 있는 건넌방의 천장상부를 누의 형식을 빌려 찬다락으로 사용하고 있다. 안채의 기단은 사랑채와 같은 높이로 하였고, 덤벙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큰 것은 26X26cm이고, 작은 것은 20X20cm이다. 안채의 구조는 간결한 납도리집 양식으로 안방의 전면에는 난간을 툇마루가 있고, 툇마루 밑에는 간결한 굴뚝을 내었다. 지붕가구도 간략하게 하여 대들보 위의 종량은 형식적으로 작은 단면의 부재를 접시받침만으로 받들고 있다. 대청칸의 온돌방은 반침으로 웃목을 일부 가리고 있어 이는 연령별의 앉아야 될 자리의 구별을 고려한 것으로 계획되었다. 안대청은 5량집 구조이며 기둥머리는 한 곳만 제외하고, 기둥, 도리, 보를 간단히 결구하였다. 대공은 동자기둥을 세웠고 주심도리와 중도리는 납도리로, 종도리는 장여를 받친 굴도리를 사용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정으로 하고, 기타 방들은 반자위에 종이마감으로 하였다. 대청마루바닥은 우물마루인데 높이를 달리한 3단으로 형성되어있다. 안마당의 배수처리는 부엌마다 밑으로 토관을 묻어 밖으로 빠지도록 하였다. 이 주택에서는 안채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기 때문에 기능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안채의 비중이 컸을 것으로 생각한다.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무고주 5량집이며, 합각지붕에 흩처마로 되어 있는데 서쪽 3칸통은 대청이고, 동쪽 1칸통은 2개의 침방로 구성되어있다. 침방은 안대청과 뜰을 사이에 두고 가까이 위치해 있어 다른 지방의 사대부가옥에서보다 외간의 구별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은 배치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 주택에서는 지형조건을 최대한 이용하다보니 자연히 약 6척정도의 높이가 높아져 행랑채와는 약 6척의 정도의 고저차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작은사랑채와 행랑채가 연결되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2층 바닥이 큰사랑채 대청까지 수평으로 연결되면서 그 아래는 광으로 사용 할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랑채의 구조는 막돌허튼층 쌓기를 한 기단위에 방형의 막돌초석을 놓고 그 위에 각기둥(21cmX25cm)을 세워 굴도리를 받치는 민도리집 양식이다. 가구는 오량으로 앞뒤의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고. 이 위에 접시받침만을 놓아 종보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흩처마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기둥머리에서는 외부로 보아지를, 내부로는 초공을 받치게 하였고 종보 위에는 대공을 세웠다. 대청 정면은 세 살 쌍여닫이문으로, 대청과의 사이는 4폭 여닫이로 하였다. 행랑채는 정면 11칸, 측면 1칸의 3량집 규모로써 가운데에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배치되어 있고, 그 양옆에 마굿간과광, 방 그리고 양끝에서 1칸씩 마루가 배치되어 있다. 사당은 큰사랑채의 뒤편 북서쪽 높은 언덕 위에 따로 담장을 쌓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집으로 건축되었는데 본채와는 축이 약간 틀어져 있다. 정면 4칸, 측면의 1칸의 맞배지붕에 1고주 1량집 구조이며, 정면에 퇴칸마루를둔 사당의 일반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곳에는 청계선생의 불천위 위판과 영정을 봉안해 두고 있다. 출입은 오른쪽으로 돌계단을 통해 출입하도록 되어 있다. 사당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안채와 좀더 가깝게 배치되어 있는데 비해 여기서는 사랑채와 아주 가깝게 배치되어 있다. 안채와 사당과의 기능적인 관계는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협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주택을 둘러싸고 있는 담은 외담과 내담의 이중으로 되어 주거의 기밀성을 좀 더 보장해 주고 있다.
5.정재종택
정재종택 (定齋宗宅) 경북 문화재자료52호
대산학설(大山學說)을 승계한 퇴계학파의 거봉인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선생의 증조부인 류관현선생이 1735년(영조 11)에 건립한 가옥이다. 임동면 수곡2동에 있었으나 임하댐 수몰로 인하여 1987년 현위치로 이건한 것이다. 대문채, 정침, 행랑채, 사당 등 4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침은 口자형 평면으로 전면에 사랑방과 사랑마루, 갓사랑, 책방을 두었고 안채에는 안방과 부엌, 찬방, 대청, 루마루, 상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침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반으로 5량가로 결구되어 있다. 좌측 퇴칸 부엌은 안방과 전면의 찬방을 끼고 있으며 좌측 협칸과 어칸은 통칸온돌로 놓고 우측 협칸과 어칸은 대청으로 꾸미고 대청 전면과 우측 퇴칸의 누마루측으로는 4분합들장지를 설치하여 하절기 통기를 용이하게 꾀하고 있다. 안방과 대청 전면에는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대청과 누마루 배면은 판벽과 판문으로 짜여져 있다. 사랑채는 정면 6칸 측면 한칸반으로 5량가로 결구되어 있다. 사랑채 좌측 퇴칸은 갓사랑방이 한칸반 온돌방으로 꾸며져 있다. 어칸은 통칸 온돌방으로 큰사랑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방과 사랑마루 사이는 4분합들장지로 구획되어 있고 사랑마루와 전면의 툇마루 사이도 4분합들장지가 설치되어 있어 하절기의 원활한 통기를 배려하고 있다. 대문채는 솟을대문을 중심으로 좌측에 두칸 온돌방이 있고 우측에는 장마루 청판을 깐 두칸 고방이 설치되어 있다. 행랑채는 정면 6칸 측면 한칸의 3량가 맞배지붕이다. 두칸 고방과 창고, 외양간, 온돌방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행랑채 곁에 3칸의 디딜방아칸이 위치해 있다. 사당은 우측 중문을 지나 들어설 수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내부바닥은 장마루로 처리하였고 구조는 막돌기단 위에 덤벙주초 깔고 방주위 상부가구는 5량가로 결구하고 있다. 정침의 누마루 바닥 높이가 서로 다른 것으로 미루어 평상시 서로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매우 특이한 것으로 사료된다.
만우정 晩愚亭 경북 문화재자료37호
조선시대 병조참판을 지낸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1777-1861)의 강학지소로 1885년(고종 22)에 건립된 정자이다. 현판은 대원군의 친필이다. 높은 자연석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을 꾸몄는데 좌측칸을 통칸방으로 꾸미고 우측 2칸은 우물마루를 깔았다. 원주와 방주를 혼용하였는데 대청부분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다. 대청의 외부벽은 판벽으로 마감하고 모든 칸에 창호를 달았는데 정면의 가운데 것은 키가 높은 굽널세살문으로 출입의 용도로 사용하고 나머지는 울거미가 있는 두짝 널문을 달아창의 쓰임새로 하였다. 대청의 원기둥 위에는 주두를 올렸고 창방과 외목도리장혀 사이에 소로를 끼워놓아 대청부분을 강조한 소로수장집으로 홑처마 팔작기와집이다. 5량가로 동자형대공을 세운 장식성이 없는 간결한 구조이다. 누하부는 목주를 받쳤으며 온돌방의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다. 규모가 작고 꾸밈새가 검박하나 전면에 큰 누마루를 두어 그런대로 별당으로서의 여유와 운치가 있는 집이다. 원래 널직한 후원터에 담장 돌림 없이 산전에 위치해 있었는데 산과의 공간적 단절이 없이 그대로 산록의 연장처라고 볼 수 있는 위치였으며 별당중에서도 매우 여유있는 배치형식을 보이는 예였다고 하겠다. 1913년에 건축한 건물인데 정자의 건축기법에서는 아직 조선시대의 수법이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당초 임하면 사의동 악사에 위치했으나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1988년 이곳으로 이전하여 같이 이건한 정재종택의 오른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