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금치전적지
1894년 11월~12월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및 관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
봉기 후 동학세력 내에서 대립을 계속하여 오던 전봉준 중심의 남접과 최시형 중심의 북접이 화해하여
공동전선을 편 후 북상을 위해 논산에서 합세하여 공주로 진군하기로 하자 사태는 다시 긴박해졌다.
충청감사 박제순은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였고, 이에 관군이 출동하자 일본군도 이어서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부대를 3분하여 제1진은 계룡산 서북쪽 판치(板峙, 널티)에, 제2진은 공주 남쪽 30리 지점인 이인역에,
제3진은 공주영에 배치하였다. 한편, 논산 초포에서 일부 북접군을 합류시킨 1만여 명의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노성읍에서 경천으로 이동하여 주력을 이인역-공주로 이르는 길에 집중시키고
1개 부대는 공주 동남방 10리 거리의 효포로 접근시켰다.
그리고 다른 1개 부대는 공주 동북쪽 30리 떨어진 대교로 전진시켜 공주를 포위, 공격하려 하였다.
11월 19일 동학농민군은 이인역을 공격하여 관군과 일본군 지원부대를 공주 부근 웅치까지 후퇴시켰다.
11월 22일 웅치에서는 일본군 및 관군과 농민군 간에 재차 격돌이 벌어졌으나 유리한 지형에 의지한 일본군과
관군의 격렬한 사격으로 동학농민군은 공주 남방 30리 지점인 경천까지 후퇴하였다.
같은 날 대교를 향해 북상하는 부대와 합세하기 위하여 북쪽에서 남하하던 북접부대 역시
홍운섭 부대가 방어하던 효포에서 관군의 기습공격과 일제 사격을 받아 패퇴하고 말았다.
효포에서 농민군을 저지시킨 관군은 웅치의 관군과 전열을 맞추기 위하여 일단 공주로 후퇴하였으며,
이후 양군은 서로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한편 농민군은 경천에서 6~7일간 진영을 가다듬고
김개남(金開南)이 지휘하는 5,000여 병력의 지원을 받아 사기를 되찾았다. 정비를 마친 농민군은 다시 공주로 육박하였다.
12월 4일 동학농민군의 일제 공격이 시작되자 판치와 이인의 관군 전초부대는 버티지 못하고 우금치로 후퇴하였고,
이후 7일간 우금치를 둘러싼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여 방어망을 구축하고
기관총을 비롯한 근대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의 방어선을 뚫지는 못하였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동학농민군이 궤멸되자 일본군과 관군은 그때까지의 수세적 위치에서 공세로 전환하여
노성·논산 방면으로 후퇴한 농민군을 추격하여 은진 황화대 지역에서 주력을 완전히 격파하여 분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