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고백록 6권)
우리는 살면서 수도 없이 많은 착각속에 빠진다. 그 착각의 구멍은 아주 크고 깊게 뚫려 있으나 평지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 빠지기 쉽고, 빠져나오기는 힘들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그것에 빠지기를 자처하고 있다. 어느덧 고백록 6권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드디어 마니교에서 빠져나왔지만, 결코 진짜가 아닌 즐거움(지식, 재물, 여자)을 포기하지 못해 길을 헤맨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길을 헤메는 제자이자 친구 알리피우스의 이야기도 함께 소개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헤맴의 여정을 마치고 고백록을 쓴 거지만, 그걸 읽는 입장의 나는 길을 헤매는 여정 중이라서 많은 찔림이 있었고 큰 도전이 되었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계속 변할 수 없다.” 집에서 홈트레이닝 영상을 틀어 놓고 운동을 하는 나는 홈트레이닝 강사의 저 말을 듣고 나서부터 작은 마법에 걸린 듯 ‘당장’이라는 단어를 모토삼아 즉각 실행에 옮기는 일들이 많아졌다. 그 마법은 대단한 어떤 주문이 아니었다. ‘착각’을 인지하게 해준 것뿐이었다. 나는 미래의 사람이 아니기에 현재의 초들을 보내고 오늘의 하루를 보낸다. ‘현재’에서 해야 하는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은 내일도 내일 해야 할 일을 미룰 것이라는 암시였다. 왜냐하면 나는 내일이라고 해서 내일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일 주어진 오늘을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이 깨달음을 운동이나 공부 같은, 현실적으로 내 앞에 놓여있는 것들에만 적용을 시켰다. 그런데 정말 공부, 운동만 현실적인가? 나는 가장 흐릿한데 가장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하나 까먹고 있었다.
‘죽음’이다. “만일 죽음이 갑자기 덮쳐 오면 나는 어떤 상태에서 이 세상을 떠나게 될까?” 왜 이 질문은 삼키며 살았을까? 지식을 쌓는 것을 넘어 대학에 가고 사회에 진출할 수 있는 ‘공부’라는 도구와 몸을 가꾸는 ‘운동’ 이건 현실에 있어서 아주 작은 부분일 뿐이었다. 정말 현실을 직시하는 건 ‘태어남’의 과거형이 아닌 ‘죽어감’의 현재진행형을 바라볼 때이다. 왜 나는 살아가는 척하며 정말 살아감을 미루고, 그 사이에 영혼이 죽어감의 속도는 늦추지 못하는가? 이것이 나의 한계이고 우리의 한계이구나. 주어진 시간을 보내며 그 시간을 죽음 후에 대비하지 않고 이것이 ‘현실적’이라며 눈 앞에 닥친 것에만 꽂혀 있으니 사실은 가장 비현실적이다.
그 이유는 뭘까? 수많은 사람들이 현실을 피하고 있는 이유 말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현실이란 다가올 죽음이다. 그렇다고 공부, 운동, 저축, 결혼 같은 것들이 전혀 비현실적이고 억제해야 하는 세상적 탐욕이라고 말할 생각은 추호에도 없다. 하나님은 이것들을 사용하셔서 영광 받으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에’만’ 집중하는 것은 절대 현실적이지도 지혜롭지도 않다. 그리고 아마 그 이유는 인간의 연약함과 거만함 때문인 것 같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에 분명 연약하면서도 높아지려는 성질이 있다. 그 성질이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을 낳았고 말이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그리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어리석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게 얼마나 불쌍한지.
p.196에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 “어둠이 눈앞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뒤돌아서서 신음하며 서로 탄식하기를 “언제까지 이러한 상태가 계속될까?”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세상을 따르는 일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버릴 때 우리가 꽉 붙들 수 있는 확실한 진리를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과거형으로 말한 이 문장이 내게는 현재형이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후회로 하루를 채우고 보내고 다음 날도 후회로 채우고 보내며 시간을 버릴까 한탄하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을 끊지 못하기에 한탄도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귀한 깨달음이다. 나 또한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지금 잠깐의 유혹들(ex:미디어)을 뿌리칠 때 꽉 붙들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뿌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러면 나는 무책임한 사람이다. 하나님은 내게 엄마와의 대화, 성경을 가르쳐주는 교회, 고백록과 같은 도구로 끊임없이 자신을 말해 주셨다. 나는 꽉 붙들어야 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이제는 모른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더 이상 성경 읽기를 미룰 수 없다. “달려오너라. 내가 너희를 붙잡아 목적지까지 인도해 주마, 거기에 가서도 내가 너희를 붙잡아 주마.” 이제는 달려나갈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