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The Bench' 속 현실에 포착된 이미지와 삶의 확인
1. 삶에서 찾아 낸 이미지
연극은 삶의 ‘재확인’으로 보이고 있다. 즉 삶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기보다 체험되는 삶, 그 자체를 무대로 옮겨 놓고 있다.
그래서 그 속에 우리는 배우들의 연기에 자연히 장단을 맞추고, 그 호흡에 따라가는 공간의 장이 만들어진다.
배우의 연기가 좋고 나쁨은 그 자연스러움을 얼마나 잘 표현했는지로 좌우된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스토리들을 연극 속에서 치환하고 있지만 그것들은 한편으로 생소한 느낌을 준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삶에서 그것들을 음미할만한 여유를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을 이러한 연극 속에서나마 ‘재확인’하고 싶은 생각을 해봄직하다.
그 갈망을 읽고 얼마나 현실적으로 그것들을 최대한 공감할 수 있고, 또 적당한 사색의 틈을 벌려 두는 것이 이 연극의 작품성을 결정짓는 지점이 될 것이다.
연극 속에는 죽음을 대하는 자, 장애인과 그 동생, 엄마와 딸, ‘사랑’의 가능성을 내재한 남과 여의 만남 등 관계의 여러 양상이 나타나며, 우리에게 다소 거리감 있는 것으로 다가오는 그래서 잘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하는 ‘죽음’과, 장애인의 등장까지 무대에 삽입된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것에 거리감을 좁히며, 삶에 연장선상에 그것을 두는 것이 아닌, 그것을 대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삶의 슬픈 자화상’이다.
2. ‘벤치’가 상징하는 것은..
[문밖의 벤치]에서 볼 수 벤치는 계절의 변화가 수놓는 세상 풍경에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며 우리 곁에 잊히지 않는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나무의 질감을 띤 벤치는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의 친구처럼 삶을 지켜주던 ‘나무’의 이미지의 현대적 변용인 듯 하다.
[도시속의 벤치]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바쁘게 지나가는 일상에서 포착되는 ‘속도의 경쟁’의 이미지에 겹쳐 지하철에서 미묘한 자리다툼의 감정의 기류만큼이나 [이상한 정신세계의 앨리스]에서의 벤치는 그 지하철의 기다란 칸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하지만 그 밀고 당기는 경쟁의 구도가 ‘킹카’를 차지하고 ‘폭탄’을 차치하는 유쾌한 사랑 방정식으로, ‘키스’를 통해 성의 정복을 의미하는 주체적 여성의 발칙한 상상으로 이미지화되고 있다.
‘안경’은 여성의 소극적이고 갇혀있는 세계관을 드러내주는 수단으로, 그것을 벗었을 때, 도발적이고 주체적 여성으로 탈바꿈하는 장치는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는 장면들이라 하나의 ‘상징’ 정도로 생각할 수 있고, 그래도 안경을 쓰고, 혼자만의 달콤한 상상에 잠기는 듯한 여배우의 표정은 귀엽기만 하며, 사랑의 강제와 방어는 ‘몸짓’으로 ‘벤치’에서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치밀한 동선을 보여주고 있고, 그 이전에 노숙자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 역시 무용처럼 두 배우의 자연스러운 힘의 배분과 움직임이 일어나며, ‘벤치’는 훌륭한 무대장치의 기능을 다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가장 재미있고 유쾌한 에피소드가 될 것 같다.
정영두 안무가의 각고의 노력과 힘이 들어간 결과일까?
[사랑이미지]편에서는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위해 벤치를 옮기고 흔들어 주며, 실질적인 무대의 변용을 효과적으로 이루지만, 그 속에는 벤치를 뒤집으며, 자신의 등이 아닌 얼굴을 상대방을 향하게 하는 것처럼, 기꺼이 자신을 열어 준다는 것, 그리고 상대방에 대한 배려로, ‘고정된’ 이미지의 벤치가 잠시 머물 수 있는 그 자유로움만큼, 언제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그 한가로운 여유로움만큼, 누군가에 의해 우리 삶에 따스한 감각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벤치는 표면적으로는 무대 정면에 위치한 채 다양한 변용을 이루지만, 그 속에는 벤치라는 중량감, 형체, 옛적인 것의 소구, ‘추억’이라는 프레임, 그리고 그것을 기다림과 사랑으로 치환하여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의 ‘감성’과 그것에서 그 갈증을 풀어주고자 한 의도에서 만들어진 복합적 상징물이자, 동시에 너무나 뚜렷한 아날로그의 한 유형일 것이다. 그리고 무대를 정말 하나의 존재감으로 채우는 훌륭한 소도구로서의 기능을 하며..
3. 현실이 멀리 하는 것들..
[긴 여행]편에서는 죽음 뒤로, 현실의 앞으로 그 찢어진 마음을 붙잡고 현실에서 아득바득 자리해야함을, 그 무거운 발걸음으로, 또 돌아서 기약 없이 손 내미는 행동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 속에 그 심연의 깊이를 모르는 아이, 그것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아이에게서 ‘존재의 이미지’의 부재를 납득시키며 다시 죽음의 그림자에 한층 가까이 다가 선 자신만의 외로움과 절망을 동시에 체감하는 할머니, 그리고 ‘가족’이라는 집단 너머로 또 하나의 죽음을 애처로워하며, 그것을 현실에서 표출할 수 없음을 감내해야 하는, 그리고 순간의 마주침으로 죽은 자가 구성한 한 편의 현실과 자취가 절묘하게 접점을 이루고 있다.
죽음이 마무리 짓지 못한 삶의 내밀한 진실이 선명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한편으로 [소풍] 편에서 ‘종이비행기’라는 노래는 그녀의 꺾여진 삶의 꿈, 이미 띄우는 순간 곧 무겁게도 침잠하는 단지 그 ‘자유의 소구’만으로, 그 물리적 진실을, 그 행위를 덮어 버리는, ‘슬픈 현실’의 노래가 비로소 이 극을 통해 그 ‘슬픔’이 오롯이 표면으로 등장한다.
그 ‘희망’의 보이는 이미 태생적인 상처, 운명적인 하나의 시험을 겪는 그녀의 삶을 상징한다.
신은 그렇게 ‘희망’의 부여로 ‘현실’을 지워버린다.
그리고 그 녀의 그 ‘떠남’의 행위를 바라보는 우리는 누구도 함부로 그녀를 욕할 수도, 또 그녀가 마치 언니를 ‘짐’처럼 떠안고 있었던, 어렸을 적 도시락의 아픔이 결코 작은 추억의 에피소드만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그녀의 행위를 통해 역설적으로 인식하게 되며, 그녀가 그 이후로도 결코 자유로워지리라 생각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는 ‘버려진 자’ 아픔을 바라보고, 그것에 동참할 수 없는, 그 공허한 공간 속에 슬픈 주체와 대상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보편적인 인간의 연민의 모습에 한층 가까울 것이다.
4. 사랑의 공간-‘벤치’
[사랑이미지]에서는 ‘헤어짐’의 이유를 물으며, 즉 술주정으로 ‘과거’ 속에 위치한 이미 닿을 수 없는 그에게 자신의 ‘부재’를 물으며, ‘현재’의 상처로 체화하는 그녀, 그리고 그 술의 물리적 힘에 의한 졸음의 본능.
궁극적으로 누군가에게 ‘의지’가 필요한 존재임을, 아니 도와 줄 누군가임을 그녀 곁에 머물던 남자의 눈에 ‘포착’된다.
중요한 건 그녀의 끊임없이 술로도 채워질 수 없는 ‘삶’의 갈증이고, 그것은 ‘공감’이전에 어떤 것도 들어갈 수 없는, 외로이 닫힌 그 문, 쉽게 열 수 없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에 관객 역시 남자와 동일한 입장으로 그녀를 ‘관찰’하게 되며, 또 조심스레 그 마음에 다가가는 것이다.
그래서 'my girl'이란 노래가 흐르는 것도, 그녀의 그런 행동들이 하나 같이 ‘귀여움’으로 다가오는 것도, 동시에 그녀를 대하는 남자의 행동이 정말 조심스럽고, 섬세하며, 소극적인 듯 잘 표출되지 않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건, 사랑이 아름답게 치환될 수 있음을,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유쾌한 심리를 불러일으킨다.
[엄마와 딸]편에서 엄마와 딸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효’와 ‘공양’이 부여하는 종적 관계에서 횡적인 비교적 평등한 ‘친구’와 같은 관계로 변화에 감을 보여주며, 여성들만의 미묘한 감성의 소통과 친밀감에 은근한 부러움의 시선이 담긴다.
[해질녘]에서 평생을 지금처럼 그렇게 하나의 언행을 꼬투리 잡고 서로 안볼 것처럼 수도 없이 싸웠을 듯한 노부부는 곧 서로의 의지처가 되어 정답게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노녀의 황혼을 서로의 존재감으로 채워간다. 사랑은 그렇게 사랑의 추억을 되살리는 것으로, 일상의 느린 속도의 반복됨을 차를 마시듯 음미하며 그 종착점의 서서히 다다르고자 하는 ‘삶의 용인’, 그 삶의 깊이와 사랑의 관조적 시선에 잔잔한 미소가 그들 앞에 오버랩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