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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데반 집사의 전도
사도행전 6:8~15
우리는 지난 주일에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이 그들의 많은 에너지를 교회의 가난한 과부들의 구제 활동에 쏟다가 다시 돌아서서 교회의 본질적인 사역인 말씀 증거 사역으로 회귀한 것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의 말씀 사역이 강화되자 말씀의 능력이 점점 왕성해져서 제자들의 숫자도 더 심히 많아질 뿐 아니라 그 복음의 영향력이 교회 밖에까지 미쳐서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까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교회 사역에서 올바른 방향을 회복한 사도들의 결정이 적중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교회가 교회답고 성도가 성도다운 그 본질적인 특징은 하나님 말씀 곧 복음 진리를 생명처럼 붙들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세상은 교회의 이런 특징에 대하여 별 관심 없습니다. 세상은 교회에 다른 것들을 더 기대합니다. 세상은 교회가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고, 교회가 자기들이 바람대로 움직여주기를 요청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구제와 선행만을 전념한다면 세상은 당연히 교회를 향하여 좋은 감정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외에도 교회에게 자기들과 함께해주기를 원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자기들의 정치적 깃발 아래 교회 사람들이 몰려와서 같은 목소리 내주기를 원합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 탄핵 집회에 참석하거나 혹은 그 반대 진영에 대통령 수호 집회에 참석하기를 원합니다. 정치 현안마다 교회가 힘을 보태길 원합니다. 검찰 개혁을 원하는 집회, 혹은 검찰에 힘을 실어주는 집회, 80년도 광주 항쟁이나 4.3. 제주 사태에 목소리를 내주기를 원합니다. 혹은 한미동맹 찬성 집회나 한미동맹 반대 집회에 참석하기를 원합니다. 그 외에도 동성애 반대 혹은 동성애 찬성에 교회 성도들이나 목사들이 목소리를 내고 힘을 더해주기를 바랍니다. 사회 현안인 마약 문제나 해외의 전쟁 문제이나 인구 절벽 문제 해소 등에도 교회가 나서주기를 원합니다. 남녀 차별 철폐 운동인 페미니즘 운동이나 거기에 반대하여 극단적으로 남성 우월주의 운동에 목소리를 내주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다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사회 운동, 집회들이지만 그러한 일에 교회와 성도들이 목숨을 걸고 삶을 내던지며 해야할 신앙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판단에는 개인적으로 그런 일을 관심을 갖고 열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교회가 그러한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되는 순간 교회는 산만하고 분주한 가운데 주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요구하는 중요한 본질을 놓쳐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요구에 휘둘려 그 장단에 춤을 추면 결국 마귀에게 속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선행과 구제라는 덕이 되고 마땅히 행해야 할 일들조차 사도들이 여기에 전력을 기울였을 때에 초대 예루살렘 교회 안에서 다툼과 분열의 위험이 가중되는 부정적 결과가 생겨난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그러한 구제의 일을 일곱 집사들에게 맡기고 본질적인 사역인 하나님 말씀 사역에 오로지 힘쓰겠다고 결정한 일은 매우 중요한 결정이라 할 것입니다. 만약 이 결정이 없었다고 한다면 기독 교회는 1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소멸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이 중요한 결정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전 세계 온 누리에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본연의 사명에 충실한 기독교회가 세워지는 열매가 맺게 되었다 평가할 것입니다.
우리도 이 점을 늘 기억하고 우리의 신앙이 이런 저런 일로 분주하기보다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중심으로 한 복음 진리를 아는 것과 믿는 것과 더 깊이 배우고 이 진리를 전파하는 일에 평생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서는 이러한 교회와 성도의 본질적인 사역인 말씀 사역에 힘쓴 결과 모든 성도들이 얼마나 도전적이고 공격적으로 불신 세상을 향하여 복음 진리를 담대하게 전파하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세상에 나가 하나님 말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진리를 담대하게 전파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예로 소개되는 사람은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인 스데반 집사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형제들 중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모든 성도들 가운데 칭찬받는 성도였습니다. 그리하여 스데반 집사님은 성도님들의 추천을 받아 사도들로부터 집사 안수를 받아 교회에서 헬라파 과부들의 매일 식사를 나누어 주는 섬김의 일을 충성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하여 사도들이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모든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고 기도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사도들이 열심을 다했던 구제 봉사의 수고스러운 일에 최선을 다하여 충성스럽게 헌신했습니다. 우리들도 어떠한 일을 맡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몸된 교회에 유익이 되고 성도들의 유익이 된다면 작은 일일지라도 충성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결론 부분에서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이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누가복음 16:10~12)
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도 작고 빛이 안 나고 사소한 일이라도 주님께서 주신 일에 감사함과 자원함으로 충성합시다. 그리할진대 더 크고 참된 것을 맡겨주시고 베풀어주시고 더 큰 은사와 능력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실제로 이 스데반 집사의 경우를 보면, 그가 교회에서 맡은 재정 출납과 구제 봉사라는 귀한 직분에 충성하였더니 성령께서 더 귀한 사역인 복음 전도의 사역에 사도들처럼 그를 귀하게 쓰임받도록 은혜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스데반 집사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성도들에게 칭찬받는 성도님이었지 않습니까? 그런 스데반 집사는 사도들의 안수를 받고서 맡겨진 직분에 충성하며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힘썼더니, 성령께서 그를 강하게 임하시어서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 은혜가 넘치게 하시고 또한 성령의 권능 곧 각양 은사까지 더해주시어 큰 기사와 표적까지 따르게 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기사와 표적이라면 거의 사도들의 전유물이었는데, 이제 기사와 표적이 사도들 외에 성도님들에게도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점점 강하게 모든 성도님들에게까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작은 일에 충성할 때에 더 큰 일과 은사를 맡겨주셔서 주님을 위하여 일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데반 집사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담대하게 복음 증거를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여기에 보면 스데반 집사가 이방 지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신앙생활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전도한 것을 보게 됩니다. 원문을 보면, 자유인이라는 ‘리베트리노이’라는 용어는 해방노예 출신 유대인을 말합니다. 로마에 끌려간 노예 출신 유대인들로서 해방되어 고국에 돌아와서 유대교 회당을 세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구레네는 지금의 아프리카 북부 리비아 지역이고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북부 도시로서 당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도시입니다. 길리기아는 지금의 터어키의 남동부 지역이고 아시아는 터어키의 서부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입니다. 이렇게 광대한 지역에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게 된 계기는 과거 앗수르 제국과 바벨론 제국에 의하여 북부 이스라엘 왕국과 남부 유다 왕국이 망하게 되면서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 흩어진 이국 땅에서 회당을 차리고 여호와 신앙을 유지했었는데 고국과 예루살렘을 그리워하여 아예 고국에 돌아와 예루살렘에 정착하거나 장사를 하며 오고가면서 예루살렘에 회당을 차려놓고 예배를 드리곤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 역시 그렇게 다른 지역에서 살다가 예루살렘에 와서 복음을 듣고 개종하여 열렬한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자기처럼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다가 고국에 와서 유대교를 믿고 회당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이 마음에 전도할 대상으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스데반 집사는 안식일에 예루살렘에 있는 헬라파 유대인들의 여러 회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잡아서 예수님의 복음 진리를 전하곤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회당에서는 안식일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누구라도 상관없이 앞에 나가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관례를 따라 예수님께서도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가지곤 하였으며, 나중에 사도 바울도 이방 전도 여행할 때에 전도할 도시에 가면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아서 그곳에 안식일에 참석하여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 복음을 전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일은 대단한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마치 지금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이단 교회에 들어가서 그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과 같고, 절 집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거나 무당 집에 가서 전도하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상 각처에서 예루살렘 와서 그들의 회당에 모이는 그 사람들은 본토 유대인들보다 더 보수적이고 더 열심 있는 배타적인 유대교 신봉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유대인의 전통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오랫동안 고난을 견딘 분들이기 때문에 더 한층 기독교에 대한 배타적 감정이 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감히 들어가서 전도하는 일은 성령의 충만함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이 충만하니까 자기와 동일한 환경을 가지고 이곳 예루살렘에 와서 회당에서 유대교를 신봉하는 그들이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그러한 대단한 도전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회당들에 가서 복음을 전하자 예상했던 대로 격렬한 반대가 일어나 논쟁을 벌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성령의 충만해질 때에 종종 주의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담대함입니다. 19세기에 영국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 복음화에 큰 열매를 맺었던 윌리암 번즈 선교사님과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님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중국에 도착하자 얼마 있지 않아서 중국인 복장을 하고 배를 타고 양자강을 오고 가면서 중국인 복장을 하고 중국 번역 성경을 나눠주면서 전도하곤 했습니다. 그들은 자주 사원에 가서 전도하곤 했다고 전기에 나옵니다. 당시 중국 사원은 도교나 불교 사원들입니다. 이런 곳 안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며 성경을 나눠주기까지 하였으니 그들은 참으로 도전적인 전도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전기를 보면, 많은 핍박을 받고 수없는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 그분들은 중국인의 영혼을 건지려고 그렇게 도전적인 전도를 계속 감행했고 많은 열매를 맺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1907년의 평양대부흥의 주된 통로가 되었던 길선주 목사님도 사실은 예수님을 믿을 사람이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는 애초에 유명한 도사였습니다. 그의 문하생도 많았습니다. 차력도 해서 힘도 좋았습니다. 한겨울에 추운 물 속에 들어가서 수련을 하는 등 무리하면서 수행을 했기에 젊은 시절부터 눈이 극히 안 좋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나라 고래의 신령한 도에 열심을 가진 도사 길선주에게 함께 도를 닦던 친구 김종섭이라는 분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 자꾸만 찾아와서 전도하므로 결국 그토록 확신을 가지고 큰 영적 경험까지 하고 많은 추종자들까지 있던 길선주가 마침내 상제님께 엎드려 몇날 며칠 고민하며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하던 중에 마침내 청아한 옥피리 소리가 방을 진동하더니 공중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 앞에 고꾸라져 울면서 회개하고 그날부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친구 김종섭의 끊임없는 전도와 기도를 통하여 유명한 도인이요 많은 추종자들의 스승이었던 도사 길선주가 주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꾼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누가 이단의 괴수 같은 자요 귀신의 강한 일꾼에게 끈질기게 전도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김종섭은 끊임없이 친구 길선주를 기도하며 전도하였더니 그가 위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일꾼이 되어 조선 기독교회를 살리는 부흥사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렇듯 성령 충만한 성도가 영혼 구원의 열망을 가지고 도저히 돌아올 수 없을 만큼 멀리 갔던 도사까지도 끈질기게 전도했더니 이렇게 놀라운 열매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령 충만함을 받아서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시다.
이렇게 스데반 집사님이 성령 충만하여서 각처에서 온 해방 노예 출신의 자유민들의 회당이나 구레네 출신 유대인이나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들, 길리기아 유대인들, 아시아 유대인들의 회당들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변론할 때 그들이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인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중에는 장사 때문에 이곳 예루살렘에 몇 달씩 머무르는 사람도 있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신앙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모여든 골수 유대교 신자들이 적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이 담대하게 그런 회당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스데반이 복음을 증거하자 그 자리에 있던 유대교의 열렬한 신자들이 가만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일제히 일어나서 스데반의 말을 트집잡고 스데반의 말이 율법에 어긋난 말이라거나 성전 모독의 말이라고 말로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강력한 반대의 말을 들었을 때 스데반 집사는 조금도 흔들림없이 차근차근하게 성경을 가지고 복음의 진리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말씀임을 증거하면서 약속된 메시야가 나사렛 예수시며 그를 통하여 더 온전하고 더 깊은 율법의 근본 정신이 성취되었음을 술술 답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논쟁을 걸었던 유대인들의 입이 다물고 더 이상 변론을 진행하지 못하고 패배하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스데반에게 논쟁을 걸고 패배한 유대교의 난다 긴다 하는 율법의 탁월한 교사들 중에는 바로 길리기아 출신 율법사였던 사도 바울도 있었을 것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7장 이후에 스데반의 순교 현장에 돌을 들어 스데반을 치는 사람들의 옷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사울이라는 청년 곧 훗날 변화된 사도 바울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길리기아 출신 유대인으로서 이곳에 와서 오랫동안 율법 공부에 전념했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서 길리기아 사람들의 회당에서 유력한 율법 교사의 역할을 했음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길리기아 출신 유대인들의 회당에 스데반이 나타나 복음 진리를 증거하였을 때 길리기아 유대인들의 대표로 나서 스데반과 한판 논쟁을 뜨겁게 벌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도 스데반에게 논쟁에서 패배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청년 사울은 성령 없이 구약 율법을 인간적인 지혜로 오랫동안 연구한 랍비였으나 스데반은 비록 랍비 학교에서 연구한 바 없지만 사도들의 가르침과 성령의 지도 아래 놀라운 지혜와 성령의 권능으로 성경 전체에 흐르는 진리의 흐름을 온전히 파악하였고 그 입술에 성령이 주신 구변의 은사와 지혜가 넘쳐 흘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종교적 교사일지라도 성령 하나님을 상대로 이길 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누가복음 21:14,15 말씀에 이르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사람 모세와 선지자들과 예수님의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을 늘 배우고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 전도의 사명에 헌신합시다. 그럴진대 아무리 완악한 자들의 자리일지라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아무도 반론을 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주시어 모든 대적하는 자들의 입을 다 막고 논쟁에서 승리하게 하사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진리를 힘있게 증거하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논쟁에서 패배한 자유민 등 외국 출신 유대인들의 여러 회당 사람들은 스데반과 논쟁에서 패배하자 도리어 분노에 사로잡혀서 스데반을 향하여 악한 음모를 꾸밉니다. 곧 스데반을 잡아 죽이려는 무서운 계획을 짜고 실행하고자 합니다. 11절로부터 14절까지를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그의 말이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이번에 외국 출신 유대인들의 회당 사람들은 스데반의 복음 증거를 큰 모욕으로 생각했는지 신앙 양심까지 버리면서까지 스데반을 해치려고 덤벼듭니다. 본래 모세의 율법이 가르치는 바 증인들을 매수하거나 거짓 증인을 세우는 것은 극히 악한 일로 정죄하고 심판을 말씀합니다. 십계명 중에 아홉 번째 계명이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1 말씀에서도 “위증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며, 출애굽기 23:8 말씀에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며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고 하심으로써 뇌물을 극히 혐오하시는 것도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을 죽이려고 드는 이 사람들은 아예 율법을 정면으로 위반하여 거짓 증거와 매수까지 감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수의 힘을 모아서 백성들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질하여 스데반을 잡아 가지고 산헤드린 공회에 끌고 와서 그 앞에 강제로 세워 종교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는 스데반이 이 거룩한 곳 예루살렘 성전과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면서 신성 모독죄로 고발하였습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또 모세의 규례를 고치겠다고 말씀했다고 고자질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그토록 위하는 율법의 정신이 거짓 증거하지 말고 불법적인 강압으로 행하지 말고 뇌물을 쓰지 말라고 한 모든 계명을 다 어겼으니, 참으로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 행위입니까? 그들이 비난한 바,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신성모독이라고 몰아붙이지만, 사실은 구약 시대 성전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보이는 바 성전은 하나의 그림자요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예수가 그 성전의 본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는 바 성전을 헐면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하신 것은 성전의 본체가 되신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가리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분히 신학적인 성전 논쟁을 삼을 일이지, 돌 던져 죽일 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또한 모세가 전한 율법은 장차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완전해져야 할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구약 시대 여러 선지자들이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그들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전해준 바 율법을 지키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결국 그 옛 언약이 폐하고 그리스도가 오시면 하나님께서 그의 법을 그들 마음에 두고 새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영을 그들 속에 두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지켜 행하게 하시겠다는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새 언약, 새 백성, 새 영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예레미야 31장과 에스겔서 36장과 요엘서 2장 등 여러 곳에 이미 말씀하신 바 있으니, 그리스도가 오시면 구약 율법이 폐해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훗날 그의 서신 갈라디아서 3:24 말씀에서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 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 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라고 증거하였으며, 로마서 10:4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
고 가르친 것입니다. 율법의 일등 수호자로 자처하며 스데반을 죽이는 데 앞장섰던 랍비 출신 사도 바울이 율법의 불완전함을 뒤늦게 깊이 깨닫고서 뒤늦게나마 스데반이 증거하였던 율법이 그리스도를 인도하는 길잡이에 불과하며 율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완전해졌노라고 소리높여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스데반 집사가 증거한 바가 진리의 말씀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이렇듯 스데반 집사가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구원의 열정과 비진리에 잡힌 자들을 진리로 돌이키려는 진리의 열정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맹신하는 보이는 성전의 불완전함과 목숨줄처럼 붙들고 있는 율법의 불완전함을 지적하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온전한 성전 되심과 율법의 완성자 되심을 담대하게 증언하였기에 그들은 스데반을 더 이상 살려둘 가치가 없는 자로 여기고 이렇게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한 것입니다.
자, 스데반 집사는 그렇게 하여 종교적인 권위의 옷을 입고 심판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산헤드린의 수많은 권세자들 앞에서 홀로 피고 자리에 서 있게 되었습니다. 마치 다른 제자들 다 도망친 마당에 홀로 대제사장의 안뜰에서 홀로 심문을 받고 빌라도 총독 앞에서 홀로 심문을 받았던 주님처럼 외롭게 진리의 변증자로 심문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진대 인간적으로 볼 때 얼마나 두렵고 떨리고 외롭겠습니까? 그러나 스데반 집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고발하는 자들의 분노에 찬 고발과 거짓 증인들의 증언 다음에 답변에 나설 차례가 된 스데반에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때 그를 보니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환하게 빛이 났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그 많은 시선이 자기에게 집중될 때 그는 두려움없이 담대하며 성령으로 충만하였으니 이는 그가 과거 모세가 하나님의 산에 있다가 내려올 때 그 얼굴이 환하게 빛이 난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변화산에서 기도하시고 난 후에 그 얼굴이 해처럼 빛난 것처럼, 스데반 집사의 얼굴도 그처럼 환하게 빛이 났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임재의 증거입니다. 성령께서 그스데반과 그 자리에 함께 계신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 집사님만이 아니라 우리도 주님의 명령을 따라 복음의 진리를 세상 가운데 사람들에게 증거하고자 성령께 순종하여 행할진대,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에 빛이 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스데반처럼 교회 안에서 작은 일에도 충성합시다. 그리고 교회 밖에서도 주님이 명하신 대로 복음 진리의 지극히 복됨과 그 영광을 알고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사명의 지극히 귀한 사명을 알고 순종합시다. 그럴진대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구변과 지혜의 은사를 주시어 우리 입술과 혀가 자유롭고 담대하게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게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따르는 표적과 기사가 스데반 집사에게도 동일하게 임한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기사와 표적도 따르게 하셔서 복음의 진실함을 입증해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줄 수 없는 지극히 복스러운 영적인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의 얼굴과 마음이 천사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자가 우리의 전도를 통하여 나타날 것입니다. 설령 전도의 열매를 당장 거두지 못한다 할지라도 복음의 씨앗을 뿌린 일로 인하여 거둔 자와 동일한 상을 주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전도만 해도 그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장차 천국에 가면 다니엘서 12:3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이처럼 장차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에 별과 같이 빛나며 해처럼 빛나는 영광과 상급이 우리 함께가는교회 모든 성도님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