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곶이다리(箭串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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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이 중량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
는 길목 동측에 너르게
펼쳐진 벌판을 "살곶이
벌"이라 불렀다
다른 이름으로
화살(箭)을 쏘았던 물
쪽으로 삐죽이 튀어나
온 땅(串)이란 의미로
전곶평(箭串坪)이라고
도 했다
오늘날 뚝섬이다
이방원이 일으킨
두 차례 왕자의 亂으로
새로 건국한 조선에
피바람이 일었다
이성계는 咸興으로
돌아가 은거해 버린다
이방원은 아버지께
용서를 빈다
여러 신하들을 보내
아버지를 설득하려 하
나 모두 죽임을 당하거
나 갇히고 만다
(咸興差使라는 野史)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멀리까지 마중
나온 이방원을 향해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쏜다
나무기둥 뒤로 숨어
아버지가 쏜 화살을
무사히 피한다
신궁(神弓)이라는 이
성계 화살이 빗맞은
것이다
이에 하늘에 뜻임을
수긍하고 이방원을 왕
으로 인정하게 됐다는
野史가 전해오며
이성계가 활을 쏜 곳이
바로 "살곶이"다
왕십리와 뚝섬을 가르
며 흐르는 中浪川 하류
에 위치한 이곳에
길이76m, 폭6m의
거대한 널돌다리가 놓여 있다
都城에서 함경도,강원
도,경상도로 나아가는
주요 길목이다
☆살곶이 다리가
생기게 된 연유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이방원은 이곳 살곶이
벌에서 사냥과 군사훈
련을 즐겨했다
이성계도 이곳에서
수시로 사냥을 즐겼다
고 실록은 기록한다
이방원은 살곶이 벌에
서 샛강을 건너 別宮
형식의 정자를 지어
기거하다시피 한다
세종1년(1419)실록에
상왕이 살곶이 벌 동쪽
증산(甑山)근처에
離宮을 건립하여 낙천
정(樂天亭)이라 이름
하였다
이방원은 이 정자를
자주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살곶이를 건
너는게 쉽지 않았다
세종2년(1420)실록엔
상왕의 명으로 영의정
유정현과 박자청에게
살곶이 내(川)에 다리
놓는 공사를 감독하게
한 내용이 있다
이방원이 살곶이 들판
과 훈련장,사냥터,
그리고 樂天亭을 얼마
나 좋아했는지를 알 수
기록이다
특히 낙천정에서 바라 본 한강 경치가 일품이
었다고 전한다
살곶이 널돌다리가 완
공된 시기는 최초 가설
시작으로 부터 무려
63년이 지난 성종14년
(1483)이다
다리가 완공된 후 펑지
를 걷는 느낌이 든다는
의미로 제반교(濟盤橋
라고 불렀다
☆살곶이벌(箭串坪)
살곶이벌은 자연 평야 가 형성되어 풀과 버들
이 무성해 조선 초부터
말을 먹이는 牧場이
되었다
또한 왕의 매 사냥터로
알려져 동교수렵(東郊
狩獵)이라 하였고
이곳을 국립목장으로
만들었다
과거 넓은 벌판인 長安
坪과 조선 초기부터
숫말을 기르던 양마장
(養馬場)이 있던 馬場
洞, 그리고 제주도 등
에서 온 암말은 지금의
자양동(雌養洞:옛이름
雌馬場里)으로 보냈다
훗날 자양동(紫陽洞)
으로 이름이 바뀐다
여기에 목장 맞은 편이
라는 뜻의 이름이 바로
면목동(面牧洞)이다
지금의 한양대학교 자리에는 말의 안녕을
비는 마조단(馬祖壇)
터가 있다
뚝섬도 그랬다
태조 때부터 성종 때까
지 무려 151번이나 왕이 이 동네로 행차를
했다
왕이 행차하면 커다란
깃발을 꽂았는데
"纛旗를 꽂은 섬"이라 는 뜻의"둑도"로 불리 다"뚝섬"으로 바뀐 것
이다(纛旗를 꽂았던 장
소는 지금의"성동구 성
수동 천주교성당 터)
이처럼 뚝섬에는 거대 한 말목장도 있었고
왕의 사냥터이자 군사
훈련장으로도 활용되
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