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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민족역사정책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의지를
일제의 침략과 국권회복운동
1902년 제1차 영·일 동맹 체결1)
1904년 2월 러·일 전쟁 시작
2월 한·일의정서성립2)-조선의 일본군사기지화(군사전략상 필요한곳을 사용할 수 있게)
8월 제1차 한·일 협약 성립3)-고문정치(친일미국인 스티븐슨을 외교고문으로)
1905년 7월 카쓰라 태프트 밀약4)(미국: 필리핀)
8월 제2차 영·일 동맹 체결(영국 : 인도)
9월 포츠머드 조약(러시아)
11월 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 체결5)-외교권박탈, 통감정치 (통감 1인을 두어 외교사항만 관리토록: 사실상 내정 간섭)
1907년 4월 헤이그 밀사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체결(정미7조약)6)- 고종강제퇴위, 군대해산, 차관정치(통감이 임명한 일본인 차관이 조선 내정을 통치)
1909년 기유각서- 사법권박탈
1910년 8월 한·일 합방조약 조인- 경찰권박탈
을사조약(외교권,행정권)-정미조약(군사권)-기유각서(사법권)-한일합방(경찰권,입법권)
* 문화계몽운동=애국계몽운동(한일합방이전)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무기를 들고 싸움에 나선 것이 의병투쟁이었다면, 이를 무모한 것으로 보고 자립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하며, 그러기 위해 교육을 진흥해 백성들의 애국심을 고취하겠다는 것이 바로 문화계몽운동7)
주도층 : 개화파의 전통을 계승한 도시의 지식인
애국계몽 운동가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단체의 조직이 필요하며 그 단체를 중심으로 신문, 잡지를 발행하고 학교교육을 펼쳐 대중을 계몽하고자 하였다.
정치적 성격의 단체의 활동 : 갑신정변, 독립 협회 등 개화 자강 운동을 계승한 구국 민족 운동
① 보안회(1904년) : 일제의 황무지 개간 요구 반대 투쟁, 일제의 토지 약탈의 시도를 꺾는데 성공 그러나 일본의 압력으로 해산
② 헌정 연구회(1905년) : 국민의 정치의식 고취와 입헌 정체 수립 운동 → 일진회(한일합방을 청원한 근대화에 열심인 단체) 규탄하다가 해산, 일제는 반일정치활동을 금지, 탄압 자신들의 침략정치에 맞서지 않는 문화운동만을 허용
1906년 이후 계몽운동- 반일정치운동의 성격이 약화되고 교육·언론·종교 등을 통한 실력양성과 대중 계몽을 목적으로 하는 문화운동
③ 대한 자강회(1906년 4월) : 발기인- 장지연, 윤효정
“교육과 산업의 발달이 자강의 방도‘라는 생각 아래 잡지를 발행,
아시아 연대론8)이라는 교묘한 침략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일본인 오오가끼 타께오를 고문으로 삼았다는 점은 근대화 논의 현혹되었던 계몽운동가들의 면모를 알 수 있다.
헌정연구회 모체, 교육과 산업을 진흥시켜 독립의 기초를 만들 것을 목적, 월보 간행과 연설회 개최, 전국 각지에 25개 지회, 1,500여 명 회원 확보, 헤이그 특사 파견 구실한 일제의 고종 황제의 양위 강요에 반대 투쟁 전개로 강제 해체
④ 대한 협회(1907년 11월) : 남궁억, 오세창, 윤효정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민권의 신장, 행정의 개선→ 점차 국권회복 의지 약화 -- 친일적 색채를 가진 단체로 비난9)
1907년부터는 보안법, 신문지법10)과 같은 악법을 만들어 단체의 조직 및 활동에 대한 일본의 단속 강화, 합법적인 문화운동마저 탄압- 비밀결사조직의 형태로 비밀단체 성립
⑤ 신민회(1907년 2월) : 민족 운동가들의 비밀 결사(회장: 윤치호, 부회장 :안창호와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등 개명 유학자, 이동휘, 이갑 등 장교출신, 이승훈, 이종호 등 평양 자산가 등 사회 각층 인사가 참여)11)
운동 방향 : 국권 회복, 공화정체의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12)
운동의 2가지 형태 : 문화, 경제적 실력 양성론 전개 - 신문, 잡지, 서적 간행, 오산학교, 대성학교(평양) 등 설립, 회사 설립 - 자기(磁器)회사, 태극서관
→ 회원 가운데 일부는 독립이 실력양성의 전제조건임을 깨닫고, 실력양성론을 비판하며 독립전쟁론을 내세우기 시작
독립군 기지 건설에 의한 독립전쟁론13) : 신민회는 일본의 완전 식민지화 정책이 예견되는 1909년에는 무장투쟁을 생각하게 되었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해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계획- 서간도의 신한촌, 신흥무관학교 설립
해산 :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조직 와해(1912년) - 사실상 해체
교육과 언론 활동(일제의 통감정치에 합법적인 반일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계몽운동가들은 주로 실력양성을 위한 교육진흥과 식산흥업에 주력하였다.)
① 교육 운동 : 서북학회, 기호흥학회 등의 교육 단체, 학교건립
목적 : 교육 진흥, 향토 발전을 통한 민족 실력 양성
성격 :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한 정치와 교육의 결합 단체
② 언론의 활동 : 국민 계몽과 애국심 고취, 항일 여론 조성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의 신문과 《소년》 잡지 발행
신문- 다양한 논조의 글- 그 기조는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자강론- 사회진화론적 입장, 자본주의적 발전 지향, 입헌군주제 주장,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전기 간행)
③ 국채 보상 운동 지원 : 1907년 국채보상운동(담배를 끊고 반지, 비녀를 기부) - 기부를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팔았다는 미담도 보도되었다. → 민족운동에 영향을 줌.
문화계몽운동의 의의
① 민족 독립운동의 이념 제시 : 국권 회복과 근대 국민 국가 건설
② 민족 독립운동의 전략 제시 : 이러한 갈등관계는 독립무장투쟁론, 실력양성론
독립 전쟁론 제시(신민회의 실력 양성 운동과 국외에서의 독립군 기지 건설로 역량을 배양)
③ 민족 독립 운동의 기반 제공 : 근대적 민족 교육을 발흥시켜 독립 운동의 인적 자원을 확보, 근대적 민족 산업을 진흥시켜 독립운동의 경제적 토대를 확보
애국계몽가들이 끼친 영향
- 1907년~1909년 민간이 설립한 사립학교 수가 3천여 개-일본군은 1908년 10월 일제의 사립학교령을 만들어 사립학교들이 법에 정한 규모를 갖추지 못했다는 구실로 폐쇄함.
이러한 학교에서 학생들은 애국심을 배우고 새로운 문물을 접함으로써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할 수 있는 세력이 되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하겠다.
문화계몽운동의 한계
이 운동의 밑바탕에는 국권을 잃어버린 것이 제국주의 침략때문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실력이 모자란 탓이라는 사회진화론의 인식이 깔려 있다. - 사실 애국계몽운동가들은 국권회복을 외치면서도 다른 한편 일본의 보호정치에 기대를 표시하는 등 모순된 자세를 보였다.- 근대화 지상주의적 자세14)(근대화를 못했을 경우에는 강국의 지배를 받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이들의 사고에서 아직 광범위한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생각은 부족했음을 알 수 있다.
애국계몽가들- 의병운동은 향촌의 무식배들의 무모한 운동이라고 보고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가 일상적인 생산 활동에 힘쓸 것을 권장
문화계몽운동의 성격을 보는 견해 - 상반된 주장
- 개화자강론이 제국주의에 대하여 올바르게 인식하고, 국민과 민중을 새롭게 발견하여 제국주의 침략을 격퇴하고 국권 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논리적 바탕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견해- 애국계몽운동이 민족독립운동이며 신민회의 경우처럼 독립 전쟁과 독립군 기지 창설운동으로까지 자연스럽게 발전해 나갔다고 본다.
- 개화자강론의 이념적 기반인 사회진화론의 이면에는 강자의 약자에 대한 지배와 착취, 제국주의 침략을 긍정하는 논리가 있었다는 점을 중시하는 견해- 애국계몽운동이 정치운동을 포기했으며, 제국주의 침략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일본의 지도로 문명화할 수 있다는 타협적 측면을 드러냈으며, 의병전쟁에 적대적 태도를 취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 중국과 일본 등지를 통해 유입된 사회진화론은 제국주의의 지배질서와 냉엄한 국제 현실을 이해하는 하나의 이론적 도구는 될 수 있었으나 이미 반(半)식민지화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되지 못했다.
국권회복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벌인 계몽운동의 실력양성론은 결국 사회진화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항일의병전쟁
* 갑오개혁에 대한 불만, 1895년 단발령과 민비 살해(乙未事變)를 계기로 하여 유생들에 의해 의병운동 - 을미의병(1895)
사상적 배경 : 위정척사 운동
- 주도 계층 : 유생(유인석15), 이소응, 허위 등) 농민 및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
- 활동 : 전국 주요도시 공격, 친일관리와 일본인 처단
- 초기 의병의 취약성- 양반 유생들의 투쟁이념은 위정척사적인 것으로 농민층의 자발적 참여를 불러올 수 있는 것이 못됨. 농민층의 호응을 받지 못한 데서도 기인
생명에 위협을 느낀 국왕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을 함. - 아관파천
- 광무정권이 들어서서 갑오개혁을 무효화하는 조칙을 발표하자 의병운동이 약화.
- 해산 : 아관파천 이후 단발령 철회, 고종의 해산 권고
* 의병 항전의 확대(을사의병, 1905)
① 계기 : 러일 전쟁에서 일본 승리, 대한 제국에 대한 주권 침해 자행 → 을사조약 강요16) , 초기의병 - 양반유생층의 주도17)
② 을사조약 폐기 운동 : 상소운동, 자결(민영환), 오적 암살단 조직(나철, 오기호 등), 언론 투쟁(장지연의 是日也放聲大哭)
③ 을사의병의 봉기(1905) : 1906년 이후 소규모의 의병활동이 통합되어 큰 대오를 형성 → 호남각지의 의병
최익현, 임병찬(전라도 순창), 민종식(충청도 홍주), 이인영, 이강년(강원도), 신돌석(경상도, 봉건유생중심에서 탈피) 등이 주도
이 시기의 의병부대의 성격 변화- 양반유생층의 주도가 약화되고 농민의병장 등장, 유생이 지도자인 경우에도 실질적 처지는 농민과 같은 상황18)
의병진압- 일본헌병과 경찰, 정부군의 지방 진위대, 일본군에 의해 진압
④ 을사의병의 의의 : 평민 의병장의 활동 부각(신돌석)
* 의병 전쟁의 전개(정미의병, 1907) -무장력 한층 강화
① 계기 : ·1907년7월 정미조약- 고종강제퇴위, 순종제위(허수아비), 군대 해산으로 의병 전쟁화 (해산조치에 반발한 대한제국 군인들이 의병투쟁에 참가, 이로써 의병은 무기도 충실해졌고 전투력도 향상)
② 서울 진격연합작전(1907.12) : 전국 의병 부대의 연합전선19)
③ 국내 진공작전 : 간도, 연해주 일대의 의병(홍범도, 이범윤)
④ 안중근 의사의 의거(1909) : 이토 히로부미 사살
1908~1909년은 전국적으로 의병투쟁이 가장 치열했던 시기-1년간 일본관과 교전이 3백회 이상, 1907년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각지에 의병20)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의 계획에 차질, 일본 상인층의 불만- 1909년 목포의 일본의 상업회의소는 전남 의병을 조속히 진압해줄 것을 통감부에 호소- 1909년 9월 전남의병 섬멸작전전
⑤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1907∼1909) : 전라남도 및 그 외곽지대를 살육, 방화, 약탈, 폭행 → 의병 전쟁 위축 → 간도, 연해주로 이동 (항일 독립군)
이후 국내의 의병투쟁은 점차 소멸, 남은 세력은 만주지역으로 피신, 독립군으로 변신하거나 잠적
이 시기의 의병의 주역은 농민들- 결국 나라를 지키기 위한 민족적 투쟁인 동시에 농민 투쟁적 성격을 지님.
* 의병전쟁(1905~1909)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전국 곳곳에서 의병을 조직
위정척사파- 민종익, 최익현 등이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의병운동
신돌석·정순현·이하현- 강원, 경북, 충북 접경지대에서 의병운동
1906년 말- 중남부지방에서만 60여개 군에서 일어났으며 그 뒤 서북부지방으로 퍼짐.
1907년 8월 군대강제해산과 고종강제퇴위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 전 계층으로 확산, 민중적 성격이 강화됨.
1907년 12월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13도 연합의병부대’를 결성- 서울진공계획- 실패(일제와 친일관료를 위협하기는 했으나 전술상의 한계와 양반유생들이 지닌 봉건의식 때문에 실패), 서울진공계획 실패 후 일제의 초토화 작전
1908~1909년 : 의병항쟁이 절정기를 맞음. 특히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치열해짐. 1907년 9월 기삼연, 고광순(장성), 1908년 5월 전해산, 심남일, 안규홍
1909년 2월- 남한대토벌작전21)- 의병운동의 퇴조기 → 중부이북으로 의병운동 중심지가 이동,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이동
호남의병 토벌에 성공한 일제는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을 선언
의병운동은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 획책을 저지하려는 반일·반침략운동이었다. 더불어 반봉건적 운동이다.
의병들은 제국주의 침략이 집중되었던 통상무역, 토지와 이권 침탈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의병들은 일본인의 불법적인 토지 침탈과 농장 경영도 반대했다.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한 뒤 ‘한일병합’을 선언하기까지 무려 5년여 동안 식민지 야욕을 지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항일의병전쟁은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띠면서 1910년대 만주를 중심으로 벌어진 무장독립전쟁의 서막을 올렸다.
의병운동이 일제의 식민지 획책을 막고 국권을 회복하는데 실패했지만 우리나라 근대사에 미친 영향은 크다.
* 항일 의병전쟁의 평가
① 한계 : 무기의 열세, 유생층의 봉건적 지배 질서 고집으로 결속력 약화, 외교권 상실로 국제적 고립
② 의의 : 민족의 강인한 저항정신 표출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형성
약소민족의 독립 운동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침
1) 서해 p. 62.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반발. 미국, 영국과 외교관계 강화. 미국, 영국이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하는 것을 국제적으로 승인. 1901년 미국 대통령 테오도르 루스벨트는 “러시아 남하 위협을 제거하고 본국의 만주 진출을 용이하게 하려면 먼저 만주에서 일본의 힘을 러시아와 대등하게 끌어올리고 그러려면 아직도 러시아보다 힘이 약한 일본에게 조선을 넘겨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1902년 1월 영국은 일본과 ‘제1차 영일동맹’을 맺어 그 관계를 확인했다.
2) 서해 p. 82. 전쟁을 일으킨 지 보름만에 일제는 5만여명의 침략군으로 대한제국정부를 위협하여 군사전략상 필요한 곳을 사용할 수 있게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맺었다.
3) 서해 p. 82. 1904년 8월에는 ‘제2차 한일협약’을 맺어 일본이 추전하는 고문을 두어 간섭하는 ‘고문정치’를 실시했다.
4) 서해 pp. 81~82. 1905년 7월 미국은 일본과 ‘카스라- 태프트밀약’을 맺어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는 것을 인정해 주는 대가로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았다. 그해 8월 영국과 일본은 ‘2차 영일동맹’을 맺어 조선·인도지배를 서로 승인했다. 9월 러·일 두 나라는 “러시아는 일본이 조선에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보호조치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포츠머드 조약을 맺었다.
5) 서해 p. 82. 1905년 11월 9일 군대를 동원하여 왕국을 포위하는 가운데 이른바 을사 5적(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공상부 대신 권중현)을 앞세워 통감부 설치와 외교권 박탈을 뼈대로 하는 ‘을사조약’을 강요했다. 을사조약은 한국외교권을 완전히 박탈한 것이었다. 을사조약에는 한국에 일본인 통감 1인을 두어 한국의 외교에 대한 사항만을 관리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통감은 외교에 한정되지 않고 사실상 한국의 모든 내정을 관장했다.
6) 서해 pp. 84~85. 1907년 7월 강제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맺어 이전의 고문정치 제도를 없애고 통감이 임명하는 일본인 차관이 조선 내정을 통치하는 차관정치로 바꾸었다.
7) 의병투쟁은 무모한 것으로 보고 그보다 먼저 자립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하며 그러기 위해 교육을 진흥해백성의 애국심을 고취하겠다는 것이 바로 애국계몽운동
8) 신채호- 아시아연대론 등의 기만성을 지적, 독립이란 실력양성만을 외쳐서는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독립이 부강의 전제조건임을 주장
9) 서해 p. 90. 대한협회의 이론가인 윤효정이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의 행복을 증진할 인물”로 극찬했을 만큼 대한협회는 이미 친일적 색채를 뚜렷이 드러냈다. 그리하여 1908년 현재 계몽단체 수가 무려 60여개에 이르렀지만 거의 “망국의 바람에 옷자락 휘날리며 오가던 망동배의 집단이거나 친일적 색채가 강한 단체”로 비난받았다.
10) 1907년 보안법과 신문지법(언론·출판의 자유를 억압)을 공포, 1910년 8월 정치에 관한 집회 금지
강압적 분위기 아래 합병 직후에는 길가에서 두세 사람이 모여서 잡담을 나누어도 잡혀가는 공포분위기가 지배하게 되었고, 3·1운동 이전에는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11) 1911년 9월 해산될 때 “당시 유지계의 정화는 모두 가입”하였다고 말하여지듯이 당시 사회의 지도자 그룹에 속하는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
12) 서해 pp. 92~93 4대강령: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할 것, 동지를 발견·단합하고 국민운동의 역량을 축적할 것, 각종의 상공업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을 증진할 것, 교육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 교육을 진흥할 것
13) 서해 p. 94. 신민회는 해체했으나 신민회 안에서 갈라졌던 실력양성론과 독립전쟁론은 각각 1920년대에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실력양성론은 1920년대 국낸 민족개량주의운동으로, 독립전쟁론과 만주 독립기지 건설운동은 1920년대 만주에서 일어난 독립군 활동의 주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14) 1904년 한일의정서 제1조 - “대한제국 정부는 대일본제국을 확신하고 시정(施政)의 개선에 관하여 그 충고를 들은 것”이라는 조항, 통감으로 온 이토오 히로부미는 항상 시정 개선을 내세우며 조선이 자립할 능력이 있으면 일본은 조선에서 물러갈 것이라고 공언하였는데 당시의 지식인들은 여기에 현혹됨.
황성신문- 애국계몽가의 식산흥업에 맞는 일본이 방적공업의 원료인 육지면을 조선에 보급하려 할 때, 우리의 산업 중 가장 귀중한 것은 농업이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개발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우수한 종장인 육지면을 조선에 보급하려는 일본인들을 정치적 의도가 전혀 없는 ‘천사’와 같은 존재라고 극구 치하함.
근대화 지상주의적 약점을 보인 단체 : 대한협회- 한일합방을 청원한 일진회(근대화에 열심인 단체- 근대화라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의 한수 단)와 합병을 추진
15) 유인석 : 위정척사사상의 원류인 이항로의 제자 유중교의 조카
16)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철도, 통신, 화폐제도는 근대화의 상징일지 모르지만 조선인에게는 몰락을 가속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 이로써 농민층과 상인층의 몰락이 가속화- 전국적 의병이 봉기, 광범위한 농민층의 호응으로 전국적으로 확대
17) 민종식- 1906년 5월 충청도 홍성에서 행동을 개시, 홍주성(지금의 홍성)을 점령
이항로의 제자 최익현- 1906년 6월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기의 - 일본군이면 모르되 국와이 보낸 군사와 싸울 수 없다고하여 항복
18) 전남 안계홍(호가 담산 그가 머슴살이(담살이)한데서 유래)
임실 이석용- 천민인 무당을 중용, 노동으로 밥벌이 했던 그의 처지가 농민과 비슷
신돌석- 농민의병장, 활빈당으로 활동하던 농민들을 모아 의병조직, 경북, 강원 접경의 산악지대에서 활동, 전성기에는 1천여명의 농민군을 거느림.
19) 유생들이 주도한 의병활동의 절정- 1907년 이인영을 13도 창의대장으로하는 의병연합부대 창설- 서울침공계획- 서울주재 각국영사관으로 보내 국제법상의 교전단체이자 전쟁의 합법성 승인 요구-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침공계획도 노출 실패
20) 서해 p. 101. 전남 전북지역이 가장 활발 - 경제침탈의 피해가 가장 집중된 지역, 호남평야와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많은 일본인 농장이 형성되고 있었던 것도 한 원인, 장성의 기삼연, 능주의 양회일, 함평의 심남일, 임실의 이석용
21) 서해 p. 101. 1907년 8월부터 1914년 말까지 일본군이 학살한 의병 수는 1만 6,700명, 부상자는 3만 6,770여 명이었지만, 단 2개월 토벌 기간에 의병장 103명, 의병 4, 138명을 체포·학살하여 ‘남한대토벌’의 잔혹상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