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凌霄花).
주로 늦여름에 주황색으로 꽃피는 능소화, 빛깔이 우아하고 고혹적이다. 다른 목본류보다 좀 늦게 싹이 나오는데, 이를 양반들의 느긋한 모습에 빗대어 양반나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다. 하지만 이 이름 때문에 평민들은 능소화를 함부로 기르지 못했다 하고, 만약 기르다가 소문이 나면 즉시 관아로 끌려가서 매를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1)
이렇게 매력적인 자태와 사연이 있다면 그럴싸한 전설이 없을 수가 없다. 한 출전(2)을 살짝 가공한다.
“옛날 옛날, 복숭아 빛 같은 뺨에 자태가 고운 ‘소화(霄花)’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더래. 그녀가 우연히 임금님의 눈에 띄어 하룻밤 성은을 입어 빈(嬪)의 자리에 올랐대. 궁궐의 어느 곳에 처소가 마련되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임금은 그 이후로 빈의 처소에 한 번도 찾아오지를 않았더래. 빈이 여우같은 심성을 가졌더라면 온갖 방법을 다하여 임금을 불러들였겠지만 아마도 그녀는 그렇지 못했나 봐.
빈의 자리에 오른 여인네가 한 둘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시샘과 음모로 그녀는 떠밀려 궁궐의 가장 외진 곳까지 밀려나서 기거하게 되었는데, 빈은 그런 음모를 모르는 채 마냥 임금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더래. 혹시나 임금이 자기 처소에 가까이 오셨는데 그냥 돌아가지는 않는가 싶어 담장 가를 서성이며 기다리며 발자국 소리라도 나지 않을까, 그림자라도 비치지 않을까, 담장을 너머 너머 지켜보는 안타까운 기다림의 세월이 흘러 흘러 갔다더구만.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친 이 불행한 여인은 결국 상사병으로 세상을 뜨게 되었더래. 권세를 누렸던 빈이었다면 초상도 거창했겠지만 잊혀진 구중궁궐의 이 여인은 초상조차도 제대로 치러지지 않았대. “그님 계신 쪽 담장가에 나를 묻어다오. '내일이라도 오실 그분을 기다리겠노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유언을 들은 시녀들은 그 말을 따랐더래. 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온갖 새들이 꽃을 찾아 모여드는 때, 빈의 처소 담장 아래 그녀의 무덤 위에는 조금이라도 더 멀리 밖을 내다보려는 듯 덩굴 식물 한 줄기가 담장을 끝없이 기어오르더래. 그님 오시는 발자국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덩굴 마디마디마다 귓바퀴처럼 꽃잎을 드넓게 벌린 홍황색 꽃이 수없이 피어났더래. 그래서 그녀의 처연한 사연을 전해들은 후세 사람들이 그 덩굴 식물에게 붙인 이름인즉, 그님이 그녀를 업신여겼으니 그녀 이름 ‘소화(霄花)’앞에 ‘업신여길 능(凌)’자를 붙여 ‘능소화(凌霄花)’라 명명했다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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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나의 절친, 동서고금의 고전 독서도 열심이고 시도 쓰고 서예도 하고 동양화도 그리는 '르네상스 인간', 변 씨와의 전화 통화.
변: 어이 친구, 8월 말쯤이나 피어야 할 우리 집 앞뜰 능소화가 지금 유월에 벌써 만개했네.
나: 우리 집에도 능소화가 있는데 이 놈은 아직 필락말락인데.
변: 온난화다 뭐다, 요즘 세상이 제대로 망쪼가 드는가봐.....쯥.
나: 그런데 친구야, 능소화가 빛깔이 고급하고 귀한 꽃이라 ‘양반꽃’이라 카는거는 알재?
변: 알다마다.
나: 그래서 옛날에는 상놈 신분이 제집에 능소화를 키우면 그 동네 촌장 댁에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는 거는 아나?
변: 양반꽃이란 건 들었는데 곤장 이야기는 처음이네?
나: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로구나. 능소화, 그거 아무나 키우는 거 아이다. 니, 관청에서 상놈들이 키우는 능소화 단속 나오면 우짤끼고?
변: (어버버, 자기 신분이 양반에는 못 미친다는, 번개 같은 돈오(頓悟), 깨달음의 순간.) 저어기, 사실은, 내가 심고 키운기 아이고 내가 이집을 사서 들어오니 이미 이집을 지은 인간이 능소화를 심어 놓았더라고. (다시 어버버) 혹시 관청에서 단속 나오면 니가 변호를 좀 해도라.
나: 글쎄다, 내가 음주 운전으로 법정 출두를 한 전력이 여러 번 있는 범법자라서 내 말빨이 묵어 줄까?
(내 말 중간에 벌써 통화 종료 소리, ‘뚜뚜뚜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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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글을 올린 날짜, 유월 25일, 그로부터 나흘 지난 29일 오늘 아침,
유레카!
우리 집 출입 계단 위의 아치를 타고 오르는 능소화가 개화를 시작한다.
유레카!
집 뒤 언덕에서 무궁화, 보리수, 매화나무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능소화가, 씨 뿌리지도 가꾸지도 않은, '행복한 절'을 향해 기어올라가는 능소화 줄기와 꽃을 발견했다. 밝은 주황 꽃빛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낼 뻔.
https://youtu.be/hDvL4SoRM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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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나무위키
(2) 출처: ‘시니어매일’. ‘애달픈 사랑, 전설의 꽃 능소화’
http://www.senior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30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