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당신 곁, 소복이 쌓이는 음악☆]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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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곁, 소복이 쌓이는 음악]
이재무, 이형권 엮음 / 시작시인선 0200 / 천년의 시작(2016.04.28)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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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통
양해기
내 키가 우체통만 할 때
우체통 뒤에 숨어서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이 있습니다
수없이 풀칠을 하면서도
수없이 마음에 우표를 붙이면서도
부치지 못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우체통은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만
우체통이
왜 꼭 빨간색인지는
지금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랑은 매일 걷는 길가에 있다
구재기
그냥 걷는 길가에서
하늘을 본다
움푹 패인 곳마다
물은 깊은 호수로 고이고
그 속에 하늘이 내려와 있음을 본다
매일매일 하늘을 굽어보면서
길을 걷는다
아무리 굽어보아도
높은 하늘인 것을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을
그대여, 사랑은 그렇게
매일 걷는 나의 길가에 있다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를 보듬어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먼저 와 있다
겨울남자 김시습
유안진
논어 학이論語 學而 편에서 첫 구절에서 따온 이름 시습時習은 천재였다, 천재는 평범에게 들킬 리가 없었다
들키지 않아서 자유로웠고, 들키지 못해서 불행할 수밖에 없었던, 온 몸이 분노의 냉소冷笑였던, 삭풍朔風 속에 피어난 향기 매운 꽃, 시대와 박치기 해온 질풍疾風의 개뼉다구 설잠, 탐욕으로 피칠갑 되어 숨 막히던 구린내, 위선으로 옥죄던 조선의 유일한 환기통換氣筒이었다. 생애를 물어 숨통 틔워준
현실과 이상은 빙산과 화산이어서, 끝없는 방랑과 기행의, 끝간데 모를 끝 끝으로 내몰린 평생이었다, 세상과의 절과 초월로 피어나 눈보라 속의 꽃송이였다, 온몸으로누린 자유에 부유했고, 끼니에 거렁뱅이였던 그에게, 조선은 너무 너무 비좁았다.
너무 좁고 너무 작아서 담길 수 없었던 그를 위하여
어느 무인지경 산 섶에 꺼질 듯 내걸려 흔들리는 때 절은 수박 등燈으로, 썩은 엄지손톱 푸욱 잠긴 이 빠진 사발의 탁배기 술로, 눈보라 짐승울음 울부짖고 달리는 밤, 곧추앉은 주막네가 사랑했던, 혹한보다 통쾌한 설잠, 내 사랑해 마지않는 겨울 남자 매월당梅月堂.
첫사랑
서정춘
가난뱅이 딸집 순금이 있었다.
가난뱅이 말집 춘봉이 있었다.
순금이 이빨로 깨뜨려 준 눈깔사탕
춘봉이 받아먹고 자지러지게 좋았다.
여기, 간신히 늙어버린 춘봉이 입안에
순금이 이름 아직 고여 있다.
백년의 사랑
김왕노
강둑에 앉아 우리 사랑 백년은 흐를 거라 해서 나는 울었네.
천 년은 갈 사랑이라 믿었다가 백년이라 말해서 울었네.
강둑에 풀을 쥐어뜯으면서 네가 어떤 변명의 말을 해도
백년이란 말 앞에서 난 울 수밖에 없었네.
강둑에 자란 왕 버들나무도 자잘한 잎을 피워 흔들지만
몇 백 년은 넘었고 강가에 구르는 자갈돌도 몇 천 년은 넘었는데
사랑 운운하면서 백년을 말해 난 토라져 울었네.
사랑이 백년이라니 고작해서 백년이라니 백년의 발상은
어느 속으로부터 나왔을까 따지며 강물보다 서럽게 울었네.
사랑이란 말을 익히는데 백년, 그 말을 전하려 고개 돌리는데 백년
그 짧은 말을 하는 데도 백년, 그 말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는데 백년
그래서 난 백년의 사랑이라 말하고 그것이 내 사랑의 지론인데
난 강둑에 앉아 우리 사랑 백년은 흐를 거라 해서 울었네.
다시 하얗게
한영옥
어느 날은
긴 어둠의 밤 가르며
기차 지나가는 소리, 영락없이
비 쏟는 소리 같았는데
또 어느 날은
긴 어둠의 밤 깔고
저벅대는 빗소리, 영락없이
기차 들어오는 소리 같았는데
그 밤기차에서도 당신은
내리지 않으셨고
그 밤비 속에서도 당신은
쏟아지지 않으셨고
뛰쳐나가 우두커니 섰던 정거장엔
얼굴 익힌 바람만 쏴하였습니다
다시 하얗게 칠해지곤 하는 날들
맥없이 눈이 부시기도 하고
우물우물 밥이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나이지리아의 모자
신정민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모자를 뜬다
빈곤이 만들어낸 심연과 굴욕에 씌워줄
빼앗긴 대지에 씌워줄 무늬 없는 모자
뉴욕만큼 비싼 물가와
사하라 사막에서 날아온 모래먼지의 나라
노예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아이들
강제 노역과 매질에 필요한
강한 바람과 우기의 천둥에게 씌워줄 모자
회색의 열풍
나무에 매달린 채로 발아하는
맹그로브 숲의 씨앗들에게 씌워줄 모자를 뜬다
시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단어들만 있고 그리움이 없다면
내일은 오겠지만 당신이 없다면
어머니가 되기 좋은 나라에서 온 편지
답장 대신 모자를 뜬다
시는 사랑이 쓰는 거라서
그리움만이 단어를 찾아 떠나고
당신이 없다면 내일도 없다고
손끝에서 태어나는 모자
생명과 두려움
그 둥근 실타래를 풀어 뜬다
태어난 날 사망하는 나이지리아의 체온
작고 검은 얼굴에 어울리는 푸른 햇살로
모자를 뜬다
한여름 나이지리아의 고무단이 촘촘하다
나는 지금 물푸레섬으로 간다
이영식
물푸레, 그래 물푸레섬....
이름만 굴려 봐도 입가에 푸른 물이 고이는 섬이렷다
연안부두에서 어쩌고 덕적도 저쩌고...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대로 이배저배 갈아타고 반나절, 쉼표처럼 떠 있는 섬 자락에 닿으면
초록물감 한 됫박씩 뒤집어쓴 물푸레나무들이 바람 탄 내 손 잡아주겠지
산책하듯 느리게 섬 한 바퀴 돌다보면 이름도 얻지 못한 몽돌 바닷가 어디쯤 한 여자가 살고 있을 거야
서랍 속 깊이 묻혀 혼자 낡아가는 첫사랑 편지 같은 여자
세상과는 담 쌓고 남정네와도 담 쌓고
그래, 섬처럼 홀로 닫고 살아왔으니 꼭 품어 안으면 물푸레 수액처럼 축축한 슬픔이 단숨에 내 가슴으로 번져오겠지
새들의 지도에나 올라 있을 듯한 섬, 물푸레
그 먼 孤島에 가서 물푸레나무 달인 물로 시나 쓰며 며칠 뒹굴다가 물푸레나무 그늘 같은 여자에게 코나 꿰었으면 좋겠네
물푸레 코뚜레에 동그랗게 갇혀 오도 가도 못했으면 좋겠어
이배저배 갈아타며 나돌아 다니지 않고
그 여자가 끄는 대로 이러구러 끌려 다니다 나도 물푸레나무로나 늙었으면 좋겠네
제 발치의 성긴 그늘이나 깁는 바보나무가 되었으면 좋겠어야
지금, 나는 물푸레섬으로 간다
문명은 문맹의 텍스트였다
정채원
바닥을 흔들어 모래 가루를 몸에 얹고
모래바닥이 천천히 움직이듯 그렇게 숨을 쉬어
바닥에 납작 엎드린 넙치처럼
저녁이 가기를 기다리는 거야
서쪽 하늘에 막 돋는 개밥바라기도
모래 덮인 눈으로 바라보아야 해
껌벅임 없이 바라보아야지
공원 주차장 한가운데 서 있던 오백 년 느티도
잎새 몇 남지 않은 나무 아래 세워 두고 온 지겨운 애인도
어둠 속에 참외처럼 노랗게 돋아나는 저녁
몸을 바닥에 묻고 눈만 내놓고
바람 몰려가는 암청색 하늘을 더듬네
꽃자리 멍들거나
덩굴마름병에 바닥을 구르던 시절 간신히 지나
두꺼운 껍질을 벗기고 반을 가르면
까달 없이 내 앞에서 즐겁던 씨앗들
문을 열 때까지 참외 속을 지키던
가슴속 씨앗 같던 애인이 노랗게 떠오르는 날
나는 씨앗을 빼낸 참외처럼
속이 비었네, 텅 빈 동굴이네
몸을 바닥에 묻고 모래알 굴러다니는
눈동자만 겨우 내놓는 저녁
물새를 키우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박강우
우리는 서로의 가슴에 물을 쏟아 부었다
두 눈을 감은 채 팔을 내저으며
목만 내밀어 수조에 떠 있기도 했고
깨어진 유리병 바닥에 잠겨 잠들기도 했다
어떤 날은 파도에 휘말려
팔이 뽑힌 채로 접시에 놓여 있기도 했다
그런 다음 날엔
남은 다리만으로 길게 줄을 선 채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구름 위로 힘차게 날아올라
다시 온전해진 몸으로
지상으로 내려오는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빈집 한 채
김영석
너의 마음 깊이 숨어 있는
빈집 한 채
너의 슬픔과 외로움과 그리움이
거기서 생기는
너는 모르는 그 빈집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랜 세월 너만을 기다리는
텅 빈 그 집.
시계
이정주
시집간 지 몇 년 만에
현수가 온다고 했다
나는 벽시계를 떼어 세탁기 속에 넣고
괘종시계는 싱크대 아래 넣었다
현수는 이전보다 빨리 옷을 벗었다
말없이 누워 있던 현수는 라디오를 껐다
저 목소리 싫어
라디오 속의 남자가 사라지고
숨 막히는 고요가 찾아 왔다
나는 현수에게 기어갔다
현수는 많이 젖어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새 강물이 되어
저만치 번득거리며 흘러 갔다
내가 강에 이르기도 전에
강물은 꼬리를 감추며 멀어져 갔다
목이 말랐다
찬물을 나누어 마시고 우리는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현수는 내 가슴에 귀를 갖다 대었다
여기 있었군요
언제 몸속에 시계를 숨겼어요?
현수는 울기 시작했다
슬픈 상사화
성선경
내 영혼의 슬픈 그림자를
뿌리처럼 알게 된 날이 언제였던가
꽃 핀 그날부터 나는 외롭네
내게는 눈이며 입이었던 것이
내게는 불이며 물이었던 것이
너는 어찌 늘 갓 잠깬 새벽으로만 오고
나는 어찌 늘 늦은 저녁으로 당도하는가
내 꽃 피는 봄날이 때늦은 것 아닌데
네 잎 지운 그날이 이른 것도 아닌데
너는 어찌 강 저쪽에서 울고
나는 어찌 강 이쪽에서 우는가
내게는 잎이며 꽃이었던 것이
내게는 희망이며 눈물이었던 것이
너와 나의 두 손
영원같이 마주 잡지 못하고
우리는 서로 비켜 가는 해와 달 되어
내 안에서만 피는 꽃
내 속에서만 지는 잎
무릇 사랑이라는 거겠지
무릇 꽃이라는 거겠지.
꽃돌
정연희
누군가의 꽃이 되지 못한 누이 노을의 시간이 그녀의 몸을 바꾸었다 채색되는 화선지처럼 꽃잎 느릿느릿 포개지고
꽃을 품는다는 것은 가시 또한 품는 일 달이 부풀고 지는 사이 기억의 저편으로 용암이 끓어올랐다
속눈썹 짙은 누이는 사는 일 힘겨워 들길을 맨발로 내달리곤 했다 발밑에 흩어지는 어린꽃잎 짓뭉개진 붉은 물 흘러내렸다 달무리 지는 밤 검붉은 모린꽃 뱉어내었다
붉은 여자
박소영
달이 차고 기우는 사원을 걷고 있네
붉은 옷을 입은 여인들
심해의 눈보다 더 깊은
여인의 눈에 비친
수많은 조각상 사이에서
시바*는 보이지 않고
자꾸만 남근으로 가는 눈
연잎 위 물방울처럼 흔들렸네
남편의 주검 옆에 수장된 여인을
기리기 위해
붉은 옷자락 아래 맨발이
가고자 하는 곳은 어디일까
보리수 그늘에
마른 나뭇가지처럼 누워 있는 남자
종교와 문화를 오가다
길을 잃은 시바일지 몰라
여인들의 지치지 않는 맨발의 행렬
정오 태양처럼 뜨겁네
* 인도 삼대 주신의 하나.
천전리 각석
고성만
우리가 맨 처음 마련한 신혼집 아니었을까
싸우고 나서도
등질 수 없을 만큼 작은 방
바위 벼랑에
뜨거운 입술
빛나는 눈빛으로
치렁치렁한 어둠의 머리카락 싹둑 자른 다음 깊게 아로새겨놓은 문양
강은 민들레 갓털 날리며 흐른다 길은 집 앞까지 바다를 끌어와 자장가 불러주었는데 나는 늑대의 저녁과 거북의 과거를, 너는 아이의 눈과 고래의 미래를 그리고
별자리에 대해
이름 없는 사물들에 대해
조곤조곤 나누던 이야기 아니었을까
사슴 여우 멧돼지 등속 쫓아 들어간 계곡에서의 나날은 거칠었다 생활은 좀체 열리지 않는 자물쇠와 같아
깜박 잠들었는데 사천 년 후라니!
여직 신혼인 너와 나는
연분홍 커튼 묶은
변두리 셋방
사방 연속으로 뻗어가는
무늬 속에 누웠다
드라이플라워
장요원
해를 보면 자꾸만 어지러워
거꾸로 매달렸다
꽃대가 밀어올린 향이 오르던 그 보폭으로 흘러 내렸다
향기의 내용이 다 비워지기까지
붉어진 시간만큼 외로웠다
문득,
유리병 속을 뛰어 내리는 코르크마개의 자세가 궁금했다
핑킹가위 같은 비문들이 잘려 나갔다
창백해졌다
소소한 바람에도 현기증이 난다
무릎이 잘린 낯선 걸음들이 유리문을 지나갔다
유리에 서성이던 웃음들이 싹둑 잘렸다
통점은 훼손된 부위가 아니라
향기의 왼쪽에 있다고 생각했다
붕대처럼, 향기를 왼쪽으로 감아 올라가는 나팔꽃을 본 적이 있지
그들의 심장이 왼쪽에 있을 거라는 편견도
흘러 내렸다
내력 없이 내리는 안개비에도 쉬이 얼룩이 번진다
허공이 우산처럼 접히고 있다
홀쭉해졌다
장미의 유전자를 가진 나는
온몸에 가시가 돋아 있고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
할퀴었다
가시와 향기는 다른 구조를 가진 같은 슬픔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몸속에서 너라는 물질이 다 휘발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바로 설 수 있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벽에 걸린 캔들 홀더 속
검은 심지가
잊어버린 어제를 켜고 있다
사랑, 당신
김경애
앞마당 평상 위 둥근 밥상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저녁밥을
가족이 함께 먹던 그때
땅바닥에 곤두박질치는 꽃송이
그 꽃자리에 남겨진 까만 꽃씨가
통점이라는 것을 알게 된 그때
서툰 몸짓으로 머뭇거리다가
말하지 못한 것이 이별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그때
상처가 상처를 보듬어야
새살이 돋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때, 늦은 인사가 되어버린
사랑, 당신
겨울장미
나태주
너를 사랑하고 나서
누구를 다시 더 사랑한다
그러겠느냐
조금은 과하게 사랑함은
나무라지 말아라
피하지 말아라
하나밖에 없는 것이
정말로 사랑이라
그러지 않았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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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보리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 의 ≪비너스의 탄생.Birth of Venus≫
어느덧 시작시인선 200호를 발간하게 되었다. 그 기념으로 그동안 시작시인선에 참여했던 시인들의 사랑시를 모아본다. 사랑의 시인들은 오늘도 아름답고 슬픈〈비너스의 탄생〉이야기를 듣는다.
보티첼리는 시모네타라는 여인을 보자마자 깊고 깊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시모시네타는 자신을 후원하는 가문의 줄리아노 데 메디치체라는 사내의 연인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시모네타는 보티첼리의 가슴에 커다란 파문을 남기고 22세의 젊은 나이에 저 세상으로 영영 떠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러나 보티첼리는 시모네타가 북은 후에도 평생 그녀만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사랑했다. 이 그림은 영원한 사랑의 징표이다. 시모네타가 죽은 지 34년이 되던 해에 보티첼리는 시모네타의 발끝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시모네타는 보티첼리의 비너스! 이 그림으로 인해 보티첼리의 사랑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 시집에는 21세기 한국의 보티첼리들이 부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랑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이곳에 실린 시편들은 진실하고 영원한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뜻 깊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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