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성의 절대성을 신뢰하고 그것으로 세상을 알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론이다.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출발한다고 보는 것이 경험론이다. 이 합리론과 경험론의 한계를 극복하고 종합한 철학자가 칸트다. 그는 인간이 세상을 인식할 때 이성의 능력을 비판해서 검토했기 때문에 그의 철학을 비판철학이라 한다. 이러한 이성에 대한 비판적 탐구를 담아낸 3대 비판서 곧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란 이름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한 바를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다.”
직관이란 감각을 통해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것이고, 개념은 구체적인 것들을 일반화하여 만들어 낸 지식이나 관념을 말한다. 그러니 직관 없는 개념이란 합리론을 말하고, 개념 없는 직관이란 경험론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지식을 얻고자 하면 경험이 필요하고, 이성을 통해 경험을 정리해야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칸트의 철학을 이해하자면 우선 선험적 종합판단이란 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선험적(先驗的)이란 말은 ‘경험에 앞서,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경험적이란 말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이를테면 5+4=9라는 판단은 선험적 판단이고, ‘착한 아이들은 공부도 잘한다’는 판단은 경험적 판단이다. 우리가 경험하지 않더라도 수학 명제들은 모두가 참이고, 경험적 판단은 실제 경험을 통해 도출되는 판단이다.
또 분석판단이란 말도 알아야 한다. 분석판단이란 주어가 이미 술어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의 판단이다. ‘삼각형에는 세 개의 각이 있다’는 주장은 분석판단이다. 삼각형이란 단어 속에 ‘세 개의 각을 가진 도형’이라는 의미가 그 속에 있다. 반면에 종합판단이란 주어가 술어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 경우이다. 예를 들면 ‘철수는 시를 쓰는 사람이다’라 할 때, 이 경우에는 주어인 '철수'를 아무리 분석해도 ‘시를 쓰는 사람이다’라는 사실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분석판단은 이미 주어에 술어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삼각형이라는 주어 자체에 이미 ‘세 개의 각’이 있으니까 다른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합판단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준다.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말을 아무리 분석해도 거기에는 ‘철수’라는 뜻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철수는 시를 쓰는 사람이다’는 판단은 실제로 참이다. 이 판단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기 때문에 종합판단이 된다. 종합판단은 선험적이지 않고 경험적이다.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이러한 판단은 새로운 지식을 더해 주는 판단이다.
선험적 판단과 분석판단은 수학적 판단이기 때문에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이성을 통해 알 수 있는 참이다. 이성을 중시한 합리주의자들은 참된 지식이 바로 이성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험주의자들은 반론을 제기한다.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적 입장을 취할 경우 우리가 예쁜 꽃을 보거나 매미 소리를 듣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성이 아닌 경험을 통해야만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경험적 판단과 종합적 판단을 중시했다.
선험적 판단과 분석판단을 중시하는 합리론의 강점은 정확성이다. 반면 약점은 새로운 사실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경험적 판단과 종합판단을 중시하는 경험론의 강점은 새로운 사실을 제공해 준다는 점이다. 그러나 약점은 부정확성이다. ‘철수는 시를 쓰는 사람이다’라는 판단은 온전히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철수는 산문을 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험론과 합리론이 서로의 약점을 비판하고 자기들의 강점을 주장하던 상황에서 칸트는 절충안을 내놓는다. 그것이 바로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선험적 종합판단은 합리론이 주장하는 이성의 정확성을 선험적이라는 측면에서 보장하며, 동시에 경험론자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사실의 제공이라는 측면을 종합판단이라는 측면에서 보장하는 것이다.
칸트는 경험 이전에 선험적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틀이 있는데 이를 범주라고 불렀다. 그가 내세운 범주는 모두 12가지다. 이러한 선험적인 형식으로 인간이 경험을 통해 들어오는 현상들을 판단하는 과정이 인식 과정이다.
여태까지 인식 또는 지식이 인식 주체의 바깥에서 온다고 믿었다. 그 인식이나 지식이 외부 사물에 대한 앎이므로 그런 태도는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칸트는 전통적인 그러한 인식론을 정반대로 뒤집어 정신이 대상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이를 그는 종래의 천동설에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과 같다고 하여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렀다. 다시 말하면 대상이 인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식이 대상을 만든다고 한 것이다. 인식의 중심이 세상과 사물이 아니라 인간과 그 인식 형식이 된 것이다.
그 결과 인식 형식을 넘어서는 사물 그 자체는 경험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우리가 선험적으로 갖는 인식 형식에 의해 포착된 것이며 그 너머를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즉 사물 자체(물자체)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칸트의 철학은 한마디로 인간의 이성에 대한 비판적 탐구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순수이성비판의 순수이성은 경험으로부터 독립한 선천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말한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은 선험적인 판단 형식인 범주를 통해 감각적인 경험을 종합하여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실천이성이란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이성을 말한다. 이성은 무엇이 올바른지 알고,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으며 또 선택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실천이성은 인간이 도덕적 의무를 따르도록 명령한다고 하였다. 선은 무조건 행해야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을 정언명령(定言命令)이라고 한다. 조건적인 가언명령(假言命令)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명령이라는 것이다.
판단력비판의 판단력은 아름다운 느낌을 일으키는 숭고한 감정을 경험하는 이성을 가리킨다.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은 진·선·미의 관계로 파악된다. 판단력은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을 연결하고 통일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첫댓글 오래 전에 다 까먹었던 이야기들을 다시 읽게 되어 고맙습니다. 다시 인식의 위대함을 깨우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