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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의 하늘보다는 밤의 하늘이 보다 낭만적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낮의 하늘을 이야기한 시보다는 밤의 하늘을 이야기한 시가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시적인 생각보다 어쩌면 더 많은 상상을 불러올 가능성도 낮보다는 밤의 하늘이 만들어줄 수 있을 듯합니다. 낮에는 해 외에는 구름이나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밤에는 수많은 별들을 보며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습니다. 구태여 별자리를 일일이 토해내지 않아도 그냥 별을 바라보며 여행을 그려봅니다. 지구와는 또 다른 여행이 아니겠습니까? 아직은 직접 가볼 수 없으니 순전히 상상 속에서의 여행입니다. 그 동안 본 영화가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기도 할 것입니다. 돈 없어도 가능한 여행입니다. ㅎㅎ
어제는 일기예보를 보면서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최저기온 -3도, 최고기온 -4도’ 어떻게 ‘최저’가 ‘최고’보다 높을 수가 있지? 말이 안 되잖아? 그래서 해석하였습니다. ‘최저’는 아침 기온을 말하는 것이고 ‘최고’는 낮의 기온을 뜻하는 것이라고. 어제는 그랬습니다. 아침부터 기온이 점점 더 떨어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요즘은 되지도 않는 말들을 하도 많이 해서 그런가보다 하는데 모두 이런 만큼의 해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말하는 사람의 사람됨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것이지요.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도 잘들 나팔 불고 있습니다. 속된 말로 제멋에 사는 거니까.
한 주 지나면 연말이라고 들뜰 만도 한데 코로나가 진정시켜주고 있습니다. 옛날에 그런 말이 있었지요. ‘연말연시를 조용하게’ 올해도 도리 없습니다. 방콕으로!! 아무튼 건강하게!! ^&^
2021년 12월 18일 김종우 목사
쉽게 읽는 요한계시록 20
어린양의 혼인잔치(계 19장)
계시록에는 ‘내가 보니’ 또는 ‘내가 들으니’ 하는 어구가 계속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보고 듣는 것입니까? 이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입니다. 그래서 그 보고 들은 것을 보고 들은 대로 기록하여 전해준 것이지요. 마지막 부분에 가서도 본인이 그렇게 증거합니다. 계 22 : 8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또한 보고 들었기에 증거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마지막 때 그 요한의 역할을 할 실제 하나님의 종도 자기가 일어나는 일들을 그대로 보고 들은 후에 증거할 것입니다. 여태 자칭 예수라, 재림 예수라 칭한 거짓 선지자들이 역사 속에 많이 등장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나타난 줄 압니다. 신자들이 미혹될 필요가 없는 일이, 그들이 과연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였는가 하는 것을 따져보면 알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분별하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하기야 앞에 말한 대로 ‘천국어’를 모르면 비교를 할 수 없으리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선 천국언어부터 배워둘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해 달 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보이는 해 달 별도 있지만 천국어로 바꾸면 한 마디로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야곱(이스라엘)의 가족에 불과했지만(창 37장) 그 가족이 생육 번성해서 나라와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규모가 커진 것이지요. 그러니 ‘해’는 한 가족의 아버지에서 한 나라의 ‘왕’으로 커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교회로 들어오면 교회의 목자가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보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계신 곳을 ‘하늘’이라 칭합니다. 물론 육안으로 보이는 하늘이 아닙니다. 소위 ‘영계’(영의 세계)를 뜻합니다. 그렇다면 그 하늘에 있는 사물들을 영계에 있는 ‘영들’을 비유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해 달 별 그리고 가까이 떠다니는 구름 또는 바람 또 날아다니는 새들도 비유됩니다.
하나님은 영계에 계시지만 땅에도 계십니다. 어디에요? 구약시대에는 ‘성전’이라 했고 신약시대에는 ‘교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이 거하실 성소를 지어라 명하십니다.(출 25 : 8) 그래서 성막(장막)을 지었습니다. 그 후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대하 7 : 16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그리고 선지자 하박국이 선포합니다. 합 2 : 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찌니라” 그래서 하나님 계시는 장막, 성전과 교회를 ‘하늘’이라 칭합니다. 계 13 : 6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더라”
하나님은 처음부터 당신이 창조하신 이 땅에 인생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에덴을 창조하시고 그곳에 함께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짓고 그 동산을 더럽혔으니 거룩하신 하나님은 떠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바라심은 이 땅을 회복하여 다시 와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을 먼저 보내어 그 피로써 정케 하시고 하나님 백성으로 생육 번성 충만케 하여 정복하게 하고 오셔서 다스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고전 15 : 28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 하늘(영계)에서 내려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
주님이 영원히 기도만 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 그 기도대로 이루어지는 때가 있음을 아시고 그 날이 오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마지막 때 기도대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끝에 가서 보겠지만 예수님은 먼저 환상으로 요한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계 21 :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오늘날 우리 하나님 백성 그리스도인들이 바라고 소망하는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벌써 2천 년이나 기다려왔습니다. 바라는 것은, 이왕이면 지금 우리가 살아있을 때 그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또 한편 생각해보면 그 나라가 임할 때 그 하나님 나라에 내가 들어갈 자격은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가집니다. 주문 외우듯이 ‘예수 천당’ 하면 천국문이 열릴까요?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면 구태여 이렇게 길고도 긴 성경을 만들어주셨을까 싶습니다.
자 계시록으로 들어갑니다. 계 19 : 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여기 익숙한 문구가 나옵니다. 사건의 전후 관계를 이어주는 말이지요. 계 19장의 사건은 무슨 일 후에 일어나는 겁니까? 바로 앞 18장의 사건입니다. 거기서 무슨 사건을 보았습니까? 음녀 바벨론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부터 바벨론이 무너진 후 무슨 일이 생기는지 봅니다. 하늘에서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하늘에 허다한 무리’가 누구일까요? 하늘에는 하나님만 계신 것이 아닙니다. 여태 보아왔지만 많은 영(천사)들이 있습니다. 그 수가 ‘천천만만’이라 하였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뜻이지요. 그뿐이겠습니까? 히 12 :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여기 ‘허다한 증인들’은 누구일까요?
우선 하늘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잘 아는 대로 그 우편에 우리 주님 예수님이 계십니다. 스데반 집사도 순교하며 그 하늘의 광경을 보았습니다. 행 7 : 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물론 요한도 보았습니다. 계 5 : 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거기에 네 생물, 장로들 그리고 특별히 보내심을 받는 일곱 영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태 계시록을 보아왔듯이 많은 천사(영)들이 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계 6 : 9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저희의 가진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 있어” 거기에는 ‘죽임을 당한 영혼들’ 곧 순교자들의 영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하늘’을 영계가 아닌 이곳에서의 하늘이라고 한다면 장막 곧 교회입니다. 그러니 이 찬송은 바로 하나님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여기 ‘그 연기’가 무엇입니까? 앞의 1 - 2절 찬송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향’을 성도들의 ‘기도’라고 배웠습니다. 비슷하게 ‘연기’는 하나님께 올리는 찬송이라고 여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찬송을 들어옵니다. 계 19 : 1 - 2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이어서 24 장로와 네 생물도 하나님께 경배합니다.(4절) 그 때 보좌에서 음성이 납니다. 5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그리고 요한이 다시 허다한 무리의 음성을 듣습니다. 6 - 8절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하더라” 드디어 우리의 기다리던 잔치가 다가옵니다. 바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어린양의 아내에게 허락하신 의복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바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입니다. 그런데 설명하기를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합니다. 옷이 신앙행위임을 의미하는 비유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라고 표현하였고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합니다. 누차 말하지만 성경은 세상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여기 ‘옳은 행실’을 윤리 도덕적 의미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살인 강도짓 하지 않고 남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으며 부모 잘 공경하고 착하게 사는 등등 그런 수준의 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옳은 행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그 언약을 지키는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준수하려고 무척 애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마귀 자식이라고 질타했습니다.(요 8 : 44) 왜 그러셨습니까?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를 믿지 않고 영접하지 않고 배척했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듭니다. 거짓말하면 지옥 간다는 사실을 압니까? 솔직히 거짓말하지 않고 사는 인생들이 있습니까? 천국 들어갈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계 22 : 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 미안하지만 예수 믿으며 신앙해도 여전히 거짓말을 합니까, 안 합니까? 그러니 천국 들어갈 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거짓말’은 ‘녀석아, 아빠 없다고 해.’ 하는 정도의 세상 거짓말입니다. 여기 성경에서 말씀하는 거짓말이 그런 수준의 거짓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잠 30 : 6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누가 거짓말하는 자가 됩니까? 하나님 말씀에 가감하는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을 마치면서도 경계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계 22 : 18 - 19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우리의 신앙이 바르게 서려면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깨닫고 알고 믿고 그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 지식만 가지고 있으면 교만해질 뿐이고(고전 8 : 1) 지식이 없이 믿음만 고집하면 맹신이 되는 것입니다.(롬 10 : 2) 아무튼 마지막 때 이루어져야 하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우리 하나님이 통치하십니다. 계 19 : 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 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역사해오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것을 위해 기도해 왔고 기도대로 이루는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 6 : 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귀는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났고(사 14 : 2, 눅 10 : 18) 이제 땅에 있는 하늘(장막)에서도 패하고 쫓겨납니다. 그래서 드디어 하나님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지요.
다음을 봅니다. 계 19 : 9 - 10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내가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 하니 그가 나더러 말하기를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이라 하더라” 우리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천사도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알고 있습니다. 시 103 : 20 - 22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를 봉사하여 그 뜻을 행하는 너희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그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아무리 능력이 있는 천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 아니지요.
우리가 궁금한 것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그 잔치에 청함을 입었지요. 우리 모두 초청장을 가지고 있나요? 그냥 ‘예수 천당!’ 하고 부르짖으면 됩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 25장에 잘 아는 ‘열 처녀 비유’가 나옵니다. 모두 믿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모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때가 되니 둘로 나뉩니다. 슬기 있는 자들과 미련한 자들입니다. 차이가 무엇입니까? 3 - 4절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둘 다 등은 가지고 있었는데 미련한 자들에게는 기름이 모자랐습니다. 기름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문이 닫혔습니다. 11 - 12절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하였느니라” 참으로 무섭습니다. 주님이 뭐라 하십니까? 너희들 모르겠다, 하십니다. 그러면 여태 신앙한 것이 무엇입니까? 모두 허사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기름’이 무엇일까요?
성전에서 사용하던 기름이 있습니다. 출 27 : 20 - 21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감람으로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말고 등불을 켜되 아론과 그 아들들로 회막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간검하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의 대대로 영원한 규례니라” 여기 감람유는 감람나무에서 나옵니다. 이것과 비교되는 말씀이 바로 포도나무와 포도주입니다. 포도나무는 말씀을 가진 목자이고 포도주는 말씀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감람나무가 뜻하는 바가 있습니다. 슥 4 : 3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선지자 스가랴가 두 감람나무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천사에게 묻습니다. 11 - 12절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대답합니다. 14절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감람나무 역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나무에서는 기름(감람유)이 나옵니다. 계 11 : 3 - 5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이는 이 땅의 주 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그렇습니다. ‘감람나무’는 ‘증인’입니다. 잘 아는 대로 증인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감람나무가 증인이라면 감람유는 바로 ‘증거의 말씀’입니다. 계 11장에서 보았듯이 요한이 증인이고 그 옆에 돕는 자 하나를 붙여주셨습니다. ‘지팡이 같은 갈대’(계 11 : 1)였습니다. 누가 그 역할을 할지는 당해봐야 알겠지만 그는 갈대처럼 허약한 신앙인일 것입니다. 아무튼 여기서 알아낸 것은 바로 감람유, 기름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증거의 말씀’입니다. 즉 예언(약속)이 성취되어 나타났을 때 그것을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말씀이란 것입니다. 그 증거의 말씀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천국문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그러고 나서 요한이 또 자기 보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계 19 : 11 - 16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고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그를 따르더라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누가 등장하는지 보겠습니다. 우선 백마와 탄 자입니다. 그리고 백마를 탄 하늘군대입니다.
앞에서 말들을 보았습니다. 계 6장에서 인을 뗄 때에 흰말, 붉은 말, 검은 말 그리고 청황색 말이 나왔던 것을 압니다. 거기에도 말과 그 탄 자가 나오지요. 그 때 이야기했습니다. 말은 그 탄 자의 지시를 따릅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을 탄 자는 ‘지시하는 영’이고 말은 그 지시를 따라 움직이는 육체 곧 사람입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님이 영이신 하나님의 명을 받고 따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영이신 예수님의 지시를 받은 이 땅의 목자가 말이 되어 그 말씀을 수행하는 것이지요. 사실 지금 요한이 예수님께로 계시를 받는 것과도 같습니다. 여기 백마를 탄 자는 뒤에 설명하기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으니 분명 예수님입니다. 더구나 뒤에 설명을 보면 계 1장에서 보았던 ‘인자 같은 이’ 곧 예수님의 모습과 같습니다.(계 1 : 13 - 16) 그렇다면 백마는 바로 예수님에게서 지시를 받는 요한입니다.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다’ 합니다. 비슷한 말씀이 앞에 있었습니다. 계 2 : 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다시 말해서 비밀이란 뜻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과 그 계시를 받는 요한밖에는 모릅니다.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온다’는 말씀도 이미 계 1장에서 보았습니다.(16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했는데 계 2 : 26 - 27에 보면 이기는 자에게 그런 권세를 주신다고 예수님이 약속하십니다. 그러니 영이신 예수님이 이 땅의 육신의 목자가 되는 요한에게 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뒤에 따르는 백마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백마를 탄 하늘군대지요. 하늘의 영(천사)들과 하나 되어 하나님의 역사를 수행하는 성도들입니다.
요한이 또 봅니다. 계 19 : 17 - 18 “또 내가 보니 한 천사가 해에 서서 공중에 나는 모든 새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 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하더라” 천사가 해에 섰다니 무슨 뜻일까요? 해는 ‘빛’을 상징하고 빛은 하나님 말씀입니다.(요 1 : 1 - 5) 그렇다면 영인 천사가 말씀을 가진 목자와 함께 하여 일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하나님의 큰 잔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뜻합니다. 그 뒤에 나오는 식사 자리를 보면 마치 사람들을 잡아먹는 이야기 같습니다. 예수님이 내 살과 피를 먹으라 하셨을 때 그 살이 말씀을 뜻하였듯이 여기 고기도 말씀을 뜻하는 것입니다. 모든 새를 불러서 먹으라 하는데 이 ‘새’도 이미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말씀하실 때도 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 13 : 31 - 32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새들이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영(천사)들이 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는 것이지요. 천국이 이루어지면 어린양의 혼인잔치가 열리고 하늘의 영들도 내려옵니다. 비슷한 말씀이 또 있습니다. 마 22 : 1 - 2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이것이 바로 어린양의 혼인잔치입니다. 그런데 그 잔치 상에 무엇이 차려집니까? 4절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저도 처음에는 천국에 가면 쇠고기를 실컷 먹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 와서 보니 그런 고기가 아니지요.
요한이 또 보는 것이 있습니다. 계 19 : 19 - 21 “또 내가 보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키다가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혔으니 이는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라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모든 새가 그 고기로 배불리우더라” 여기 하나님 편의 백마부대와 전쟁을 하는 마귀 편의 군대가 어디서 나왔는지 앞에서 보았습니다. 계 16 : 13 - 14 “또 내가 보매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오니 저희는 귀신의 영이라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의 큰 날에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으더라” 그렇게 드디어 전쟁이 일어났지만 패배합니다. 그 결과 짐승이 잡히고 거짓 선지자도 잡힙니다. 그래서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우고’ 그 나머지 곧 짐승의 표를 받고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은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습니다.
적은 항상 외부와 내부에 있습니다. 본래 원수 마귀 소속이 있고 처음에는 하나님 편에 있다가 변질되어 배반하고 마귀 소속으로 들어간 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을 침략한 일본이 있고 우리 안에 나라를 팔고 일본의 앞잡이 노릇하던 자들이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모두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붙잡힌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앞에서 찾는다면 계 13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 13 : 1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더라” 소위 ‘바다 짐승’입니다. 본래 마귀 소속입니다. 계 13 : 11 “내가 보매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오니새끼양 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하더라” 여기 나온 짐승은 ‘땅 짐승’입니다. 하늘 장막에서 변질된 자입니다. 용(마귀)에게서 받았으니 용처럼 말합니다. 뱀의 말을 하는 것이지요.
그들의 거짓말(사람의 계명)은 하나님 진리의 말씀(성령의 검)으로 심판받아 진멸됩니다. 즉 모든 새(영들)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끝장납니다. 이제 곧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리라 믿습니다.
<돈 룩 업>
종말을 예고하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또 한 사람 나타났군, 정도일 것입니다. 하기야 지난 몇 세기 안에서도 종말을 이야기한 것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마치 양치기 소년의 말처럼 흘려버릴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과연 종말이 가능할까요? 대부분 설마 내가 사는 동안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여태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종말이라는 말을 가지고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잘 아는 대로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내가 사는 이 시대, 이 세상에서 당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면 되는 것이지요.
어쩌면 지구 전체적인 종말이라기보다 지엽적인 종말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도시 폼페이가 화산폭발로 사라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지구라는 행성이 사라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 동안 종말을 그린 시나리오는 여러 개 있습니다. 20세기 초 핵전쟁을 비롯하여 전염병이나 환경오염 기후변화에 따른 대 격변, 외계인의 침투 그리고 자주 등장하는 혜성 충돌 등입니다. 대부분 지구 자체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 사고지만 우주 밖에서 원인을 만드는 이야기도 여러 가지로 등장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막아내기 어려운 경우가 바로 혜성 충돌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는 지구 전체의 위기이기에 모처럼 지구인 전체의 협력을 불러냅니다.
또 한 가지 과학적 궁금증이 있다면 바로 외계 머나먼 저 우주 바깥에 지구와 같은 행성이 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어딘가에 우리와 같은 존재가 있을까? 아니면 최소한 그 무엇이든 생명체라는 것이 존재할까 하는 궁금증입니다. 아직 태양계 안에서의 여행조차 쉽지 않은 마당에 은하계 내에서라도 생명체 찾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 커다란 은하계가 이 우주 안에 몇 개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 알 수 없는 머나먼 곳에 우리와 같은 생명체가 있기를 희망하며 쫓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이 우호적일지 적대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알고 싶고 만나고 싶어집니다. 다른 한편 이제 지구 안에서의 자원 활용도 한계에 달했으니 다른 곳에서 찾아보려는 기대도 따라갑니다.
어느 날 과학도 대학원생이 혜성을 발견합니다. 담당교수에게 확인하고 발표합니다. 학생의 이름으로 명명됩니다. 그런데 혜성의 궤적을 확인하니 바로 지구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을 계산합니다. 고작 6개월 남았습니다. 그 사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연구하는 사람들의 몫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관에 보고하고 대통령에게까지 전달됩니다. 대통령의 면담이 이루어집니다. 지구 전체의 생존에 관한 일입니다. 빨리 대처를 해야 합니다. 진작 영화로도 나온 것이 있으니 ‘아마겟돈’식으로라도 해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의 종말을 불러올 것입니다. 6 개월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닙니다. 핵폭탄을 운반하여 지구 밖에서 처리해야 하니 말입니다.
대통령의 관심은 온통 중간평가와 재선에 있습니다. 어떻게든 정권을 이어가야 합니다. 현재로서는 국민의 지지가 너무 약합니다. 무엇인가 자극적인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지구가 멸망당해도(?) 일단 자신의 지지기반을 갖추어야 합니다. 혜성 충돌에 대한 보고가 대통령의 귀에 실감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루 종일 기다리게 만들고도 면담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기야 지구 충돌은 6 개월 뒤의 일이고 중간 평가가 그보다 앞서 시행됩니다. 과학자들만 발을 동동 구를 뿐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입에서 나오는 말만 따라가고 있습니다. 무시당했다 싶은 과학자들은 방송을 이용합니다. 시청률 높은 토크쇼에 나오니 진행자들 또한 유명인사와 자기네 개인의 스캔들에만 신경 씁니다. 시청률에만 관심 있다는 뜻이지요.
혜성 충돌과 지구 멸망, 우리는 대책이 있다, 이거야말로 특종이 될 수 있습니다. 지지율 상승에도 한몫을 하겠지요. 그래서 쓸 만하다 싶은 우주비행사까지 만들어 우주선을 쏘아 올립니다. 그러나 불발입니다. 게다가 계속 시도하지만 별 성과가 없습니다. 자신을 적극 후원하던 업자와 후속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 시간이 촉박하여 슬그머니 지휘 현장을 빠져나옵니다. 위기의 순간에 일부 계획된 사람들만 빠져나온 것입니다. 자기네만 따로 준비된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탈출합니다. 대단한 이기주의는 자기 아들까지도 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혜성이 눈앞에 닥쳐서야 우왕좌왕 아우성입니다. 여기저기 혜성의 조각들이 지구를 강타하며 재앙이 닥칩니다.
마지막이 닥친다면 나는 어떻게 그 마지막 시간을 보낼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극도의 혼란이 닥칠 수 있습니다. 사회적 혼란뿐만 아니라 각자 개인적인 심리적 혼란이 생길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만들까요? 죽음을 앞두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 자리에 누구와 함께 하고 싶을까요? 일상 속에서도 준비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싶습니다. 개인적 종말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맞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2만 2천 년 냉동수면 여행 후 어딘가에 착륙했습니다. 그리고 우주선 밖으로 나와서 본 신세계, 과연 살만한가요? 사람은 어디서든 죽습니다. 거참! 섬뜩한 종결이 충격입니다. 영화 ‘돈 룩 업’(Don't Look Up)을 보았습니다.
<마션>
한 사람이 그만 대형냉장고에 갇혔습니다. 사실 고장이 나서 사용하지 않고 있는 냉장고였습니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서의 일이기에 다음 날 출근 때까지는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다음 날 직원이 출근하여 수리를 위해 그 냉장고를 개방하였습니다. 그런데 웬 사람이 냉장고 한편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깜짝 놀라 확인해보니 직원 중의 한 사람입니다. 문제는 죽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작동이 되지 않고 있었고 냉장고의 크기로 보아 산소의 양도 충분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죽어서 발견되었을까요? 철학자는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라고요. 냉장고에 갇혔다, 이제 죽을 수밖에 없다, 그 절망감이 결국 죽게 한 것입니다. 사실을 알았다면 죽을 이유가 없는데 말이지요.
죽겠다 싶으면 죽는 것입니다. 살아야지 하면 사는 길을 찾습니다. 어느 쪽으로 생각하느냐, 그것이 생사를 가릅니다. 물론 차원이 다릅니다. 어느 외딴 섬에 떨어졌다는 사실과 거의 1년을 쾌속으로 달려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곳 화성에 홀로 남았다는 사실은 엄청 다른 이야기입니다. 혹시나 어떤 화물선이라도 지나가지 않으려나 하는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구 안에서의 일이 아닙니다. 동료들은 이미 떠났고 자기에게서 한참 떨어져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연락할 통신 장비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은 사고를 당했을 때 망가졌고 그곳에 남은 것은 오래 전에 버려진 구닥다리입니다.
그곳은 화성입니다. 잘 아는 대로 공기가 지구와 다릅니다. 우주복을 벗었다가는 끝납니다. 아무튼 정신을 차리고 나니 사고를 당한 것이고 동료들은 자기를 죽었다고 판단하여 급한 상황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의 생사여부를 알려주는 기구가 사고를 당하며 파손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떠나간 동료들을 원망할 계제가 아닙니다. 이제 남은 숙제는 생존이고 탈출입니다. 그런데 탈출이 그냥 탈출이 아닙니다. 무엇으로 어떻게 탈출합니까? 우주로 나갈 로켓이 어디 있습니까? 지구에서 와주어야 합니다. 그것도 거기까지 오려면 1년 가까운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면 그 때까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식량이 문제입니다.
우선은 알려야 합니다.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있다는 사실을 지구에서 알아야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통신수단을 찾아야 합니다. 다른 한편 식량의 재고를 알아보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계산해야 합니다. 남겨진 식량으로는 어림없지요.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생산해내야 합니다. 그래서 찾은 것이 감자입니다. 농사를 짓는 것이지요. 씨감자는 있다, 그런데 어떻게 재배합니까? 어찌 되었건 화성도 땅덩이입니다. 그러나 지구의 흙과 별차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식물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야 합니다. 비료가 필요합니다. 함께 생활하며 싸놓은 자연비료가 있습니다. 이렇게 재활용이 되는구나 놀랍습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생명체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물입니다. 물 자체를 구하기는 어려워도 공기는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산소와 수소 그 조합으로 물을 만들어냅니다. 씨감자를 심고 거름을 주고 물을 뿌립니다. 그리고 기다립니다. 과연 변화가 생길까요? 초조한 시간이 지나갑니다. 화성에서 파란 싹이 트는 것을 보는 것은 그야말로 감동입니다. 우리 지구에서 매양 보고 지낸 나뭇잎들을 보며 그런 감동을 받은 적이 있을까요? 하기는 겨울을 지나고 봄이 오는 무렵 죽은 듯했던 나무 가지에서 움트는 싹을 볼 때 비슷한 감동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무게는 대단히 다를 것입니다. 생명체가 있을 수 없는 땅덩이에서 생명체를 키워낸 것이니 말이지요.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도 이미 보고를 받아 알고 있습니다. 승무원 중 한 사람은 사고로 희생하였음을. 그리고 귀환 중임을 계속 보고 받고 있습니다. 나사 직원은 계속 화성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화성 기지에 뭔가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아챕니다. 한편 화성에 남겨진 ‘마크’는 이전에 남겨진 장비들을 점검하고 구식으로라도 지구와 통신할 방법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냅니다. 드디어 지구 나사와 통신이 이루어집니다. ‘살아있다’는 사실에 흥분의 도가니가 됩니다. 그런데 문제입니다. 어떻게 구출합니까? 외딴 섬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기를 무엇으로 어떻게 가서 구합니까? 그 한 사람을 살리려고 어떤 희생을 감내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 문제는 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 한 사람은 인류를 대표하여 외딴 별에 가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인류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온 세계가 나서서 관심을 가지고 도우며 지켜봅니다. 나사의 문제도 미국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온 지구촌의 문제라는 것이지요. 결국 귀환 중의 우주선도 마크가 생존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구출작전에 함께 돌입합니다. 한 사람으로 인하여 온 지구촌이 한 마음이 되는 순간입니다. 인종도 종교도 사상도 없습니다. 우주에서는 한 지구인일 뿐입니다. 그렇게 하여 함께 노력합니다. 영화 ‘마션’(The Martian)을 보았습니다. 2015년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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