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삼보(三寶)의 의의(意義)
우루베라 카사파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 네,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고, 제자들에게 아그니의 제단을 계류에 버리도록 시키고,
동굴의 구렁이를 자유롭게 해 주었다.
그는 붓다와 함께 우루베라의 마을로 돌아가기 위해 하산했다.
하산 도중, 그는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아그니의 제사에 대해서는 그들 대부분이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의문이란, 교조는 어쨌든 간에,
아무리 혹독한 육체 고행을 계속해도,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하기는커녕,
제자들 중에는 병마에 침범되어, 재기할 수 없는 자가 나왔다..
또 엄격한 수행을 하면 할수록,
마음은 투쟁적으로 되어 가서, 사람이 변해가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제자들의 수행의 미숙함이라고 해서,
불명(不明)인 채 버려져 간 것이었다.
게다가 또, 아그니의 제사의 역사적 습관이 이런 신앙을 지속시켰다.
신심(信心) 신앙(信仰)의 형태가,
형식이나 계획된 진행 방식을 동반하여 가면,
내용보다 형식에 사로잡혀 간다.
즉, 마음을 아는 것이 어렵게 되어 간다.
바라문이 오랜 역사 속에 학문적인 형식으로 되고 만 것도,
또, 지금의 불교가 가람이나 전통 속에서만 살 수 있게 된 것도,
마음의 문제보다도, 형식을 찾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첫째로는 지식과 지혜가 혼동되어,
그 구분을 잡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은 환경에 휩쓸려,
눈에 보이는 움직임에 사로 잡히는 습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나 괴로운 일보다 편한 일을 하고 싶어 하며,
가난하기보다 풍족한 생활을 찾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 인정(人情)이, 차츰 부풀어, 사물의 본질에서 멀어져 가면,
참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의 구별을 하기가 어려워져서,
사람의 본성인 신성 불성을 잃어가는 것이다.
우루베라 카사파의 신앙은,
불의 신,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으나,
동시에, 신앙의 형태가 습관적 행사화(行事化)되어,
행사를 위한 신앙으로 변해 간 것도 간과할 수 없었다.
많은 제자들이, 행사화된 신앙으로부터 완전히 바뀌어,
붓다의 수행이 어떠한 것인지, 당혹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타성으로부터 깨어나지 않으면,
마음의 진성(眞性)을 아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들 자신이 구원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아그니의 신을 버리게 하고, 붓다에게 귀의시킨 것은,
그들에게 있어 엄격한 생활의 대전환이었으나,
그래도 그것이 그들 자신의 구원이라고 보면,
붓다가 취한 조치는 큰 자비였다'라고 하겠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루베라 카사파의 행동은 용기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보통이면, 제자들의 체면도 있어, 명예를 걸고라도,
붓다와 대항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믿고 있던 아그니의 신(神)을,
깨끗이 버리고, 붓다에게 귀의했다.
"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면,
설령 어떤 수행자이더라도, 불행하도록 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
" 아라한이라면, 승부에 구애되지 않고,
공포의 마음을 갖는 것도 없다."
붓다의 이 말이 카사파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는 스스로 아라한이라고 말하고,
'슈바라다'라고 사람들에게 믿게 하고,
지금까지 많은 제자들을 인솔하여 왔으나,
붓다 앞에서는, 갓난 어린애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교조이지만, 동시에 한낱 수행자라고 하는 마음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이 마음이 있었기에, 붓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붓다에게 귀의하는 것에 의해, 그는 일개 수행자로 되었다.
그는 스스로의 용기에 의해, 교조라고 하는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붙잡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와 몇 사람의 제자들은, 붓다와 라자그리하로 동행했다.
다른 제자들은 삼림이나 숲으로 들어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만들어 낸 마음의 구름을 걷어내려고
명상적 반성의 수행에 들어갔다.
즉, 불, 법, 승에 귀의할 것인가의 여부를 스스로의 마음에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 마음이 생긴 자에게, 입문을 허락하기로 되었다.
귀의하려는 마음이 생겼는지의 여부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후광에 의해 식별한다.
반성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자비이며,
스스로를 구하는 유일한 능력이었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잘못을 신에게 용서를 빌고,
두번 다시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자기를 확립했을 때에,
누구든 차별 없이 후광이 방사되는 법이다.
불. 법, 승 귀의의 조건은,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의 존엄성을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고,
붓다의 제자라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불. 법. 승...
귀의의 조건이란 ,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붓다(불)에게 귀의하는가.
타르마(법)에 귀의하는가.
상가(승)에 귀의하는가.
의 세 가지이다.
즉, 부처를 믿는가.
정법을 믿는가.
승으로서 마음과 몸을 닦아 나갈 자각이 있는가 어떤가, 이다.
붓다의 경지는, 인간이면 누구나 찾는 것이기는 하지만,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는 혼의 긴 과거세의 역사가 간직되어 있으며,
그리고 그런 과정을 겪지 않으면 얻지 못하는 것이었다.
붓다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붓다(부처)를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믿음이 없으면, 신심 신앙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신심 신앙은 신의 도(道)뿐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생활의 모든 것에도 해당된다.
물건을 생산하는 것도 팔린다는 전망이 있으니까 만드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교제이건, 가정에서의 생활에서도,
서로가 믿음으로 해서 조화되어 살아갈 수 있다.
믿음이 없으면, 사람은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다.
마음의 세계는, 모든 것이 믿음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지상계는, 그 의식의 양이 조금밖에 나오지 않아서,
내일의 운명을 모르기 때문에,
더구나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히 헌상계만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저세상의 생활도 그러하다.
인간은 신(神)의 자식이므로,
신(神)을 보고 싶다고 생각해도 신(神)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神)을 볼 수 있는 혼을 가진 자는,
석가, 예수, 모세의 3인밖에 없다.
저세상 사람들,
혹은 이 세상에서 영적 심성이 높아져, 신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것들은 저세상의 천사거나, 가짜를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신(神)은 저세상에서도, 인간에게 모습을 나타내는 일이 없다.
왜냐하면, 신(神)은 저세상과 이 세상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과 만물의 에너지 속에,
살아있는 능력으로서, 의사(意思)로서,
살아 있기 때문이다.
석가, 예수, 모세가 신(神)을 볼 수 있는 것은,
신(神)의 의사(意思)를 틀림없이 전하기 위해 주어진 권능이며,
그것은 또한 우주 창조를 할 때부터 약속한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보면, 믿음의 세계는,
석가, 예수, 모세 이외의 자는,
저세상에서도 연연이 이어져가는 것이라고 하겠다.
붓다를 믿는 것은,
만생 만물을 지배하는 신을 믿는 것과 동의어로 된다.
동시에 그것은 스스로의 올바른 마음을 믿는 것에도 연결되는 것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그만큼 위대하고, 권위가 있었다.
따라서, 붓다의 문하생은,
먼저 붓다에 귀의하는가 어떤가 가 열쇠가 된다.
다음의 타르마(법)란,
붓다가 설파하는 정법(正法=불법)이다.
만생만물은, 모두 정법이라는 신의 마음에 바탕을 두고 순환이 되어,
자비의 아래에서 살려지고 있다.
이것을 스스로가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객관적으로는 이해가 되어도,
이것을 체험으로 인식할 수 있는 자는 붓다밖에 없다.
그래서, 붓다가 설법하는 불법을 믿는 것이,
문하생으로서의 제2의 조건이 된다.
세 번째인 상가(승)는,
중도라고 하는 팔정도를 일상의 생활에서 행하는지의 여부이다.
팔정도는 자계(自戒)의 길이다.
각자가 신의 자식으로서 그 신성 불성에 눈뜨기 위해서는,
중도(中道)라고 하는 척도(잣대)를 가지고,
조화의 마음을 습득해 나가야 한다.
자계의 길을 게을리하고,
형식에만 치우치게 되면, 이미 붓다의 제자 자격을 잃는다.
상가의 길은, 그런 만큼 엄격하다.
자기에게 엄격하다.
반성과 자계에 의해,
지금까지 쌓아 온 업을 초월해야 한다.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세상의 비유처럼,
업을 수정하는 일은 어렵고 어려운 일이다.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또한 연구를 하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습성을 전환시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하기 싫어하면,
나쁜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붓다의 제자가 되는 자격은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깨닫고,
자신을 엄하게 다스려가는 자가 아니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인간 석가. - 다카하시 신지-
첫댓글 소중한글 감사 합니다
반갑습니다.
성불하소서
합장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