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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베소서 6장 13-17절 영적 전쟁터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 6-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을 신으라
전쟁을 하러 나가는 군인들은 완전무장을 하고 나갑니다. 머리에 투구를 쓰고 전투복을 입고 총과 칼을 준비하고 수류탄을 준비합니다. 이것이 승리를 염두해두고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의 무장된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전투복인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호심경에 대하여 들으셨습니다.
오늘은 영적전쟁을 위해서 입어야 하는 전신갑주의 세 번째인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신을 신으라는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말씀을 전하기 전에 고대 로마시대의 전투복 중 하나인 전쟁에 신고 나가는 신발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아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바울 당시 모든 나라들을 정복해나갔던 로마군이 신었던 신발의 모양은 오늘날의 전투화와 다르게 반 구두형태였습니다.
즉 발가락 부분은 드러내고 바닥에는 두꺼운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그 밑에는 무거운 징을 박았습니다. 그리고 발목 부분에는 가죽 끈이 있어 다리에 묶게 하는 형태로 되어 있었습니다. 바닥에 징을 박은 이유는 미끄러움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적을 발바닥으로 찰때는 큰 부상을 입히기도 합니다. 그런 쇠를 박은 신은 가죽으로 연결하여 발목에서 무릎까지 연결하여 일부러 벗으려고 하지 않는 한은 절대로 벗어지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전투화를 신듯이 영적인 전투화를 신으라고 표현하면서 이 영적 전투화는 징이나 가죽이 아닌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으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은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는 신이라는 것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복음에 대하여 성경은 많은 표현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하나님 나라의 복음, 화평의 복음, 은헤의 복음, 영광의 복음, 구원의 복음, 나의 복음, 우리의 복음,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이 읽으신 것처럼 평안의 복음이라는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여러 복음들 가운데 여기서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일단 여러분들은 전신갑주 하나하나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해두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평안의 복음 역시 하나님이 주신 평안의 복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몇 가지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우선 대다수의 학자들이 복음의 신을 신고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복음의 신을 신고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을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자기 목회를 위한 관점으로 이해사면서 지지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에 비중을 둡니다. 신은 비유입니다. 사람이 신을 신는다는 것은 어디를 가려고 나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영적 전쟁에서 신는 신은 영적전쟁을 하기 위해 싸움터로 나가기 위한 출발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신을 신는 다는 것은 영적전쟁터로 가기 위한 무장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이 벗어지지 않도록 가죽끈을 단단히 붙들어 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신발이 벗어지지 않도록 가죽끈을 단단히 동여매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평안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발이 발과 하나가 되는 것처럼 자기 영혼과 복음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데 그 복음이 무슨 복음이냐 하면 평안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왜 영적 전쟁을 앞두고 무장을 하는 복음이 평안의 복음일까요? 왜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하라고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 복음이 영생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의 특징을 잘 아시겠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과 박해가 따릅니다. 그런데 이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복음은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이 평안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모든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계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예수님에게 속한 평안입니다. 그 평안을 줄 것이니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이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근원도 다릅니다. 이것은 에수님과 하나로 연합된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에 대해서 알려면 세 가지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관점은 로마서 6장 5절을 보면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함께 부활하게 되는 연합입니다.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연합입니다. 그래서 고난도 함께 받고 부활도 역시 같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생의 보장입니다. 평안의 복음은 영생을 보장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았다면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부활도 없을 것입니다. 설사 그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수많은 것을 드리며 봉사를 했을지라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사람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합할 수 없고 악인들의 부활의 날에 그들과 함께 부활하여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평안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결여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로 연합되지 못한 사람이, 그래서 영생의 확신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들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예수님의 생명을 가졌기 때문에 고난도 박해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육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에게 예수님은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두 번째 관점은 사랑의 연합입니다. 골로새서 2장 2절을 보면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이 편지를 골로새교회에게 보낸 사도 바울은 자신이 직접 보지 못했지만 말로만 들었던 라오디게아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들을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알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해 편지를 보내 교훈함으로 인해 그들 서로가 서로로 인해 마음의 위로를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함으로써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예수님과의 사랑으로 연합하지 못했다면 그는 확실한 이해의 풍성함을 누리지도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평안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여러분은 예수님과 사랑으로 연합함은 물론 교회와도 역시 사랑으로 연합함으로 인해 주님이 주시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복음의 신을 신어야 합니다. 그러면 흔들리지 않고, 또 사라지지 않는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세 번째 관점은 교회의 연합입니다. 골로새서 2장 19절을 보면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몸인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 마디와 힘줄로 모든 영적인 영양분을 공급하십니다. 그렇게 공급받을 때 하나님은 교회를 영적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여기서 마디와 힘줄은 교회의 목사와 모든 영적인 일꾼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머리이신 에수님 아래서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과 진리의 모든 은혜를 받아서 예수님과 온전히 연합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은 주님과의 죽음과 부활의 연합, 사랑으로의 연합, 그리고 예수님의 몸인 교회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평안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시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여기서 왜 그러면 평안의 복음이라고 표현한 이유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신을 신는다는 것은 어딘가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어떤 신을 신느냐는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한다는 표현입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은 운동화를 신고, 일을 하는 사람은 작업화를 신고, 회사로 출근하는 회사원은 구두를 신고, 논에서 일하려고 나가는 사람은 논에 맞는 장화를 신습니다.
저는 밭에 갈 때마다 장화를 신는데 그 이유는 밭에 있는 벌레나 뱀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이렇듯 그 사람이 어떤 신을 신느냐는 그 사람이 지금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며 어디를 가려고 하느냐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평안이 예비한 복음의 신을 신는다는 것은 평안의 복음을 전하러 가려고 나서는 영적인 군인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의 전체주제가 마귀의 간계를 물리치기 위한 하나님이 주신 전신갑주 가운데 하나인 전투화에 대하여 들으시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는다는 것은 마귀와 싸우러 나가는 전투화를 신고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와 싸우는데 평안의 복음이라니 조금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창과 칼의 복음이 아니라 평안의 복음이라니 말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이 거의 마무리 될 무렵에 열 두 제자를 한 번 파송하시고, 또 70인의 제자들을 파송하셨습니다. 그들을 파송하시면서 예수님은 “가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 아무 동네의 아무 집에 들어가거든 그 집의 평안을 빌라고 하시면서 만일 그 집이 그 빈 복을 받을만하면 빈 평안이 그 집에 머물게 될 것이지만 그 집이 그 평안을 거부하면 그 복을 받기에 합당치 않은 집이기 때문에 그 빈 평안이 제자들에게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0장 12-13절입니다.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하지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그러니까 평안의 복음이 제자들로부터 전도대상자들에게 전해질 때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임하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주신 하나님 나라의 평안입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2장 17절을 보면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가깝고 먼데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전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평안을 전하실 때 누구를 통해서 주시느냐 하면 성령을 통해서 전해주십니다. 성령은 하나님 나라를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에게 임하게 하시는데 그 하나님 나라는 의와 희락과 평강을 가지고 임하십니다. 그로인해 성령이 내주하신 사람 속에는 이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의와 희락과 평강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4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안의 복음을 받은 사람은 천국의 평안을 누리게 되고 그 평안의 복음을 받은 사람이 전하는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도 역시 평안의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을 신은 자신의 군사들에게 주신 영적인 복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 복이 임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평화의 소식을 전하는 주님의 사자들이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이 평안이 왜 꼭 필요할까요?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나가서 전도를 한다는 자체가 바로 영적인 전쟁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에서 여러분은 환난을 당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받았고 자신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 복음을 전하는 전도를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전도가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전도를 매우 쉬워하고 어떤 사람은 전도를 매우 어려워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쉽고 어떤 사람이 어렵냐하면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에게는 전도가 쉽고, 성령을 충만히 받지 못한 사람에게는 전도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에 쳐들어 갔을 때는 함락시키는 일이 너무나 쉬웠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실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이라고는 여리고성을 6일 동안 하루에 한 바퀴를 돌면 되었고 7일째는 하루에 일곱 바퀴를 돌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크게 소리를 지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성은 작은 성이라고 무시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없이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이스라엘에 많은 사상자만 났을 뿐이었고 아이성 사람들의 기세만 올려주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울부짖으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믿고 아이성을 공격했는데 왜 자신들이 전쟁에 패했느냐고 여쭈어보았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여리고에서 온전히 순종하지 않은 죄를 지적하시고 그 문제부터 해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이성을 공격했습니다. 그 결과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처럼 성령충만한 전도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전도를 하기 때문에 전도가 쉽습니다. 하지만 성령충만하지 못한 전도자는 자기가 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방법에 의존하게 되고 그것이 통하지 않으면 전도자 어렵게 느껴집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마귀에게 갇혀 있고 눌려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적진 안으로 쳐들어가야 합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귀는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전도자로 하여금 전도를 포기하게 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사역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동원되었고 또한 자기 이익에 민감한 이방인들이 정치와 사법부의 권력을 이용해서 감옥에 잡아 넣기도 하고 죽이려고 돌을 던져서 숨이 끊어지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도 바울 자신의 상태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더욱 헌신했던 그의 사역에 복을 주셔서 많은 교회들이 세워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들이 튼실하게 자라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안의 복음이 예비한 신을 신고 적진을 향해 전진하는 하나님의 군사요 복음의 일꾼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평안의 역사가 교회로 임할 때에는 교회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3절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마귀의 간계를 맞서싸워 이기기 위해 여러분들이 무장하고 갖추어야할 영적인 하나님의 전신갑주에 대하여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6장 13-17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성령이 여러분 안에 내주하심으로 인해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예수님과의 죽음과 부활로의 온전한 연합, 그리고 사랑,의 연합 그리고 교회와의 온전한 연합을 통해 마귀의 간계를 물리치고 온전히 승리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