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은 대로 알려주실 것이며
-이흥우-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 생각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들은 대로 알려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리란 자신의 인격에서 나온 깨달음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 전사한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만들어 낸 진리가 아니라 아버지께 받은 그대로 우리에게 전하신다.
우리 몸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고, 음식을 먹고 배설한다. 공기가 들어왔다 나가고, 음식물이 들어와 영양소로 흡수되었다가 배설된다. 이것이 제대로 안 되면 고생한다. 죽은 몸은 공기와 음식을 통과시키지 못한다. 우리 몸은 밖으로 열려 있다. 그런데 우리 생각은 열려 있는가? 우리 생각이 상상의 날개를 펴고 무한한 우주로 뻗어나가는 것 같지만,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것에 갇혀 있다.
사람은 느끼고 그 다음에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마음대로 뭐든지 상상할 수 있지만, 실제 몸과 행동은 제한되어 있다. 여기에서 왜곡과 착각이 나온다. 사실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이 인간이다. 실제 역량은 쥐꼬리만한데, 상상하고 바라는 것은 한없이 크다. 상상이나 생각이 자유롭지 않다면 인간이 좀 더 겸손해질 수 있을까? 생각하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그것 또한 인간 제멋대로의 생각이 아닌가 싶다. 성령님은 ‘말씀’을 당신 생각으로 만들어 전하는 것이 아니라 들은 대로 알려주신다.
사도 바오로는 말씀하셨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기쁨·평화·인내·호의·선의·성실·온유·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갈라 5,22-25) ●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양승국신부-
<모터가 다시 돌기 시작할 때>
제초작업 할 공간이 워낙 광활해서 예초기를 몇 대 구했습니다. 다들 ‘초보’다 보니 자주 고장이 나더군요. 농기구 수리 센터를 뻔질나게 다녔습니다. 그러다보니 은근히 지출도 많아졌습니다.
한번은 또 고장이 났기에, 머리를 싸매고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커버를 벗겨 분해를 했습니다. 노즐에 낀 먼지를 제거도 하고, 뒤틀어진 부품을 바로 잡기도 한 후 다시 조립을 했습니다.
‘잘 돼야 할 텐데..’ 잔뜩 기대를 품고 시동 거는 레버를 힘차게 돌려봤습니다.
그러나 웬걸, 모터는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투덜거리며 또 다시 커버를 벗겨냈습니다. 그리고 이 레버, 저 레버, 조정해보고, 또 다시 시도를 해봤지만, 모터는 조금도 협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레버를 당겨댔던지 어깨가 다 아팠습니다. 나중에는 욕이 다 나올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오랜 시간 수리에 수리를 반복하던 어느 순간이었습니다. 혹시나 하고, 있는 힘을 다해 시동 거는 레버를 돌렸습니다.
그 순간, 웽?????? 하는 소리와 함께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웽?????? 하는 소리가 얼마나 반갑던지. 그 순간, 또 얼마나 기쁘던지. 그 순간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봐, 하는 우쭐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예초기의 겉모양이 아무리 좋아도, 예초기의 품질이 아무리 뛰어나도, 예초기가 아무리 좋은 메이커라 할지라도, 웽?????? 하고 돌아가지 않으면 무용지물입니다. 쓸모가 없습니다. 괜히 자리만 차지할 뿐입니다.
요즘 계속 선포되는 복음 말씀의 주제어는 ‘성령’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모터가 돌아가야 예초기는 제 구실을 할 수 있습니다. 낫으로 할 일의 몇 배나 되는 일을 별 힘들이지 않고 순식간에 끝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분께서 우리 각자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실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신앙인으로서의 구실을 다할 수 있습니다. 열매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힘차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습니다.
애벌레에게는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장애물이며 스트레스꺼리들입니다만, 나비에게는 세상 모든 것들이 신기한 구경꺼리들입니다.
멈춰있는 신앙인들에게는 세상만사가 다 스트레스 덩어리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미움덩어리입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힘차게 활동하시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세상만사 모든 것이 다 축복입니다. 사랑입니다. 은총입니다.
Unknown God
-김찬선신부-
우리는 열심히 사는 중에는 시간의 흐름을 의식치 못하다가
시간이 매듭지어질 때에야 시간이 빨리 흘렀음을
깨닫고 의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매듭지어질 때에야
우리가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살았음도
깨닫고 의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돌아보니 모든 것이 다 은총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몰랐습니다.
내가 숨 쉰 것이 하느님의 숨이었음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내가 마신 물이 하느님의 생명수였음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내가 마신 음식이 하느님이 주신 생명의 빵이었음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내가 눈 오줌이 기막힌 하느님의 섭리였음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내가 겪은 고통이 하느님이 주신 생명에의 자각이었음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내가 만난 사람이 하느님이 주신 사랑의 동반자였음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에게 괴로움을 준 사람이 하느님이 주신 도반이었음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하느님 안에서
숨쉬고, 움직이고, 살아왔음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말씀은
바오로의 그 유명한 아레오파고스 설교입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미지의 신, Unknown God에 대해서 얘기하고
우리 모두는 그분의 자녀임을 얘기하며
그래서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함을 얘기합니다.
하느님은 본래 미지의 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입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신입니다.
神秘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다 알 수 있는 신이라면,
그것은 신도 아닙니다.
그러니 신비는 하느님의 본질이고
우리가 다 알지 못함은 하느님 인식의 기본입니다.
우리의 겸손이 요청되는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즉 우리가 그분을 다 알지 못해도
우리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알지 못해도
그분은 우리를 잘 알고 계시며
우리는 그분의 살피심을 느끼지 못해도
그분은 우리의 모든 것을 살피십니다.
내가 걱정하지 않는 것까지 부모는 걱정하시듯
아버지 하느님은
우리도 모르는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다 헤아리시고
우리가 모르게 미리 다 마련해주십니다.
아니 계신 듯이 계시면서
아무 티내지 않고 모든 것을 하시니
우리의 무딘 감각은 그 사랑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요청되는 부분입니다.
말.말.말!
-오상선신부-
나는 하루에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사는가?
입이 있기에 말을 하고 살아야 함은 당연할진대
어떨 때는
쓰잘 데 없는 말을 할 때도 많고
안해도 될 말을 할 때도 있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반대로 꼭 말을 해야 할 때도 힘이 없어서 말 못하고,
말하면 누군가 다칠까봐 가만히 있기도 하고,
심지어 말해봐야 입만 아플 것 같아서 말을 못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말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 말 때문에 수많은 문제들이 야기된다.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오해가 생기고
관계가 나빠지기가 일쑤다.
그럼
어떤 식으로 말하면서 살아가야 하나?
그 원칙을 한번 복음에 비추어 정리해 보자.
1) 먼저 할 말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슴에 담아두자.
된장이 맛이 있기 위해서는 오래 담구어 두어야 하고
술이 맛이 있기 위해서는 오래 숙성시켜야 한다.
말도 다 입으로 내뱉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때론 가슴 속에 묻어두어야 한다.
자식들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2) 쓰잘데 없는 말을 줄이자.
자기를 자랑하고 드높이는 말, 과장해서 하는 말,
남보다 더 많이 아는 듯이 보이기 위해 하는 말,
남을 험담하는 말,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
욕설 등은 내 입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기에
가능한 한 줄여 나가야 한다.
3) 꼭 할 말은 더 많이 하자.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감사를 드리는 기도,
남을 칭찬하는 말, 감사하는 말, 미안하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위로의 말, 용서를 청하는 말,
이런 말들을 하면 할 수록 내 입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기에
더욱 더 늘여나가자.
침묵만이 금이 아니다.
침묵이 금이라면 이러한 말들이야 말로 보석들이다.
4) 입보다는 눈으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말하자.
전철을 타고 갈 때마다 늘상 만나게 되는
"예수 믿으시오!"하는 소위 쟁이들을 만날 때마다
입보다는 마음과 행동으로 설교해야 함을 더더욱 느끼게 된다.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눈으로
마음으로
행동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따라서 말보다는 실천이 앞서야 함은 당연지사...
예수님은
입보다는 몸으로 말씀하셨다.
그분의 삶 자체가 하나의 설교였다.
그분은 아직도 나에게 할 말이 많으신데
그냥 마음 속에 품어 두신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 말이 무엇인지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말씀은
<바오로, 너를 사랑한단다!> 이리라.
그 사랑을 말로 하기보다는
눈으로
마음으로
몸으로 하셨기에
이는 내가 진리의 영 안에서 올바로 해석할 줄 알아야만
알아듣기 때문이다.
<주님, 저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드려야겠지만
입으로 보다는
나도
눈으로
마음으로
그리고 내 삶으로 그 응답을 드려야 하리라. 아멘.
새벽을 열며
어제는 교구청에서 사제평생교육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시간 맞추어 자전거를 타고서 교구청으로 향했지요. 요즘에는 거의 모든 곳을 자가용보다는 자전거를 이용하고 있거든요. 더군다나 새로운 자전거 한 대가 생겨서 더욱 더 자전거를 많이 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자전거는 미니벨로라는 이름을 가진, 그러니까 아주 조그마한 자전거입니다. 어떻게 보면 어린이용 자전거 같은……. 하지만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작고 새빨간 자전거는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하지요.
아무튼 이 자전거를 타고서 교구청까지 가는데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봅니다. 교구청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신부님들이 신기함을 표시합니다. 괜히 으쓱하는 기분이 듭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고 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쳐다보는 이유는 단순히 자전거를 보고서 그런 것인데, 왜 내가 으쓱하냐는 것이지요. 내가 잘나서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내가 멋져 보여서 감탄의 소리를 외치는 것도 아닌데, 마치 제가 잘나고 멋져서 그런 것인 양 으쓱했던 제 자신이 얼마나 한심했는지 모릅니다.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학교에서도 강의를 하고 있지만, 이 성당 저 성당으로 강의를 많이 하러 다닙니다. 그런데 저를 이렇게 불러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말을 잘 해서 그럴까요? 사람을 특별히 끌어들이는 무엇인가가 있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바로 주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한 명의 사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만약 제가 주님을 믿고 있지 않다면 그리고 사제가 아니라 일반인이라면 저에게 강의를 부탁할 사람이 있을까요?
제 자신이 얼마나 교만했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사람들은 제 곁에 계신 주님을 보고 있을 뿐인데, 마치 나를 보고 있는 줄 알고서 착각할 때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내 뜻을 드러내는 데에만 최선을 다했던 것 같습니다. 즉, 내가 상대방에 맞추기보다는 상대방이 나에게 맞춰야 한다고 주장했었지요. 내가 상대방에게 맞추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그 쉬운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어려운 방법인 상대방이 나에게 맞추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기심과 욕심으로 ‘나’에게만 초점이 맞춰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당신 자신에 초점을 맞추셨다면 굳이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할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에게 초점을 맞추셨고, 우리들의 입장에서 우리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셨기에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온갖 거짓과 불의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인 진리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려는 그분의 사랑을 다시금 느낄 수가 있습니다.
이 현재를 살면서 주님께서는 우리 역시 그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나’만을 바라보지 말고, ‘남’ 좀 바라보라고 하시면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며,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는 것입니다.
빠다킹신부
성령의 힘을 입어야
-김동하 신부 -
모든 이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 그분께서는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해주시기 위하여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십니다.
당신을 보내신 분에게서 들으신 것만을 이야기하시며 앞으로 올 일들도
알려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진리를 알려주시면서 당신을 보내신 분을
드높이십니다.?성부께서는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로서 자연을 통하여
우리에게 쉽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성자께서는 세상을 살리는 구세주로서
인간의 온갖 선행을 통하여 더욱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보내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면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힘을 입어야
자연과 인간 안에서 진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오로지 성령께서는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끄셔서 우리가 진리를 깨닫기만을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우리가 자유스럽게 내린 뜻을 먼저 존중하십니다.
우리가 당신께 동의하고 당신을 따르고자 하였을 때만
진리로 이끌어주시고 깨닫게 해주십니다. 그러므로 진리로 나아가서
진리를 깨닫는 것은 우리 뜻에 달려 있습니다.
진리 안으로
-윤영수 수녀-
수도회에서 양성기간을 보내고 있던 한 자매가 성인전을 읽고 느낌을 얘기하다가 갑자기 "수녀님, 수녀님은 마귀들이 책동하는 게 보이세요?"라고 질문을 해왔습니다. 나는 난데없는 질문을 받고 "글쎄요, 기도를 진지하게 할 때면 어떤 때 간혹 보이는 것도 같던데요."라고 얼버무렸습니다. 그 자매가 수련자가 되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수녀님! 수녀님 말씀대로 기도를 진지하게 해보았는데 진짜 그 마귀 책동이 무엇인지 보이더군요."라고 했습니다. 난 그때 솔직히 말하면 큰 확신 없이 대답한 내용이어서 겸연쩍었으나 내심 반가운 마음에 "어머! 그랬어요? 그런데 그게 어떤 모습으로 보이던가요?"라고 반문했습니다. "수녀님! 그 마귀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었어요. 제 마음 안에 늘 도사리고 있다가 제가 주님 말씀을 조금만 소홀히 하는 기미가 보이면 튀어나와 저를 괴롭히더군요. 그런데 여태까지 저는 외부 상황이 늘 저를 괴롭힌다고 생각했답니다."
난 그 순간 이 수련자 안에 계신 주님의 시선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열망하는 사람한테는 세상에 속한 것들에서 오는 내적 어둠과 주님이 주시는 진리의 빛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체험했습니다. 간혹 우리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이기심의 출발) 바를 행하면서 주님의 사람이기에 어려움이 많다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 반성을 해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 실현되지 못하는 세상을 증오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속한 세상의 것이 기승을 부릴 때 이를 깨닫고 주님께 돌아서는 신앙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 제6주간 수요일
- 도정호 신부-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은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너희에게 할 말이 참 많다. 이 말씀은 어디를 떠나시려는 인상이 드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부활기간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사실 이번 주간 내내 우리에게 들려지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함께 가지면서 이야기를 나누신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 앞부분에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고, 어떤 일이 있어도 당신을 떠나지 말라는 당부를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렇게 본다면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은 많지만,’ 이라는 말씀 속에 어떤 심정이 담겨져 있는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오늘 저는 복음을 묵상하면서 마지막이 다가왔다고 생각하며 제자들과 시간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마음과 아직 예수님의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지 못하는 제자들 사이에 어떤 간격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의 의미와 고통의 의미를 알아듣고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스승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확신도 부족한 상태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투신하고 증언하기에도 용기가 부족한 상태이고, 이렇게 제자들의 상황을 주님께서 알고 계시기에 너희가 당신의 말씀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복음이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전적으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의 내면상태나 영성이 조금은 위로가 된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알아듣기 전의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복음 안에서 나타나고 있고, 그 모습이 오늘날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그랬었다는 점, 그런 면에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너희에게 할 말이 참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나의 신앙의 현주소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 신앙인으로서의 내 삶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 자신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주님의 말씀은 참 위로가 됩니다. 항상 부족하고 성숙해야 하고, 덕을 쌓아야 할 우리라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또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 세상에서 알아가고 배워야 할 것도 많은 우리들이기에 억지로 알아듣도록 서두르지도 않겠다는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에 많은 위로가 된다는 겁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우리의 신앙의 높이에 당신을 낮추어 주시는 하느님의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면서 곁에 있어 주시겠다고 하시는 우리주님, 억지로 주입시키려고도 하지 않으시는 우리 주님을 오늘 우리는 만났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우리 스스로 맡길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선택과 결심을 기다려주시겠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독서> : 방해와 적대 속에서도 계속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로
- 경규봉 신부 -
사도 바울로는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한 후 아테네로 갔다. 그는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최선을 다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아레오파고의 법정에 섰다. 아테네 사람들은 수많은 신들이 있으며 그들 가운데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들도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을 새긴 제단을 만들어 놓고 예배함으로써 아테네 시를 알지 못하는 신들의 저주로부터 보호하고자 했다. 바울로는 이러한 그리스적 배경을 이용하여 복음을 전한다. 그는 아테네 사람들이 섬기는 알지 못하는 신이란 곧 그들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절대자 하느님을 뜻한다고 설교한다.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이시며 우주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며, 아테네 신전과 사원에 있는 신들처럼 인간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살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부족함이 전혀 없으신 분이시며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시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인간의 생명을 한 치라도 연장할 수 없다.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의 생명과 호흡의 주인이시다.
인류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같은 혈통과 같은 조상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사람이 하느님을 찾기만 하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와 함께 계신다. 바울로는 그리스의 시(詩)를 이용하여 사람은 하느님 안에서 살며 하느님의 자녀라는 점을 설명하고, 하느님께서 주님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증거를 보이셨으므로 이제 결단을 내리고 회개하여 하느님을 섬기도록 촉구한다.
그러나 아테네 사람들은 육신의 부활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믿었지만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아왔기 때문이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으로서 속되고 악한 것이며,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본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만 아니라 부활 또한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했다(1고린 1,18 참조). 그들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바울로가 전하는 복음을 대부분 거부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테네에서는 아레오파고의 법정 판사인 디오니시오를 비롯한 몇몇 사람만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때문에 인간적으로 생각한다면 바울로는 아테네 시에서 복음전파에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아테네를 떠나는 바울로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로는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로마 5,3-4)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실망하지 않고 다른 도시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아테네를 떠났다.
성공과 실패는 결코 신자수의 많고 적음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한가? 그렇지 않은가? 말씀을 중심으로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 바울로는 분명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했으며 아테네에 복음의 씨를 심었다. 그리하여 비록 적은 수의 사람이지만 그를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졌고, 그 말씀은 계속 퍼져나갈 것이다.
복음전파는 하느님 말씀의 선포이며,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사는 것이다. “세상도 가고 세상의 정욕도 다 지나가지만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1요한 2,17) 아무리 뛰어난 인간적 지식이나 화려한 말씀일지라도 세상 것은 모두 지나갈 뿐이며, 하느님의 말씀만이 영원하다. 그러므로 말씀을 마음속에 담고,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며, 말씀에 충실하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신앙
-조영만 신부-
요한 복음 16장은, 최후의 만찬자리 그러니까 이미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앉혀 놓고 그들에게 일러주시는 마지막 유언, 이제는 곧 이별을 앞둔 스승이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고별의 담화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고, 또 3장에 걸쳐서 진행되는 이 고별담화를 통해 요한은 예수님과 공동체, 곧 교회와의 관계를 정리해 나가는 긴 대목 중의 일부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잘 알아들으려면 우리의 시선을 그 시대의 상황으로 좀 되돌릴 필요가 있는데요, 우선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의 상황은 지금 우리처럼 그리스도교라는 교회가 일반적이지 않은, 대단히 작고, 어쩔 수 없이 그 당시의 사회로부터도 격리되고 고립되어 있던 시절에, 그러니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어떠한 박해를 당할지 모르는, 마치 비밀결사 집단이나 가질 법한 긴장과 철저함이 가득 베여있는 초세기 교회공동체가 그 대상입니다.
세상은 아무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지 않는데, 이를 고백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나버리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건을 체험한 그들은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목숨을 내걸고서라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 자신들 역시도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올지 두렵고 또 모든 것을 박탈당할지도 모를 불안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들이 뼈저리게 체험하는 바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두렵고 떨리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에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그리고 그분께서는 기어이 우리에게 다시금 돌아오실 것이라는 굳은 약속.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막막한 두려움 속에서도 울려 퍼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그분의 이끄심에 대한 의탁을 예수님의 유언 형식을 빌어 이 글을 읽는 교회 공동체 신자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시선으로 오늘의 말씀을 다시 봅시다. ‘지금은 너희가 어둡고 괴로움 속에서 무엇인가라도 잡으려고 발버둥을 치지만 오히려 지금 너희가 하느님의 뜻을 다 감당해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머지않아, 진리의 영, 곧 협조자이신 성령께서 오시면 그분이 너희가 가야할 길들을 일러주실 것이다. 그분은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시며, 어둠에 덮어두었던 모든 것들은 빛으로 폭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도 대동소이합니다. 참으로 많은 어두움과 두려움, 그리고 막막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다구니를 써서라도 하느님의 뜻이 이거다 저거다 재단하고 무언가 하나 턱하니 내세우고 욕심이 앞섭니다. 기도하면서도 안달하게 되고, 믿는다 하면서도 끝없는 불안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식의 대답은 성에 차지 않습니다. 하느님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분의 때가 있고 그분의 시간이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를 성령께, 하느님께 내맡기지 않고 내가 나서서 자꾸만 뭔가를 해결 지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꼬여가는 신앙의 길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신앙은 바로 그분 친히, 이렇게 안달하고 끝없이 돌아서려는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 일, 그분의 성령께 아프고 억울하고 작아보여도 그래도 그분께 나를 다시금 이끌어주시도록 내맡기는 일,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오늘 요한은 우리에게 그런 기다림을 이야기하십니다. 지치지 말고, 포기하지도 말고, 정말로 스승의 말씀과 그분의 성체에 머물러라고, 그러면 우리가 예상치도 않았던 때에 모든 것이 드러나게 해주시리라고 격려하십니다.
여러분. 부디 힘을 내십시오. 2,000년 전의 사람들도 이런 절박함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들과 함께 같은 기다림의 대열에서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
-이수철신부-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솟나이다.”(시편97,11).
하느님은 빛이시자 기쁨의 원천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고,
하느님의 영광은 우리 삶의 유일한 목표입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나를 알아 참 나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모르고 나를 모르고
그냥 되는대로 살다가 인생 마친다면 얼마나 허망할까요?
인간관계를 통해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평생 서로 알아가는 과정 중에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의 인생인 것 같습니다.
하여 서로 모를 때 답답하기도 하고
무지로 인해 숱한 오해와 착각으로 상처도 입고
관계가 단절되기도 합니다.
참으로 서로 알아 갈 때
신뢰도 깊어지고 자유롭고 편안합니다.
사실 마음 담기지 않은 숱한 선물 보다는
자신을 알아줄 때 진정 기뻐하고 행복해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가 당신을 알아주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을 잘 몰라 엉뚱한 곳에서 하느님을 찾고,
미신적으로 하느님을 믿고,
본의 아니게 우상을 섬기면서,
내 식대로 하느님 사랑을 표현하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야 올바로 믿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바오로의 설교가
우리에게 올바른 하느님 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사람의 손으로 지으신 신전에는 살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이 아름다운 신록의 세상 전체가
하느님의 천연 사원일 수 있습니다.
또 하느님은 무엇이 부족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습니다.
도대체 모두가 하느님의 것인데
무엇을 하느님께 드리겠다는 말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땅 위에 살게 하시고,
일정한 절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것’,
바로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는 단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승들의 유일한 일도
하느님을 찾는 일에 두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찾아 수도원에 왔고,
또 평생 기도와 노동, 성독을 통해
하느님을 찾는 일에 전념하는 수도자들입니다.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하느님의 일인 끊임없는 기도 중에
하느님을 찾는 자가 수도자이니,
하느님은 바로 수도자의 존재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원형을 사는 자가 수도자이니
깊이 들여다보면
이런 진리는 모든 신자들에도 해당됨을 봅니다.
사실 하느님을 찾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으니
하느님 탐구와 나의 탐구는 함께 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알아야 참 나를 알아
기쁘고 행복하게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떠나선 참 나도 모르니
참 자유와 행복도 요원합니다.
하느님은 막연하지도 추상적이지도 않습니다.
너무나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생명과 숨과 모든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 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합니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살아있는 하느님 체험이니
새삼 무슨 하느님 체험이 필요하겠습니까?
지식 많아 머리는 똑똑할지 몰라도
하느님을 아는 영적 감각은
많이도 퇴화되고 무디어진 현대인들 같습니다.
무지로 인해
마치 물속에서 살면서 물을 모르는 물고기처럼,
하늘 안에 살면서 하늘을 모르는 나무들처럼,
하느님 안에서 살면서 하느님을 모르는 대부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므로,
인간의 예술과 상상으로 빚어 만든
금상이나 은상이나 석상을 신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하느님을 찾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하느님을 찾을 때 비로소 하느님 자녀로서
겸손하고 고결한 품위 있는 삶이 가능합니다.
사실 하느님 찾는 재미로, 맛으로 살아야
매일 새 하늘과 새 땅의 초록빛 영성을 살 수 있습니다.
나 혼자 하느님을 찾는 게 아닙니다.
고맙게도 진리의 영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귀를 열어 주시고, 눈을 열어 주시어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십니다.
퇴화해 시들어가던 영적 감각을 일깨워 주십니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머리로 아는 진리가 아니라
온 몸과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체험적 진리가 되게 하는 것
전적으로 성령의 은혜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오시는 부활하신 주님은
진리의 영으로 우리를 일깨워 주시어
참 좋으신 하느님을 전 존재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아멘.
삼위일체
-노성호 신부-
비행 중에 ‘삼각편대’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맨 纜?비행기 한 대가 나서고,
그 뒤를 다른 비행기 두 대가 따르면서 전방과 좌우를 공격하고 방어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모로 효과가 뛰어난 전술입니다. 그런데 어느 비행기 한 대가 유독
앞질러 간다든지 뒤처지게 되면 균형을 이룰 수 없고, 세 대의 비행기가 하나의
편대를 이루지 못하면 적을 공략하는 데 어렵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삼발이’라는
취사도구가 있는데, 둥근 쇠테에 발이 3개 달려 있다고 해서 명명(命名)된 이
기구도 삼각편대와 마찬가지로 어느 한 다리만 유독 길거나 짧아서는 균형을 잡을 수
없습니다. ‘삼위일체적인 결합’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밖에도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가 이루는 화목한 ‘성가정’의 모습이라든지, 스승과 제자와 학교가 이루는
‘교육의 장’, 그리고 세 장의 잎이 하나로 모여서 생명의 신비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세 잎 클로버’와 같은 식물 등 수없이 많은 요소들이 우리 모두에게
삼위일체의 신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이루셨던 ‘성삼위일체’의 모습은 가장 존귀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위격으로는 세 위로 구분이 되어 각자 하시는 일에는 차이가
있지만, 본성으로는 한 분 하느님으로 계시면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 그 신비로운 조화와 결합 안에서 우리 모든 신앙인들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근간을 이루며 살아갔으면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양승국신부-
<강요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게 되는 많은 일들 가운데,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오랜 기간 공들여 쌓아올린 내 인생의 탑을 한 순간에 나를 무너트리고 마는 고통스런 사건들, 사사건건 부딪치고 서로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 괴로운 인연들을 만납니다.
저 무죄한 어린이들의 처참한 죽음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기아로 죽어가는 수많은 아이들, 불치병으로 소리 없이 꺼져가는 어린 생명들, 어른들의 폭력과 이기심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는 청소년들의 고통은 또 어떤 의미입니까? 의로운 이들이 겪는 끔찍한 시련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까?
무엇보다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하느님께서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이시면서 어찌 이런 불합리한 현실을 그냥 바라만 보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신속히 개입하지 않으시는가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요즘 들어 조금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철저하게도 인내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그분의 반응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느리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은 당신이 직접 나서기보다 누군가가 먼저 나서기를 기다리시는 것 같습니다. 그 누군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겠지요. 하느님은 이 불의하고 고통스런 현실 앞에서 우리의 협조와 투신을 요청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순을 개탄하고, 다른 누군가에게 화살을 돌리기보다는 바로 내가 지금 나서는 것을 하느님은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시시콜콜한 사건들이 그때 그 때 개입하시고, 우리 인간 각자의 역사 안에 반복되는 모든 세세한 일들에 간섭하신다면 그것보다 견디기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에 대해 그때 그 때 벌주신다면, 우리의 윤리 도덕적 타락 앞에 그때 그 때 질타하신다면, 우리의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내시고 만천하게 공표하신다면 단죄 받지 않을 사람, 그래서 이 세상에 남아있을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세상의 취약점, 모순, 부조리, 악행 앞에 크신 자비를 베푸십니다. 일단 기다리십니다. 기회를 주십니다. 길게 침묵하십니다. 그리고 깨닫기만을 기다리십니다. 당신 품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결국 변화되고 회개하고 행동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아직 제대로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현실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말씀을 자제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뒤에 오시게 될 협조자 성령께 나머지 일을 맡기십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오시면 제자들의 내면에서 이루어질 깨달음은 정녕 큰 것입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제자들은 마침내 이런 깨달음에 도달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의 현실적 욕구를 한없이 충족시켜주실 이 세상의 메시아가 절대로 아니라는 깨달음.
예수님은 이 세상의 다른 황제들이나 정복자들처럼 군사를 일으켜 약소국을 정복하고 폭력으로 그들을 다스릴 왕이 절대로 아니라는 깨달음.
결국 예수님은 한없이 참아내는 메시아, 인간의 폭력성 앞에 그 즉시 분개하시고 처벌하시는 진노의 하느님이 아니라 언젠가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진리의 길로 나아갈 때 까지 기다려주시는 인내의 하느님이시라는 깨달음.
강요하지 않으시는 하느님, 인간의 자유의지를 철저하게도 존중해주는 관대하신 하느님,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당신께로 돌아설 때면 너무 기뻐 어쩔 줄 모르시는 사랑의 하느님 앞에 그저 감사드리는 아침입니다.
-김웅태 신부-
예수님은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하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수는 없었고, 다음으로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한꺼번에 하느님의 진리를 다 파악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가르치고 알아듣는다 하는 것은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기에 하느님의 진리를 인간이 알아듣는 데도 점차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인간을 가르칠 수 있고, 사람이 하느님의 진리를 배울 수 있는 한계가 있기에, 합당한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한 실례를 보면 : 이스라엘이 상대 적국을 공략 점령하고서는 가축과 남녀 아이들까지 멸하라고 명하고 있는 구절들이 여러 곳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 말을 우리가 들을 때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하다고 하겠지만 그러한 말의 배후에는 그들이 지켜야하는 중요한 사상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야훼 하느님을 아는 유일한 백성으로서, 하느님을 모르고 미신에 젖어있는 이들로부터 자신들이 감염되어, 자신들의 신앙의 위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한 영향을 받을 위험이 있는 이교인들을 멸망시켜버리는 편이 더 낫다는 다시 말해서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야훼 하느님께 대한 종교의 순수성을 고취해 나간다는 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신 다음에는 달라졌습니다. 이방인의 멸망이 아니라, 모두가 한 하느님 안에 한 백성으로 함께 구원에 참여하는 구원의 모습으로 발전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계시는 인간이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발전되고 더 깊이 드러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복음적인 계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왔으나 그 분의 죽으심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그분의 부활하심으로 살아 계셔서 항상 진리를 계시하십니다. 또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계시는 영신적인 진리뿐 아니라 과학과 학문, 예술 등 모든 진리에 대해서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신학자와 설교자들만이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새로운 진리를 알아듣고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헨델은 그의 작품 "메시아중의 알렐루야 코러스"를 어떻게 작곡했느냐?에 대해서 말할 때, "하늘이 열리고, 장엄하신 하느님께서 그 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라고 했습니다. 과학자가 인간의 수고를 덜어주고 보다 나은 생활에 공헌하는 것을 발명할 때, 외과 의사가 인간의 생명을 구하고 고통을 덜게 하는 새로운 기술을 발견할 때, 그 모든 것도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비추어 주심으로 알게되는 은혜인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탐구에 몰두하면서 어떤 한계점에 부딪칩니다. 이때 인간의 사고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 문제의 해답이 그의 머리 속에 섬광처럼 떠오르는 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것은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입니다. 그의 사고가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지혜 자체이신 하느님의 은혜가 들어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진리를 하느님께서는 점차적으로 인간의 모든 분야에서 밝혀주시고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에게도 하느님의 진리를 풍부히 들어내시어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공헌하며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약속하신 바 그 진리의 성령의 은혜를 내리시도록 간절히 기도합시다. 아멘.
그대에게
-강영구신부-
우리는 지금 성령(聖靈)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인 성령(聖靈)은 진리를 깨닫게 하여 우리를 자유인이 되게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를 따라 살면 여러분은 죽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힘으로 육체의 악한 행실을 죽이면 삽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8,14-15)
우리들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열려있습니다.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진리를 깨닫고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육체의 욕망에 충실하여 악령(惡靈)의 노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성령은 아무것도 강권(强勸)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사람 안에 진리를 담아줍니다.
깨달음은 노력하여 자력으로 쟁취(爭取)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개방함으로서 성령으로부터 하사(下賜) 받는 것입니다.
당신이 성령의 사람이 되어 진리의 길을 걷기를 바랍니다.
하늘을 향해 자신을 열고 비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온전히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스스로를 비우는 사람이 성령으로부터 진리를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一明)
† 진리이신 성령의 임무 †
-박상대 신부-
1차 고별사에 이어 2차 고별사가 행해지는 가운데 고별의 밤은 깊어만 간다. 예수님은 아직도 하실 말씀이 많으시다. 그렇게 길지 않은 3년간의 공생활,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시면서 그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고 놀라운 업적을 보이셨다. 이 모든 가르침과 행적을 요약하는 고별의 밤이 지금까지 그 어느 밤보다 길어지면서 제자들의 집중력도 점점 떨어져 간다.
이미 제자 1명은 자리를 떠나 가야할 길로 갔고, 나머지 11명은 이 밤이 스승과 마지막 밤이 될 줄을 짐작이나 했겠는가? 제자들의 집중력은 떨어졌지만 그 중에 누군가는 고별의 유언들을 머릿속에 담았다. 그것을 성령의 감도(感導)로 후일 이렇게 기록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업적에 대한 제자들의 이해와 학습능력을 감안하여(12절) 또 다시 '진리이신 성령'을 계시하신다. 이미 이 밤의 고별사에서 두 번씩이나 '진리이신 성령'에 대하여 언급되었다.(14,17; 15,26) 어제 복음에서도 예수께서는 '협조자'이신 성령계시를 통하여 성령의 실제적 차원을 암시하셨다.
오늘은 예수께서 '진리'이신 성령계시를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이는 성령 하느님에 대한 학습적(學習的) 차원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진리의 성령'께서 자기 고유의 무엇을 제자들에게 교수(敎授)하시는 것은 아니다. '진리의 성령'은 제자들을 '진리'에로 이끌어 깨닫게 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신다. 여기서 진리는 무엇인가? 진리는 바로 길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당신이시다.(14,6)
그러므로 '진리의 성령'은 제자들을 당신께로 이끌어 주실 자신의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인즉, 바로 하느님의 진리이시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까지 진리를 온전히 파악하는데 여러모로 부족하다. 온전한 진리 파악이란 예수님의 인격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계시를 온전히 깨닫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은 계시된 내용에 대한 올바른 해석자이시며, 이는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한 시간과 역사의 전부를 주관하신다.(13절) 진리의 성령은 제자들에 대한 학습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14절) 제자들이 진리의 성령을 통하여 열심히 학습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데 일조(一助)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아버지의 영역에 속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계시된 진리(성자)를 위해 지속적으로 활동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활동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세상에 대한 자기계시를 위해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주셨으므로(요한 3,35),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아들의 것"(15절)이며, "아들의 것은 다 아버지의 것"이다.(요한 17,10) 이로써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느님의 관계와 삼위일체 하느님의 내적 생명의 구조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된다. 물론 우리의 깨달음은 세례와 견진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자신을 성전(聖殿)으로 삼으신 '진리의 성령' 덕분이다........◆
'진리 안으로'
-유광수신부-
납골당을 다녀왔다. 납골당은 죽은 이들이 거처하고 있는 곳, 즉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한 뼘밖에 되지 않는 작은 공간 속에 갇혀있는 죽은 자들의 집이다. 그 작은 공간 속에 갇히기 위해 그토록 살아있는 동안 발버둥쳤는지 참으로 인생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곳에 가보니까 "고인에게 쓰는 편지"라는 것이 있었다. 무슨 글을 썼는지 일일이 읽어보았다. 한결같이 " 보고 싶다. 미안하다. 살아있을 때 잘 해주었을 걸, 천국에서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란다."라는 내용이었다. 그 중에 어느 남자가 자기 부인에게 보내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보고픈 당신께
여보, 당신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소?
난 당신이 에덴 동산으로 갔을 줄 믿고 살고 있오.
그것만이 지금 나에게 유일한 위로이니까.
주님 곁에 있는 당신이 너무 보고 싶어
매일 매일 꿈속에서나마 당신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여전히 그리운 당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구료.
벌써 나를 잊지나 않았는지....
여보 모든 것이 정리되고 남한테 줄 빗을 다 갚으면 나를 데리러 와 줘.
정말 당신 곁으로 가고 싶소.
날마다 당신을 위해 기도할께
어서 빨리 우리가 빗진 것을 빨리 갚게 해달라고 기도해줘.
여보, 기다려. 빗 다 갚을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릴런지 모르지만
우리 하늘 나라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구료.
안녕 !
하느님은 이런 비극을 원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끔찍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셨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 사업을 완성시키셨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단 하나, 즉 우리 모두를 살리는 일이다. 그것이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서 이런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가? 오늘 하느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어떤 방법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진리의 영이신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고자 하신다.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 하느님이신 진리의 영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무엇을 통해서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시는가?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라고 하셨다.
즉 진리의 영이신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을 우리들이 알아듣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리의 영이신 하느님을 만나고 싶으면 진리이신 말씀으로 가야한다. 우리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깨닫게 되면 우리 안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그 동안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작은 깨달음이라도 있었다면 그것은 분명히 진리의 영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신 것이며 우리를 진리에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인도하심이다. 매일 복음을 묵상한다는 것은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이며 그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진리를 위해 몸바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복음을 읽고 묵상하면서 어떤 기적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가?
우선 자신의 잘못을 보게 된다.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왜 내가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그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 해답을 스스로 찾게 된다.
해답을 찾게되니까 근심걱정이 사라지고 용기가 나고 희망을 갖게 된다.
그것은 곧 그 동안 나를 얽어 메었던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이다. 마치 밭에 묻힌 보물을 발견한 사람처럼 마음속에서부터 커다란 기쁨이 용솟움치고 삶의 의미를 되찾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게 된다. 그야말로 새 하늘 새 땅이 매일 매일 펼쳐지는 삶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드리게 되고 "숨쉬는 모든 것들아 주님을 찬미하여라."(시편 150)고 했던 찬미가 자연스럽게 우러나올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고 싶어한다. 그러나 어디에서 하느님을 만나야하고 어떤 방법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 같으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분명히 진리의 영이신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을 통하여 오시고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며 우리 자신이 진리를 깨닫게 됨으로써 새 하늘 새 땅을 볼 수 있도록 역사 하신다. 이 진리를 깨닫는 사람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다.
나는 매주 자매들과 함께"다가오시는 예수"를 읽고 묵상한 것을 나누는 묵상나눔을 하면서 그네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체험한다. 자매들이 복음의 빛으로 자신들의 안을 들어다 보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방법으로 자기들 안에서 역사하시는지를 깨닫게 되니까 사람들이 변화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어둠 속에 빛이 들어가니까 얼굴이 환해지고 해방되는 것을 체험한다. 참으로 오늘도 우리를 진리에로 이끌어 주시는 진리의 영이신 하느님의 역사는 말씀을 통하여 일어나고 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7)라고 기도하셨다. 그렇다 복음 묵상을 한다는 것은 몸을 바치는 일이다.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다. 적당히 하는 일이 아니다. 시간이 있으면 하는 일이 아니다. 목숨을 바치는 일이다.
목숨을 바쳐 복음을 묵상해 보라. 그러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모든 진리 안으로 으끌어 주시는 진리의 영을 체험할 수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리의 영이 우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가시는 진리의 영을 만나는 은혜로운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성령은 우리의 힘, 우리의 희망 †
-[두올묵상팀] -
주님은 떠나시는 고별의 장면에서 아직 하실 말씀이 많이 남아 있나 봅니다. 아마 제자들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토마스와 필립보의 질문 이후에 거의 말이 없고 그냥 듣고만 있을 뿐입니다. 말이 없다는 것은 순명하여 희망을 가지는 경우와 절망하여 포기하는 경우 둘 중의 하나입니다. 웬만하면 제자 중의 어느 누구 한명이 나사서 '주님, 걱정 마십시오, 우리들이 알아서 잘 할거니까, 편안히 가십시오'...라고 할만도 한데 아무 말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순간에는 정적이 깊이 감돌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지방의 모였던 군중들도 깊은 밤이기에 자고 있습니다. 티베리아 벌판에서 빵을 나누어 먹던 5000여명의 사람들도 지금은 깊은 밤이기에 자고 있습니다. 예배당에서 주님의 복음을 듣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 병을 치유받기 위해서 주님을 졸졸 따라다니던 병자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주님의 뒷꽁무니만을 따라다니던 죄인들.....모두가 깊은 밤에 자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로지 주님의 11제자만이 적막한 다락방에서 이별의 대화만을 나누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전에 등불을 켜 놓고 주님을 위해 함께하는 사람은 11제자들 뿐입니다. 12제자 중 1명은 어둠 속으로 나가서 어둠의 세력들과 작당을 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등불이 끼진 상태에서 주님의 일과는 무관한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자고 있다는 의미). 주님은 게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중에 제자들에게 '까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과의 관계성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령에 대한 관계성은 현재로서는 제자들 11명에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이 제자들에 의해 전 세계와 온 백성에게 전파되겠지만 현재로서는 11제자들에게만 관계되는 것입니다. 빵을 얻어 먹고, 물을 얻어 먹고, 병을 치유받고, 죄를 사함받은 공생활 기간 중의 모든 사람들도 이제는 성령의 역사에서는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즉, 그 모든 사람들은 '성령의 세례'를 다시 받아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성령의 세례'란 지금 가톨릭 성사제도로 보면 '견진성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성령의 세례"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물의 세례'를 하는 권한을 부여 받았지만, 주님은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장차 그 성령의 역사하심을 제자들이 대신 임무를 받아 전세계로 나아가는 복음화 길을 갈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그 의미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아직도 인성 수준에 머물러서 '떠남과 이별과 슬픔과 걱정과 불안과 장차의 문제' 수준 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한차원 더 높은 영적 제자로 육성시키기 위해 마지막 교육을 학습시키는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많은 자식들을 놓아두고 돈벌이를 위해 먼길을 떠나는 아버지가 큰아들 몇명만 불러놓고, 이제부터는 너희들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동생들을 잘 돌보아라. (그리고 훌쩍이는 큰아들들에게) 이제는 너희들이 아버지 역할을 할애하니 좀 어른스러워져야지....(그러니) 내가 떠나면서 이런저런 것을 준비해 놓을터니, 그걸 가지고 이런저런식으로 잘 도움(협조)을 어린 동생들을 잘 돌보고 키우거라....는 장면과 유사합니다.
그 (어린저런)이라는 것이 바로 성령에 대한 주님의 계속적인 말씀입니다. 지난복음과 연결하여 다시한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첫 번째 하신 말씀은 사랑과 실천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사랑과 실천은 주님과 제자들 사이에 떨어질 수 없는 유대감을 형성하는 기본 뼈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이 결속을 유지시켜 줄 수 있는 성령 파견에 관한 약속입니다. “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 14,26).
그리고 세 번째 말씀은 평화에 대한 약속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14,27). 이와같이 성령을 통한 예수님의 현존은 공동체에게 평화를 주며 사랑에 의해 영원한 생명의 공동체로 결속을 줄 것입니다.
제자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공동체가 이 평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믿음 안에서 투쟁하도록 사명을 부여 받은 것입니다. 그 사명을 생각하며 내 마음을 다져주는 글 하나를 묵상합니다. 박성철님의 '삶이 나에게 주는 선물' 中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패배와 절망의 연결고리, 실패와 실망의 연결고리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늘 겪게 되는 통과의례 같은 것입니다
패배와 실패를 겪고 난 후
기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허나 그것들이 비록 기뻐해야 할 것은 아니어도
우리는 그것들에 때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알다시피 비오지 않은 후에는 찬란한 무지개가 뜨지 않고
잎의 헌신 없이는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지 않으니까요
링컨은 상원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후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걷는 길은 언제나 험하고 미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자꾸만 미끄러져 길 밖으로 곤두박질치곤 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기운을 차리고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길이 약간 미끄러울 뿐이지 낭떠리지는 아니야...'하고.....
일어서십시오
당신의 숨이 붙어 있는 한 절망의 낭떠러지는 없습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모든 일이 가능하다고 가르치고
절망은 우리에게 만사가 곤란하다고 가르치니까요
[박성철님의 '삶이 나에게 주는 선물'中에서]
그렇습니다. 일어서야 합니다. 비록 주님께서 떠나시는 고별의 장이지만, 우리에게는 절망이란 없습니다.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희망이 없는 자에게는 탐스러운 열매가 맺히질 않습니다. 맞습니다. 그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 희망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진리의 성령'을 보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란 누구입니까? 네, 주님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아버지와 똑같은 분이기에 아버지도 진리이십니다. 따라서 '진리의 성령'이란 그리스도의 영, 어버지의 영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직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주실 것이다. 그분(성령)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일들도 알려주실 것이다. 또 그분(성령)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A)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다 나(B)의 것이다. 그래서 성령(C)께서 내게(B)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려주시리라고 내가 말했던 것이다.”...
이 복음이 바로 삼위일체을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즉, 아버지=나=성령의 관계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시한번 정리하면 주님(B)은 아버지(A)가 시킨대로만 했습니다(B=A). 그리고 성령(C)은 주님(B)에게서 들은 것만을 일러줍니다(B=C). 따라서 연역법으로 해석하면 성령(C)은 아버지(A)께서 시킨 일만 하게 됩니다. 고로 A=B=C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논증입니다.
다시 복음을 묵상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한(A=B=C)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다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셨으며, 그리고 그 성령께서 하실 역할을 말씀주시고 계십니다“이제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 주실 성령, 곧 그 협조자 는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모두 되새기게 하여 주 실 것이다”(14, 26)...주님은 이렇게 성령의 역할을 아주 훌륭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즉 성령은 가르치는 것과 되새기게 해주는 두 가지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협조자, 곧 성령은 예수님의 계시에 어떤 새로운 계시를 덧붙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다빈치 코드'라는 책부터 시작하여 뉴에이지의 일부 그룹들이 자기계시를 마치 진리의 계시인양 헛소문을 내고 우리 신자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통일교니 해방신학이니, 말기 재림예수니, 등등....많은 사이비들이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마치 계시인양 떠들고 있습니다. 이런 미혹한 시대를 예상하신 주님은 복음에서 분명히 말씀을 주셨습니다. '진리의 영'은 자기 생각대로 말하지 않고, 하느님에게 들은 대로 일러주실 것이다, 아멘입니다.
진리의 성령은 오로지 주님의 계시를 현존케하고 그 의미를 우리에게 밝혀 줄 것입니다. 이와같이 성령은 공동체 안에서 교사로서 활동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성령 자신이 모든 신자들의 가슴 깊은 곳에서 그들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입니다. 또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타종교인들에게 비해 참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우리 가톨릭인들은 여호와 증인의 밥이라고 누가 그럽니다. 또 개신교인들에게 두들겨 맞는 스파링 상대자라고 말합니다. 왜 그런 말들이 소문으로 떠도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점집에도 잘가고, 미신에도 양다리를 걸쳐놓고, 좀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보다는 세상의 가르침(유혹)을 더 따르려고 하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예수님의 뜻 보다는, 우리의 뜻에 따라 움직이려고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부활 제6주간을 보내면서도, 주님의 수난과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며, 어떤 사람은 십자가(고통) 없는 부활을 바라거나, 고통 없는 사랑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들의 믿음이 부족하거나 양다리를 걸쳐놓은 부족한 신심은 회개치 않고, 무슨 일만 생기면 하느님 탓을 하고 애매한 사제들만 공격하고 있습니다. 뭐 누구누구는 영성이 부족하다느니...성령이 덜 임했다느니...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성령이 빵을 쪼개듯이 조금조금씩 나누어 들어오늘 줄 아는가 봅니다. 이렇게 우리들은 인간적으로 습관된 생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올인(All in)입니다. 쬐끔식 감질나게 하지 않습니다. 샘플로 조금 주었다고 시험하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더 많이 가고, 어떤 사람에게는 덜 가고...그렇질 않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은 양의 똑같은 질을 올인시켜 주십니다.
성령은 이와같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자, 즉 주님의 길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 자, 주님께서 언제든지 오시도록 등잔을 켜 놓고 있는 자..., 그런 사람에게 올인하며 오십니다. 그 성령은 우리의 힘이요, 우리의 희망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준비되어 있지 않는 자는 그분(성령)을 모릅니다. 그런데 준비되어 있어 성령을 받은 자는 그분을 확실히 압니다. 우리 주변에 성령을 받은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확실히 다릅니다. 오늘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진리의 길로 이끌어주시는 성령이 받을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예비해 두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안에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교회의 뜻에 순명하는 삶, 성사 안에서 살아가는 삶, 기도하는 삶, 성서를 가깝게 접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신비를 일깨워 주실 것이며, 그 신비 안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행복을 덤으로 선물하실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역할은 능동적인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이 사랑을 부어 줄 대상이 어디 있는지 우리의 시선을 돌려봅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오늘은 어버이날, 우리들의 부모님께서는 3중고~ 4중고를 겪고 우리 자녀들을 양육하셨지요. 대한민국 부모님 화이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