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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8. 묵상글 (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 추수 때가 되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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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8.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추수 때가 되면
저는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성모동산이 있는 아름다운 성당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아주 작게 느껴져도 그 멋스러움은 여전합니다. 텃밭에는 콩이 심겨 있었고 들깨도 있었습니다. 밭모퉁이에는 흔하지 않은 가로등이 밤새 켜있었습니다. 가로등 가까이에 있는 콩과 들깨는 다른 것보다 훨씬 더 키가 크고 잎도 넓었지만, 가을 추수 때에 보면 열매가 없었습니다. 겉은 화려했지만 정작 속은 빈 껍데기였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견디고 밤에는 어둠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입니다. 결국 곳간에 채워진 것들은 겉보기에는 초라했던 콩이고 들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겉모양으로 갚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인생여정 안에서 겪을 것을 다 겪으면서 견디고 받아들인 삶의 모양을 헤아려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삶 속에 감춰져 있는 악이 나타나지 않고 그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 해도, 혹은 외적으로는 아무런 흠이 없고 유능한 사람으로 드러날지라도 그 사람의 참된 모습은 ‘마지막 날’ 추수 때에 밝히 드러나므로 지금 누리는 것들이 헛된 기쁨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처한 어려움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를 희망합니다. 시편저자는 노래합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시편 126,6).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을 끌어올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13,48). 고 말씀하셨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로마2,6). 사실 하늘의 그물은 빠져나갈 수가 없는 법입니다. 기회를 주는데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심판에 앞서 스스로 자신을 심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여정이 이미 좋은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과거에 매이지 말고, 지금 이순간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이 세상의 삶은 실패도 없고 성공도 없습니다. 실패가 없다는 것은 지금 정신을 차려 알곡의 삶을 살면 된다는 의미요, 성공이 없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우리 마음이 하느님 안에 평안히 쉴 때까지는 그 어디에서도 평안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나쁜 것을 좋게 만드는 것은,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주어진 소명입니다. 우리는 인내와 관용으로 천국을 살아가야 하고 또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므로 추수라는 심판의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새것도 꺼내고 낡은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이 과거를 발판 삼아 오늘을 새롭게 하고 그리하여 복된 내일을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가까운 사이라 해도 그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굴을 맞대고 서로 이야기 하고 있지만, 마음은 천 개의 산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뱃속까지 환희 들여 다 보십니다(예레17,9). 사람이 하는 일이 제 눈에는 옳게 보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 마음을 헤아리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마음속을 보시는 하느님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분 마음에 드는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맺는 모든 열매가 주님 그릇에 담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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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8.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1-52)
우리는 <마태오복음> 13장에 나오는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에서, 마지막 일곱 번째인 “그물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 비유는 지금까지의 하늘나라에 대한 비유들에 대한 결론에 해당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있을 “심판”을 강조하시면서, 하늘나라의 비유를 마무리 지으십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마태 13,47)
사실, 그물 속에는 “온갖 것”이 한데 섞여 있습니다. 마치 밀밭에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듯이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물이 가득 차면, 어부들이 그물을 해변에 끌어올려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 버린다.”(마태 13,48)
“세상의 끝날”이 오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밀밭에서 가라지를 따로 뽑아 묶어서 불에 태워버리고 밀은 하느님의 곳간에 거두어들이듯이,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어부들이 바다에서 그물을 끌어 올려 쓸모없는 나쁜 고기를 추려내어 해변에 죽게 내버리고, 좋은 고기는 “하늘나라”라는 그릇에 담는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이 “그물의 비유”는 의인과 악인의 종국적인 결말이 준엄함을 말해줍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바다에 생명의 물을 부으시어 우리를 살게 하시고, 그 물속에서 생명을 모아들이십니다. 곧 우리를 살리려고 당신 생명의 그물에 몰아넣으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미 당신의 그물 속에 들게 하셨습니다.
이는 욥을 찾아와 충고했던 친구(빌닷)의 말을 떠올려줍니다.
“모르겠는가? 나를 이렇게 억누르는 이가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나를 덮어씌운 것이 그분의 그물이라는 것을!”(욥 19,6)
시편 작가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실족하여 죽을세라 염려하여 주시며 우리의 목숨을 되살려 주셨다.
~우리를 그물에 몰아 넣으셨으며 짐을 등에 지우셨다.”(시 66,10-11)
이처럼, ‘그분의 그물에 든 물고기’인 우리는 동시에, 하느님께서 “바다에 처져 있는 그물”, 곧 이 세상에 쳐놓은 그물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의 바다에 처져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비유 일곱 가지를 마치신 다음, 제자들에게 그 사명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 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 13,51-52)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의미를 깨닫고, 또한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의 곳간에 ‘하늘나라의 복음’이 채워져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늘나라는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마태 13,47)
주님!
하늘나라의 그물에 저를 몰아넣으소서.
당신 말씀의 그물로 덮어씌워 당신 뜻 안에 가두소서.
세상의 바다에 저를 던지시어, 당신의 그물이 되게 하소서.
온갖 고기를 모아들일 뿐, 제 입맛에 맞게 고르지 않게 하소서.
제가 그물일 뿐, 주인이 아니듯 고기의 주인도 아님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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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8.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학교 2학년 때입니다. 중세철학사 시험을 보았습니다. 과목의 범위가 많았고, 공부할 내용도 많았습니다. 시험지를 받아들고 종이에 이렇게 글을 적었습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시험을 보자, 최선을 다했으면 결과는 하늘에 맡기자는 뜻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제가 조금 이상한 행동을 했는지 제 자리에 오셔서 시험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혹시 제가 부정한 행위를 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쓴 글을 보시고 웃으시며 열심히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뒤로 잠언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제비는 옷 폭에 던져지지만 결정은 온전히 주님에게서만 온다.” 시편은 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집을 지어 주지 않으시면 그 짓는 이들의 수고가 헛되리라. 주님께서 성읍을 지켜 주지 않으시면 그 지키는 이의 파수가 헛되리라.” 아무리 노력해도 알 수 없었는데 순간 영감이 떠올랐을 때 아르키메데스는 ‘유레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다행히 중세철학사 시험은 무사히 통과했습니다.
거절을 잘 못하는 성격인데다가, 맡은 일은 잘 하려고 하다 보니 일이 엉키고 복잡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면초가라는 말처럼 혼자 힘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주님께서 일을 말끔하게 해결 주곤 하셨습니다. 팬데믹으로 모든 일정이 취소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코로나가 확진되어서 일정이 연기된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려고 하면 못 할 것은 없지만 몸도 마음도 피곤했을 일들도 하느님께서는 제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기회를 주셨습니다. 지금은 거의 볼 수 없지만 어렸을 때는 소달구지를 종종 보았습니다. 덩치가 큰 소가 주인의 손에 이끌려 얌전히 따르는 것은 ‘코뚜레’가 있기 때문입니다. 소에게는 멍에가 될 수 있지만 주인에게는 소를 다스리는 도구가 됩니다. 소는 주인을 위해서 일을 하지만 주인은 소에게 여물을 주고, 안전한 집을 마련해 줍니다. 코뚜레는 주인과 소를 이어주는 안전핀과 같습니다. 연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것도 ‘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줄이 끊어지면 연은 이내 땅으로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맞습니다. 저는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결정해서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많이 들었던 소위 ‘386’세대로 태어났습니다. 저는 부모를 결정하지 않았고, 저의 성도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양 조씨 집안에서 태어났고, 남자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까지는 제가 선택해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소위 ‘뺑뺑이’ 세대였습니다. 마치 옹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 듯이 하느님께서는 저를 오늘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제가 태어난 시대, 제가 태어난 집안, 제가 남자로 태어난 것을 스스로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오늘까지 감사드리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불평과 불만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감사드리면서 받아들이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좋아합니다. ‘주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도록 용기를 주시고, 할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겸손을 주시고,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주소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어떻게 설명하시겠는지요? 하느님 나라는 내가 원하는 것이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나 혼자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늘을 날 수 있고,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느 특정한 공간과 시간으로 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서 시작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의가 드러나는 곳입니다. ‘세상에는 높고 귀한 사람이 많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오묘함을 겸손한 사람에게만 드러내신다.’(집회 3, 20) 저는 이 말을 이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는 겸손한 이들에게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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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8.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의 섭리를 따르는 기쁨♣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 13,48)
오늘의 복음 말씀은 그물의 비유입니다. 갈릴래아 호수에는 20여 종이 넘는 물고기가 서식합니다. 그 가운데는 먹어도 되는 붕어나 잉어와 같은 것들도 있지만, 율법으로 금지되어 먹어서는 안 되는 메기나 뱀장어와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레위 10,10-12). 어부들이 그물을 던지면 온갖 고기들이 함께 잡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집이요, 성령의 궁전입니다. 그런데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면 늘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 긍정적인 사고와 부정적인 사고, 하느님을 섬기는 기쁨과 현세의 달콤한 맛에 애착을 둠으로써 맛보는 쓴맛, 희망과 근심걱정 등이 가득합니다. 선악의 갈림길에서 신앙인다운 선택과 결단을 하지 못하고 주저할 때도 많습니다. 나 자신은 물론 인간 세상이 곧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사는 호수속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바로 죄악의 한복판에 있음을 잊은 채 고통이 없는 행복한 세상을 바라며 다음과 같이 묻곤 합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악을 척결하지 않고 참고만 계실까? 왜 예수님께서는 마음에 드는 선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선택하지 않으실까?
오늘의 비유가 답을 줍니다. 그물이 가득 차면 어부들은 물가로 그물을 끌어올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립니다.”(13,48). 선과 악이 공존하지만 세상 끝날에는 가려져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악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고(13,50),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입니다(23,46).
호수 물속에는 온갖 고기들이 자유롭게 먹이활동을 하며 성장합니다. 그러나 언제 그물에 걸려들어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가려질지 알 수 없지요. 그렇게 하느님께서는 악 앞에서 침묵을 지키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려내기 위한 그물을 필연코 던지실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에게만은 그런 날이 당장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양다리를 걸치며 무사안일하게 무의식이 조정하는대로 움직이고 말하며 살아갈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이 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당장 닥칠 수도 있지요. 따라서 매순간 깨어 어떤 선택과 결단을 해야 할지 잘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서둘러 회개하고 정의와 선을 행해야 할 때입니다. 그물이 던져지기 전에 하느님의 뜻에 어울리지 않는 원의와 행동을 완전히 가려내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느님의 선 안에 머물며 다른 이들에게 선을 행하는데 삶의 초점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태도가 개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 사회적 불의와 정의가 공존하는 세상을 그저 감정적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연대하여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위대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악을 폭로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오늘도 내 마음과 한국사회, 교회라는 그물속을 주님의 눈으로 살펴 적극적으로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는 '좋은 고기'가 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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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8.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깨달음의 여정”을 살아가는
하늘 나라의 제자들
-기도와 회개, 분별과 선택, 협력과 훈련, 종말과 심판-
-“내 영혼아, 주님을 찬양하여라.
내 한평생, 나는 주님을 찬양하리라.
사는 동안, 나의 하느님 찬송하리라.
행복하여라, 하느님을 구원자로 모시고,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이!”(시편146,1-2,5)
오늘로서 ‘그물의 비유’를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13장 일곱 개의 하늘 나라의 비유들은 끝납니다. 엊그제의 ‘가라지의 비유’와 흡사한 '그물의 비유'로 초점은 종말 심판에 있습니다. 제1독서 예레미야서의 옹기그릇과 옹기장이 비유와 관련되어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오늘도 여러 단상斷想들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정확히 10년전 요셉 수도원 25주년을 맞이하여 25년 수도공동체 역사를 묵상하며 내린 결론같은 진리 넷입니다. 우리 삶만이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연성경책을 통해서도 절절히 깨닫는 진리입니다.
1.모든 것은 다 때가 있다.
2.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3.모든 것은 다 필요했다.
4.지금을 살자(carpe diem).-
-2.제1독서 예레미야서 옹기장이의 비유를 묵상하던중 떠오른 성가 49장 옹기장이가 생각났습니다. 역시 우리 삶에 대한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내용이 좋아 2절까지 보기 좋도록 배치하여 인용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른 우리의 한결같은 협력의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옹기장이 손에든 진흙과 같이
내게 있는 모든 것 주님 손에서
님뜻따라 나의 삶이 빚어지리니
가르치심 마음 새겨 들으렵니다
옹기장이 손에든 진흙과 같이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 안에서
님의 모습 내 얼속에 새겨졌으니
기쁨중에 당신 말씀 행하렵니다.
-3.시편 127장 앞부분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이와 더불어 “모사謀事는 재인在人이요 성사成事는 재천在天이다”, “일을 계획하고 꾸미는 것은 사람이 하지만 일을 이루시는 것은 하느님이 하신다.”는 진리도 새삼 깨닫습니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로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리-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저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그 짧은 시간 단잠을 자고 일어나 이른 새벽 날마다 쓰는 강론입니다. 새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의 자세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됩니다.
-4.오늘 복음의 비유를 대할 때 늘 둘이 생각납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漏)”, 하늘의 그물이 크고 성긴듯해도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즉 죄를 지으면 반드시 하늘로부터 벌을 받는 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마디입니다. 그 누구도 하느님의 그물망을 벗어날 수 없으니 결국 죽음을 통해서 그물망에 걸려 들어 올려지면서 종말이요 심판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연상되는 우린 인생 여정에 대한 깊은 성찰을 촉구하는 말마디로 제가 늘 염두에 두고 사는 진리입니다.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내 인생여정을, 일년사계一年四季, 일년 사계절로 내 인생여정을 압축했을 때 지금 어느 시점時點, 지점地點에 위치해 있겠느냐에 대한 자각과 확인입니다. 삶의 환상이나 거품은 말끔히 걷히고 남은 선물인생,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삶을 살 것입니다.
-5.“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답입니다.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입니다. 내일을 하나도 걱정할 바 아닙니다. 어제의 상처를 치유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오늘입니다. 오늘이 내일의 미래입니다. 오늘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하느님이 잘 해 주실 것입니다.
휴가로 보내는 날들이 아까워 휴가 안간지 수십년입니다. 일과 놀이가, 삶과 휴가가 하나된 삶이니 새삼 무슨 휴가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세상 떠나 하느님 집에 가면 끝없는 안식의 휴가라는 생각도 떠나지 않습니다.
2012년 이후 10년동안, 아니 앞으로도 살아 있는 그날까지 제 좌우명 고백기도는 다음 하나일 것입니다. 참 많이도 인용했고 앞으로도 필요하다 싶으면 인용할 것입니다. 삶을 깊이 들여다 보면 하늘 아래 새것은 없고 거룩한 반복, 새로운 반복이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게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우리 사부 성 베네딕도는 물론 옛 사막의 수도승들의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이구동성의 말씀입니다. 죽음있어 삶은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종말론적 파스카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에게 하루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하루의 영적전투를 끝내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요, 이른 새벽 그날의 강론을 쓰며 하루를 새롭게 여는 시간입니다.
그대로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의 삶”이 습관화된 듯 합니다. 8년전 산티아고 순례여정도 살아 있는 그날까지 계속되는 느낌입니다. 이때 가장 행복했고 설렜던 시간은 날마다 새벽 배낭을 등에 메고 길을 떠날 때 였습니다. 삶은 부단한 “떠남의 여정”이란 진리를 절감했습니다.
단상들이 길었습니다. 이런 단상들을 바탕으로 오늘 말씀을 보면 그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어 살 수 있는 비결이 다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물의 비유를 통해 늘 종말 심판을 염두에 두고 하루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하자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옹기장이 하느님의 일에, 하느님의 뜻에 최대한 협력을 잘 해드리자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느님 마음에 들고 내 마음에 드는 내 고유의 삶의 옹기그릇도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인위적 외형적 성형수술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닫습니다. 참 좋은 내 고유의 삶의 옹기그릇을 하느님과 잘 협력하여 만들어 갈 때 내면의 아름다움은 저절로, 서서히 주님을 닮은 참나의 깊고 신비로운, 아름답고 품위있는 외모外貌의 얼굴로 변모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되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 지혜로운 분별과 선택, 주님뜻에의 협력과 훈련, 종말과 심판을 염두에 두고 치열히 절박한 마음으로 분투의 노력을 다하며 하루하루 진인사대천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곱의 하늘 나라 비유를 가르쳐 주신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시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의 분발을 촉구하시며 우리 모두 지혜로운 하늘 나라의 제자들이 되어 하늘 나라를 살게 하십니다. 새삼 우리의 삶은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깨달음의 여정’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그러므로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모든 이들은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마태13,51-52)
이런 하늘 나라의 제자가 된 집주인처럼 날마다의 삶도 강론도 그랬으면 소원所願이겠습니다. 끝으로 카나다에서 교황님의 제17주일 조부모와 노인의 날 미사시 강론 결론으로 끝맺습니다.
-“젊은이들이여 노인들이여, 조부모들과 손주들이여, 모두 함께 합시다. 우리 함께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리고 함께 우리 꿈꾸도록 합시다(Young and old, grandparents and grandchildren, all together. Let us move forward together, and together; Let us dream)”-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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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28.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종종 꾸는 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을 꾸고 나면 그렇게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군대에 다시 이등병으로 입대하는 꿈이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제대했는데, 당시 나의 선임들이 꽉 차 있는 내무반에 이등병으로 있는 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가니 기뻐할 일인데도,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라서 그럴까요?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 필요 없는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좋아하는 일이 아니어서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군대 시절이지만, 제가 성장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일만을 쫓으면 해야 하는 일을 놓치고 맙니다.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서 포기하면 어떨까요? 나의 발전을 가져올 변화의 가능성이 줄어들게 됩니다. 어떤 공부도 공부는 해야 하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이 재미없다고 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재미없어서 포기해야 할까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떠올리면 재미없어도 해야 하는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좋아하는 일만이 우리가 해야 할 진리가 아닙니다. 해야 하는 일에 충실하면서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발전과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물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비유된 바다에 던져진, 특히 티베리아스 바다에서 쓰던 것은 길이가 4~500미터, 넓이가 2~3미터나 되는 큰 그물입니다. 그러다 보니 온갖 종류의 물고기가 잡힐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고기만 잡히는 것이 아니라, 나쁜 고기도 잡힙니다. 그물 안에 들어왔지만, 나쁜 고기라서 하느님 나라라는 그물 밖으로 던져질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고기는 하느님 나라에 살기에 합당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에 맞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자기 좋아하는 것만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먼저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일보다 필요한 일을 먼저 찾았습니다.
이 좋은 고기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만을 내세운다면 절대 좋은 고기가 될 수 없습니다. 좋은 고기는 주님의 사랑을 그대로 따르는 사람이었고, 자기 좋아하는 것을 쫓는 이기적인 사람보다 주님 좋아하는 것을 먼저 좇은 이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고기의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라는 그물에 있을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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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보다 잘하려고 고민하지 말라. 지금의 나보다 잘하려고 애쓰는 게 중요하다(윌리엄 포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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