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마라 사건
1.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 앞에서 애굽의 바로와 군대를 멸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한 이스라엘 자손의 감격을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모세와 미리암은 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찬송의 노래를 불렀다. 여호와는 나의 힘, 나의 노래, 나의 구원이시며 그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은 결코 입술만의 고백은 아니었다(2).
모세의 말대로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시는 용사셨다(3).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와 힘으로 자기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들어가실 것을 모세는 안다(13, 17).
모세에 이어 미리암이 모든 여인들을 인도하여 찬송을 이어간다(20). 이스라엘에게 이 날의 감격은 잊을 수 없는 것임에 분명했다.
2. 하지만 다음의 사건은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22~27).
홍해 사건이 지나고 삼일 만에 이스라엘 자손은 물이 없어서 모세를 향하여 원망을 하고 있지 않은가(24)! 그들이 정녕 그 큰 일을 보고 체험하고 여호와와 모세를 믿은 사람들이 맞는가(14:31)!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테스트였다(25).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들을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다(26). 이스라엘은 마라 사건을 통해서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배워야 했다.
3.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을 통해서 두 가지 목적을 이루신다.
광야의 시련과 시험은 우리 심령의 사악함과 고칠 수 없는 육신의 부패를 드러내고 또한 우리들 속에 있는 ‘숨은 교만’을 제거하고 겸손하게 만듦으로써 기업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입증하여 우리의 합당하지 못함, ‘아무 선함’도 없음을 보여주시고자 함이 그 첫 번째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광야로 이끌어내실 때 그들과 함께 행하시고 그의 임재와 사랑을 나타내셨음과 같이 광야에서도 자기 백성들의 반복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구속해주시는 당신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로써 그들이 그의 풍성하신 은혜를 아낌없이 부어주심을 알게 하는 기회를 주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또 그들을 위하심을 보여주려 하심이다.
시련과 낮추심은 목적이 아니라(약 5:11) 아버지의 오래 참으심과 선하심을 보이시고자 하는 수단이다.
4.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음을 처음으로 말해준다(22).
홍해를 건넌 사건은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롬 6:3,4). 이스라엘이 광야로 들어갔다는 말은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 피조물이 되어 성화의 삶을 시작했음을 가리킨다. 자연인에게는 세상이 매력을 주겠지만 영적인 사람에게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허무와 안타까움뿐이다.
광야는 나그네와 여행자의 장소요, 광야에 집을 지으려는 자는 어리석은 자일 뿐이다. 믿음은 세상을 보는 관점을 변화시킨다.
5. 마라 사건은 하나님만이 신자의 소원에 만족을 가져다 주신다는 것을 보여준다(요 7:37).
만족을 줄줄 알았던 것이 쓴 실망이 되고 말았다. 당신은 세상의 즐거움, 부 또는 명예가 쓰다고 느낀 때가 있는가? 어린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광야를 사는 동안 순조롭고 안일한 길을 예비해 줄 것이라고 믿기 쉽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먼저 단 물이 아니라 쓴 물을 먼저 주시는가? 존 칼빈의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단 물을 먼저 주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쓴 물로써 그들 속에 잠복해있는 쓴 뿌리를 드러내고자 하셨다.” 영원한 즐거움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른손에 달려있다. 마라는 광야 여정의 첫 단계에서 이 여정의 진정한 본질을 가르쳐준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기서 왜 불평을 했을까? 믿음의 눈을 감으면 불평 밖에는 나올 것이 없다. 하지만 마라는 또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한다.
모세의 부르짖음은 헛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이시며 무한히 오래 참으심으로 그들을 참으셨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시 103:10).” 왜 하나님께서는 불평하는 백성들을 부드럽게 다루시는가? 하나님께서 주신 중재자의 부르짖는 간구 때문이었다. 직임의 특성에 있어서 모세는 시종일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선 자로 나타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그림자다(히 7:25; 요일 2:1).
6. 모세가 쓴 물에 넣은 나무는 십자가를 상징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마라는 수치의 십자가 때문에 달게 변했다. 십자가는 우리의 괴로운 분투를 달게 해준다. 우리가 그를 위하여, 그의 당하신 수치와 배척을 참고 견디면 마라와 같은 현실을 그와 연합한 단맛으로 변화시켜 줄 것이다.
이스라엘은 마라를 지나 엘림에 이르렀다. 엘림은 마라의 완성이다. 엘림은 열 두 물샘과 종려 70주가 있는 휴식처였다. 엘림은 하나님이 그와 더불어 순종의 길을 걷는 자들에게 주시는 만족을 보여준다. 심령의 즐거움, 영혼의 만족은 말씀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7.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받고 광야를 걷는 인생에서 마라를 만날지라도 십자가 복음의 은혜와 능력으로 능히 감당하고 하나님의 안식과 은혜의 자리인 엘림에 이르는 저희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