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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얻는 세 가지 방법
시편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누가복음 17:20~22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어렸을 때, 교과서에서 읽었던 파랑새 이야기는 마지막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머리가 흰 것을 보면서 파랑새라는 행복은 그 파랑새를 따라가는 것이었음을 그리고 자신이 있는 그곳에 있었음을 이야기 했던 것으로 기억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행복을 찾아 지금까지 살아왔습니까? 어떤 사람은 건강이 어떤 사람은 자녀가 어떤 사람은 물질이 혹은 어떤 사람은 명예가 행복의 기준이 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에게 진정한 행복은 무엇입니까?
하루는 바리새인들이 주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주님은 오늘 본문의 답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행복에 대한 말씀을 준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행복이 어디 있는 것인가? 라고 주 예수님에게 물으면 주 예수님은 “행복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음으로 나는 행복하다고 하고 싶은데,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즉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신앙인들이 지켜야하는 율법이 우리가 감당하기에 너무도 힘들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하지만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쉽다고 말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데 왜 무엇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일까요?
교회가 크면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작으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일이 많으면 피곤하다고 하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무시당하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만약 이것이 진리라고 하면 혹은 사실이라고 하면 우리 주님이 말씀 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라고 하는 말씀은 거짓이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는 말씀이 과연 거짓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만약 신앙생활이 정말 힘 들기만 하다면 하박국 선지자의 이 말씀은 거짓이 아닐까요? 만약 하박국 선지자의 이 말씀이 맞는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행복을 주신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우리가 행복을 바르게 인식 하지 못하는 이유는 현실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잊어버리고 우리 삶 속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는 행복을 찾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행복을 행복인줄 알지 못하고 우리가 상상하고 우리 마음대로 믿는 행복을 찾아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저들은 분명 자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온 방식을 돌아보면 광야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그 불편한 것들 때문에 이스라엘이 느낀 것은 불편함이 아닌 불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쉴 새 없이 불평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불편함을 불행으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지요? 성경에 보면 주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행복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님에게 혹은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란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가 가진 것 중의 가장 귀한 것으로 주 예수님에게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가격은 당시 300데나리온 정도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미니멈 페이에 하루 8시간 일하는 것으로 계산해도 17,400 달러나 됩니다.
초대교회로 가면 바나바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전 재산을 교회에 내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들이 헌금한 것을 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저들의 마음에 자기의 가장 귀한 것들을 드리고 전체를 드림에도 아깝지 않은 행복을 가지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기도 합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행복한가? 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결혼 한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결혼했기 때문에 행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동시에 행복은 지키는 것입니다. 지금 행복하다고 해서 그 행복이 아무런 수고 없이 영원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귀한 축복 아래서 행복 하셨다면 그 행복은 더욱 큰 행복으로 만드는 것도, 신앙인의 행복을 지키는 것도 다 우리 자신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키기 원하는 행복, 어떻게 만들어서 어떻게 지켜야 할까요?
첫째로, 행복을 지키려면 가지 말아야 할 길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시편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 말씀은 ‘복 있는’이란 말로 시작 합니다. 여기서 ‘복 있는’이란 단어는 히브리어의 ‘esher’ 신명기 33:29절의 ‘행복한’이란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복 있는’ 대신에 ‘행복한’이란 단어를 넣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여기서 말씀대로라면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1) 행복한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2) 행복한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3) 행복한 사람은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들을 종합해 보면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탄’과 함께 하는 자리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악인’, ‘죄인’의 개념은 ‘사탄’의 개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사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 주님의 길은 어떤 길입니까?
마태복음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적어도 넓은 길은 아닙니다. 좁은 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말씀의 결론 부분을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좁은 길을 가면서 우리가 행복 할 수 있을까요? 즐거울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 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불가능한가? 정말 안 되는 것일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신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이 편지가 에베소에서 쓰여 졌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의 바울 사도의 고백은, 바울은 그의 고백에 의하면 살 소망까지도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없었다는 고백의 배경이 에베소에 있었을 때의 박해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바울은 에베소의 감옥 에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기뻐하라. 다시 말하는데 기뻐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적인 생각이나 마음만 가지고 가능 할 것이라고 생각 하십니까?
이 말씀을 준비하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누구나 약합니다. 그리고 악의 길을 가고 싶어서 가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 합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무시 하면 안 되는 것은 사탄은 정말 집요하다(stubborn)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와서 우리를 악한 길로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혹은 상황을 바꾸어서 악한 길로 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악한 길, 사탄의 유혹하는 길에서 떠나 있습니까?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지 않고 있습니까? 행복을 원하신다면, 복 받은 삶을 원하신다면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길에서 떠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행복을 지키려면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 혹은 주어진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따라가선 안 되는 길,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고 하면 거꾸로 우리가 꼭 가야 할 길도,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좁은 길로 가야 합니다. 좁은 길은 그냥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좁은 길은 힘을 써야 갈 수 있는 길입니다.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힘써야 하고 들어가기를 구해도 못 들어가는 자가 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출석 한다고 해서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을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전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반드시 좁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좁은 길은 주님이 원하시는 길입니다. 멍에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마태복음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멍에(yoke)가 무엇입니까?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맞습니까? 아닙니다. 멍에는 어차피 그리 무겁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멍에가 부담스러운 것은 무게 이전에 멍에 때문에 자유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의 멍에는 쉽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이는 무슨 말씀이 됩니까?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 그분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주님 때문에 자유를 빼앗기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생각보다는 쉽다고 말씀 하시는 것 아닐까요?
우리는 종종 왜 하나님은 선악과를 만드셨을까? 라는 질문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질문을 하게 되는 이유는 선악과 때문에 우리가 에덴에서 쫓겨 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신 것은 억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종종 힘들다는 생각을 합니다. 목사기 때문에 목사처럼 사는 것이 힘들 수 있습니다. 직분을 맡았기 때문에 직분자로 사는 것이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이 멍에여서 힘든 것이 아니라고 말씀 하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잃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의 즐거움을 잃었기 때문에 사역자의 삶을 사는 것, 혹은 직분자로 사는 것이 부담스럽고 힘든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무시하고 싶어도 꼭 사람들이 지적하는 말씀이 있지요.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이 말씀이 얼마나 부담스럽습니까? 하지만,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님에 잡힌바 된 사람은 과연 이 말씀이 부담스러울까요?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유두고란 청년이 바울 사도의 말씀을 듣던 중, 창문에 걸터앉아서 졸다가 떨어져 죽음을 당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유두고가 죽지 않았다고 하며 다시 살립니다.
우리는 이 청년이 왜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곳에 갔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억지로 끌려간 것이었을까요? 이 청년은 그곳에서 무엇을 얻기를 원해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간 것일까요?
이 시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치는 일이 있다고 하면, 그러면 이 말씀은 여러분에게 어떤 말씀이 됩니까? 여러분에게 정말 힘이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니 말씀은 분명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만약 말씀이 힘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 신앙생활에 무엇인가가 잘못 된 부분이 있는 것일 겁니다.
요한복음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자유는 무엇일까요? 언제까지 율법적 자유의 틀에서 혹은 윤리적 한계 안에서 부자유 한 자유를 자유로 알고 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행복의 길이 어떤 길인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해야 할 일은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조차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씀 하시고 있습니다. 물론 어렵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이 이미 우리의 한계를 아고 계시기에 우리의 실수까지도 용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알아야 할 정말 중요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을 알고 하지 말 것과 할 것을 우리 마음을 결정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할 것과 하지 말 것을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인가?하는 부분입니다. 그 기준은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말씀을 묵상함으로 올바른 행복의 길을 구별하십시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각 사람마다 나름대로의 살아가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방식이 우리의 복된 길을 보장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복된 길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함정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던 복과 우리가 기대하는 복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을 보아도 10~11절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 이것이 복이라고 말씀 합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를 실패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복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으로 기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기준 하고 정의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오늘 시편기자는 복 받은 자 혹은 행복한 자를 정의하기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 하는 자”가 행복한 자, 다시 말해 “복 받은 자”라고 말씀 합니다. 여기서 묵상이란 단어를 생각해 보기 원합니다.
묵상이란 단어는 말 그대로 해석 하면 “숙고하다”란 뜻이 가장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 속에는 “말하다, 속삭이다.” 라는 뜻과 함께 “신음소리를 내다”란 뜻도 있습니다.
즉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아지고 다른 사람과 나누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내게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신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의 묵상을 많은 성경주석가들이 제각기 해석을 해 놓았습니다.
2절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이 구절을 분명하게 이해하면 거룩하고 영적인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내용을 연구해 보면, 외관상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조셉 캐릴(Joseph Caryl, 1647).
큰 시련의 날에, 성경을 통해 구원의 안내를 받아야 하는 때에, 아뿔싸! 그들에게는 자신을 구해 줄 책이 없다. 그들이 성경 대신 우상들을 제시할 수도 있다. 이것들이 평신도들이 의지하는 것이 되고 만다. 복음을 상고하여 그 말씀을 통해 위로와 구원을 받으라. -토머스 애덤즈.
“나는 조용한 곳에서 쉬지 않고 말씀을 본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
“그리스도인은 말씀을 묵상함으로 자신을 분별하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된다. 그것은 영적 색인이다. 색인이 책 속의 내용을 보여주듯이,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를 보게 된다.” -토머스 왓슨, Saints’ Spiritual Delight.
“묵상은 말씀으로 되새김질을 하는 것이다.” -바돌로뮤 애쉬우드(Bartholo- mew Ashwood, Heavenly Trade, 1688).
정말 중요한 것은 ‘묵상’이란 하루아침에 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묵상은 나름대로 훈련이 필요합니다. 말씀을 먹는 훈련입니다. 묵상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모르면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이 올바른지 혹은 틀렸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기준이 말씀이 되고 빛이 되어 인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가 말씀을 바르게 알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인정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과 삶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열심이 아닙니다. 잘하고 잘못하고가 아닙니다. 모든 행동에 앞서 무엇이 기준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삶의 기준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 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을 생각하고 기대합니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도 행복 합니다. 그러나 실제 제가 살아보니 생각보다 작은 일들이 행복을 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이 있음에 행복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가족이 있음에 행복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정말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행복의 전부일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하면 그것이 행복일까요?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을 이루고 나면 우리가 바라던 행복이 누릴 수 있을까요?
행복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고 묵상 하면서 과연 하나님이 나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행복 혹은 내가 받아 누리기를 원하는 행복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 하시는 행복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생각해 본 것은, 행복은 무엇을 이루었느냐? 보다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느냐? 라는 방향성이 더 중요합니다. 주 예수님은 세상에서 무엇을 이루었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지막 순간은 비참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이 불행한 삶이었다고 쉽게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혹은 우리가 기대 해야 할 행복은 세상이 주는 행복과 같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평안과 다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신다고 하는 약속에는 어쩌면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같은 것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박국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는 조건에 의한 즐거움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즐거움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는 그대로의 상황에서 행복하고 하나님의 주신 복을 경험 하려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복의 기준 행복의 기준을 무엇으로 삼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행복 하십시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악의 길이라면 혹은 사탄의 유혹이라면 우리는 그 길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기 싫어도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은 성령님의 도우심 없이는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 길을 가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보여 지는 것보다 보이지 않아도 믿고 가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같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기준이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말씀을 기준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을 붙잡고 싶습니까?
사탄의 꼬임에 빠지지 말고 “NO”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하기 싫은 일을 하라고 해도 “YES”라고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내 행복의 기준은 세상이 아닙니다. 행복의 기준을 알기 위해 말씀을 읽고 묵상 하십시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5:35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우리가 행복을 붙잡는 방법은 아닌 것은 아닌 것으로, 옳은 것은 옳은 것으로 인정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말씀으로 삼는 것입니다.
말씀에 기초한 “Yes”와 “No”를 분명히 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행복을 붙잡는 성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향복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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