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애지문학상 시부문 수상작
자리가 비었다
권혁재
한 차장이 면직되고 자리가 비었지만 계절이 바뀌어도 신입을 뽑지 않았다
그가 키우던 죽은 나무를 내다 버렸다
먼지에 덮인 의자가 눈치 보며 비꼈다
전화가 울려도 받지 못할 빈 자리 지나간 공문이 폐지 더미로 쌓여도
한 차장을 기억하는 직원은 없었다
문상을 마치고 나와 붙여대는 담뱃불처럼
한 사람의 청춘이 연기로 사라졌다
─ 『애지』, 여름호에서
제21회 애지문학상 시부문 수상 소감
폭염과 폭우의 계절이 지나갔다. 이제는 서서히 다가올 폭설과 혹한의 계절을 맞이해야 한다. 시도 그렇게 폭염과 폭우 속으로 떠나갔다 폭설이 내리는 날 눈이 시리게 되돌아 올 것이다. 전봇대에 기대어 선 어깨가 좁은 사람 위로 눈물처럼 떨어지기도 하고, 밤새 돌아가는 기계 옆에서 꾸벅꾸벅 조는 어린 노동자의 꿈길에서도 하얗게 내릴 것이다. 그들을 위해, 그때를 위해 쓰다만 시 한 줄을 가지런히 남겨 놓는다. 영원히 완성할 수 없는 시 한 줄을.
신춘문예 등단 이후 『애지』로부터 수상자 선정 소식을 이십 년 만에 새롭게 받았다. 주소불명의 편지를 받은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차를 몰아 서산 용현리에 있는 서산 마애불로 향했다. 차창으로 빗방울이 와서 부서졌다. 연이어서 오는 빗물이 차창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린 유리 너머로 사물이 뿌옇게 보였다. 처음 시를 쓸 때의 시각이자 초점을 놓친 거리였다. 가까운 빗물만 보이고 유리창을 벗어난 거리의 대상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계단을 올라갈 무렵에 비가 멈추었다. 마애불 앞에 서서 천 년 동안 마지를 드신 연유를 여쭈어도 묵묵부답이었다. 나오는 중인지 들어가는 중인지 물어도 웃을 뿐이었다. 계절에 따라 또는 시간에 따라 내 미소가 달라 보이는 게 왜 그런지 물으며 또 웃었다.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너 시 쓰는 시인이라며 시도 똑같은 거여. 시도 점차 진화하고 있잖아. 그러면서 자꾸 웃고만 있었다.
나는 시를 돌연변이로 만들지 않는다. 더욱이 시를 미학적으로 잘 쓰거나 수사로 잘 꾸미지도 않는다. 시는 시 자체로 존재하고 의미가 있어야 한다. 시는 “상처 난 기억에 대한 정직한 고백”을 하는 것이며 사유의 집합체를 이루어야 한다. 시는 사람의 땀 냄새고 “고독한 자의 말”이어야 한다. 분명 시는 진화하는 중이며, 시인은 진화한 시를 방해하거나 성급히 해체하는 것을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김병호 시인에 의하면 나의 시는 “시어로 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진득하게 삶의 진경을 찾아 그대로 옮겨내는 것이 나의 고유한 시법”이라고 지적한 사실이 있다. 나도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다른 문학잡지에서도 밝힌 바가 있다.
당신은 나의 첫 문장이자 마지막 문장이다. 그러나 시에서의 첫 문장은 오래전 당신이지만 끝 문장은 아니다. 기원전 내 눈빛에 섞인 당신 눈빛이 즈믄 해를 건너오면서 잔물결로 흘러온다. 당신이 읊은 시가 너울로 와 닿는 맨 가슴 구석마다 소름 줄기로 돋아난다. 온몸을 돌고 돌며 새겨 넣은 당신 흔적에 지금도 내 몸 어딘가 떠돌고 있을 당신. 나의 끝 문장은 당신이 아니다. 언제든 당신을 느낄 수 있는 온기가 나의 마지막 시이자 끝 문장이다. 그래서 나의 문장은 끝이면서 끝이 없는 기원전의 말씀들이다.
시골 어두운 방에서 무말랭이로 말라가며 혼자 중얼대는 노모의 힘없는 소리에도 자식을 걱정하는 사랑이 배어있다. 문학의 시작은 빚진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번에도 많은 사람과 시에게도 빚을 졌다. 빚진 사랑을 갚으며 시를 쓰라고 굴레를 씌워주신 애지문학상 심사위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더욱더 정진하고 매진하여 좋은 작품으로 빚을 덜어내겠다.
제21회 애지문학상 시부문 심사평
본심에 추천된 작품은 10편이었다. 산문성이 짙은 시는 시인의 고유한 직관과 통찰이 부족했고 긴 분량을 장악하는 구성의 밀도 또한 떨어졌다. 감각적 비유와 참신한 발상에 기댄 시는 사유의 깊이를 확보하지 못해 아쉬웠다. 비유는 기교적 표현의 차원을 넘어 인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때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법인데 이 점이 간과되었다. 관찰과 해석에 집중한 시는 낯선 상상력이 부족했으며 철학적 관념시는 관념이 구체적 몸을 얻지 못했다. 철학적 수사를 하는 시와 철학을 담지한 시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고심 끝에 「작약을 보러간다」와 「자리가 비었다」를 최종 후보작으로 놓고 면밀히 살폈다. 「작약을 보러간다」는 절제된 심리와 운율감이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작품이다. 화자가 백두대간 저수령低首嶺을 넘어 은풍골로 작약을 보러간다는 내용이지만 이 꽃놀이가 그리움과 불면에 시달리는 화자의 상처 치유와 갱생의 여정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작약은 화자를 되살릴 그리움의 대상이면서도 없는 당신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시의 통증과 울림이 깊어진다. 「작약을 보러간다」가 전통적 서정의 색조와 리듬에 기대어 화자의 뼈아픈 심리를 섬세하게 그렸다면, 「자리가 비었다」는 가면의 조직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을 직접적으로 그려냈다. 수사적 비유 대신 사건과 침묵과 암시로 사색의 메아리를 확장시킨 점이 인상적이다. 면직免職된 한 차장이 남긴 빈 자리가 짙은 적막감을 낳는데 시적 정황으로 보아 한 차장은 조직의 어떤 불미스런 사건이 터진 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강제 면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그의 면직은 암묵적 경쟁자였던 다른 동료들에게 기회였을 것이며 조직적 무관심과 방치가 떠난 자의 마음을 더욱 황폐화시켰을 것이다. 빈소에서 문상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와 피워대는 담뱃불,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지는 담배연기는 한 차장의 청춘이면서 황폐한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 미래의 초상일 것이다. 죽음의 전개방식이 다소 단순하지만 이 단순한 정황 속에 숨은 베일의 사건, 화자의 고통과 번민, 직장 동료들의 방임과 은폐심리 등이 후폭풍처럼 밀려든다. 이 시는 점점 더 극악한 상황으로 치닫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향해 울리는 경종警鐘이자 조종弔鐘이다. 현대인의 은폐된 욕망, 현대사회의 야만성을 담담하게 폭로하고 비판한다. 이 비판적 성찰과 사유를 높게 평가하여 「자리가 비었다」를 제21회 애지문학상 수상작으로 최종 선정하였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 심사위원 함기석, 반경환 (심사평: 함기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