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60
3월10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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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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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2Le2iLRZOY (김규봉 가브리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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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께서 어찌 지극정성의 기도, 목숨 바쳐 올리는 기도를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바빌론 유배 때 인질로 끌려간 유다인들이 머나먼 타국땅에서 겪었던 고초는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깊은 신앙심과 타고난 총명함으로, 혹독한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삶을 활짝 꽃피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벤야민 지파 출신 모르도카이, 그리고 그의 조카 에스테르였습니다.
에스테르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삼촌 모르도카이의 손에 양육되었는데, 어려서부터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습니다. 처세술이 남달랐던 모르도카이는 크세르크세스 임금 시절 왕국 안에서 봉직하고 있었습니다.
와스티 왕비가 폐위되자 모르도카이는 즉시 조카 에스테르를 후궁으로 들어가게 힘을 썼고, 오래가지 않아 아름답고 붙임성 있는 그녀는 왕의 눈에 띄게 되었으며, 총애를 한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왕은 즉시 그녀를 왕비로 임명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초고속 신분의 상승이었습니다. 유배를 끌려온 것만 해도 가련한데, 부모마저 여읜 한 소녀가 순식간에 대제국의 왕비가 된 것입니다. 당시 크세르크세스 왕이 통치하던 지역은 어마무시했습니다.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127개 주의 제후들과 지방관들이 그의 휘하에 있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모르도카이와 에스테르는 어느 날 엄청난 큰 위기 앞에 봉착합니다. 꽤나 까칠했던 모르도카이가 왕국의 제2인자 하만에게 허리를 숙이지 않자 미운털이 박힙니다. 하만의 계략으로 대제국 전 지역에 임금의 인장이 찍힌 칙령을 보내게 되는데...그 내용이 ㅎㄷㄷ입니다.
“아이와 여자 할 것 없이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다인들을 열두째 달인 아다르 달 열사흗날 한날에 파멸시키고 죽여서 절멸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
동족들이 몰살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파악한 모르도카이와 에스테르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건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게 되지요. 2인자 하만을 제거하기 위해서 왕의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2인자 자리에 앉은 하만은 보통내기가 아니었습니다. 자칫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왕과 하만 둘 사이를 이간질하는 수작으로 몰려 역공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에스테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왕에게 나아가는데, 결코 그냥 나아가지 않습니다. 사흘간에 걸친 간절한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화려한 의복을 벗고 고뇌와 슬픔의 의복을 입었습니다. 값진 향료 대신 재와 오물을 머리에 뒤집어 썼습니다. 즐겨 치장하던 온몸을 헝클어진 머리칼로 덮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의 주님께 외쳤습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신들의 임금님, 모든 권세의 지배자시여! 사자 앞에 나설 때, 잘 조화된 말을 제 입에 담아 주시고, 그의 마음을 저희에게 대적하는 자에 대한 미움으로 바꾸시어, 그 적대자와 동조자들이 끝장나게 하소서.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에스테르기 4장 17절)
에스테르 역시 어쩔 수 없이 나약한 한 인간 존재였기에 동족 전체의 목숨이 걸린 사명을 안고 임금 앞으로 나아갈 때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사색이 되어 우왕좌왕한다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평생토록 그녀가 믿어왔고 의지해왔던 주님의 이름을 목청껏 부릅니다. 그분께 목숨바쳐 간절히 청합니다. 영혼과 육신, 마음과 정신 모든 것을 다 바쳐, 자신의 존재 전체를 다 바쳐 간절히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께서 어찌 이런 지극 정성의 기도를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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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동영상 강론)
https://youtu.be/02DclfYL1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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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을 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 청하는 것은 반드시 받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이웃이 바라는 것을 그대로 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를 소위 ‘황금률’이라 합니다.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나도 남에게 해주고, 남이 나에게 하기를 원치 않는 것은 나도 남에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이 그것을 하느님께 청할 때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를 결정합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1년째 축축한 화장실에서 생활하는 할머니’가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누군가 자신의 집에 냄새나는 가스를 주입한다고 믿습니다. 물론 집에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습니다. 할머니의 피해의식은 얼마 전 옆집 아주머니와 말다툼하고 나서 일어났습니다. 옆집이 집을 싼값에 팔도록 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여기고 할머니는 그나마 냄새가 덜 나는 화장실에서 먹고 자고를 합니다. 그러며 옆집이 이 사실을 알면 안 된다고 쉬쉬합니다. 또 절대 그렇지 않다는 제작진의 말에 크게 화를 냅니다. 괜히 와서 자기만 이상한 사람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어쩌다가 오히려 냄새가 더 나는 곳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일까요?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 수는 없었을까요? 또 할머니를 다시 거실로 나가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나에게 닥치는 일은 내가 이웃에게 하려고 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곧 할머니가 이웃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을 할머니가 끌어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절대 틀리지 않는 법칙입니다. 그렇다면 할머니는 어떻게 다시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요? 이웃에게 좋은 것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해야합니다. 그래야 자신도 좋은 것을 받습니다. 이에 제작진은 며칠이고 할머니와 함께 화장실에서 먹고 자며 지내기로 합니다. 제작진이 할머니와 며칠을 함께 화장실에서 지냈을 때 할머니는 미안했는지 거실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제작진들을 위해 처음으로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차려놓습니다. 할머니가 거실을 즐길 수 있게 된 데는 이웃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행복이 할머니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행복은 항상 우리에게 마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받아 누리지 못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이웃이 행복한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웃이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즉시 나에게 마련된 행복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해지려면 이웃이 행복한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이 원리는 구원과 행복뿐만 아니라 모든 것, 곧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재물복도 해당합니다. 부자들은 이 원리를 잘 압니다. 이웃을 부자로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자신도 부자가 된다는 것을. 이 황금률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제정해 놓은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이 부자가 되는 것을 시기하고 함께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늘에서 주기로 마련된 부를 받을 자격을 스스로 잃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웃의 행복을 나의 행복으로 기뻐하는 마음수련을 해야합니다. 이 마음 수련과 반대되는 것이 경쟁입니다. 남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남을 이겨서 더 가지려고 하다가는 가진 것마저 빼앗깁니다. 설사 무언가를 가진다고 하더라도 행복을 잃습니다. 비교해서 항상 남보다 나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나보다 더 가진 사람이 존재합니다.
가끔은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데 자신은 고생만 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그건 이웃의 행복을 바라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행복하다면 겉모습만 행복한 것이고 불행해 보여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모습만 그럴 뿐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고통을 받는다면 그 고통받게 보이는 시간이 그 사람에게는 이웃에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을 하느님께 받는 시간입니다.
유기성 목사의 ‘감사가 가장 큰 믿음이다’라는 설교 첫머리에 유 목사가 중국에서 북한 이탈주민을 위해 사역하다 공안에게 붙잡혀 1년 반 동안 옥살이하다 온 다른 목사님과 대화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 목사님은 중국에서 북한 이탈주민 200여 명을 한국에서 잘 정착할 수 있도록 교육도 하고 도움을 주어 한국으로 데려오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정도 범죄라면 중국에서 한 20년 형을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1년 남짓 살고 석방된 것도 기적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그동안 바쁘게 살던 나머지 하느님과 깊은 친교의 시간을 갖지 못했는데 그 1년 반 동안 하느님과 개인적으로 큰 만남의 시간을 가져서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엔 남을 위해 고통받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하느님께 상을 받는 것입니다. 이 법칙엔 오류가 없습니다.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마음만 있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이는 상황에서건 분명 행복을 선물해주십니다. 그렇게 당신 황금률의 원리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만 이해하면 부자도 될 수 있고 행복도 할 수 있고 영원한 생명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마음을 키우려면 이렇게 하면 됩니다. 내가 행복해지려면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함을 우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박해하는 이들을 향해서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사랑은 결국 ‘의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기가 2천 번을 넘어져도 결국 두 발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은 일어서려는 의지를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의지는 믿음의 증거입니다. 하느님은 믿음은 주시지만, 의지는 주실 수 없으십니다. 우리의 자유에 맡기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결국, 내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다는 것은 의지로만 증명됩니다.
중국이 서방세계를 향하여 문을 열기 전, 그러니까 문화혁명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한 중국 스파이가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미국 정부 기관에서 일하며 완전한 미국인 행세를 했습니다. 우선 그의 생김새가 영락없이 서양사람이었고, 중국 인구가 10억이 넘으니까 그 많은 사람 중에서 서양식 얼굴을 가진 사람을 고르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다고 합니다. 제스쳐도 전형적인 미국 사람의 제스쳐였습니다.
그런데 그를 수상하게 여긴 한 정보요원이 그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유럽 여행 중에 한 시내버스 곁에 서서 일종의 테스트를 해 보았는데, 미국국가를 휘파람을 불어봤습니다. 반응이 없었습니다. 미국은 여러 나라에서 온 민족이 살고 있기에 미국에 살고 있어도 내가 미국인이라고 느끼는 일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사는 사람이 자기가 미국에 사는 것을 느낄 때는 휴일이 되어 TV에 풋볼을 보고 앉아있을 때 미국국가가 나오는데 미국국가를 부를 때야 ‘아, 내가 미국인이지!’ 하고 느낀다고 합니다.
휘파람으로 미국국가를 불러도 그 사람이 전혀 반응이 없자 그 다음에는 중국국가를 휘파람으로 불러보았다고 합니다. 탁 쳐다보더랍니다. 계속 휘파람을 불고 있으니까 발로 장단을 맞추더랍니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스파이다’라는 확신을 가진 정보요원은 결국 그를 체포하게 됩니다. 그는 미국인처럼 행동하고 미국인으로 사고하고 미국인이 사는 삶을 모방했지만 그가 진정으로 미국인이 될 수 없었던 이유는 완전히 미국인이 되려는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불러야 하는 국가는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계명입니다. 이를 위해 이웃이 행복해지는 것을 보면 기뻐하고, 또 행복하지 않은 이웃은 행복하게 해주려는 의지를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의 그 노래에 장단을 맞추어야 진정한 하느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이웃의 기쁨과 행복을 위한 ‘의지’, 이것이 황금률을 살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유일한 평가의 기준입니다.
드라마 ‘연애의 발견’에서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너랑 만날 땐 사랑이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헤어지고 나서 생각해보니 의지의 문제였어. 내가 이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냐가 아니라 이 사랑을 얼마나 지키고 싶은 의지가 있느냐의 문제.”
내가 미래에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 것인지 아는 방법은 내가 지금 끝까지 지키고 싶은 마음, 곧 그 의지가 무엇을 향하는지 보면 됩니다. 그러면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받습니다. 청하는 것을 받고 싶거든 그 청하려는 것을 의지적으로 이웃에게 기쁘게 내어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으면 됩니다.
(**사순시기, 미사참례에 대한 새로운 다짐을 하셨다면)
https://youtu.be/ZYenpLEpY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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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7,7-12 :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기도를 잘 아는 민족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듣는 귀가 말하는 입 가까이 붙어있는 것과 같이 하느님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가까이 계셔 들어주신다.” 그리고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것과 요구를 내놓을 줄 아는 이를 더 사랑하신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7-8절)라고 가르쳐 주신다. 문은 청하고 구함으로써 두드리는 이에게만 열린다. 우리가 청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완수할 수 있는 힘을 청하는 것이며, 찾는다는 것은 복된 삶을 위한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참된 지식은 복됨으로 가는 길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열렬한 마음으로 청하여야 한다. ‘찾아라.’는 의미가 이런 뜻이다. 무엇을 찾는 사람은 찾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며 주변 상황에는 관심이 없다. ‘두드려라.’는 말씀은 열정적으로 하느님께 다가가라는 뜻이다.예수님께서 곧 열어 주시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곳에 남아 계속 문을 두드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께 항구하게 청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의 삶을 예를 들어 설명하신다.
즉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9-11절)하신다. 우리가 악하다 해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을 골라 준다. 그러니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속이지 않듯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일을 간단히 요약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덕은, 즉 선행은 간단하고 쉬우며 모든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것임을 가르치신다. 그래서 ‘너의 동료가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 주어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안다. 몰랐다고 핑계를 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를 대할 때, 이중적으로 대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현세적인 이익을 바리지 않는 마음으로 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에게 참된 마음으로 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원하는 것 같이 우리도 이웃을 대할 때 그런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내가 청하는 것을 이루어주시기를 원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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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기도>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7-12)
이 말씀은 다음 말씀들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 6,31-32) 겉으로만 보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과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라는 말씀이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모순이 아니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조금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께 ‘청원 기도’를 바치는 것은, ‘주시는 그것을 잘 받는 방법’입니다. (청하지 않는 것은, 주시는 것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사제는 고해실에 앉아서 ‘주님의 용서’를 전해 주려고 기다리고 있고, 그 용서를 받기를 원하는 이들은 스스로 고해실로 들어갑니다. (‘주님의 용서’는 이미 주어져 있고,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그것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고해실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용서를 받지 않겠다는 사람입니다. 고해성사를 보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고해성사를 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혹시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이라면 사제가 그 사람에게 가지만, 용서를 안 받겠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주는 일은 없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고해성사는 단순하고 명확한 일이지만, 실제 우리 삶에서 필요한 것들을 청하는 기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정말로 “먼저 준비하셔서, 주려고 기다리고 계시는지” 그게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청하는 것을 끝끝내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과 내가 ‘청하는 것’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어떻게 해야 그것을 알 수 있는지? ‘내가 받기를 원하는 그것’이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원하는 것을 달라고 청하기 전에 먼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아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청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더 열심히, 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말장난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입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성령의 도움을 받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 덕분에 눈을 뜬 사람이 ‘기도’에 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요한 9,31) (여기서 ‘죄인들’은 죄 속에서 살면서 청하지도 않고 받으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기도도 들어 주시고, 필요한 것을 주시는데, 죄인들 쪽에서 청하지 않거나 ‘나쁜 것’을 청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것을 받지 못합니다.) 이 증언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으려면, 우리 쪽에서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막 살면서,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기도 하고, 잘 받을 준비도 안 하고서 ‘생떼’를 부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다시 정리하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아무거나’ 청하기만 하면 아버지께서 그것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면서, 올바른 지향으로 기도한다면, 아버지께서 이미 주신 것을 잘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올바른 지향’으로 기도하는 것은, 첫 번째는 ‘좋은(선한)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악한 것’을 청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죄’입니다. 두 번째는 ‘모두에게 좋은(선한)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나에게만 좋은 것이고, 남에게는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라는 말씀은, 황금처럼 귀한 계명이라는 뜻으로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황금률은 신앙생활의 원칙이기도 하고, 기도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서 ‘남’은 이웃이기도 하고, 하느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일만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께 드리는 일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일이 아니라,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황금률에서 ‘너희도’를 ‘너희가 먼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것을 ‘너희가 먼저’ 남에게 해 주어라.” “받으면 그때 가서 해 주겠다.”가 아니라, 먼저 해 주고 나서 받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가장 좋은 때’는 ‘지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성급함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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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일주일에 한번은 부르클린 한인성당 사제관에서 머물게 됩니다. 머물 때마다 강론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며칠 전에는 강론자료를 깜빡하고 신문사에 놓고 왔습니다. 사제관에서 신문사까지는 차로 40분가량 걸리는 거리입니다. 갔다 오려면 2시간 정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강론 자료를 가져와야 하는지, 다시 강론을 준비해야 하는지 망설였습니다. 차를 타고 가져오면 시간은 걸리지만 준비된 자료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강론자료를 준비하면 힘은 들지만 차로 갔다 와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미리 준비했던 자료를 깨끗하게 포기하고, 새롭게 강론자료를 준비하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막막했는데,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니 어렵지 않게 강론자료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많은 발명품들은 수많은 실패를 거친 후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패를 했을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열정을 갖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뚝 솟아 있는 나무를 봅니다. 나이테는 나무가 긴 겨울을 보냈음을 알려줍니다. 나이테가 있어서 나무는 높이 자랄 수 있듯이, 우리는 저마다 삶의 나이테가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디언들의 기도는 꼭 들어 주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은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기우제’를 드릴 때도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린다고 합니다.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보다는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를 생각합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하고 싶을 때 노를 젓는다면 배는 험한 파도를 뚫고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배는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난파할지도 모릅니다. 파도가 거셀수록 함께 힘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호흡을 맞추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우리가 두드리고, 찾고, 열어야 하는 것은 바로 생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이가 되어주는 헌신과 봉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아침을 여는 열쇠고, 하루를 닫는 자물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주님께서는 제게 응답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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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락 타대오 신부님]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언어의 위력>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시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항구히 기도하라고 권고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청하지 않고 구하지 않고 주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 훌륭한 믿음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하느님께 이런저런 청원을 하는 것이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길을 떠나기 전에, 가끔씩 “운전자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소서.”라는 식의 기도를 하다 보면, ‘문제는 사람들이지! 하느님께서는 당연히 언제나 그들이 안전하기를 바라시는 분이신데…….’ 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어떤 것을 청하고 구한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이 아버지의 선물임을 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또는 내가 당연히 받을 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선하신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궁극적으로는, 아버지께 청원하는 기도는 감사하는 기도와0일맥상통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온갖 선의 근원이 오직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기도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선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아버지의 선하심을 믿으며, 우리가 바라지 않는 것을 주실 때에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기도를 계속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기도에서 우리는 “주님, 주님 없이는 저희가 있을 수 없사오니, 저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어, 언제나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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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강우현 요아킴 신부님]
“너희는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우리의 기도는 저마다 간절한 바람을 지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느님께 바쳐집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신분 고하를 떠나서 모든 사람은 하느님께 자신이 안고 있는 고통을 하소연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런 우리의 실존의 고통을 어떻게 하느님께 아뢰어야 하는지 들려줍니다. 우리는 위기의 순간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하느님을 애타게 찾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믿는 자이든 믿지 않는 자이든 인생의 위기에서는 절대자인 하느님의 도움을 애타게 청합니다.
그런데 이런 간절함도 잠시 위기를 넘기면 언제 내가 그랬냐는 듯이 우리 안에는 하느님을 찾던 갈망은 이내 사라지고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자신의 오만함이 자리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는 태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만남을 시도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은 기도를 통하여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고통과 어려움을 풀어나갈 실마리를 찾고자 합니다.
그래서 믿는 자라면 더욱 애타게 하느님의 마음을 두드리고 매달립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이 말씀은 믿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지녀야할 신앙 태도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도를 하고도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였다면, 우리가 조급하게 기도의 응답에만 매달려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마음을 빼버린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기도는 주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바칠 때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하고, 기도가 이루어 졌다고 믿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입으로 발설되기 이전부터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불러 주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기도를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올바른 지향과 태도를 지니고 믿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 나라를 항구하게 구하고, 이 땅에서 이루어질 하느님 나라를 찾으며, 하느님 나라의 문을 쉬지 않고 두드릴 수 있는 믿음을 지니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남에게 바라는 것을 먼저 이웃 안에서 사랑을 실천합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기도할 때, 자신의 것을 먼저 구하기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들어나기를 청합시다. 그래서 우리가 매일 찾고 구하는 간절한 기도가 하느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여는 힘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을 체험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할 때 바리사이파의 기도보다는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 베풀어주소서.”(루카18, 13)라는 세리의 기도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을 위해서 당신을 내놓으셨듯이,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이웃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기도 생활을 통하여 얻어지는 열매입니다. 항구한 믿음과 기도의 생활이 내가 이웃에게 바라는 대로 이웃에게 먼저 해줄 수 있는 마음으로 변화시켜가는 힘이 됩니다.
오늘 하루 “너희는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실천으로 들어내는 은총의 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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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정호 빈첸시오 신부님]
<받고, 얻고, 들어선 이의 할 일>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언제 들어도 든든한 예수님의 약속입니다.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 이 말씀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꼭 기억해야 할 예수님의 좋으신 말씀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것은 우리의 간절한 청을 말합니다.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고 그것을 얻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행동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얻고자 하는, 그리고 바라는 것을 얻는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행동이 있으면 분명 보답이 있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곧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그 문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적인 약속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청을 드릴 때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복음의 첫 머리는 기억하면서도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에는0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너무 처음 말씀이 인상에 깊어서일까요? 너무 좋아서일까요.
예수님은 복음의 끝을 이상한 말씀으로 끝맺으십니다. 따로 떼어서 생각하면 너무 좋은 말씀인데, 이어지니까 말이 잘 안됩니다. 무슨 말씀일까요?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라고 실컷 이야기하시고는 마지막에 하시는 말씀은 정반대입니다. 주님은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가르치십니다.
그것도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하는 내용을 그대로 우리의 몫으로 돌리고 계십니다. 곧 우리가 해야 할 일, 곧 우리가 스스로 구하는 이에게 주고, 찾는 이에게 찾아주며, 문을 두드리는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일까요? 아님 서로 너무 다른 이 두 말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요?
이것을 푸는 열쇠는 중간에 설명하지 않고 지나친 주님의 말씀 속에 해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그 청을 들어주실 것이라 하시면서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끝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악하면서도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다른 복음을 찾아보면 그 더 좋은 것이 등장합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하느님의 사랑의 원리요, 생명, 숨, 얼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 혹은 성령의 흐름을 안고 사는 사람은 곧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하느님께서 내리셨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에게는 하느님께 바랄 것 보다는 그가 바라던 것을 들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 하셨던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일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으로 당신의 일을 다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그 청을 스스로 실천하고 남에게 베풀어서 하느님을 닮은 그 소중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오늘은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구하면서도 나에게 무엇을 애타게 구하는 이를 찾아보고,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것을 찾으면서도 그와 같은 것을 우리에게서 찾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찾아 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문을 두드리듯 우리 맘을 두드리는 이에게 우리의 문을 열어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하신 일들, 사실 알고 보면 바로 그 일들이 고스란히 우리 것이 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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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이틀 전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은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마태 7,11)
이는 “우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심을 밝혀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 해야 할 바를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주님께서는 먼저, 기도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청하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지 말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이요, 나아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신뢰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귀먹은 이가 들을 수 있기를 청하듯, 눈먼 이가 볼 수 있기를 청하듯,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시지만, 우리가 그 필요를 깨달아 알고 절실하기를 바라시며, 또한 그것을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음에는, ‘찾아라.’고 하십니다. ‘찾는다.’는 것은 수고로움을 바치는 것이요, 믿음으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온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하여 믿고, 믿는 분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내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두드려라”고 하십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가슴에 타오르는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라고 하십니다.
이토록, 주님께서는 우리가 입(말)과 몸(행동)과 가슴(마음)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있고 “아버지께 매달려” 있기를 바라십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듯이 우리도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곧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고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리이신 당신을 찾게 하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시는 당신의 음성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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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7,7)
주님!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우리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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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청원>
마태오 7,7-12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청원>
당신께서
주신다시니
당신께
청하나이다
당신께서
주시고픈 것을
당신께
청하게 하소서
당신께서
주시는 것으로
당신처럼
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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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장 강력한 힘>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도 양보하시는 힘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권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그 자녀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이고, 주 하느님나라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작자미상).
그런데 기도의 응답은 때때로 즉각 이루어 주십니다. 가르멜 산위에서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곧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천천히 적당한 때에 이루어 주시기도 합니다.
다윗왕은 성전을 건축하려 하였지만,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때는 이루어 주지 않음으로 응답이 되게 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들어주어서 손해가 될 것은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유익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의 필요를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최선의 방법으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라고 하셨습니다. 각자의 바람이 많이 있겠지만 세속적인 만족과 위로를 찾고 구하기보다 먼저 하느님을 찾고 갈망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청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정을 채우려는데 쓰려고 청하기 때문(야고4,3)이라고 하였으니 헛된 수고의 기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젖도 못 얻어 먹는다.”고 했습니다. 먼저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 보고 발 뻗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들어주실 것을 청하십시오. 에둘러서 하거나 구구절절 설명하려 들지 말고 그냥 청하십시오.
사실 문이라는 것은 열릴 때 열리고, 닫을 때는 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열고, 악에는 닫아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는 물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와 명예, 명성의 유혹에는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마음은 열고 욕심의 입은 닫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는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만 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고마운 응답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되 내 뜻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길 바라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좋은 의향을 가지고 마음껏 청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반복해서 청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빕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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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내가 무엇인가를 받을 때,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가? 주님과 더불어 베풀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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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산상 설교의 본론(마태 5,17~7,12 참조), 특별히 후반부(6,19─7,12)에 속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에서는 구약의 지혜 문학과 비슷한 점이 발견되는데, 대표적으로 비슷한 내용의 짧은 단락들, 강한 어조의 명령, 비유 또는 상징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후반부 앞부분(6,19-34)의 중심 주제가 ‘부’였다면, 이어지는 뒷부분(7,1-12)에서는 하느님과 또 이웃과 이루는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7장 7-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가르쳐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더 많이 주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백성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사 30,19; 58,9; 65,24; 예레 29,12-14; 호세 2,23 참조) 7-11절의 각 절에는 ‘청하다’와 ‘주다’라는 동사가 짝을 이루어 사용됩니다. 이러한 단어의 반복 사용은 중심 주제를 설명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청하다’와 ‘주다’라는 동사 외에도 ‘찾다’와 ‘얻다’, ‘두드리다’와 ‘열다’라는 동사가 7-8절에서 짝을 이루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명령 또는 권고에 이어 그에 따른 결과, 곧 인간이 청하면 하느님께서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행위는 지속적으로 요구됩니다.(7,7 참조) 또한 하느님께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사람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7,8 참조) 청원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누구이신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인간의 요청에 응답하시는 분으로서 그분의 능력은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이웃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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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7,7)
<무엇을 청할까?>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청을 들어주시는 주님께 많은 것들을 청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이렇게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바라는 것을 간절히 청해야 하고,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나의 간절한 노력(찾고 두드리는 노력)도 함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나의 회개를 청하고, 재물을 청하고, 건강을 청한다면, 입으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얻기 위한 '구체적인 나의 땀 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7,12)
사랑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용서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청할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는 주님의 이 물음 앞에서 부와 장수와 원수의 죽음을 청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잘 이끌어갈 수 있는 '지혜와 분별력'을 청했던, 그래서 부와 장수도 덤으로 받았던, 이스라엘의 세 번째 임금인 '솔로몬의 지혜'(1열왕3,4-15 참조)를 떠올리게 됩니다.
어제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국민의 더 많은 지지를 받아 새 대통령으로 뽑힌 이 나라의 지도자를 겸허히 인정하고, 새 대통령은 솔로몬의 지혜와 분별력으로 분열되어 있는 이 대한민국을 '하나 된 나라', '통합의 나라'로 만들어 줄 것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주님, 주님 없이는 저희가 있을 수 없사오니, 저희에게 성령의 힘을 주시어, 언제나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힘껏 실천하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소서."(본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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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가식적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이나 행동을 거짓으로 꾸미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대부분 말합니다. 그렇다면 솔직한 사람은 어떠합니까? 거짓이나 숨김없이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사람 말입니다. 당연히 솔직한 사람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식적인 사람이 때에 따라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2014년 9월의 어느 날 했던 적이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외치며 광화문에서 단식 농성을 했습니다. 그때 이들 앞에서 피자 파티를 열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가족이 벼슬이냐!”면서 유가족들에게 큰 아픔을 주었습니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불순세력’이라며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자식을 잃고 가족을 잃은 그들에게 가식적이라도 위로해주면 안 되었을까요? 이때 아픔을 주는 ‘솔직’이라면, 아픔을 주지 않는 ‘가식’이 더 낫다 싶었습니다. 아픔을 주는 ‘솔직’보다 ‘무관심’이 더 나아 보였습니다.
종종 스스로 솔직하다며 “나는 뒤끝 없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로 솔직할지는 몰라도 “저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사랑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을 위한 것이라면, 또 위로와 힘을 주는 것이라면, 가식이라도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더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즉, 하느님 나라를 열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물론 마지막 날에 악인과 선인을 가리는 심판이 있겠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누구나 이 나라 백성이 되는 자격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늘 뛰어넘습니다.
우리는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대신 돌을 주지 않으며,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주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랑 가득하신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를 결코 나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늘 간곡히 기도해야 한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그런데 기도에는 사랑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주님께서 제일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를 주님께서는 황금률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솔직과 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 측면에서 바라보면 지금 해야 할 것이 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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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탄력 좋은 삶과 믿음>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결과의 성공보다는 과정의 충실함이 우선입니다. 한결같은 분투의 과정이 바로 성공이요 결과는 그 다음입니다. 말 그대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믿음의 삶을 뜻합니다. 삶이든 믿음이든 참으로 한결같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절대적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적탄력 좋은 삶입니다.
30년전 초창기 참 많이 강조했던 영적 탄력입니다. 세월 흘러 노쇠해 가면서 육신의 탄력은 떨어져도 영혼의 탄력인 믿음은, 희망은, 사랑을 날로 좋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를 위해 간절하고 항구한 한결같은 기도가 절대적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정주영성의 핵심이자 주님의 전사로서의 필수 요소입니다. 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기도 첫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한결같이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들이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바로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한결같이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정주 수도승들의 모습에 대한 묘사이기도 합니다. 불가에서는 이런 정주의 불승들이 모인 사찰 공동체를 나무들이 우거진 숲을 뜻하는 뜻하는 말마디 “총림叢林”이라 일컫기도 합니다. 또 아주 예전 그러니까 24년전 여름철에 써놓고 주님의 전사로서 영적 전의戰意를 새롭게 했던, 그리고 자주 인용했던 담쟁이란 고백 자작시도 생각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작년 가을
붉게 타오르다 사라져 갔던 담쟁이
어느새 다시 시작했다
초록빛 열정으로
힘차게 하늘 향해
담벼락, 바위, 나무 타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붉은 사랑으로 서리 내려 사라지는 날까지
또 계속이다
해마다 반복되는
제자리 정주의 삶에도
지칠 줄 모르는 초록빛 열정
다만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향해 타오를 뿐 내일은 모른다
타오름 자체의 과정이
행복이요 충만이요 영원이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오늘 하루만 사는 초록빛 영성이다”-1998.6.3.
시공을 초월하여 지금도 여전히 공감, 감동하는 좌우명 같은 고백시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 묵상중 떠오른 두 편의 시입니다.
오늘 복음은 참으로 믿는 자들의 삶과 믿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어떤 상황에도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좌절이나 절망하지 말고 한결같이 새롭게 시작하는 탄력좋은 삶과 믿음, 기도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바로 죽을 때까지, 살아 있는 그날까지 깨어, 끊임없이, 한결같이 시도하는, 도전하는 삶과 믿음, 기도의 자세를 뜻합니다. 이런 이들이 참으로 주님의 전사요, 참으로 살아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어떤 형태로든 하느님 방식대로 참 좋은 응답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바로 이것이 백절불굴의, 진인사대천명의 믿음의 본질입니다. 이래서 좌절이나 절망함이 없이 한결같이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도하다보면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알 것이며 하느님은 당신 생각에 가장 적절한 때 가장 좋은 최선, 최상, 최고의 방식으로 응답해 주신 다는 것을 체험할 것입니다. 참으로 최종의 영적 승자는 이런 탄력좋은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에게 있습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 인간만사 세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도 있습니다. 무엇이 잘되고 무엇이 못되는 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합니다. 죽음의 순간에 깨달아 밝혀지는 일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일희일비함이 없는 한결같이 영적 탄력좋은 삶이 정말 바람직합니다. 당장은 모르지만 지난 뒤, 내 고유한 삶의 성경책을 렉시오 디비나 하면 깨달아 알 것입니다.
바로 이런 기도의 모범이 재1독서의 기도의 여인, 에스텔입니다. 본문에는 장장 2페이지에 걸쳐 계속됩니다. 전후의 사정을 보면 하만의 중상 모략으로 온 유다인들이 절멸할 수 있는 풍전등화, 절체절명,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상황입니다. 바로 에스텔의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절멸의 위기에 처한 유다인들을 살립니다.
몇 감동적인 대목을 인용합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는 안 나오지만 왕비 에스텔의 기도의 결과 사필귀정, 해피엔딩으로 끝나 에스텔의 사촌 오빠이자 양부인 유다의 지도자 모르도카이의 승리로 귀결됩니다. 마침내 모르도카이 대신 유다인들의 절멸을 꾀하던 하만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짐으로 완벽한 에스텔의 승리, 하느님의 승리로 유다인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기도가, 한결같은 끊임없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답임을 절감합니다. 이래야 영적 탄력 좋은 신망애의 삶이요 믿음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에게 탄력 좋은 믿음을 선물하십니다.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구원의 기쁨을 제게 돌려주소서.”(시편51,12.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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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말씀 기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대통령 선거가 끝났습니다.
나라의 지도자 한 분을 뽑기 위하여
이토록 모든 국민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애쓰는 것을 보며
과연 그토록 절박하고 중요한 일이었나
생각해 봅니다.
또 내가 지지하는 분이 되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은 그런 절박함이
과연 진정한 기도였을까 돌아봅니다.
나의 주님!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죽음의 공포 앞에 절박함으로
기도하는 에스텔 왕후를 바라봅니다.
저에게는 아직 그런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지 않아서
그런 절박함이 없어서인지
의지할 곳이라고는 당신밖에 없다고
고백하기보다는
자꾸만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은 아닌가
되돌아봅니다.
나의 하느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새로운 지도자를 통해서 발휘되어
선거로 분열되고 상처입은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화해와 통합의 정치로 치유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오!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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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x0TH3jY5b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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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마태 7, 8)
기도로
태어나
기도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간절한
기도의
주인은 언제나
우리의
주님이시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먼저
받아주시는
주님이시다.
우리를
살리는
기도이며
거짓을
허무는
기도이다.
끝없는
기도의
여정을 우리는
살아간다.
생명과
기도는
하나의
몸이다.
그래서
기도는
뜨겁다.
기도는
살아있다.
기도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
기도
아닌 것이
없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기도로
우리를
사랑으로
데리고
가신다.
다시
하느님께
집중해야 할
우리들 삶이다.
우리에게는
힘겨움을
이겨내게 하는
기도가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기도를
내어주셨다.
청하면 얻고
두드리면
열리는
기도가
다시 우리를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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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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