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변문(原州邊門) 변안열(邊安烈, 1334-1390) 변안열은 본래 심양(瀋陽) 사람으로, 원나라 말기에 병란(兵亂)을 피해 공민왕을 따라서 고려로 오자 원주(原州)를 본향(本鄕)으로 삼게 했다.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이등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그 후 거듭 승진해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가 되었다. 또 안우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고 곧 예의판서(禮儀判書)벼슬을 받았으며 추성보조공신(推誠輔祚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고 다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옮겼다. 재추들이 교외에 모여 잔치를 열었을 때 변안열이 임견미·염흥방 등과 함께 박희(拍戱)로 승부를 다투기도 했다.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있으면서 최영과 함께 제주를 정벌하고 귀환하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다가 평리(評理)로 옮겼다. 우왕 초에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양광·전라도 도지휘사(都指揮使) 겸 조전원수(助戰元帥)로 나갔다. 왜적이 부령(扶寧)에 침구해 행안산(幸安山)에 올라가자 변안열이 나세(羅世)·조사민(趙思敏)·유실(柳實)과 함께 군사를 독려해 공격함으로써 적을 대파하였으며 적의 수급을 많이 베었다. 승전의 소식이 올라가자 우왕이 은 1정(錠)과 안마(鞍馬)와 의복을 하사했으며, 개선하자 도당에서 천수사(天水寺)까지 나가 영접했다. 이후 문하찬성사로 승진했다. 왜선 5백 척이 진포(鎭浦) 어귀로 들어와 굵은 동아줄로 배를 서로 묶어놓고 군사를 나누어 수비하다가 마침내 해안에 상륙해 각 고을로 분산 침략하면서 분탕질을 저질렀다. 나세(羅世)·심덕부 등이 진포에 이르러 화포를 쏘아 적선을 불태우니 수비하던 적병이 거의 불에 타 죽거나 익사했다. 수세에 몰린 적이 발악을 부리느라 포로로 잡았던 남녀를 다 죽여 시체가 산같이 쌓였고 지나는 곳마다 피바다를 이루었다. 적군은 330여 명만 살아 도망쳤으며 배를 지키던 적 중에서 죽음을 면한 자는 옥주(沃州 : 충북 옥천)로 달아나 이미 상륙했던 자들과 합세해 이산(利山 : 옥천군 이원면)과 영동현(永同縣 : 영동군)을 불태우고 영동감무(永同監務)를 죽였다. 또 황간(黃澗 : 영동군 황간면)·어모(禦侮 : 경북 금릉군 어모면) 두 현(縣)도 불태우고 다시 중모(中牟)·화령(化寧)·공성(功城)·청리(請利) 등 여러 현(縣)으로 쳐들어와 상주(尙州)를 불태운 다음 7일이나 머물면서 술판을 벌였다. 전라도 원수(元帥) 지용기의 휘하에 있던 배검(裵儉)이 적정을 정탐하겠다고 자원하자 원수들이 허락하였다. 적진에 이른 배검을 적이 죽이려고 하자 그는, “천하에 사자(使者)를 죽이는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의 장수들은 정예를 무수히 거느리고 있으니 싸우면 기필코 이기게 마련이나 너희들을 모조리 섬멸한 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너희들은 한 고을을 차지하고 눌러앉아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설득했다. 적은, “그것은 속임수다. 너희 나라에서 정말 우리를 살리려고 한다면 왜 우리의 배를 빼앗았는가? 우리도 충분히 작전이 서 있다.”하며 배검에게 술을 대접하고 드디어 철기(鐵騎)로 호송해주었다. 왜적이 2, 3세 된 여아를 데려다가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깨끗이 씻은 다음 쌀과 술을 같이 차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좌우로 벌여 서서 풍악을 울리며 큰 절을 올렸다. 제사가 끝나자 쌀을 움켜서 나누어 먹고 술 석 잔을 마신 다음 아이를 불태웠는데 창(槍)자루가 갑자기 부러졌다. 점치는 자가, “우리들이 이곳에 머물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곧 군사를 이끌고 선주(善州 : 경북 선산군)로 달려가 고을을 불태웠으며 경산부(京山府)에도 침구했다. 이리하여 3도(道)의 바닷가 고을들이 모두 텅 비어버렸으니 왜적의 침구가 있은 이래 이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우왕이 조선 태조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임명하고 변안열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보좌하게 하였으며 왕복명·우인열·도길부·박임종(朴林宗)·홍인계·임성미 및 태조의 서형(庶兄) 이원계를 원수(元帥)로 삼아 모두 태조의 지휘를 받게 했으며 각자에게 말 두 필씩을 하사하였다. 출정군이 장단(長湍)에 이르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는데 점치는 자가 싸움에 이길 조짐이라고 예언했다.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을 원수 배극렴·김명휘·지용기 등이 공격하였으나 패전하여 박수경과 배언이 전사하고 전사한 사졸도 5백 명이 넘었다. 왜적이 함양(咸陽 : 경남 함양군)을 도륙한 후 남원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면서 운봉현(雲峯縣 : 남원시 운봉)을 불태운 후 인월역(印月驛)에 진을 치고서, 광주(光州 : 광주광역시)의 금성(金城)에서 말을 든든히 먹인 후 북쪽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떠벌이니 온 나라가 크게 떨었다. 태조가 길에 널린 시신을 보고 슬퍼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변안열과 함께 남원에 당도하자 배극렴 등이 도중에 영접하면서 다들 기뻐했다. 태조가 하루 동안 말을 쉬게 한 다음 이튿날 새벽에 싸우려 하자 장수들이, 적이 험한 곳에서 웅거하고 있으니 나오는 것을 기다려 싸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왜적을 물리치고 귀환하자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오색 장막을 설치해 온갖 놀이판을 벌이게 한 후 열을 지어 천수사(天水寺)의 문 앞에서 영접했다. 우왕이 태조와 변안열에게 각각 금 50냥(兩)씩을 주고 왕복명 이하 장수들에게는 각각 은 50냥씩을 하사하니 다들, “장수는 적을 죽임이 직분이니 저희들이 어찌 감히 받으오리까?” 하며 사양했다. 변안열이 임견미·이인임과 함께 정방(政房)을 맡게 되자 서로의 욕심을 채우려고 공장(工匠)이나 재력이 있는 자를 반드시 먼저 벼슬에 올렸다. 왜적이 단양군(丹陽郡)에 침구하니 변안열이 한방언 등과 함께 격파하여 80여 급(級)을 베고 말 2백여 필을 노획하였다. 또 한방언 등과 합세해 왜적을 안동에서 격파해 30여 급을 베고 말 60 필을 노획하자 그를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으로 봉하고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올렸으며, 공양왕 초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김저(金佇)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김저가, 변안열·이림(李琳)·우현보·우인열·왕안덕·우홍수와 내응해 우왕을 맞이하려 공모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낭사(郞舍) 윤소종·이첨(李詹)·오사충 등이, “변안열은 신우를 맞아다가 다시 왕으로 세움으로써 왕씨(王氏)의 제사(祭祀)를 영원히 끊고자 하였음은 김저의 진술로 명백히 드러났으며 나라 사람들도 다 아는 바입니다. 바라옵건대 헌사에 회부해 적합한 형벌을 내리고 가산을 적몰하소서.”라고 상소했다. 왕이 사면령이 내리기 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이유로 파직만 시켰는데, 다음 날 또 상소하자 삭직(削職)만 시키고 한양(漢陽)에 유배 보내도록 조치했다. 애초 우왕이 강릉으로 추방되었을 때 어느 사람을 보고, 자신을 그르친 자는 변안열이라고 탄식한 적이 있었다. 김저를 문초했으나 불복하므로 칼로 발바닥을 몇 치 가량 째고 단근질을 하자 묻는 대로 모두 자복해 드디어 옥사(獄詞)가 성립되었으며 변안열도 그 죄에 연루되었다. 이에 윤소종 등이 다시, “홍영통·우현보·왕안덕 등이 변안열의 역모에 참여한 것이 드러났으니 왕씨(王氏)의 신하와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입니다. 바라옵건대 변안열·홍영통·우현보·우인열·왕안덕 등을 극형(極刑)에 처(處)하소서.”라고 건의했으나 회답을 주지 않았다. 이에 윤소종 등이 다시 건의했다. “홍영통은 이인임·임견미·염흥방에게 빌붙어 함께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흉악한 무리들이 다 처형되었으나 홍영통만은 우왕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목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우현보는 수상까지 지냈으면서도 수탈로 쌓은 재물을 잃을까 두려한 나머지 간사한 아첨을 일삼음으로써 우리의 미풍양속을 훼손했습니다. 왕안덕은 장수로 이름을 걸어놓고도 매양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며, 남포(藍浦)의 전투에서는 전 부대가 궤멸되어 나라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으니 군법을 적용해 마땅히 참수해야 합니다. 우인열은 아전 출신으로 권세가의 연줄을 타고 정부(政府)에까지 자리를 차지했으나 백성에게 공덕을 끼쳤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정희계는 염흥방과 인척을 맺어 불의한 짓을 자행했으나 신우의 처인 최천검(崔天儉)의 딸 덕분에 요행히 무진년 때도 처형을 면하였습니다. 이 다섯 명은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므로 그 자리에서 기필코 처형되어야 합니다. 하물며 변안열의 음모에 끼어 신우를 다시 추대코자 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천지(天地) 간에 용납 받지 못할 죄인으로써 전하께서 사사로이 용서할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대의로써 결단하여 해당 관청에 회부한 다음 국문하여 치죄하게 하소서.” 왕이 허락하지 않자 간관이 대궐문에 엎드려 허락을 기다리면서 한낮이 되도록 물러가지 않았다. 이에 왕이 심덕부와 우리 태조 이성계를 불러 의논하고 교지를 내렸다. “변안열은 이미 관직을 삭탈하여 유배보냈고 홍영통·우현보·정희계 등은 김저의 공술에 의해 그 사건과 무관함이 입증되었다. 왕안덕은 회군할 당시 왕씨를 회복하는 의논에 협력한 바 있으며, 변인렬은 과거 설장수(偰長壽)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우왕의 폭정을 보고한 일로 미루어 김저의 음모에는 반드시 참여치 않았을 것이니 파직만 시킨다.” 또 왕이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용생을 홍영통 등에게 몰래 보내, “내가 있으니 경들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이날 여우가 수창궁 서문(西門)에서 나와 효사관(孝思觀) 서쪽 언덕으로 달려 들어가자 낭사(郞舍)가 다시 상소했다. “ 지금 신 등이 궐문에 엎드려 소인을 제거할 것을 청하고 있는데 요망한 여우가 나타났으니 이는 소인이 다 제거되지 못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늘이 책망하여 보내는 경고임이 분명합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하늘이 보낸 경고를 두려워하시고 다음으로 조종의 왕업을 생각하시어 변안열 등 여섯 명의 죄를 바로 잡음으로써 조종에 사과하신다면 하늘의 견책도 그칠 것입니다.”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대사헌 성석린이 또 상소하여 변안열의 처형을 간언했다. 마침 강도가 나타나 성문 밖에서 사람을 위협해 재물을 탈취하니 윤소종 등이 왕의 면전에서 이렇게 건의했다. “ 지금 왜적이 개경 가까이 있고 또 한양(漢陽)에도 있는 터에 강도가 발생한 것은 사실상 이 무리들 때문이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친 후 물러 나와, “저희들이 전에 변안열의 대역죄에 대해 다섯 차례나 상소하여 치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전하께서 관용을 베풀어 다만 한양 별장에 안치하게 하니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그 죄에 적합한 형벌을 내려 난적(亂賊)을 징계하소서.” 라고 상소했다. 왕이 그 소(疏)를 헌사에 내리며, “유배지에 가서 국문할 필요 없이 그냥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헌사에서 밤에 녹사(錄事) 손원식을 시켜 한양부윤 김백흥에게 공문을 보내 변안열을 처형하게 하였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까닭도 묻지 않고 대신을 갑자기 극형에 처할 수는 없다고 하자, 왕은 좌사의(左司議) 오사충과 집의(執義) 남재(南在)를 보내 국문하게 하였다. 오사충 등이 벽제역(碧蹄驛 : 경기도 고양군)에 이르러 손원식을 만났는데 이미 변안열을 처형하고 귀경하는 길이었다. 변안열이 처형될 즈음에, “우왕을 맞아오려고 했던 사람이 어찌 나뿐이랴?”라고 탄식하며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김백흥이 묻지 않고 형리에게 명하여 밖에 데리고 나가 참수하게 하였다. 이에 윤소종 등이 건의했다. “ 듣건대, 역신 변안열이 처형될 즈음에 스스로 ‘저는 죽어도 마땅하나 함께 모의한 자가 많은데 왜 저만 죽는 것입니까?’라고 말했으나 한양부윤 김백흥이 더 이상 묻지 않고 처형했다고 합니다. 변안열의 심복으로 부장(部將)인 통산군(通山君) 이을진이 필시 그 역모에 가담했을 것이니 반드시 국문해야 합니다. 또 김백흥이 역적과 한패가 되어 사실을 덮어버린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김백흥을 파직시키고, 사평제공(司平提控) 박위생과 사헌규정(司憲糾正) 신효창을 청주로 보내 이을진을 국문하게 했다. 혹독한 고문이 가해지자 그는 공술에서 이림(李琳) 및 아들 이귀생, 정주목사 이경도, 정지(鄭地)·원상(元庠)의 이름을 대었다. 원상은 변안열의 처족이므로 대간에 명하여 순군과 합동으로 국문하게 하자 그는 다만 사전개혁(私田改革)을 원망한 나머지 우왕을 맞아 옹립함으로써 그 일을 저지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이에 오사충과 장령(掌令) 권담을 안주(安州)로 보내 이경도를 국문하게 하고 남재와 좌헌납(左獻納) 함부림은 전주(全州)에서 이림을, 계림(鷄林)에서 정지 및 이귀생을 국문하게 하였다. 또 대간에 명하여 순군과 합동으로 김백흥과 원상을 국문케 하였다. 김백흥이 옥중에서 죽자 왕은 옥관이 혹형(酷刑)을 가해 죽은 것으로 의심하고서, “죄를 처자에게까지는 주지 않는 법이니 변안열의 처족은 면죄시키라.”고 지시하고 원상을 석방시키게 했다. 얼마 후 위화도회군 때 세운 변안열의 공적을 기록하도록 지시했는데, 그 뒤 윤이·이초의 공술에 그의 이름이 나왔으므로 공신 칭호를 삭제하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아들은 변현(邊顯)·변이(邊頤)·변예(邊預)이다. 출전 -고려사. 열전 [출처] 원주변문(原州邊門) 변안열(邊安烈, 1334-139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