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숙소 옆에 호수와 공원이 있어서 구경을 갔는데 벌써 구경을 마치고 오는 일행들도 있다.
공원 옆 광장에는 북한의 김일성 동상만큼이나 큰 모택동 동상이 있고 중국건국 70주년을 열열히 경축한다는 문구도 있다.
이곳에 사는 원주민들이야 건국70주년이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지만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이 감내하여야 할 일이다.
동호광장에 있는 모택동 동상과 건국70주년경축 문구
동호 안에 있는 건축물
올드시티 넘어도 보이는 사막과 같은 산들
올드시티..위험해서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다고...
좀 더 당겨서...
천연상무주점이라고 쓰여진 호텔...다행히 관광지 주변에 있어서 편리했었다.
도시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가지고 둘러보게 되면 취향에 맞는 사람들끼리 또는 가보고 싶은 곳이 같은 사람들끼리 수시로
이합집산(離合集散)을 하면서 목적지를 선택하게 된다.
모두 처음길이다가 보니 지도만으로 찾는 것이 그리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면 어렷이 같이 가려고 한다.
이곳도 역사가 오래된 도시이기 때문에 역사적 유물들이 많이 있어야 하지만 지배자들이 자주 바뀌는 바람에 남아 있는 유물이
그리 많지 않고 이곳을 들르는 관광객들이 가 보아야 할 곳이 그리 많지는 않다.
이곳에서 제일 크다는 시장(바자르), 중국 청나라의 후궁이었던 향비가 묻혀 있다는 아바크 호자의 가족묘인 향비묘,
그리고 이곳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이드 카 모스크(Id Kah Mosque) 그리고 올드시티 등이다.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중에 우선적으로 선택을 하게 되는데 오전에는 향비묘를 보러 가기로 했다.
호텔에서 얻은 지도를 가지고 몇 명이서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해서 물어물어 가면서 찾아 갔는데 그리 오래지 않아서 도착을 한다.
향비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사야 한다.
입장권을 파는 곳과 기념품을 파는 곳이 화려한데....
향비묘는 본래 아팍 호자의 가족묘로 그 가족 중의 하나였던 청나라 건륭황제의 위구르족 후궁이었던 용비(容妃)의
묘(진짜묘는 하북성에 있고 이곳엔 의관만 묻혀있음)가 있어서 향비묘(香妃墓/샹페이 무)라고 불리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카스시에서 동북쪽으로 5km떨어진 하오한촌(浩罕村)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전형적인 이슬람식 고묘건축예술을 따랐으며
1640년 전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높이 40미터에 아름다운 모자이크 첨탑과 원형 아치지붕이 궁전을 연상시킬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크게 문루(門樓), 소 예배실, 대 예배실, 교경당, 주묘실(主墓室)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한다.
1948년 지진으로 묘의 중심을 이루고 있던 묘실이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1956년 56기를 복구 하였다고 하며,
1972년, 1974년, 1982년 세 번에 걸쳐 대대적으로 수리한 후, 1988년 국가 보호 문화재로 지정됐다고 한다.
들어가는 입구
뒤에 보이는 것이 아팍호자의 가족모이다.
들어가는 입구에 분수와 공원 그리고 회랑이 잘 만들어져 있다.
좌우로 늘어선 회랑
시간이 없기 때문에 느긋하게 감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향비의 묘가 있다는 아팍 호자의 가족묘....
4방에 탑이 있고 탑에 전망대가 있다.
주변에 있는 묘지들
어물어진 것도 있고...
노란 천으로 덮혀 있는 것이 향비의 무덤이라고...인터넷에서(안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
전투복을 입은 향비의 그림...이탈리아 사람으로서 청나라에 벼슬을 지낸 카스틸리오네가 그렸다는 <향비융장상(香妃戎裝像)>
이 그림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있다고...“향비는 회부(回部, 신강성 남부)의 왕비로서 자색이 뛰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름하여 향비라 불렀다. 청나라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회부에 출정하는 장군 조혜에게 기필코 향비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회부를 평정한 조혜는 과연 향비를 데리고 북경에 이르렀다.”
같은 향비를 그린 그림인데... 윗그림이 나중에 그려진 듯...
무덤 옆에 있는 예배실
이곳은 대 예배실인 듯...
사실 이곳이 관광객들에게 유명해지게 된 것은 향비(香妃) 때문으로, 향비는 아팍호자 가문의 5대 후손으로 몸에서
향기(香氣)가 난다고 하여 향비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자색도 뛰어나고 몸에서 향기나 나는 것으로 유명해서 건륭황제의 후궁이 되었으나
후궁이 되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죽었다고 한다. 그의 죽음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설이 있다고 하며, 그의 실재 무덤은 청나라의 황제들이
묻힌 북경의 동릉인 건륭제의 무덤 유릉비원침(裕陵妃園寢)속에 건륭제의 36명의 여인들과 같이 묻혀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유해는 동릉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슈카르 사람들은 124명의 카슈카르 사람들이 특별한 상여를 메고 3년 반이나
걸려 북경에서 향비의 시체를 운구한 다음, 호자가의 묘에 묻어 주었다고 믿고 있고 한다.
그리고 카슈가르 사람들은 요즘에도 죽은 뒤 이 향비묘 가까이에 묻히는 것을 바란다고....
향비묘 들어가는 입구
앞에 보이는 여자가 향비라고..향비묘 근처 건물에 있는 그림
향비 기념행사를 하는데..아마도 매일 하는 듯...
아마도 청나라로 떠나는 향비를 기리는 행사를 하는 듯
향비 기념행사??
카스 시내로 다시 들어와서 이드 카 모스크로 왔더니 12시가 다 되었다.
이드 카 모스크...이 곳의 모스크가 신장지역에서 제일 커서 신장지역의 사람들이 이곳으로 온다고 한다.
이곳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경로라고 우대를 해 준다....그러나 예배 때문에 일반인들에게는 네 시에 문을 연다고
다시 건너와서 올드시티 쪽으로...
골목으로 계속 들어가면 올드시티가 나온다.
어제 저녁 야시장이 섰던 자리
낮에도 장사를 한다.
황동 제품을 만드는 골목..
올드 시티의 일부로 사람들이 살지만 구경을 한다.
이 골목에서 일행들을 수시로 만나게 된다.
올드시티에는 들어가는 문이 여러 개 있는데 동문에 있는 조각상
골목 골목에는 메론을 파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인심도 좋아서 맛을 보라고 한 쪽씩 나누어 주기도...
하나에 8백원 정도로 하나를 사면 둘이 요기가 될 정도로 양도 푸짐하고 맛도 그만이다. 점심을 메론으로 떼웠다.
메론파는 아저씨..
4시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서 다시 숙소로...카슈가르 시 뒤로 산과 사막이 보인다....이곳이 오아시스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
아래는 카슈가르의 역사와 향비에 대해서 더 알고 싶으신 분만...
아팍호자묘 & 향비묘 ::
카쉬시 동북쪽 5㎞ 거리에 있음. 이슬람교식 고대 건축물. 1640년에 지어지기 시작하여 1693년에 완성됨.(300여년의 역사)
아팍호자는 17세기 카쉬가르 수피즘(백산당)의 대표자로 이 묘에는 그의 아버지를 비롯 5대에 걸친 72명의 가족들이 매장되어 있음.
제 1대는 유숩호자이지만, 아들인 아팍호자가 더 유명하여 전체 능묘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불리움. 또한 청조 말기 위구르족으로서 건륭제의 첩이었던 “향비”(香妃)가 묻혔다는 전설에서 향비묘라고도 불리움.
☞ 위구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시기가 있다.
하나는 카라한왕조(840-1230) 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얠캔칸국(1514-1678) 시기이다. 얠캔은 한어로는 샤츠어(莎車)임.(현재 莎車縣)
위구르 사람들은 카라한조 시기를 위구르 문화의 제1전성기로, 얠캔칸국 시기를 제 2전성기라 부른다.
카라한왕조 시기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술탄 수툭 부그라칸”이다.(존경받는 인물로서)
얠캔칸국 시기에 가장 유명한 인물은 “아팍호자”이다.(악명 높은 인물로서)
위구르 사람들은 17세기 즉 얠캔칸국의 후반기를 “수피즘의 세기”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명목상 칸이 존재했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호자”라고 불리우는 수피즘(이슬람 신비주의) 종교귀족들이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수피즘을 전도하기 위해 사마르칸드나 부하라 같은 곳에서 얠캔칸국으로 들어온 종교집단에 불과했으나
점차 수피즘에 취한 얠캔칸국의 칸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치적인 집단으로 변하여, 정권을 조종하는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수피즘 종교귀족들 즉 호자들은 두 파벌로 나뉘어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였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백산당’(白山黨)과 ‘흑산당’(黑山黨)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즉 백산당과 흑산당은 신강에서 이슬람교의 양대 주요 파벌이었던 것이다.
이 양대 파벌의 조종 하에 수도 얠캔과 지방정권 사이의 정권투쟁이 끊이질 않았고 그들의 정권다툼 가운데 백성들의 생활은 피폐해져만 갔다.
결국 얠캔 칸국은 이 두 파벌의 상호 투쟁 중 멸망되었다.
이 얠캔칸국의 멸망을 초래한 인물이 바로 아팍호자이다.(카쉬가르의 위구르인들 사이에서 그는, 잘 나가던 위구르인의 얠캔칸국,
위구르 문화의 전성기를 망쳐놓은 몹쓸 수피놈...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그 멸망 경위는 이러하다.
1667년 압달라칸이 사망하자 그의 큰 아들 욜바스가 백산당의 지지 아래 칸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흑산당은 이에 승복하지 않고
욜바스의 동생 이스마일을 칸으로 등극시키려 하였다.
이 때 천산산맥 북쪽에는 서몽골인들이 다스리는 준가르국이 있었고, 천산산맥 남쪽(타림분지)에는 얠캔칸국이 있었는데,
준가르국이 흑산당의 이스마일을 지지하면서 얠캔칸국의 정사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벌써 외국국가가 정사에 이래라 저래라 할만큼 국력이 약해진거지...)
그리하여 1670년 4월 2일 이스마일과 흑산당 수령들은 악수에서 출발, 카쉬가르로 진격해, 얠캔까지 곧바로 쳐들어갔다.
(서몽골의 준가르국이 도와준 듯) 이스마일은 형으로부터 칸위를 빼앗고, 얠캔칸국의 새 군주가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형을 지지했던 백산당을 잔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백산당의 수령 아팍호자는 간신히 카쉬가르를 탈출하여 인도를 거쳐 티벳으로 들어갔다. 그는 라싸에서 달라이라마를 접견하고
달라이라마는 그에게 친필 서한을 주어 준가르의 지배자 갈단에게 가보라고 하였다. 1678년 아팍호자는 준가르국으로 가서 갈단을 접견하였다.
갈단은 달라이 라마의 친필 서신을 본 후(이 때 서몽골은 티벳 불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에 달라이 라마의 영향력이 컸음)
일 만여 명의 기병을 파견하여 얠캔칸국으로 진공하였다.
마침 칭기스칸에 버금가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던 갈단에게 아팍호자의 지원 요청은 천산산맥 남쪽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하여 갈단은 1678년, 아팍호자를 앞세우고 카쉬가르로 진격, 얠캔까지 점령해버렸다. 그는 이스마일칸을 포로로 잡아
굴자(한어로는 이닝)로 보내 구금시켜버리고 그 대신 아팍호자를 그 자리에 앉혔다.
흑산당에게 쫓겨갔던 백산당이 다시 외세의 힘을 빌려 흑산당을 쫗아낸 것이다.(정권다툼에 이기려고 외세를 끌어들인거지...
망할려고 작정을 한거지 뭐..역사상 외세 끌어들여서 잘 된 나라를 못 봤다. 우리도 신라가 고구려 이기려고 당나라 끌여들였다가 당한테 먹힐뻔 했잖아...- -)
이렇게 해서 카쉬가리아(천산산맥 이남, 타림분지, 지금의 남강지역)는 다시 통일이 되었지만, ‘무슬림 신권정치’ 아래에
새로운 몽골 제국인 준가르의 속국으로 전락, 150여 년간 지속된 얠캔칸국은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나라를 잃은 위구르인들은 그로부터 약 70년간 서몽골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물론 아팍 호자와 그의 일족은 몽골의 대리인으로
행세하며 위구르인들 위에 군림했다.
그러나 아팍 호자는 외세를 이용해 자신의 적을 거꾸러뜨리고 정권을 장악하긴 했지만 위구르인들이 독립을 잃고
몽골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백산당과 흑산당 사이의 골은 더욱 깊어졌고 양측은 앞을 다투어 몽골 지배층에게 잘 보임으로써 상대방을 제압하려 애썼다.
그런 상황에서 위구르 민중들의 생활은 날로 악화되어 갔다.
☞ 그럼 “향비”는 누구인가?
향비는 아팍호자의 5대째 자손이다.(이 때 준가르는 청에 의해 멸망당하고, 준가르의 속국으로 아팍호자 집안이 다르리고 있던
카쉬가리아 또한 청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다)
카쉬가르 출신으로 몸에서 고운 향기가 난다고 해서 향비라 불렸으며, 건륭황제(1736-1795)의 명으로 고향을 떠나
비(妃)가 되었지만 곧 죽게 되고 그 시신을 다시 고향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청조가 건륭제 때 군사 침략을 단행한 뒤(1760), 청의 장군이 황제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해 그녀를 사로잡아 북경에 보냈다고 한다.
(현지 위구르인 가이드는 좀 다르게 설명한다. 향비의 오빠와 삼촌이 건륭황제 때 청조에 큰 공을 세워서-청조가 카쉬가리아를 점령할
때 별 저항을 안 했나부지 뭐..아팍호자 집안은 뭔가 매국노적인 냄새가 난다...처음에는 아팍호자가 몽골을 끌어들이더니,
그 자손은 또 청을 끌어들인거잖아..- 건륭황제가 이 가족들을 모두 북경으로 초청했는데, 그 때 향비의 미모가 건륭황제 눈에 띄여서 첩이 되었단다)
그녀는 카쉬가르에서 한 족장의 부인이라고도 했고, 또 정혼한 사람이 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26살 때(1760) 청나라의 자금성에 들어온 뒤, 29세 때 사망하였다.
어떤 이는 25년간 자금성에서 살았다고도 한다. 생활은 무척 힘들었던 듯하다. 망향병에 시달렸다는 흔적도 있다.
궁중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건륭제는 이를 위해 그곳에서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을 정도였고,
그녀가 위구르의 전통 복장도 입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특별히 그녀를 위해 위구르의 조복(朝服)까지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궁정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향비의 실존 근거는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청나라에 벼슬을 지낸 카스틸리오네가 그렸다는 <향비융장상(香妃戎裝像)>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이 그림에는 투구를 쓰고 무장 차림을 한 여인이 있는데 이 그림에 찬자불명(撰者不明, 글 쓴 이가 분명치 않음)의 사략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향비는 회부(回部, 신강성 남부)의 왕비로서 자색이 뛰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름하여 향비라 불렀다. 청나라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회부에 출정하는 장군 조혜에게 기필코 향비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회부를 평정한 조혜는 과연 향비를 데리고 북경에 이르렀다.”
향비를 본 건륭제는 한눈에 매료되고 말았다. 확실히 향비는 건륭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뛰어난 미모와 이국적인 체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경에 온 향비는 항시 칼을 빼어들고 죽음으로써 건륭제의 접근을 거부하였다. 그녀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은
것은 독살하였거나 자살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살설은 그녀 자신이 이미 정혼한 몸이었기 때문에 항상 칼을
가슴에 품고 황제의 접근을 불허하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황태후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녀를 불러 들여 소원을 묻자, 죽는 것 뿐이라고 말해서
결국 별실에서 자살케 하였다고 한다. 황태후가 환관들을 시켜 목졸라 숨지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찌 되었든, 향비에 얽힌 이야기는 청의 카쉬가르 정복 과정에서 나타난 비극이고, 향비는 그에 저항한 여성인 셈이다.
아마 위구르인들은 청의 황제 건륭제에게 끝까지 몸을 허락치 않고 저항한 향비를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고,
그 욕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인터넷에서)
첫댓글 여행이라 늘 바쁜 일정인데 수많은 자료와 설명들을 이여 가시네요,
잘 보고 았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