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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대통령을 사랑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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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게시판 스크랩 영창대군 ... 의문투성이, 영창대군의 죽음
오렌지캬라멜 추천 0 조회 807 11.09.28 00:05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영창대군        永昌大君

 

 

 

 

 

조선시대에는 크게 세가지의 차별이 있었다. 양반과 상민의 차별...남녀의 차별 그리고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었다. 남녀의 차별과 양반,상민의 차별은 발생지인 중국보다 더 발달한 유교 성리학의 영향이었고, 적서(嫡庶)의  차별은 태종시절 법제화되었다.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정도전이 庶子이었음을 이유로 서자의 관직 진출을 법으로 금지시켰던 것이다.

 

 

 

 

 

 

 

 

 

 

                                                    영창대군의 묘

 

 

 

 

영창대군의 묘는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에 있다. 그의 묘는 원래 경기도 광주군 남한산성 아래에 있었는데, 성남시 개발계획에 따라 1971년 8월에 현 위치로 이장되었다. 이장 과정에서 묘지명(墓誌銘)이 미쳐 수습되지 못하고 매몰되어 있다가 1993년 도시가스 시설 공사 도중 파손된 채 발견되었다. 다섯 동강 난 상태로 발견된 그의 묘지명은 영창대군의 짧은 생애를 기록하고 있다. 

 

 

영창대군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이 복구되었다. 묘비(墓碑)는 하얀 대리석으로 높이 186cm, 폭 61cm, 두께 20cm로, 전면에 ' 영창대군 ' 증시(贈諡) 소민공지묘(昭愍公之墓)라는 명문이 있다. 묘단은 장방형으로 복판 연화문(覆瓣 蓮花紋)이 조식되어 있고, 이수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고 사실적이다.

 

 

 

 

 

 

 

 

 

 

 

                                           선조, 광해군 그리고 영창대군

 

 

 

 

왕의 자리는 반드시 왕비 소생의 적통대군이 즉위하여야 했지만, 왕비에게 왕자가 없으면 물론 후궁 소생의 왕자가 왕위에 올랐다. 宣祖 자신도 적통이 아니었므로 재위기간 동안 그 정통성이 취약했었다. 宣祖는 모두 14명의 아들을 두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까지 선조에게 嫡統 왕자가 없었다.   어쩔수 없이 선조는 임진왜란의 와중에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당시 明나라의 책봉 허락이 거절되나, 宣祖는 단독으로 책봉하 고, 임진왜란의 지휘를 광해군에게 맡긴다.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하여 임진왜란을 훌륭하게 지휘한다.임진왜란이 끝나고 나라가 조금 안정을 찾아갈 때,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에게서 영창대군이 태어난다.

 

 

선조는 처음부터 광해군이 마음에 안들었었므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게 하고 싶었지만 영창대군은 간난 아기이었고, 오랫동안 세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던 광해군도 있었기에  쉽지만은 아닌 일이었다. 그러다가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고만다. 광해군은 당시 亡해가는 明나라와 强해지는 후금(後金)사이에서 탁월한 외교로 나라를 잘 다스리고 있었다.

 

 

 

 

 

                                                   大北派와 小北派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로, 長子인 임해군(臨海君)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기 때문에 선조에 의해 세자로 책봉된다. 그후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가 새로 맞아들인 繼妃 인목왕후(仁穆王后)에게서 1606년 영창대군이 출생하자, 선조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위를 물려주려 한다.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도 적통론(嫡統論)을 내세워 宣祖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유영경의 척신정권에 대한 의도는 사류(士類) 사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유영경은 결국 주살되고, 소북파는 몰락하였다.

 

 

유영경의 세자 교체 기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은 유영경에 의해 축출되었던 北人의 다른 계열인 이산해(李山海),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이고, 이들은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정통을 지지한 공로로 중용되어 대북(大北)이라 하였다.   

 

 

 

 

 

 

 

 

 

 

                                            여덟살, 영창대군의 역모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우선 조정의 기풍을 바로 잡고, 임진왜란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재정을 회복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인다. 초당파적인 이원익(李元翼)을 영의정으로 등용하고, 전란 중에 불타버린 궁궐을 창건, 개수하여 왕실의 위엄을 다시 살리려 하였으며,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제하려 하였다. 하지만 왕권의 안정화 과정에서 피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때마침 칠서의 난이 일어난다.

 

 

 

                                               칠서의 난      七庶의 亂

 

 

 

 

태종 이방원은 사얼(庶蘖)의 관직 진출을 법으로 금지하였다. 자신의 라이벌인 정도전(鄭道傳)이 서자 출신이었으므로...  광해군 즉위 초, 영의정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朴應犀) 등 7명은 정계에 진출할 수 없는 자신들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소양강에 무륜당(無倫堂)을 짓고, 그곳에서 詩를 짓고 술을 마시며 함께 지내는데, 스스로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 불렀다.

 

 

이들은 광해군에게 서저들도 관직에 나갈 수 있도록 건의하였으나 묵살되었고, 이에 불만이 커진 이들은 나무꾼, 소금장수, 노비 등을 모아 화적질하면서 재산을 모았다. 고아해군 즉위 4년 1612년에 이들은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銀 수백냥을 강탈하였다가 모두 포도청에 체포되었다.

 

 

이때 정권을 잡고 있던 대북파는 잠재적 위험세력인 영창대군파를 모두 제거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이 칠서(七庶) 사건을 이용하기로 모의한다. 즉, 이 칠서(七庶)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국구(國舅 ..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의 사주를 받고 거사 자금을 마련하려고 도둑질을 저지른 것처럼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박응서(朴應犀)를 회유한다. 이대로 자백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 이에 박응서는 시키는대로 거짓 자백을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당시 인목대비나 그 아버지 김제남의 광해군에 대한 저주나 반대행위는 있었어도, 七庶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하여튼 대북파의 의도대로 김제남과 그 아들들은 사사되었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9살에 죽음을 당했다. 이와 더불어 영의정 이덕형과 좌의정 이항복을 위시한 서인과 남인이 정계에서 축출되었고, 이후 정권은대북파가 독점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광해군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너무 확대되었고, 이는 결국 후일 인조반정의 결정적인 불씨가 되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의 친필족자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친필 족자이다. 영창대군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칠장사에 내려 준 것으로 아들 잃은  어머니의 슬픔과 집권세력의 위세에 시달리는 아픔이 담겨져 있다. 인목대비는 선조의 계비이다. 어린 나이에 선조의 계비(繼妃)로 책봉되어 영창대군을 낳았지만, 1613년 대북파(大北派)의 모략으로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고,자신도 서궁으로 유폐된다.

그 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광해군이 물러나고  다시 대왕대비로 복귀한다.

 

 

이 글씨는 대북파의 위세에 시달리던 자신의 처지를 늙은 소에 비유하고, 광해군은 그 늙은 소에게 채찍을 가하는 주인에 비유하여 자신의 고달픔을 담은 내용이다. 이 글씨는 인목대비(1584~1632)가 영창대군을 잃고, 폐비의 위기에 몰려 용주사의 암자이었던 칠장사(七長寺)로 피신해 있을 때 쓴 것으로 추정된다. 보물 제1627호로 지정되어 있다.

 

 

 

 

                                      老牛用力已多年        노우용력이다년

                                      領破皮穿只愛眠        영파피천지애면

                                      려파已休春雨足        려파이휴춘우족

                                      主人何苦又加鞭        주인하고우가편

 

 

 

 

늙은 소는 힘을 쓴지 이미 여러 해, 목이 찢기고 가죽은 뚫려  다만 부처의 자비스러운 눈 뿐이로구나. 쟁기질과 써래질이 이미 끝나고 봄의 물은 넉넉한데, 주인은 어찌 심하게도 채찍질하는가 ?

 

 

 

 

 

 

 

 

 

 

 그러나 조선은 광해군의 적통여부(嫡統與否)를 둘러싸고 국론이 양분된다.  즉 적통론을 주장하는 유영경(柳永慶) 중심의 소북파(少北派)에서는 광해군이 적자가 아니고, 명나라의 허락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창대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명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을 중심으로 한 대북파(大北派)에서는 광해군이 전란 수습의 능력이 입증되었고, 즉위 후 탁월한 외교정책으로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였으므로 계속 광해군으로 하여금 나라를 이끌어가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혼란 속에서 광해군은 당쟁의 폐해를 막고 억제하려다가 오히려 대북파의 책동으로 그의 동복형인 임해군 그리고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과 아들인 영창대군을 역모로 몰아 죽여 버렸다. 자신보다 나이 어린 인목대비는 폐서인(廢庶人)하여 서궁(西宮)에 유폐시킨다.인목대비는 광해군보다  9살이 어렸지만, 공식적으로는 어머니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조치가 광해군의 뜻은 아니었다. 임해군은 실제 역모의 사실이 있었으며 대북파의 주장은 더욱 강경하였지만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키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을 뿐 폐모시키지는 않았다.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西人세력이 광해군을 패륜아로 몰기 위한 조작이었다.

 

 

 

 

                                                인목대비와 막걸리

 

 

 

 

영창대군은 죽고, 그 어머니 인목대비는 제주도로 귀양을 갔다. 제주도에 귀양 간 인목대비는 갖은고초를 겪었음은 뻔한 일이다. 문제는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날 인목대비는 쌀로 빚은 술 즉, 청주를 만들고 술 찌꺼기를 버리는것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이것이 ' 마구 버리는 술 '이라 막걸리이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을 먹고난 다음에 남는 것을 싸게 팔아 인목대비는 생활고를 이겨낸 것이다. 그래서 임금님의 어머니가 만든 술이라고 해서 모주(母酒)라고 한다.

 

 

사실 막걸리는 농주(農酒)나 가주(家酒)로 불리지만, 모주라는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막걸리의 빛깔은 유백색, 이것이 어머니의 젖 빛깔이다.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먹듯이, 농민들이 이것을 먹어야 힘이 불끈 솟아 오른다. 그런데 인목대비가 제주도로 귀양갔었나 ? 서궁(현재 덕수궁)에 유폐되었던 것으로 나오는데....

 

 

 

 

 

 

 

 

 

 

 

 

                                                 영창대군과 七長寺

 

 

 

 

경기도 안성시 칠장리 칠현산 기슭에 있는 칠장사(七長寺)는 신라 선덕여왕 5년(636년)에 자장율사가 세운 고찰이다. 그 후 고려 현종 5년 (1014년)에 혜소국사가 중수한 뒤 여러 차례의 중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623년 인목대비는 광해군에 희생된 자기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영창대군을 위해 칠장사를 원찰(願刹)로 삼고 크게 중수하였는데, 그때 하사한 괘불탱과 친필 족자가 지금도 남아 있다. 

 

 

 

 

 

 

 

 

 

 

                                                    영창대군의 죽음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영창대군이 당시 강화부사 정항(鄭沆) 에 의하여 증살(烝殺...증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영창대군이 강화도에서 죽을 당시 그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정온이 그 의문을 제기하기에 광해군은 정항(鄭沆)을 불러 철저히 조사하지만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겨나고 仁祖가  즉위하여  西人세력이 집권하자 본격적으로 살해설이 나온다.

그리고 정항을 불러 처벌하라고 하지만 仁祖는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명분으로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한다. 의심 받았던 광해군은 철저히 조사하였지만, 오히려 인조는 피하였던 것이다.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는  仁祖反正 이후 대왕대비로 복권되어 권력의 중심에 있었는데

자신의 아들을 죽인 그들을 조사도 하지 않고 살려 둘 뿐만 아니라 벼슬도 계속 유지되었다.인조반정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광해군을 패륜아로 몰아가면서, 정작 살해의 혐의를 받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는 조사도 하지 않았다.  이 것이 권력이고 역사일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서인세력들에 의해 제기된 영창대군의 죽음은 이러하다. 즉 영창대군의 방에 불을 때어 연기로 증살(蒸殺)시켰다는 얘기... 반대로 영창대군이 빨리 죽게 하기 위하여 방에 불울 넣지 않고 그래도 죽지 않자 잿물을 먹여 죽었다는 얘기... 또는 강화부사 정항이 영창대군에게 밥을 주지 않아 기력이 다해 죽었다는 얘기... 

 

 

기록할 때마다 얘기가 달라 진다.  이래서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라고 한다. 강화부사 정항은 북방의 국방을 단단히 지킨 훌륭한 무인(武人)이었지만, 역사는 그를 이렇게 농락하고 만다.

 

 

 

 

 

 

 

                                           영창대군의 죽음 ... 광해군일기

 

 

  

 

 

정항(鄭沆)이 강화 부사로 도임한 뒤에 영창대군에게 양식을 주지 않았고, 주는 밥에는 모래와 흙을 섞어 주어서 목에 넘어갈 수 없도록 하였다. 읍 안의 한 작은 관리로서 영창대군의 위리(圍籬 .. 가시 울타리)를 수직한 자가 있었는데, 불쌍히 여겨 몰래 밥을 품고 가서 먹였는데, 정항이 그것을 알고는 곤장을 쳐서 내쫓았다. 

 

 

그러므로 영창대군이 이때부터 밥을 얻어 먹지 못하여 기력이 다하여 주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 정항은 그가 빨리 죽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 온돌에 불을 때서 아주 뜨겁게 해서 태워 죽였다. 영창대군이 종일 문지방을 붙잡고 서 있다가 힘이 다하여 떨어지니 옆구리의 뼈가 다 탔다 '고 하였다. 지금의 강화도 사람들은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영창대군의 죽음 ...  인조실록

 

  

 

 

 

광해군이 이정표를 別將으로 삼아 지키게 하면서 몰래 빨리 죽이도록 하자, 이정표가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이 거처하는 곳으로 가서 방에 불을 넣지 않았다. 이에 영창대군이 늘 의롱 위에 앉았고, 때때로 섬돌 가에 나아가 하늘을 향하여 빌기를 ' 한 번 어머니를 보고 싶을 뿐이다 '하였다. 이정표가 음식에다 잿물을 넣어 올리자 영창대군이 마시고서 3일 만에 죽었다. 강화 사람들이 지금도 이 일을 말하려면 슬픔으로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한다.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였나 ?

  

 

위와 같이 영창대군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뒤죽박죽일 정도로 일관성이 없다. 위의 기록만 보아도 강화도 사람들이 애통해 했다는 내용만 같을 뿐, 영창대군이 죽은 원인이라든지, 살해를 주도한 사람까지 다르다. 더욱이 정설(?)처럼 전해지고 있는 증살(蒸殺)은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식으로 그저 가설로만 나와있는 것이다.

  

 

두 기록 모두 仁祖反正 이후에 나온 것이니 영창대군의 死因을 조사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일관성 없는 기록만 남아 있으니, 영창대군이 진짜 살해당하기나 한 것인지, 광해군을 폄하하려는데 그 증거가 발견 안되니 대충 얼버무린 것인지 의혹투성이다. 그리고 위의 기록에서 영창대군 살해를 주도하였다는 또 하나의 인물인 이정표... 효종 때로 가면 仁祖 옹립공신인 이시백이 자기가 알아서 이정표는 아무 죄도 없다고 시인해 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벌어진다. 

 

 

 

 

 

 

 

 

 

 

 

                                               계축일기        癸丑日記

 

 

 

 

조선시대의 문학에는 흔히 ' 궁중 문학 '이라고 불리는 분야가 있다. 궁중 문학 작품은 궁중이라는 특수하고도 폐쇄적인 곳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 것이어서, 작품의 배경이나 등장 인물은 물론 낱말과 문장도 일반 문학 작품과는 크게 다르다.                                      

 

 

 

 

 

 

 

 

 

계축일기(癸丑日記)는 ' 인현왕후전 (仁顯王后傳) ' 그리고 ' 한중록 (恨中錄) '과 함께 궁중문학을 대표하고 있는데, 조선의 15대 임금인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臨海君)과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참혹하게 죽이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서궁(西宮 .. 지금의 덕수궁)에 가둔 사건을 인목대비 편의 시각에서 그린 작품이다.

 

 

이 계축일기는 ' 애초에 즉위하지 말았어야 할 광해군이 온갖 악행과 폭정을 저질렀다 '는것을 기본시각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광해군은 세자일 때부터 흉악한일을 꾸몄으며, 임금이 된 후에는 무능하여 나랏일을 제대로 살펴보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불효하고 계모를 가두는 패륜을 저질렀다고 적고 있다.

 

이 계축일기는 당시의 어떤 궁녀가 쓴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인목대비나 영창대군의 누나인 정명공주가 썼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아울러 광해군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면서 과장함으로써, 사실이 아닌 내용도 들어가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영창대군 묘지명            永昌大君 墓誌銘

 

 

 

 

 

묘비가 아닌 무덤에 담겨 있는 묘지명(墓誌銘), 즉 죽은 이의 이름, 생몰년(生歿年), 집안 내력, 주요 발자취 등의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는 한 인물의 개인사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서 이루어진 생활, 문화,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역사 교과서라 볼 수 있다.

 

 

왕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묘지명과 관련된 유물은 고려시대 관료계층을 중심으로 시작되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왕실과 사대부 뿐만 아니라 하급 관리, 부호, 중인 등의 다양한 계층으로까지 퍼지게 되었다.  

 

 

 

 

 

 

 

 

묘지명은 묘주(墓主)의 약력을 기록하여 상석(床石) 밑에 부장하는 것이다. 1971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4911번지에  있던 영창대군의 묘는 성남시 도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으로 이장되었는데, 이때 묘지명이 함께 수습되지 않고 그대로 남겨진 것이 발견되었다. 같은 해에 도시가스관을 가설하는 공사를하는 도중에 파손되어 방치되었다가 관계기관에 신고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영창대군의 묘지명은 1623년 (선조 1년)에 대리석으로 제작되었으며, 크기는 높이 107cm, 두께 20cm이다. 비문은 신흠(申欽)이 짓고, 음기(陰企)는 김천령(金千齡)이 해서로 썼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오성과 한음             鰲城과 漢陰

 

 

 

 

 

오성(鰲城)은 이항복의 군호(君號)일 뿐이요, 호는 필운(弼雲)이라고 했다가 뒤에 백사(白沙)로 바꾸었다. 한음(漢陰)은 이덕형의 호이다. 그들은 과거시험장에서 처음 만나 일면여구(一面如舊)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같은 시험에 급제한 것은 아니었다. 한음이 문과에도 빨리 급제하였고, 벼슬도 빨리 올라갔다. 다 같이 영의정을 역임하였지만 한음은 37세에 영의정이 되었고, 오성은 그보다 훨씬 늦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대북파 정권의 폐모살제(廢母殺弟)를 반대하다가 죽었다. 한음은 1523년(광해군 5) 8월 8일에 영의정으로서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을 반대하다가 9월에 삭탈관직되어 용진(龍津)으로 물러나 울면서 굶어 죽었고, 오성은 한음의 묘지문(墓誌文)을 써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그리고 오성도 1617년 (광해군 9) 11월 23일에 페비정청(폐비청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시 삭탈관직되어 용강(龍岡) 북청(北靑)으로 귀영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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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1.09.28 00:14

    첫댓글 영창대군을 보면 참으로 어린나이에 저렇게 참혹하게 죽은것이 정말 안타깝습니다.인목대비가 어린자식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하고 자식이 유배가서 끔찍하게 살해 당하였으니 얼마나 부모로서 슬펐겠습니까?권력이 무섭습니다!!

  • 11.09.28 23:21

    예나 지금이나 자기들을 위하여는 물 불을 안가리고 정치보복은 여전 하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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