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BA
넬슨 만델라가 좋아했던 그룹 아바. 그들의 음악을 듣노라면 마치 천상의 노래처럼 하늘나라로 훨훨 날아가는 듯 하다.
1970년대,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독보적인 존재는 운명(하지만, 재능과 치열하고도 고된 작업의 결과로)처럼 나타난 스웨덴의 한 그룹이었다. ABBA, 2쌍의 커플로 이루어진 이 그룹은 70년대의 가장 성공적인 활약상이었으며, 심지어 20세기를 통틀어서 가장 커다란 사건중의 하나로 기록된다.
전세계가 아는 사실은 ABBA의 신화가 1974년 4월 그들이 Waterloo로 유러비젼 송 컨테스트에서 우승한데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당시 ABBA는 2년간 그 이름으로 활동해 왔었고 맴버 개개인들은 스웨덴 음악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베테랑들 이었다.
ABBA의 역사는 비요른과 베니가 처음만난 1966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요른 울바에스(Bjorn Kristian Ulvaeus)는 포크밴드인 '후트내니 싱어즈(the Hootenanny Singers)'의 맴버였으며, 반면 베니 안데르손(Goran Bror Benny Andersson)은 당시 스웨덴의 최고 인기그룹 '헵 스타즈(Hep stars)'의 키보드 주자였다.
1966년 여름, 두 그룹이 처음 대면했을 당시 그들은 스웨덴의 인기있는 음악 축제인 Folkpark Tour에 참가중 이었다. 당시, 군입대 예정이었던 후트내니 싱어즈는 송별회 파티에 헵 스타즈를 초대했고, 그 자리에서 처음 만난 비요른과 베니는 그들 사이에서 많은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여름이 지난후 다른 파티 석상에서 만난 비요른과 베니는 서로 함께 음악작업을 할 것을 약속했다.
비요른 부친의 도움으로, 한밤중 비요른 부친 사무실에 그들의 악기와 앰프를 옮긴 비요른과 베니는 곧 작업에 들어가서, 나중에 Hep stars에 의해 녹음이 되는 Isn't It Easy To Say를 완성하게 된다. 훗날 ABBA라는 거목으로 자라나게 될 씨앗이 뿌려진 순간이었다.
1969년에 들어서, 두 그룹의 인기는 점차 쇠퇴 하기 시작했고, 각각의 여름 순회공연 이후, 후트내니 싱어즈는 비정기 라이브 공연과 함께 의무적인 음반작업을 이어 나갔지만, 반면 베니는 헵 스타즈의 맴버 전원과 함께 그룹을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비요른과 베니는 후에 아바의 매니저가 되는 스틱 안데르손(Stig Anderson)의 후원으로 곡 제작과 음반작업을 계속해 나간다. 스틱은 베니와 비요른의 작곡과 음반제작 능력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들에게 곧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리라고 보장을 했다.
비요른과 베니의 두번째 싱글은 Hej Gamle Man(Hey Old Man)이었으며, 이곡은 비요른과 베니의 약혼녀들인 아그니타(Agnetha Ase Faltskog)와 프리다(Anni-Frid Synni Lyngstad)가 백보컬을 담당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훗날 미래의 ABBA 맴버가 되는 4명이 같은 음반에 등장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967년 가을 이래로 음반을 내놓으며 활동을 해온 프리다는 1969년 3월 스웨덴의 남부지방인 Malmo에 있는 한 캬바레 무대에 출연중에 베니와 처음 만났다-당시 헵 스타즈는 Malomo에 있는 다른 무대에 출연하고 있었다. 아그니타는 1968년초 성공적인 데뷔이후 줄곧 솔로로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1969년 5월 그녀는 비요른과 우연히 같은 TV쇼에 출연하게 된 이후,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1970년 11월, 그들 4명은 공식무대에 처음으로 등장했는데, Festfolk 축제의 캬바레가 바로 그곳이었다. 이 첫번째 시도는 결과적으로는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룹을 결성하고자 하던 모든 계획이 일단 보류되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들은 서로의 음반에 계속 모습을 나타 내었고, 다른 모임에서도 같이 공동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1971년 7월 비요른과 아그니타가 결혼을 하게 되고, 그해 가을, 비요른과 베니는 스틱의 회사인 폴라뮤직에서 하우스 프로듀서로 일을 시작한게 된다.
1972년 봄, 다시 그룹결성을 추진하려는 노력이 결정되고, 진정한 첫번재 아바의 싱글인 People need love가 녹음 되었다. "Bjorn & Benny, Agnetha & Anni-Frid"라는 다소 긴 이름으로 발매된 첫싱글은, 스웨덴 차트에서 20위권에 들어가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972년 가을, People need love의 성공이후, 그룹으로서의 그들의 장기적 미래가 불확실함에도 불구하고 두커플은 앨범제작에 돌입한다.
1973년 2월, 유러비젼 송 콘테스트 출전곡으로 비요른, 베니, 스틱이 공동제작한 Ring Ring을 선택한다. 스웨덴 예선당시, 아그니타는 비요른과의 첫번째 아이인, 딸 린다의 출산이 임박해 있던 상태였지만 본선진출을 위해서 맹연습을 거듭했다.
당시 그룹은 겨우 3년째 해를 마친 상태였지만, 스웨덴 국내예선에서 Ring Ring의 스웨덴, 영어버젼 두곡의 인기는 단연 최고였다. 그리고 그들의 곡은 스웨덴 싱글, 앨범 차트에서 3개의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그렇지만 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본선진출에 좌절하고 만다. 스웨덴 국내예선 심사 위원들이 다른 곡의 손을 들어 준 것이었다.
ABBA's live performance on the Dick Cavett Meets ABBA television special. Year: 1981
이때 그들 그룹의 이름이었던 Björn & Benny, Agnetha & Frida는 모든이들이 너무 길고 불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매니저 스틱은 그들 이름의 첫글자를 따 ABBA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한 신문사에서 개최한 Björn & Benny, Agnetha & Frida 의 새명칭 공모에서도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명칭에 대한 새 결정은 확정되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스웨덴에 이미 "ABBA"라는 이름의 생선 통조림 가공회사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스틱이 그 회사에 인기 팝그룹에게 이름을 빌려줄 수 있는지를 문의했을때, 다행히도 그회사는 반대하지 않았다.(물론 회사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1973년 여름동안, ABBA는 스웨덴 Folkpark에 참가했다. 그러나 순회공연 참가는 가을까지 계속되지 못했다. 다음 앨범의 제작에 착수했을때 'ABBA'는 그들의 정식이름으로 확정되었다. 1년후 , 비요른, 베니, 스틱은 유러비젼 송 콘테스트의 우승을 위해서 새로운 곡의 제작에 들어간다. 그 결과로 나온 Waterloo는 1974년 2월 간단히 스웨덴 예선을 통과하게 되었고 마침내 1974년 4월 6일, 영국 남부 휴양지 Brighton에서 개최된 본선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하게 된다.
Waterloo는 ABBA의 진정한 첫번째 국제적인 히트곡이 된다. 영국, 서독, 노르웨이, 벨기에에서 1위를 차지하였고, 다른 여러나라에서는 Top5안에 들게 되었다. 심지어 팝의 본고장 미국도 Waterloo의 무서운 인기 열풍에 무릎을 꿇게 되었고, Waterloo는 빌보드챠트 6위까지 오르게 된다.
이후 18개월간 일부 유럽국가에서의 인기를 제외하고는 Waterloo 이외의 싱글들이 영국챠트에서 고전을 면치못했다. 드디어 언론에서는 아바는 반짝스타라는 평가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1974년 가을과 겨울, 그리고 1975년 초 ABBA는 유럽순회 공연과 3번째 앨범 녹음 작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간단히 'ABBA'라고 명명된 3번째 앨범은 1975년 봄에 발매되었다. 이 앨범의 3번째 수록곡 SOS는 마침내 영국챠트에선 커다란 히트를 기록하게 되엇고, 이것은 이후 연속되는 18개의 Top10히트곡들중 첫번째 것이 되었다.
SOS 다음으로 등장한 Mamma Mia는 Waterloo이후 첫번째 영국챠트 1위곡이 된다. Mamma Mia와 함께 발표된 I do,I do,I do,I do,I do로 1975년 여름 호주에서 ABBA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된다. ABBA는 다른 여러나라에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중에서도 호주는 가장 열렬히 아바를 사랑한 국가였다.
1976년 3월 ABBA의 대표적인 곡중의 하나인 싱글 Fernando가 발매되었다. 같은달 ABBA는 그해 가을에 발매되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될 앨범 Arrival의 녹음작업에 들어간다. Arrival 앨범은 1976년 8월에 발매된 싱글 Dancing Queen의 인기에 힘입어 발매전 예약이 600만장에 달할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된다. Dancing Queen은 원래 스웨덴 국왕의 결혼 축하곡으로 제작 되었으며 Fernando와 같은때인 발매 1년전 1975년에 녹음되었다. 아바의 싱글중 최고판매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ABBA의 유일한 빌보드챠트 1위곡 이기도 하다.
Arrival 앨범에서 인기를 얻은 두번째 싱글은 Money,Money,Money였고, 이곡이 인기챠트를 휩쓸고 있을때, ABBA는 1977년 2월에 시작될 유럽및 호주순회공연 준비로 바쁜 상태였다. 특히, 런던의 Royal Albert Hall에서 열린 2차례의 콘서트에서는 단 1만장의 표를 구하기 위해 350만명이나 신청을 해, 영국언론은 아바매니어가 비틀매니어를 잠재울만 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1977년 투어는 어느곳이든지 만원사례를 기록한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고 이러는동안, 새로운 ABBA의 싱글곡 Knowing Me Knowing You가 영국챠트에서 5주연속 1위를 차지하게 된다.
1977년 3월, 순회공연의 무대가 호주로 옮겨졌을때 장편영화인 ABBA-The Movie의 작업이 시작된다. 이영화는 이듬해인 1978년 전세계에 개봉되어 Star Wars같은 영화들과 경쟁하여 흥행순위 7위를 달성하는 성공을 거두게 된다. 국내에서도 개봉되었는데, 그때 라디오 Pop프로그램 DJ들이 영화에서 '애바'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다들 한동안 '애바'라고 부르기도 했고, 영화에 나오는 아그니타와 프리다의 힙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순회공연후 스톡홀름으로 돌아온 비요른과 베니는 새로운 곡의 제작에 들어간다. 1977년 5월 ABBA-The Album의 녹음작업이 시작된다. ABBA-The Album은 1977년 12월에 처음 발매된다.(이것은 북유럽 국가들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머지 국가들에서는 1978년 초에 발매가 시작된다.) 이 앨범에서 The Name Of The Game이 먼저 인기를 얻기 시작하는데, 스웨덴에서 앨범이 발매될 무렵 아그니타는 비요른과의 두번째 아이인 아들 Christian을 얻게 된다.
ABBA-The Album의 두번째 인기챠트 진입곡은 Take A Chance On Me 였는데 이곡은 빌보드챠트 3위까지 오르게 된다. 1978년 봄, ABBA는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ABBA의 매력에 대해 약간의 저항감을 가지고 있던 미국에서 대규모 홍보활동을 가지게 된다. 이 결과로 ABBA-The Album은 앨범챠트 상위(14위)를 차지하게 된다.
ABBA는 홍보활동을 마치고 재빨리 스튜디오로 돌아와 새 앨범에 들어갈 곡들의 녹음작업을 시작한다. 그 작업의 첫번째 결과로 1978년 9월에 Summer Night City가 싱글로 발매된다. 결과적으로 이곡은 다른 앨범에 수록되지는 못하지만, ABBA의 고국 스웨덴에서 마지막 1위곡이 된다. Summer Night City가 정상을 차지한 1978년 10월 6일 베니와 프리다는 약혼 9년만에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된다.
1979년 1월, ABBA는 또 한곡의 싱글인 Chiquitita를 내놓는데 이곡은 뉴욕에서 있었던 유니세프 자선기금 마련 All Star Concert에서 처음으로 연주된다. Chiquitita는 1979년 ABBA의 가장 큰 히트곡이 된다. Chiquitita의 싱글발매 소식과 함께 무척이나 슬픈 소식하나가 알려지게 된다. 그것은 비요른과 아그니타가 최종적으로 이혼에 합의했다는 뉴스였다. 비요른과 아그니타의 이혼이 ABBA의 끝을 의미한다는 무성한 추측에도 불구하고 맴버들은 그들의 파경과는 상관없이 계속해서 공동으로 작업해 나갈 것을 동의 했다. 새로운 앨범 제작은 봄까지 계속되어 마침내 1979년 4월 Voulez-Vouz 앨범이 발매된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나온 싱글 Does Your Mother Know는 비요른의 마지막 리드보컬 곡이 되었다.
1979년 가을, ABBA는 북미대륙과 유럽순회 공연을 시작했으며, 동시에 새로운 싱글 Gimme Gimme Gimme를 발매했다. 순회공연은 11월 아일랜드에서 끝났으며 곧이어 명곡 I Have A Dream이 싱글로 발매된다.
ABBA는 새해가 되면서 새로운 앨범제작을 계획했었는데, 1980년도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75년 이래 처음으로 레코딩 작업에서 벗어나서 휴식을 취했는데, 그사이에 3월에는 그들의 마지막 순회공연이 된 일본공연을 3주동안 펼쳤다. 그해 7월 새로운 싱글인 The Winner Takes It All이 발매되고, 곧이어 영국과 네덜란드, 벨기에에서 차트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그 다음에 발매된 싱글은 1980년 11월에 발매된 앨범 Super Trouper의 타이틀 곡인 Super Trouper 였는데, 이곡은 9개의 영국차트 1위곡들중 마지막 곡이었다. 이런 대기록을 가졌던 아티스트는 그때까지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그리고 클리프 리챠드 밖에 없었다.
1981년 2월 더욱 더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베니와 프리다가 합의했다는 것이었다. 아그니타와 비요른이 한것처럼 베니와 프리다 역시 그들의 이혼이 ABBA활동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룹은 곧 그들의 마지막에 앨범 제작에 들어간다.
1981년 12월, 싱글 One Of Us와 앨범 The Visitors가 동시에 발매된다. 싱글과 앨범 양쪽모두 발매즉시 전유럽에서 챠트 상위에 랭크된다.
1982년은 그들이 그룹으로써 함께한 마지막 해였다. 새로운 앨범제작을 계획했었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싱글 두곡과 함께 그간의 히트곡을 편집한 더블앨범 The Singles-The First Ten Years를 내놓았다. 앨범은 곧 여러개의 챠트에서 정상을 차지하지만 두개의 싱글곡중 첫번째 곡인 The Day Before You Came에 대해서는 반응이 엇갈렸다. 영국에서는 겨우 32위에 그쳤지만 스웨덴,노르웨이,네덜란드에서는 Top 5에 들었고, 벨기에에서는 챠트 정상을 차지했다.
최후의 아바 싱글곡은 1982년 12월에 발매된 Under Attack인데, 이곡은 작지만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이러는 동안, ABBA의 멤버들은 ABBA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며 각자의 새로운 목표에 대한 도전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다시는 함께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몇년후 팝뮤직 팬들의 관심이 새로운 그룹이나 새로운 사운드로 돌려졌을때, 스웨덴 출신 4인조 혼성그룹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1990년대 들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히트곡을 편집한 앨범인 ABBA Gold가 1992년에 발매되자마자 전세계적으로 챠트정상을 차지하면서, ABBA가 발표했던 앨범들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이 재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ABBA의 재결성은 미지수이다. 그리고 ABBA의 멤버들은 재결성에 대해 여전히 부인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들의 음악은 아직도 누구나 즐길 수 있으며,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음악적 유산인 것이다. |
첫댓글 언제들어도 참 좋은 노래,,그룹 아바의 노래들,,,,잘 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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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펜입니다.....너무좋아합니다........아바노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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