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의 배낭엔 즐거움 가득
-강화도 기행-
2017. 2. 금계
2월 5일 오전 10시, 안드레아 부부와 우리 부부는 안드레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홍 지점장이 사는 강화도를 향하여 출발했다. 안드레아와 홍 지점장은 스무 해 전 농협 목포 죽교동 지점에서 같이 근무했고, 나와 홍 지점장은 나주에서 광주로 함께 기차통학을 한 중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서해안 고속도로에는 안개가 자욱하였다. 서산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보 84호 마애삼존불상을 구경하였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을 들었다.
본존불상은 넉넉한 미소를 띠고 있다. 좌협시보살과 우협시보살. 왼쪽은 과거의 보살이고 오른쪽은 미래의 미륵보살이라 하던가. 이 마애불상이 발견된 것은 50년 전인데 부여박물관장 홍사준 박사가 나무꾼한테 물어보니 산신령이 한 분 있는데 오른쪽은 작은마누라, 왼쪽은 큰마누라라고 하더란다.
본존불상의 입술은 불그스름한데 연지를 바른 것이 아니라 바위 속의 철분이 나타난 것이라 한다. 마애불상은 위쪽이 더 앞으로 튀어나오고 아래쪽이 비스듬히 안쪽으로 들어가 있어서 빗물을 막고 또 마애불상 위쪽에는 툭 튀어나온 바위가 있어서 비바람을 막아준다.
국보 84호 마애불상은 천 년을 산신령처럼 미소 머금은 채 끄떡없는데 백 년을 못 사는 인간들은 거푸 세대가 바뀌면서 얼굴들이 뒤바뀌어 바위에 경배한다. 헛되고 헛되도다, 덧없고 덧없어라. 사람의 오고 감이여, 사람의 살고 죽음이여!
인천대교 기념관
(초지진)
인천대교 기념관과 정서진을 거쳐 석양녘에야 강화도 초지진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홍 지점장 내외와 합류했다. 6시, 수위가 문 닿을 시간이라면서 빨리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라 했다.
1871년(고종 8) 4월 23일 미국 해병 450명이 함포의 지원을 받으며 초지진에 상륙하였다. 초지진 수비대가 이들을 맞아 싸웠으나 화력의 열세로 결국 미군에 점령당했다. 군기고 화약고 등이 미군에 의해 모두 파괴되었다.
1875년 8월 21일, 운양호가 초지진 포대에 접근하여 왔다. 이에 초지진 수비군이 일본 함정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자, 운양호는 110㎜와 40㎜ 함포로 포격을 해 초지진 포대는 일시에 파괴되고 말았다. 이후 일본군은 영종진에서 방화, 살육, 약탈을 자행한 후 퇴각하였다.
광성보 안해루(按海樓)
초지진을 나와 광성보를 구경했다. 사적 제 227호. 고려시대 몽고 침입에 대항하여 흙과 돌로 강화외성을 쌓았다. 효종 9년(1658) 여기에 광성보를 만들었다. 숙종 때는 광성보 안에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의 소속 돈대를 완성했다.
신미양요(1871)때 광성보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병 450명으로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은 극동함대의 함포 지원사격을 받으며 광성보로 쳐들어왔다. 조선군은 화력의 열세에도 끝까지 싸워 중군장 어재연과 그의 아우 어재순, 군관을 비롯한 49인의 장수와 200여명의 군사가 전사하였다.
이때 파괴된 누각과 성곽 등은 1976년 복원되었다. 광성보에는 어재연 등 장수들의 용맹을 기린 쌍충비각과 무명 병사들의 무훈을 기린 무명용사비가 세워져 있다.
(광성보 용두돈대)
저녁은 간장꽃게와 꽃게탕, 맛이 좋았다. 막걸리와 소주로 회포를 풀었다.
술 마신 뒤 홍 지점장의 차와 안드레아의 차는 사모님들이 운전했다.
(펜션 발코니에서 바라다본 얼어붙은 저수지)
홍 지점장이 소개한 펜션에서 잤다. 펜션 바깥이 바로 널따란 저수지였다. 그래도 강화도는 목포보다 추운지 물이 꽁꽁 얼어붙었다. 펜션 부근의 분위기가 일류 호텔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아침을 펜션에서 라면 누룽지와 고구마 떡 과일로 간단히 때웠다.
우리가 묵었던 펜션 주인은 팔순을 넘긴 상보 안근준 선생. 홍 지점장과 교류가 있단다. 안 선생의 한글 궁체는 옛 초등학교 서예 책에 실렸단다.
아침을 먹고 그분의 갤러리를 구경했다. 우리가 묵은 방 바로 곁에 갤러리가 있었다. 한글 붓글씨가 참 예뻤다.
(홍 지점장의 강화도 농토에 들어선 컨테이너 가옥)
홍 지점장은 농과대학을 마치고 농협에 취직했다. 지점장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퇴직했다. 김포에 아파트가 있고, 우연한 기회에 강화도에 오백 평 남짓의 토지를 장만하여 컨테이너 주택을 들어앉히고 겨울에만 폐쇄하고 봄여름가을로 김포와 강화를 오가면서 농사를 지은 지 벌써 십 년이 되었다 한다.
홍 지점장은 농대 출신이라 농사짓는 기반이 탄탄하다. 김포 아파트에서 오줌도 버리지 않고 강화도까지 날라다가 퇴비더미에 부어 거름을 한단다. 나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훤히 알쪼다. 배추를 심어 김장을 너끈히 담고 아침에 맛본 군고구마는 어찌 그리 달고 사근사근한지 입에 쩍쩍 달라붙었다.
(홍 지점장의 잔디밭 가에서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항아리들)
전등사로 갔다. 어제(2월 5일)는 하루 종일 안개가 끼고 날씨가 흐려서 전망이 좋지 않았는데, 오늘(2월 6일)은 햇빛이 짱짱해서 구경 다니기에 아주 좋은 날씨였다.
전등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의 말사이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고 했다고 한다.
1266년(원종 7)에 중창하였고,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1282년(충렬왕 8)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옥등(玉燈)을 시주했으므로 절 이름을 전등사(傳燈寺)로 고쳤다 한다.
홍 지점장이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 웅크리고 앉아 추녀를 떠받치고 있는 나녀상(裸女像)을 가리키며 거기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울분을 참을 길 없던 도편수는 그 여자를 본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떠받치게 하였다.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악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했단다.
전등사를 내려오는 길목에서 홍 지점장은 풍수의 기본을 이야기한다. 대개의 절들은 명당에 자리 잡고 있는데 그 기본은 배산임수, 좌청룡 우백호란다. 뒤에 산을 등지고 앞에 물이 흐르고 좌우에 산줄기가 내리뻗어 바람을 막아주는 곳이 명당이 아니고 뭐겠는가.
(전등사 사하촌 목포식당)
주차장에 내려오니 목포식당이 눈에 띈다. 커피를 파느냐니까 없다고, 식당 안에 설치한 자판기 커피는 그냥 줄 수 있다 해서 한 잔씩 얻어마셨다. 왜 목포식당이냐고 물으니까 시어머니 고향이 목포시 죽동이란다. 타향에 가면 고향 까마귀만 보아도 반갑다더니 목포식당이라는 간판만 보아도 반갑다. 목포식당에서 조금 올라간 곳에는 또 목포식당 2호점도 있었다. 거기는 시어머니의 둘째아들이 운영한단다.
목포식당에 걸린 그림이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가 닭의 해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강화도 풍경
두 대의 suv 차량은 전등사를 떠나 북쪽으로 올라갔다. 평화전망대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전망대가 가까워지자 검문소가 나오고 군인들이 주민등록증 제시를 요구했다. 평화전망대는 접적지역에 있었다. 2km 바다 건너가 바로 북녘 땅이었다.
4층 전망대에서는 전방으로 약 2.3㎞ 해안가를 건너 흐르는 예성강, 개성공단,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신시가지,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단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 땅)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 중국, 일본과 미국 소련 등 강대국의 틈새에 끼어 끙끙 앓고 부대끼는 우리들의 초라한 모습을 절절하게 보여주는 곳. 남쪽과 북쪽을 나눈 것은 전혀 우리의 뜻이 아니었다. 나는 500원 동전을 넣고 망원경으로 바다 건너 북녘 땅의 논밭에서 서성이는 동포들의 모습을 눈이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민족이 무엇인가?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전통과 문화를 이어받고, 핏줄이 얽히고설킨 사람들이 민족 아닌가. 우리 민족을 갈라놓은 작자들이 누구인가. 지도에 잣대로 38선을 그은 자들이 아닌가.
광복 70년, 홍 지점장이 45년 생 해방둥이, 내가 46년 생 거의 해방둥이, 바로 홍 지점장과 내가 우리나라 70년 쓰라린 분단의 희생자이자 분단의 아픔을 몸으로 뼈저리게 겪은 장본인들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 땅)
남한은 북한을 소련 중국의 괴뢰라고 비아냥거리고, 북한은 남한을 미제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정권을 잡은 자들은 저마다 분단을 이용하여 저들의 종주국을 신주단지 모시듯 떠받들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형국이다.
나는 인생 70년 만에 강화도를 처음 구경하고, 평화전망대에 올라 2km 떨어진 북녘 땅을 처음 구경하면서, 전광용의 소설 ‘꺼삐딴 리’를 떠올렸다. ‘꺼삐딴 리’는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에 아부하고, 해방 공간에서는 소련에 아부하고, 6.25 후에는 미국에 아부하기 위하여 청자를 준비한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이 땅에는 ‘꺼삐딴 리’가 횡행한다.
(전망대에 전시된 북한 화폐)
이게 모두 남의 탓이 아니고 이 땅에서 태어난 내 탓이다. 내 운명이요 우리 민족의 운명이다. 운명은 바꿀 수 없는가. 아니다. 바꿀 수 있다. 언젠가는 우리 민족도 반드시 휴전선을 평화공원으로 바꾸고 한 나라로 뭉칠 것이다. 그 세월을 못 보고 죽을 것이 나는 억울하다.
(전망대에 전시된 북녘 땅 사진)
전망대를 나와 아스라한 북녘 땅을 바라보면서 벤치에 앉아 담배를 꼬나문다. 홍 지점장이 다가와,
“자네는 다 좋은디 담배를 끊으면 더 좋겠네.”
“글쎄 나도 끊을라 한디 뜻대로 한 되네.”
홍 지점장은 고등학생 때 노래를 잘 불렀다.
“나 그 때 자네한테 노래 몇 곡 배웠어. 이 노래도 자네한테 배웠지.”
그러면서 나는 바다 건너 북녘 땅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른다.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로 봄은 찾아온다네. 들 너머 뽀얀 논밭에도 온다네.”
나는 그한테서 ‘석별’도 배웠다.
“서편의 달이 호숫가에 질 때에 저 건너 산에 동이 트누나.
사랑 빛이 감도는 빛난 눈동자에는 근심어린 빛으로 편히 가시오.
친구 내 친구 어이 이별할까나, 친구 내 친구 편히 가시오.“
나는 부모님의 유전자 덕분에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고등학교 때 친구 홍 지점장 덕분에도 음악 애호가가 되었다.
내가 교사가 되면서는 ‘석별’이라는 제목도 모르고 학생들한테 아코디언을 틀어주면서 ‘석별’을 가르쳤다. 정말 좋은 노래였다.
“제목을 모르지만 이 노래 참 좋아야.”
그랬더니 어느 날 제자가 귀띔을 해주었다.
“선생님, 어제 인터넷 검색해 보니 그 노래 제목이 ‘석별’이어요.”
“그래?”
사랑은 음악을 타고 온다. 행복도 음악을 타고 온다. 나는 사람으로 태어나 음악을 즐기게 된 것을 큰 행운으로 알고 있다.
(전등사)
나는 고등학생 때 홍 지점장한테 노래만 배운 게 아니었다. 언젠가는 그 집에서 낚싯대를 빌려 나주 한수동 저수지에서 처음으로 낚시질을 했다. 붕어가 지렁이 끼운 낚시를 물고 찌르르찌르르 요동을 치자 머리칼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면서 오르가즘에 젖어, “와!” 함성을 지르며 낚싯대를 끌어올렸다.
그게 빌미가 되어 훗날 나는 시냇물과 강과 방죽과 저수지와 바다를 갈고 다니며 낚시꾼이 되었다. 모두 홍 지점장 덕분이었다.
또 그 시절 홍 지점장의 아버님은 ‘홍 약방’을 운영하셨다. 신선처럼 맑고 점잖고 기품이 그윽한 분이었다.
그 약방에 들르면 흔히 아버지와 아들이 대국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 당시 이미 아버지한테 배운 홍 지점장과 그 아래 동생은 3급쯤 되는 수준이었다. 나는 바둑 초보였다. 내가 저렇게 놓으면 친구는 이렇게 놓으라고 가르쳐주었다. 그러면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물정도 모르면서 똥고집이 센 것은 예나 지금이나 내 나쁜 점 중에서도 가장 나쁜 점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나는 3급이 못 되고 겨우 6급이나 5급 수준이었다.
“어야, 자네 지금도 바둑 잘 두는가?”
그러자 홍 지점장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응, 가끔씩 두기는 하지만 바둑이나 화투처럼 앉아서 하는 놀이에는 별 관심이 없다네.”
(펜션 갤러리 안준근 씨 작품)
마시, 그게 참 좋단마시.”
그 부부는 함께 강화도 산도 거뜬히 넘으면서 가끔 등산을 즐긴단다. 뿐만 아니라 홍 지점장은 이런저런 모임으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등산을 다니고, 농사일과 등산 덕분에 나는 고혈압, 고지혈증, 전립선 약을 먹는데 반해서 그는 아무 약도 먹지 않는단다.
전등사에 갔을 적에도, 평화전망대에 오를 적에도 나는 계단이나 비탈을 만나면 어김없이 씩씩거리는데 반하여 그는 성큼성큼 거침없이 발길을 옮기던 것이었다. 아이고, 부러워라. 신선이 따로 없구나.
참, 삼신할미도 불공평하시다. 나한테는 아들만 셋을 점지하시더니 홍지점장한테는 딸만 셋 점지하셨다. 다들 잘 살고 있단다. 이제 우리 나이는 아들 딸 걱정할 나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매조지할지 걱정할 나이다.
그도 칠남매의 장남이고 나도 칠남매의 장남이다. 칠십 년을 살아오면서 어찌 어려움이 없고 우여곡절이 없었을까마는 이제는 훌훌 털고 여생을 넉넉하고 여유롭게 관망하고 즐겨야 할 시점이다. 우리 집은 가훈도 없고 그냥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아가는 형국인데, 그의 집에는 가훈이 있단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그는 전등사에서 내려오는 길에 뇌까렸다.
“내 인생의 배낭에는 즐거움이 가득하다네.”
그의 인생이 어디서 어디까지 즐거웠는지 나는 알 길이 없지만 그의 배낭이 나를 기껍게 해주었다. 어찌 인생이 즐겁기만 하였겠는가. 그러나 우여곡절을 겪고 희로애락을 겪은 끝에 즐거움이 가득하다면 그것으로도 그냥 괜찮은 인생이 아니겠는가. 또 진정한 즐거움이라면 숱한 애환과 고락을 거친 뒤끝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이고, 이 고추같이 맵고 익모초같이 쓴 인생의 바다를 건너는 모든 사람들이여, 그대들의 배낭에도 늘그막에는 즐거움이 가득하기를.......
평화전망대를 나와 점심으로 불고기 백반을 먹은 후 작별 인사를 하였다.
칠십이라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씩씩하고 가뿐하고 인생의 배낭에 즐거움을 가득 짊어지고 다니는 오륙십 년 전의 죽마고우와 악수를 나누었다.
넉넉하고 자상하고 낙천적이며 아직도 여전히 소녀처럼 풋풋하고 상큼한 감성이 살아있는 사모님과도 악수를 나누었다.
내비에다 목포를 찍었다. 피곤하였던지 끄덕끄덕 졸다가 눈을 떠보니 이제 겨우 서울 부근을 빠져나왔는데 시계를 보니 출발한 지 한 시간 반이나 지났다. 다들 조느라 차가 밀리는 줄도 몰랐는데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바람에 운전하는 안드레아만 속을 썩였단다.
홍 지점장과 함께 농협 죽교동 지점에 근무하던 안드레아는 농협에서 퇴직하고 다시 농협에 임시로 근무하면서 오랜 경륜에서 터득한 지혜를 맘껏 발휘하고 있단다.
사실 시대의 변천을 고려하자면 이제 육십 언저리의 정년퇴직은 칠십이나 팔십으로 올려도 별 하자가 없어 보인다. 여전히 팔팔하고 건강한 육십을 퇴출시키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안드레아는 침착하고 신중하고 과묵하고 겸손하고 친절하고 예의바르고 낯빛이 온화해서 함께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평안케 해주어 한 군데도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다. 과연 이 세상에 이처럼 순수하고 선량한 사람이 몇이나 될지 궁금할 정도다. 운전 실력도 뛰어나서 졸고 있는 일행에게 누가 될까봐 브레이크도 함부로 밟지 않을 정도로 배려심이 뛰어나다. 아이고, 성모 마리아님! 저한테 이토록 착하고 지혜로운 사람과 연을 맺게 해주어서 감사하나이다.
(전등사)
목포에서 올라갈 때에도, 목포로 내려갈 때에도 안드레아의 부인이 준비해온 CD로 황창연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다.
우리 내외는 종교가 없었지만 홍 지점장 내외는 개신교였고 안드레아 내외는 천주교신자였다. 목포에서 올라갈 때에는 졸음 때문에 황 신부님의 강론을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이었지만 목포로 내려갈 때에는 맑은 정신에 들어보니 그야말로 금과옥조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재미나는 대목이 나올 때마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껄껄껄 폭소를 터뜨렸다.
내가 종교에 발을 딛지 않은 것은 순전히 집안 내력 때문이었다. 우리 아버님은 무신론자였지만 굳이 따지자면 유교 쪽에 가까웠다. 우리 어머님은 점이나 푸닥거리를 좋아하다가 만년에는 기복신앙에 가까운 불교 쪽으로 귀의했다. 우리 할머님은 6.25 전란 후에 열심히 성당에 다니셨다. 우리 삼대할머님과 작은할아버님은 금성산 꼭대기에 산가를 짓고 부처를 모시고 승복을 입으셨다. 우리 작은할머님은 삼대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산으로 올라가 주 예수를 기리는 찬송가를 부르셨다. 원래 우리나라가 그렇지만 우리 집안도 종교가 각양각색으로 화려하게 다채로웠다. 덕분에 나와 우리 남매들은 우왕좌왕하다가 아무 종교도 안 믿는 쪽으로 낙착을 보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다 사람 나름이라고. 경상도 사람도 쓸 만한 사람이 있고, 전라도 사람도 피곤한 사람이 있다고, 교장도 괜찮은 사람도 있고 형편없는 사람도 있다고, 교수나 교사도 잘 하는 사람이 있고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종교인이건 아니건 본받을 만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으리라고........
(펜션 갤러리 안준근 씨 따님 작품)
이제 50을 갓 넘긴 황창연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어깨를 들썩거릴 만큼 웃다가 문득 신부라는 종교적 요소만 빼면 황 신부님과 내 생각의 DNA가 90% 정도 일치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황 신부님한테 배울 점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그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냥 폐부를 콕콕 찌르는 내용이었다. 내가 하도 좋다 하니까, 처음 듣는다 하니까, 아내는 이미 텔레비전에서 여러 번 듣고 웃기도 많이 웃었다 했다.
욕심을 버려라, 미움을 버려라,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살아라, 인생을 계획하라, 남에게 베풀어라, 판검사 대통령을 부러워 말아라, 자식들이 원하는 대로 나아가도록 해줘라, 오늘 행복해라.......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니까 귀에 쏙쏙 들어왔다. 음성이 또록또록하고 힘이 넘쳐서 귀에 쏙쏙 들어박혔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핵심만 꼭꼭 짚어내니 알아먹기가 아주 쉬웠다.
이야기 여기저기에 유머가 차고 넘치니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고 경이로웠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황창연 신부님을 검색해보니 그분에 대한 내용들이 풍성하게 올라와 있었다. 몇 가지 소개하자면,
# 학교 성적이 610명 중 597등이었다. 운동선수들을 빼면 민간인으로서는 최하위였다.
# 신학교를 가려고 대오각성 늦공부를 시작하였다. 한국에서 2106번째 신부가 되었다.
(펜션 갤러리 이방자 여사 작품)
# 천주고 수원교구가 기증받고도 개발 못했던 강원도 평창 산기슭의 땅을 개발하자고 제안했다 > 성령이 황 신부를 보내주었다고 쾌락했다 > 돈이 부족했다 > 황 신부 신학생 때 본당 신부였고 수원교구 원로 사제로 있던 김창민 신부(필립보)가 평생 모아두었던 장학금 20억 원을 쾌척했다 > 필립보 생태마을 - 행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자급자족이 가능한 공동체 만들기
# 생태마을에 문의 전화 : 싱싱한 생태 있느냐, 황태도 있느냐.
# 시각장애인 200명이 생태마을에 왔다.
황 신부 : 뭐가 그리 좋아서 웃으시나요?
시각장애인 : 눈에 뵈는 게 없어서 행복합니다.
시각장애인 : 이렇게 경치 좋은 곳 처음 와 봅니다.
황 신부 : 어떻게 경치 좋은지를 아십니까?
시각장애인 : 신부님, 모르는 소리 마세요. 저 흐르는 강물 소리와 새들의 재잘거리는 소리, 바람이 싣고 오는 달콤한 아카시아 향기, 보지 못해도 알아요. 얼마나 경치가 좋은지......“
# 황 신부 생각 - 두 눈 멀쩡한데 ‘사는 게 지겨워’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라고 불평하는 이들은 복을 누릴 줄 모르는 이들.
# 2013년부터 잠비아 무푸리라 지역 봉사활동. 2015년 잠비아 대통령이 2천 ha 땅 추가 기증, 학교 농장 성당 건립 계획. 농기구 중장비를 한국에서 잠비아로 택배.
# 1년에 300회 이상 강연. 많은 저서와 CD.
# 2017년 1. 19 가수 비와 김태희 주례.
# 어떤 할머니가 강도들한테 납치를 당했다. 그 할머니의 차에는 황 신부님의 CD가 꽂혀 있었다. 며칠 동안 차를 끌고 다니다 황 신부님의 강론을 들은 도둑들은 마음을 고쳐먹고 할머니를 풀어주었다. 할머니는 생명의 은인인 황 신부를 찾아가 100억이 넘는 전 재산을 기증하였다.
@ 행복하게 사는 법 : 운동해라, 감사해라, 텔레비전을 거실에서 치워라, 웃어라, 자신에게 잘해주어라.
@ 유무정란 구별 방법 : 웃느냐, 안 웃느냐. 감사하느냐, 않느냐. 감동하느냐, 않느냐. 나누느냐, 나누지 않느냐.
@ 내 삶을 껴안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
(강화도 초지진 부근의 선창)
목포에 돌아와서 나는 아내한테 물었다.
“언제 한 번 평창 생태마을 가볼까요?”
“그럽시다.”
나는 황 신부님의 말씀과 행적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메! 한국에도 이처럼 향기롭고 그윽하면서도 내공이 깊은 현자가 계셨구나.
황 신부님을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우선 인터넷으로 검색해보시기 바란다. 그분의 저서나 CD를 구해보면 더욱 좋을 것이고.
강화도 나들이 다녀오면서 나는 삶의 배낭에 즐거움이 가득하다는 홍 지점장 때문에 유쾌해졌고, 욕심을 버리고 남을 미워하지 말라는 황 신부님의 강론에 크나큰 감명을 받았다. 날씨는 추웠지만 참 다사롭고 쫀쫀한 나들이였다.
지금도 홍 지점장의 한 마디가 귀에 쟁쟁하다.
금 가운데 지금이 가장 좋다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