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신수길은 분명 홧병으로 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50대, 그것도 전쟁터를 쏘다니던 하급 무인 출신이니 관료들처럼 성인병으로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당시 일본 무장들은 전장에서 죽지 않으면 더럽게 오래들 살았지요. 전국시대 무장 인명록을 뒤지다 현대인과 다를 바 없는 그네들 수명을 확인하고 의아스럽던 기억이 납니다. 70대는 보통이고 90대도 있습니다. 그런데 임금인 선조는 전쟁 끝날 때까지 살았지요. 어쩌면 다행입니다. 고대 전쟁은 왕의 안위가 중요하고, 승패를 가르는 기준의 하나가 되니까요. (일본에 보낸 명나라, 조선의 국서에 풍신수길은 일본국왕으로 되어 있으며, 당시 일본에서도 이 문구를 전혀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병력손실비율은, 전쟁기간 중에 일본이 병력 보충을 얼마나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불충분해 정확히 추산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파견 14만 5천이니 총 동원 30만이니 하는 것도 단지 풍신수길이 시달한 전쟁 초기 동원 계획이고 각 전투부대 편성은 실제 그보다 적었을 수도, 많았을 수도 있으며, 그런 기록이 각각 하나씩 남아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병력이 아까워서 조금, 반대로 공을 세우려고 더 많이). 그리고 원정군의 병력손실을 제때 제때 보충해주는 것이 본국에 남은 사령부의 주요 역할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는 일본 무장들이 각자 알아서 자기 영지에서 동원했으니 문서자료가 남은 경우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스타 크래프트에서도 끊임없이 병력을 보충해줘야 패하지 않겠지요.
>조선군: 투입병력 97600 명 손실병력 70000 명 손실률 72%
>명군 : 투입 191000 명 손실 83700 명 손실률 44%
>
>일본군 : 투입 339100명 손실 116800 명 손실률 35%
윗 글에서 그 삼식이 님은 전멸에 가까운 손실이니 조선군의 참패라고 하셨는데, 손실률이란 것은 분모인 투입병력이 늘어나면 자동적으로 줄어드는 것입니다. 조선군 투입병력 9만 몇천여 운운은 대만쪽 주장이라고 신재호님이 말씀해 주셨습니다만, 실록 1593년 1월치 기록을 보면 당시 소집돼서 각지에서 왜군과 대치중인 조선군이 17만인가 19만으로 나옵니다. (임진전란사 부록에도 나온 기록이며, 각 지휘관별로 병력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만 기록은 명백히 틀렸습니다. 대만의 추정치가 아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1593년 1월 현재 병력을 분모에 대입하면 손실률이 절반으로 뚝 떨어지지요? 그런데 일본군쪽 투입병력은 왜 33만입니까? 조선에 직접 건너온 16만 몇천을 실제 투입병력으로 보고 분모로 놓으면, 손실률은 두 배 넘게 늘어나는군요. 그 삼식이 님의 논리대로라면 확실하게 왜군의 참패입니다. 마치 '통계의 마술'을 보는 듯하군요.
그 많던 조선군 병력은 전쟁이 몇 년 간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군량미 부족 등을 이유로 서서히 줄어들었지요.(자진 해산, 명나라 군량미 운반에 동원) 그런데 명나라 19만은 연인원일까요? 아니면 요동 주둔군도 포함해서일까요? 병력 많이 보냈다고 자랑은 아닙니다. 병력이 많고도 항상 깨지는 허접 중국군임을 반증하는 자료도 되는데, 대만측이 무턱대고 숫자를 늘린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후금 수도를 공격하는 그 중요한 전쟁에서도 명군의 동원병력은 9만 이하였습니다. 뭐, 당연히 명나라가 패했지요.
그리고 한국전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지만, 1개 사단에 소속되는 병력은 항상 규정치를 밑돌게 마련이지만, 전쟁기간 중에 그 사단을 거쳐가는 인원은 오히려 규정 인원보다 훨씬 많아 10만 가까이 됩니다. 물론 다 죽거나 다쳐 후송된 것은 아니지요. 난중일기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군은 전쟁중인데도 농사철, 겨울철에는 상당수 병력을 귀향시키고 있습니다. 병력교대나 휴가도 이루어지지요. 어쨌든, 병력은 시기에 따라 항상 유동적이라 정확히 산출하기 어렵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차라리 각국 총 전사자를 추정하는 편이 비교적 정확하겠고, 투입병력 대비 손실률을 따진다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민중들은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점령지역 백성들이 모조리 몰살당하거나 피난을 가야 했느냐? 천만에 말씀이지요. 왜군 점령지에서도 백성들은 농사짓고 장사하고 결혼하고, 할 것 다 했습니다. 왜군 점령지라고 알려진 곳에서도 조선 지방관이 세금 징수 등 행정을 펼쳤으며, 조정 대신이나 선전관들이 들락거렸지요. 왜군의 약탈행위는 공식적으로 금지됐었습니다. 물론 정유재란 때는 전혀 달라졌지요. 현대 일반인의 상식과는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전투에 지더라도 투입된 병력이 모조리 죽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임진년 용인전투에서 조선군 5만~8만이 왜군 1500명에게 도륙당한 것이 아니라 다 도망갔지요. 칠천량해전에서도 장수든 병사든 전사한 조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해전 직후에는 조선 수군이 다 죽은 줄 알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다들 슬금슬금 기어 나옵니다. 칠천량 해전에서 발생한 전사자가 거의 없다는 것은 실록에 여러 번 언급된 이야긴데 교과서를 쓴 학자들은 패전 직후의 기록만 들쳐보고 쓴 모양입니다.
오히려 비전투 피해는 많았습니다. 용인전투에서처럼 전군이 도망가는 상황에서는 굶어죽는 자, 병들어 죽는 자, 자살하는 자들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오랜 전란으로 인해 굶어 죽는 일반 백성도 많았겠지요. 그런데 6.25때 굶어죽은 사람이 있다는 말은 별로 못 들어본 것 같습니다. 피난민들이 미군부대에서 나온 꿀꿀이죽을 먹고 연명했다는 이야기는 있지만, 그게 없더라도 굶어죽은 사람은 대한민국을 통틀어 국민방위군 사건인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사건에서 굶어죽은 사람 숫자보다 적을 겁니다. 임진왜란 때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은 분명히 있지만, 극히 일부 지역, 한때에 국한된 이야깁니다.
반대로 군인이든 백성이든 전염병으로 죽는 경우가 가장 많았겠지요. 난중일기 기록을 봐도 가장 큰 손실은 전투손실이 아니라 전염병으로 인한 손실이었습니다. 치열했던 명량해전에서 선봉으로 싸운 충무공의 기함에서 나온 전사자가 달랑 둘에 불과하고, 전투 전면에 나서서 싸운 기함이 위기에 빠지고 충무공이 저격을 당했던 노량해전에서도 인명피해는 일반인들의 예상만큼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산도에 전염병이 돌 때는 수졸들이 매일 수백 단위로 떼로 죽어 나갑니다.
그런데, 그건 왜군도 마찬가집니다. 굶주림에 시달린 쪽은 조선군보다 오히려 왜군이었고, 전염병에도 많이 쓰러졌죠. 일본인 종군화가가 그린 그림 중에서 왜군들이 동료의 살을 먹는 것이 있습니다. 스페인 신부의 종군기록에도 자세히 나와있지요. 어떤 분이 올린 반론에 나와있듯이, 선봉 고니시군과 가토군의 손실은 엄청났습니다. 간양록을 보면 일본 영주들이 일본땅에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을 전쟁이 끝나고도 놓아주지 않은 것은 영지 내의 인명피해가 워낙 많아서 보충하는 의미에서였다고 합니다. 겨우 몇천 동원한 수군 장수 등당고호(도오도 다카토라) 등이 막부의 명을 어겨가면서까지 조선인 포로들을 몇 년 간 계속 붙든 것은, 일본의 인명피해가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줍니다.
참, 결정적으로 일본 함대에서 노를 젓던 노꾼들은 인명피해 추산에서 빠졌군요. 당시 조선 판옥선의 노꾼은 정규 수군이었고, 일본 군선의 노꾼은 민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수군에서 전투원보다 노꾼이 훨씬 많았지요.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레판토 해전 등을 살펴보면 서양 배들의 노꾼 비율이 조선보다 훨씬 높습니다. 조선과 일본 양측의 해전 기록을 대조해볼 때 자칫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여지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노꾼의 피해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대충 2천 명 단위의 수군부대에 할당되는 노꾼이 3천 약간 넘는 식입니다. 그리고 일본 노꾼들이 조선수군의 화포 사격에 무방비상태로 노출됐다는 것은 구출된 조선인 포로의 증언에 나옵니다. (단순히 '탄환'이라고 나옴) 일본'군'의 인명피해에 포함되지 않는 수치입니다.
그 삼식이 님은 아마 조선 민중이 받은 피해에 분노하셨나 본데, 일본 민중이 받은 피해도 만만치 않습니다. 배란 배는 모조리 조선에 끌려갔고 대부분 다 부서졌으니 도대체 쌀을 운반할 수단이 없어, 일본 전체에서 쌀값이 엄청나게 뛰었습니다. 총 3천 척에 달하는 배를 만들기 위해 황거와 거시기(일본 제1의...--;;) 신사 주변 숲 빼고는 모조리 벌채당했고, 민중들은 그 작업에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길 가다가 관헌에 잡혀 노꾼으로 끌려갔다가 조선군이 너무 무서워 대한해협을 수영으로 건너 도망쳐온 일본인 이야기도 있듯이(그런 도망자들이 너무 많아 풍신수길이 그들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렸지요. 일본에는 조오련 이상급 수영선수들이 상당히 많았나 봅니다.), 죄 없는 일본 민중도 조선에 많이 가서 많이 죽었습니다. 스페인 신부의 종군기를 봐도 일본군(고니시군)의 상황은 처참 그 자체입니다. 아! 그 기록에서 일본수군(아마도 육군의 수송선단?)이 조선수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는 이야기도 기억나는군요.
관변 사학자들이 임란 때 발생한 조선의 피해를 강조한 것은 일본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기 위한 의도인가 하는데, 도리어 수치로 느끼는 국민이 많은 모양입니다. 실제로 조선이 입은 피해는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런데 그 삼식이 님은 당시 일본의 과학수준을 과대평가하는군요. 당시 일본이 대형 화포를 만들 능력이 있었는데 비효율적이라서 안 만들었다니. 당시 일본인들이 들었으면 참 쑥스러워하겠습니다. 7년 동안 신나게 깨진 일본수군 무장들이 들으면 발끈하겠군요. 이미 다른 분들이 말씀해 주신 내용이지만 대형화포를 만들고 싶어도 만들 능력이 없어 못 만들었다는 것이 사실이고, 일본측 기록을 통해서도 그렇게 추정됩니다.
그리고 당시 화승총의 가장 큰 장점은 최대사거리도 유효사거리도 명중율도 관통력도 연사력도 아닌, (초기, 굉음에 의한 충격효과 빼고) 사수를 단기간에 육성할 수 있다는 점인데, 웬 무기 자체의 장점을 들었는지, 무지를 드러내고 뻐기는군요. 그리고 승자총통을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쓰레기라뇨? 발굴된 승자총통 가운데 상당수가 임란 중, 또는 이후에 생산된 유물입니다. 쓰레기라면 계속 쓰겠습니까? 그리고 당시 어떤 총이 한번에 탄알 여러 발, 그리고 연속해서 여섯 발까지 쏘는 총이 있습니까? 물론 종합적으로 비교할 때 조총이 나은 것은 분명하지만, 승자총통을 쓰레기라고까지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조선군에 원거리 무기가 활밖에 없었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그럼 그 많은 화포는 다 뭡니까? 일본수군이 왜 깨졌을까요? 화포를 빼고 3대첩이 가능했을까요? 행주대첩에서 여자들이 행주치마로 돌 날랐다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를 사실로 믿는 분인데도 화포는 믿지 않는군요. 그 분이 재즈는 믿으실까요?
(부뚜막에서 쓰는 물건에 행주가 있고 행주치마가 따로 있습니다. 둘 중에 뭐가 먼저 생겼고 뭐가 중요할까요? 당연히 행주치마는 없어도 되지만 행주는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행주가 훨씬 쓸모가 많지요. 행주치마는 부가적인 물건이기 때문에 행주대첩에서 따온 이름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즉, 혹시라도 행주치마가 행주대첩에서 이름을 따왔더라도 행주는 다른 이름으로 남았겠지요.)
이 모두는 역사학자들이 임진왜란 자체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연구를 해야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텐데, 지금은 정식 사학자가 발표하는 연구성과도 '대부분' 위인전이나 중고교 국사 교과서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만 접하고도 그것이 모두 사실인 줄 착각하며, 또한 임진왜란의 모든 것을 알았다고 착각하는 일반인에게도 잘못이 조금은 있습니다(특히 바퀴벌레처럼 주기적으로 기어나오는 원균 옹호론). 아마추어 사학자인데도 저자가 비교적 제대로 열심히 공부해서 쓴 책도 많습니다. 엉터리도 많지만.
그런데 행주대첩에서 조선군이 화포를 쓴 것은 분명하지만, 그 화포에 왜군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는 것(최소한 심리적 타격을 크게 받았다는 것)도 왜군측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총통기(화거)를 썼다는 기록 자체는 절대 없습니다. 임진왜란 기록 통틀어 조선군이 화거(문종화차, 총통틀, 신기전기 등)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그것만은 KBS가 오버한 것이 분명합니다. 고교 국사 교과서에 나온 그 누구입니까, 행주대첩 직전에 수원성인가에서 왜군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왕창 깨진 그 군량미 수집하는 관리(변이중이던가요?)가 화차를 만들었다는 것은 뻥입니다. 그것은 신기전이나 승자총통을 한꺼번에 수십발씩 쏘아대는 화거가 아니라, 소가 끄는 수레 속에 병력이 숨어 적진에 접근하는, 춘추전국시대에 써먹었던 수레입니다. 왜군의 화공에 당해 참패했지요. 조금만 살펴보면 나오는 기록인데 역스 팀은 왜 그런 실수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끔 오버하는 경향이 있지만 역스는 좋은 프로그램임이 분명합니다.
명나라의 역할이라... 당시 전황에서 매우 중요했지요. 그런데 의주까지 도망가 명나라 구원군에 목을 멘 주체는 조선 조정이 아니라 임금 개인이었지요. 전쟁 패배 책임을 회피하려는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습니다. 후에 공신책봉할 때도 마찬가지 의도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의 주둔에 정치적 목숨을 건 선조가 도리어 명나라 군대를 밥벌레, 쓰레기 군대로 욕설을 퍼부은 것을 알면 그 삼식이님도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명군이 왜군과 싸울 때 2차 평양성전투에서의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 전투에서 얼마나 허접임을 자랑했는지 알면 그런 황당한 망상은 하지 않았겠지요. 사천성 전투에서 아군 화포의 오발로 인한 폭발음에 놀라 떼로 달아나다 강에 빠져죽은 명나라 군대 수천~수만(견우 직녀가 밟고 간 오작교, 주몽이 건너간 물고기 다리 생각이 나는군요. 생존자들은 아군 시체를 밟고 강을 건너지 않았을까요?). 괜히 평지성인 남원성에 남아서 겨우 하루 버티다가, 도망치면서 저항도 못하고 떼죽음 당한 명군. 아군인 조선군이 싸우는데 멀거니 지켜보기만 하는 명군.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 분에게 조금 더 기록을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의병과 조선수군이 어떻게 싸웠는지도 제대로 알아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오히려 조선 지상군이 명군의 군량 운반에 동원되지 않고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면, 명나라 군대에 갈 군량미를 조선군 동원에 사용했다면, 전황은 전혀 달라졌을 지도 모릅니다. 임진년을 제외하고 (그리고 칠천량해전을 제외하고) 조선군이 지휘체계를 잃고 대규모로 도주한 적은 없습니다. 대규모로 병력이 구성된 적도 없었지만, 도망치지 않고 싸운 기록은 꽤 있습니다.
조선군 육군도 1만 이상 단위가 싸워 이긴 적은 없지만, 몇천 단위로 싸워 이긴 적은 꽤 많았습니다. 삼대첩이 다 조선은 몇천, 상대는 몇만이었군요(한산도 대첩에 동원된 왜군 병력은 미상). 그런데 임진왜란에서 조선군이 일만 단위 이상을 한 전투에 투입했던 경우는 용인전투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초기 신립의 충주전투도 일만 이하입니다. 그밖에도 권율의 웅치, 이치 전투, 정기룡의 승리 몇번, 이시언 등등 몇백에서 몇천 단위로 왜군의 사단급 단위를 상대로 잘 싸운 기록은 많습니다. 정문부는 의병을 이끌고도 왜군 정규군을 정규전 식으로 잘 싸운 셈입니다. 상대적으로 왜군이 병력집중의 원칙을 잘 실천한 셈이겠지요. 몇만씩 동원한 왜군이 그렇게 자주 패배했다는 게 신기하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임진왜란은 쪽발이 침략자들을 흠씬 두들겨 패준 통쾌한 전쟁이 아니라는 그 삼식이님의 주장에는 공감합니다.
조선군이야 가장 치열하게 싸웠으니 사상자가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명군은 초기 평양성 전투와 백제관 전투를 빼면 거의 싸우는 척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의 전투를 회피한 걸로 아는데.... 그렇다면 저 사상자가 모두 평양성 전투와 백제관 전투에서 나왔다는 말인지?????
첫댓글 분모에 따라 산출되는 통계,불확실한 동원병력(농번기에 따른 병력교체,거의 대부분 흩어졌다가 소집을 반복했던 전황) 을 분모삼아 불확실한 손실병력수치(의도적 왜곡인 단지 패했다는 것만으로도 전사수치에 집어 넣어버린.)인 분자로 저런 엉터리 통계가 나온것이군요.
대만이라..대만이라면 필리핀,동남아와 더불어 일본애들 앞에서 질질싸는 애들 아닙니까.대만애들이야 중국특유의 비열함과 한국에 대한 악감정과 일본에 대한 호감으로 저런 비슷한 짓거리를 많이 하지요.분야를 막론하고 말이죠.
제가 볼땐 그 대만교수라는 분 기준적용을 조선군은 활동중인 병력을 기준으로 한 것 같고 명이나 일본은 교대병력까지 다 포함한 숫자 같군요. 그리고 조선군의 사상자 보단 명의 사상자가 저렇게 많다는 것이 더 이상합니다.
조선군이야 가장 치열하게 싸웠으니 사상자가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명군은 초기 평양성 전투와 백제관 전투를 빼면 거의 싸우는 척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의 전투를 회피한 걸로 아는데.... 그렇다면 저 사상자가 모두 평양성 전투와 백제관 전투에서 나왔다는 말인지?????
벽제관전투에서 참패한게 아닌가요..오타겠지만 다른분들이 그렇게 아실까봐.
푸훗....저 말대로 조선이 70%이상의 사망률을 보인다면, 한반도에는 사람의 씨가 말라야 정상이겠군요. 싸우는 것은 장정 즉 성인남자고...성인남자의 70%가 죄다 죽어나가면 씨가 모자라는 것은 당연지사. 결국 한반도는 무인지대가 되었더라....ㅋㅋㅋㅋ
무인지대라니요! 천국이지요. 낄낄..
흠흠. 농은 그만치고, 실제로 그랬던 사례가 있긴 합니다. 파라과이가 주변국(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들을 상대로 7년간 전쟁벌였다가 완전히 다구리맞고 남성들 거의 90% 가 죽었다죠. 성윤리란건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다나.
-_-...의외로 재미있는 자료를 많이 보신거 같군요.지수님 그런건 혼자 아시지 말고 본카페의 필살기중 하나로서 공유합시다.자세한 글 부탁합니다.
명군의 손실이 큰것은 전쟁후기에 울산, 사천 등지의 왜성공략전에서 10000단위로 사상자를 내는 등 피해가 급증해서 그런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