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에서 벼슬을 한 인물을 찾고 있은데 칠곡에 있는 청백리의 碑를 답사를 가니
김두남의 碑가 보였다.
그런데 김두남은 동명이인이 많으며 어느시대의 사람 인지 알아야 되기에 검색하고 연구하여 보니
숙종 때의 인물인 김두남이 울산부사에 제수되는 기록이 보인다.
김두남金斗南(1657년~1715년) ----안동김씨 대종회 홈페이지에서 발췌 하였다.
字는 일경(一卿), 호는 탁청헌(濯淸軒), 군사공(휘 七陽) 후손. 성균관 생원, 1687년(숙종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典籍), 호조. 예조. 병조의 좌랑(佐郞), 사간원 정언(正言), 헌납(獻納). 사헌부 감찰(監察),지평(持平),장령(掌令). 시강원 문학(文學), 필선(弼善), 장악원정(掌樂院正), 강원도사, 함경도경시관(京試官), 사은사 서장관, 박천군수(博川郡守), 울산(蔚山), 인동(仁同), 양양부사(襄陽府使)등 4개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안주목사(安州牧使)로 재임 시 병으로 임소(任所)에서 사망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청백리 김두남에 대한 기록이 보이며,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영조 9년 계축(1733) 12월 13일(경신)
청백리를 뽑는 것, 농상을 권장하는 것 등 옛 제도를 수거하도록 하다
여러 승지(承旨)에게 《대전(大典)》을 가지고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승지 이광보(李匡輔)가 말하기를,
“청렴을 장려함은 탐욕을 징계하려는 것입니다.
청백리(淸白吏)를 오래도록 뽑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구전(舊典)을 수명(修明)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그리고 대신(大臣)ㆍ육조(六曹)의 장관(長官)ㆍ비당(備堂)에게 각각 염근(廉謹)한 사람을 두 명씩 천거하고, 팔도 방백(方伯)과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는 각각 효렴(孝廉)한 사람 한 명씩을 추천하되, 이미 입사(入仕)한 사람들은 염근의 항목에 넣고, 아직 입사하지 않은 자들은 효렴의 항목에 넣으라 명하였다.
이춘제(李春躋)가 말하기를,
“고(故) 헌납(獻納) 김두남(金斗南)은 염절(廉節)이 탁이(卓異)하여 주군(州郡)을 다섯 번 맡았지만 식량(食糧)이 자주 핍절되었습니다.
선조(先祖) 때에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끝내 포양(褒揚)의 은전(恩典)이 없었습니다.”
하고,
이광보는 말하기를,
“고 응교(應敎) 이현모(李顯謨)가 용강(龍岡)에 보임(補任)되었을 때에 신도 또한 서읍(西邑)에서 대죄하고 있다가 병이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보니, 울면서 신에게 말하기를, ‘조정에 선 이래로 오로지 군덕(君德)을 보도(輔導)할 것을 마음먹고 붕당(朋黨)에 발자취를 더럽히고자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론(黨論) 때문에 군부(君父)에게 죄를 얻어 병으로 장차 거의 죽게 되었으나, 이 마음을 미처 드러내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눈을 감기 어렵다.’라고 하였으며, 죽음에 이르러서는 염(殮)할 만 한 옷이 없었습니다.
그의 아비 이제(李濟)는 관직이 관서백(關西伯)에 이르렀고 이현모도 또한 여러 번 군읍을 역임(歷任)하였으나, 가난과 곤궁이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가상(嘉尙)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두남의 청백(淸白)은 내가 이미 알고 있어 바야흐로 대신(大臣)에게 순문하였다.
이현모는 해조(該曹)로 하여금 그 자손을 수용(收用)하게 하여 측은(惻隱)해 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김두남이 울산부사에 제수되는 기록이 보인다.
숙종 28년 9월 15일 계해 1702년 / 吳命增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有政。禮曹佐郞吳命增, 正言李宜顯, 工曹佐郞李箕翊, 承旨李三碩, 長興主簿金恒壽, 蔚山府使金斗南, 工曹佐郞許堟。
1702년에 울산부사에 제수되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대신들이 개차하여 울산부사에 제수 되었지만 부임은 안 한것으로 추정된다.
울산부 선생안에는 나학천이 울산부사에 도임하는 기록이 보이기에 그렇게 추정 하는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울산부사에 나학천이 제수되는 기록이 보인다.
羅學川 등에게 관직을 제수 함-1702년 9월20일
○ 有政。蔚山府使羅學川, 鎭川縣監權煜, 輔德尹弘离, 掌令朴見善, 執義李德英, 左通禮李溭。
나학천은 9월에 제수되어 하직인사를 11월6일날 하고 울산부사에 도임은 11월24일에 온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즉 김두남은 울산부사에 제수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승정원일기에는 울산부사에1702년 9월15일 울산부사에 제수되었으나 9월20일 개차 되고
문겸에 제수되고 개차되고 점마에 제수되고 난 뒤에 1702년 11월20일에 인동부사로 부임 하는 기록이 보인다.
즉 울산부사에 제수되었지만 부임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옥산 이희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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