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바람은 살을 에이는데, 콧물마저 쉴 틈 없이 흐르네.
나는 이런 신체적 고통이 싫어. 살아있음 자체가 불행이라 여겨지기도 하네.
고통은 내 한 몸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네. 주위를 둘러봐! 삶에 지쳐있는 내 이웃들을.
그리고 세계 건너편 전쟁에 동원된 우리 동포들의 죽음 그 소식들을!
고통은 이 몸안에서만 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을 둘러싼 주변까지도 만연이네.
세상은 온통 삶의 현장이라는 고통으로 들끓고 있지. 고통 아닌 것이 없음에 진저리쳐지네.
붓다는 이러한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고성제라 부르며, 삶의 본질적 부분이라고 하셨지.
그는 고통에 휘둘리지 않는 방법으로 사띠를 말씀하셨고, 사마타를 권하셨네.
그래! 사띠로 사실 그대로를 관찰하고, 사마타로 마음을 고요히 하여 모든 드러남이 본디 조건적임을 깨닫는다면,
그러한 경지는 고통의 속박을 벗어난 상태로 보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결국,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사는 이상, 고통은 결코 완전히 떠나지 않네.
사띠로 고통을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바라봐도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고,
사마타로 일체가 조건임을 보았어도 몸으로 돌아오면 고통은 다시 고통일 뿐.
이 몸을 받은 한,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네.
고통에 몸부림치는 삶이나, 해탈한 삶이나, 결국 모두 자연의 법칙인 열역학의 흐름을 벗어나지 않지 않나?
열역학 2법칙은 모든 것이 흩어지고 무질서로 돌아감을 말하지.
우리의 몸도, 삶도 결국 이 흐름 속에서 소멸하며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지.
그렇다면, 해탈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해탈은 삶의 조건들로부터의 완전한 자유라 하네.
그 자유는 우리가 흔히 추구하는 어떤 가치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하지.
오히려 모든 가치와 의미를 초월하여, 그저 삶과 자연의 흐름을 잇는 다리처럼 느껴지네.
그렇다면, 해탈하여 흐름을 인지한 상태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루카 이전의 상태는 무엇이 다를까?
루카 이전의 상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자연이네.
반면 해탈은 모든 것을 꿰뚫어 아는 지(앎)로서의 자연이지.
결국, 이 둘의 차이는 단 하나. 인식작용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
그렇다면, 안다는 것에는 무슨 아름다움이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을까?
단지, 우리는 인식작용으로는 세상을 알며 자연의 흐름에 올라타고,
무지는 그 흐름 그 자체가 될 뿐이네.
그 차이는 인식작용의 있음과 없음일 뿐이라네.
'인식작용의 있음'과 '인식작용 없음'!
그럼에도 붓다는 우리에게 루카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하지는 않으셨네.
오히려 루카 이전을 꿰뚫어 보고도, 그 상태를 관조하며 살아가라고 하셨지.
인식작용이 있는 상태에서 자연의 흐름을 인지하고, 그 흐름에 조화롭게 녹아드는 삶을 말이지.
루카 이전과 해탈은 닮은듯 다르네.
한쪽은 앎 이전의 고요,
다른 한쪽은 앎 이후의 평온이지.
이렇게 둘의 비교로부터
우리는 그 어떤 쪽도 선택할 수 있지.
하지만 자아가 출현한 이상, 루카 이전의 세계로의 돌입은 두려움이고, 그 두려움이 극복되었다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있지도 않았을거야. 그길로 떠났겠지?
자연적 본능은 내게 끝없이 질서지을 것을 요구하지.
"살아남으라, 살아남으라 "라고...
"이 생에 몸을 받은 이상, 루카이전의 길은 본능적으로 허용된 길이 아니라고". .
그렇다고 해탈의 길을 추구하기에는 나는 너무 어리석어.
나는 어리석음 자체거든.
끝끝내 그런 길이 있다는 가르침은 붙드나, 나는 해내지 못함이 거의 확실해.
결국 고통속에 허우적거리며 하루하루를 버틸거야.
그길(수행의 길)을 걷고있는 몇몇 화엄 식구들.
좌절하더라도 거듭 나아가는 몇몇 불자들.
그들을 부러워 하며....
아...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함이 정말 괴롭다.
첫댓글 불교에서 중생이란, 생물학의 생물과는 좀 다른데요.
그런 중생이나 윤회 등의 개념이 잘 와닿지 않는다?
대부분 그럴 거니까, 그거는 별 중요한 거는 아니구요.
무언가를 이루려면 그 무언가를 이루기에 적합한 행위를 해야 합니다.
통증이 빈발하는 몸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이 몸이 싫다.
그러면 적절한 약을 먹고, 통증 완화되는 습관을 기르고...
동시에, 몸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을 찾는게 좋습니다.
스스로의 행위가 스스로를 결정합니다.
몸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 정신적 즐거움...
그런 쪽으로 향하는 행위를 많이 하면요.
그만큼 몸에 의존하는 경향이 줄어듭니다.
괴로움이라고 아는 것이, 분노하는 것은 아닙니다.
뭐랄까... 역시 슬픈 거라고 해야 하나요?
몸이 고통스러워서 슬퍼요, 안타깝습니다.
이 슬픔과 안타까움은, 정신적 즐거움입니다.
고통스러운 몸과 함께 하기에, 상응한 정신적 즐거움도 발생하는 겁니다.
물론 화딱질 날 때도 있습니다, 인지상정이거든요.
화딱질 나니까, 또 슬프구요.
그처럼 불교의 슬픔은, 고통을 멀리하게 하지만,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불국토의 특징입니다. 수용 최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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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배웠고 슬픔을 일으킬 수 있으면, 몸에 의존하지 않는 다른 정신적 즐거움을 찾을 필요가 없지만요.
그렇지 않은 경우, 어떻든 몸에 의존하지 않는 즐거움을 찾아야 상대적으로 통증에 둔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용한다는 것은, 의외로 아주 어렵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자신을 이미 완벽하게 온전히 수용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자신은, 이미 자신의 마음이 그와 같이 일어났기에 있는 것이거든요.
중생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 중생에게 자기 자신만큼 사랑스러운 것은 없다...
중생의 속성, 어리석음의 속성은...
여기가 석가모니 부처님 불국토라서 그런지 몰라도, 묘하게 연기의 모습을 닮아 있습니다.
도피처를 찾든, 직시하든, 세속적 관점에서는 별 큰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괴로움을 바라보며 그 고통에 휩쓸리기 보다, 그것을 수용할 때 슬픈마음이 일어나고
그 슬픈 마음은 정신적인 고귀함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그 슬픔은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중생임을 받아들임에서 오는 정신적 아름다움에서 오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지네요.
오늘 '슬픔' '수용'의 아름다움을 알려주신 방문객님께 고개숙입니다.
대자대비이신 붓다의 '대비'심이 일체중생을 수용함으로써 일으키신 크나큰 슬픔이셨다면..
이 보잘 것 없이 왜소한 중생인 자신의 괴로움을 슬프게 바라보는 것이,
붓다께서 가여운 중생을 보살피고저 한 뜻의 한가닥이라도 되는듯 싶습니다.
다른 정신적 즐거움을 찾아도 좀 덜 괴롭습니다.
이제 슬픔을 가지고 이야기하자면요. 전혀 어려운게 아니거든요.
눈꽃님도 슬픈 영화를 보고 코 끝이 찡하거나 눈물 흘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하다 못해, 만화영화 플란더스의 개 마지막 장면 보고...
그 슬픔이 분노였습니까? 아니었죠?
누구나 느끼는 슬픔입니다. 이게 그거거든요.
각종 말들은 그 슬픔을 더 의미 있게 만들고 더 깊어지게 하는 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철학은요. 개똥 철학이라도요. 깊이, 의미를 부여해 줍니다. 촉촉하게 만들어요.
플라톤 철학으로 치자면, '슬픔'의 이데아... 이게 '미(아름다움)'의 이데아입니다.
고대 희랍의 희곡이 왜 비극에 열광했나? 그 슬픔이 '미'거든...
자기 자신에서 그 아름다움 즉 미 곧 슬픔을 보는 자...
예로, 자신의 육체적 고통에서 자신의 비극을 보는 자...
육체적 고통이라는 비극...
아름다움과 카타르시스...
눈물과 승화...
슬픔을 배우면, 마음이 아름다워집니다.
개똥철학이든 고구마든, 그 슬픔이 바로 '미'의 본질이거든요.
최소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말입니다.
정신적 괴로움은
어느 정도의 정신승리 노하우가 있으면
넘어가기 용이한 측면이 있는데..
육체적 고통은..
감당키 힘든 경계로 보입니다..
(저는 감당 못할 것 같아요..)
힘내세요.. -()-
그 누구도 신체적 고통을 피해가지는 못할거 같아요.
피하고 싶지만 피할수 없음에 두렵지만..
그 전부 우리가 감당해내야 하는 부분이니 슬플 수밖에 없겠죠?
그나저나 이 겨울이 빨리 지나가길 손꼽아 기다립니다.
저는 추위가 너무 싫어요ㅠ
'앎 이전의 고요'와 '앎 이후의 평온'이 무슨 차이가 있냐는 의문을 제기했었는데..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그 차이는 아름다움을 담아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군요.
'앎 이전의 고요'에는 그 무엇도 없어서 그 어떤 것도 품지 못하고 그 어떤 것도 빛날 것이 없지만,
'앎 이후의 평온'에는 고통을 수용하며 슬픔을 담아내고, 삶의 비극을 아름답게 승화하는 힘을 뿜어내며,
그 아름다움에 의해 자신을 정화해 나가는 삶. 그런 삶을 담을 수 있음이 참으로 수승한 길이되겠다는 가르침으로 들립니다.
역시 화엄은 멋진 곳입니다.
언어적 사유가 참 좋은 건데요. 방향성 설정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어느 방향으로 향하든, 또 그 나름의 유용성은 있습니다.
이해득실이 쉽지만은 않아서요.
어쨌든 예를 들어서요,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
두번째 화살을 안맞으려면, 언어적 생각으로도 가능하죠.
첫번째 화살로 향하는 언어적 생각이 있고,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쪽으로 향하는 언어적 생각이 있습니다.
통상 우리가 알아차림과 같은 걸로, 그러니까 계정혜 3학 중 [정]요. 그쪽에서는, 원칙이 첫번째 화살로 향합니다.
첫번째 화살로 향하니, 두번째 화살은 당연히 맞지 않을 수 밖에 없습니다.
결국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방법이 뭐냐?
@ 워밍업 과정 :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쪽으로 향하는 언어적 생각등을 통해, 첫번째 화살에서 발생한 폭류 즉 흐름의 방향성을 누그러뜨린다.
@ 실전 과정 : 첫번째 화살로 향하고, 첫번째 화살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런고로 두번째 화살로 향하는 흐름이 발생하지 않는다.
워밍업 과정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그걸로도 매우 유용하고, 그 정도만 해도 많은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워밍업은 워밍업입니다. 워밍업은 워밍업으로 알아야 합니다.
===
학생시절에 후배한테 폼 좀 잡으면서요. 다음의 말을 했습니다.
[ '맹목적 의지'라는 실존적 슬픔 ]... 그게 [ 슬픔 ] 즉 [ 자비 ]다...
맹목적 의지는 슬픈 겁니다. 그게 자신인 것은 슬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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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소개한 적 있는데, 육체적 고통과 관련해 [ 빠딸라 수따, patala sutta , 지옥 경 ]이 있습니다.
대충 다음 내용입니다.
<<
배우지 못한 놈은 '빠딸라(지옥)'가 저 어디 땅 속 깊숙한 곳 어디에 있는 줄 안다.
하지만 땅 속 깊은 곳에 그런 거는 없다.
빠딸라는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말한다.
배우지 못한 놈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 즉 빠딸라에서 울부짖고 좌절하고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지랄발광을 한다, 그래서 빠딸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배운 놈은 극심한 육체적 고통 즉 빠딸라에서 그런 지랄발광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빠딸라에서 벗어날 토대를 얻는다.
>>
육체적 고통이 자기 자신이므로, 첫번째 화살은 맞을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육체적 고통이 있을 때, 그것이 자신일 때, 거기에 머물면 당연히 두번째 화살을 맞지 않습니다.
자신에 머물기에, 슬픔이 일어나고, 자신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얻습니다.
[맹목적 의지라는 실존적 슬픔]...그게 [슬픔] 즉 [자비]다.
자신에 머물기에, 슬픔이 일어나고, 자신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얻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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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멋집니다.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의지'와 붓다의 '자비'가 콜라보를 이루며 아름다움의 극치를 발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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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기다려 만난 그 보람이 오늘 빛을 발하네요.
늘 불만족함과 의아함을 품고 있던 저에게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