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동호, 선비, 돌궐, 거란, 여진, 서하, 몽골, 만주.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서나 아니면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에서 한번쯤은 보았음직한 이름들이다.
이들은 흔히 북방 민족으로 일컬어지는 광활한 초원의 민족들이었다. 북방 민족은 몽골,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누비며 초원을 휘젓고 다녔다. 때로는 강성한 무력으로 중국을 점령하기도 하였는데, 북위, 요, 금, 원, 청 등은 북방 민족들이 중국에 건설한 나라였다. 가히 북방 민족들은 그만큼 강력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북방 민족은 몽골족은 제외하고는 거의 없게 됐다. 선비족은 스스로 민족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중국인이 되었다. 거란족 역시 ‘다호르족’이라는 중국 소수 민족의 하나로 전락하였다. 만주인들은 청조의 멸망과 함께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팽개쳐 버렸다. 만주족들은 만주식 성씨를 중국식으로 고쳤고, 극소수의 만주인들만이 ‘시버(Xibe)’라는 이름으로 중국 변방 일대에 거주하고 있을 뿐이다.
북방 민족은 왜 이처럼 철저하게 소멸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물론, 복합적인 요소가 있었을 것이고, 때론 역사학자들도 밝히지 못한 사정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요인은 바로 ‘문화’이다. 문화가 문자로 정착되고, 안정적으로 후손들에게 전해지기 위해서는 민족이 이동생활보다는 정착생활이 더 유리하다. 더구나,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수를 늘이기 위한 인구 증식 역시 유목 민족보다는 농경 민족이 훨씬 유리하다. – 물론. 유목 문화가 농경 문화보다 우월한 점도 많을 것이다. 다만, 문화라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방 민족은 사냥감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는 유목 민족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자리에 앉아서 글과 벗하며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고안하기란 북방 민족들에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대체적으로 네 가지 부분, 즉 자체 문자의 부재, 민족화 작업의 부족, 역사서 편찬과 민족 의식 형성의 실패, 그리고 민족 자체의 민족 유지를 위한 의지 부족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로, 북방 민족들은 확실한 자기 문자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자기 문자가 없었던 흉노, 동호, 선비, 거란, 여진 등은 중국 한자의 힘에 압도 당하였다. 그들은 앞서 중국을 정복하기는 하였지만, 뭔가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한자와 중국어를 사용해야 하였고, 이는 대를 거듭할수록 자손들이 자신의 말과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중국어를 쓰는 중국인이 되게 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두번째, 북방 민족들은 중국인들의 북방 민족화 작업에 소홀하였다. 그나마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서는 만주족의 복식과 말을 꽤 적극적으로 보급하였는데, 이 역시 중국어, 한자와의 병용을 원칙으로 하였기에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 청나라 말기에 가서는 오히려 만문 병용이 폐지되고 한문 전용이 사용된 것만 보아도 이는 분명해 진다.
세번째, 역사서 편찬과 민족 의식 형성의 실패이다. 역사서 편찬은 국가 통합과 민족 의식 확보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다. 민족 의식이란 혈연적인 요소도 있지만, 그보다도 인위적인 의식화 교육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 그 대표적인 예가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편찬이다. 이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분열된 민족 의식을 하나로 묶기 위한 작업이라 볼 수 있다. – 만약 북방 민족들이 적극적으로 사서를 편찬하고 민족 의식 교육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면, 북방 민족들은 그만큼 더 오래 살아남았을 것이다.
네번째, 민족 자체의 민족 유지를 위한 의지 부족이다. 청조가 망하고, 만주어가 소멸하는 상황에서 만주족들은 중국어를 배우기에만 바빴을 뿐, 누구 하나 만주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 1940년대 식민지 한국에서 ‘조선어 학회’를 결성하여 한국어를 지키려고 하였던 것과는 대조되는 대목이다.
어쨌든, 북방 민족은 사라졌고, 역사 역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흘러왔다. 그래도 역사책을 넘기며 북방 민족들의 흔적들을 찾을 때면 마음이 아프다. 사라진 민족이 꼭 북방 민족이서가 아니라, 한 민족의 소멸은 그만큼 인류 문화 전체의 크나큰 손해이기 때문이다.
첫댓글믈사리님, 한가지 잘못 알고 계신 것이 있는데 청조의 만한병용식의 체제는 다른 북방민족 국가들에서도 나타납니다. 여진의 맹안 모극제도 그렇고,,박한제 교수의 북위 관련 논문을 읽어보시면 북위의 한화 정책에 대한 오해가 풀릴 것입니다. 실제로 북위는 후기에 이르기까지 국가 정체성이 유목국가에 더 가까웠습니다. 여러 풍습이나 언어에 있어 한족과는 완전히 다른 문화를 화북에 유포시키지요. 현재 북경어는 그 어원에 있어서 북방 유목민 계통의 발음이 많이 유입되어 광동어나 상해어(?)와는 많이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믈사리님이 생각하시는 유목민에 대한 관념은 한족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고 비트 포겔의 정복국가론에 의하면 당시 문화의 흐름이나 국가정체성을 주도하는 주체는 유목민이지 한족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유목민의 필요에 의해서 한족의 문화를 끌어다 쓴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즉 당대 유목민의 정복왕조는 정복한 민족의 역사 경험의 일부이지 한족의 역사경험은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한족의 역사경험은 주체가 아닌 객체죠. 물론 일제강점기와 비교를 하자면 이 말은 일제강점기가 우리역사가 아니냐라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만 분리해서 봐야한다는 겁니다.
즉 지배를 받은 한국인의 피지배적 경험만이 한국의 역사경험의 일부이고 한반도 지배의 역사 경험은 일본의 역사 경험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유목민의 후예들이 오늘날의 중국에 종속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유목민들이 이끈 자신만의 역사경험을 한족과 공유하진 않을 것입니다. 공유라고 해도 그것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영유했다는 것이지 근원적 무의식까지 공유한 것은 아닐테니까요. 예를 든다고 한다면 오늘날 중국에 속한 유목민의 후예는 일본에 남아있는 우리의 교포 2세, 3세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유목민의 후예에게 각 종족별로 국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국가가 없다고 해서 종족 정체성이 없는 건 아니지요.
아,,밑에 태환님 글을 읽었는데 제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라는 것을 너무 잘 풀어서 설명해 주셨네요. 저도 저런 식으로 정리해서 생각은 못하고 있었는데 태환님 글을 보니 명확해집니다. 확실히 객체로서 녹아들어갔다가 아니라 주체로서 스스로 변화했다는게 맞는 거겠죠. 그러고 보면 오늘날의 중국은 자국을 구성하는 국민들의 역사로서 중국이란 나라의 역사를 개관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자국민의 하나가 된 집단에 대한 개별적 역사로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통합사로서 다루며 그것은 통합된 이후 발생한 중국이란 관념을 통합 이전과 구분하지 않고 그 이전에도 강요한다는데 문제가 있지요.
분명 하나의 집단을 이루는 집단 정체성의 형성 이전에는 분명한 남남일 것입니다. 내가 나임을 느끼는 것은 남을 통해서인데 우리가 우리임을 느끼는 것은 남을 통해 비교하는 것일 것이고 즉 우리가 우리인 까닭은 우리라고 인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집단적 무의식이죠. 즉 같은 문화, 역사 경험을 영유한 것이 '우리'라면 혈통은 무엇일까요? 혈통이 동질의식에 기본관념인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피가 다 섞이고 그것을 의식해 알고 있지 않은 이상 혈통이 동질의식의 필수조건은 아닐 것입니다. 즉, 그렇다라고 상정하는 것일 뿐이죠. 유전학적으로 우리는 한명의 후예입니까? 그럴리는 없을 겁니다.
역사의 시작은 내가 나임을 인지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일 겁니다. 지나온 시간은 내가 있어야 의미있죠. 나란 것을 인지하지 않는 기록이라는 것은 미래를 보기 위한 나를 보기 위함인데 그렇지 않은 기록은 의미가 없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중국사라는 관념의 시작은 '중국'이라는 인지가 있었던 시점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물론 혈통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중국'이라는 집단의 인지가 없었다면 그건 개별 종족이 종족 내에서 느끼는 집단 동질성에 의한 역사일 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집단으로 모인 뒤의 유목민의 역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일 수는 있어도 그 이전은 중국사라고 공언하지 못합니다.
한단인님// "현재 북경어는 .... 북방 유목민 계통의 발음이 많이 유입되어 광동어나 상해어와는 많이 다르다" 라는 말은 마치, 유목민의 영향이 없었다면 (북부언어인) 북경어와 (남부언어인) 상해어, 광동어는 차이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북경어는 본디 광동어, 상해어와 거의 유사하였다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북경어 등 중국 북부지방의 언어는 본디부터 광동어, 상해어(우어吳語 ?) 등 남부지방의 언어와는 달랐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방민족의 영향(특히 만주족에 의한 알타이어화)에 의한 중국 북부어의 변화는 변화 이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다른 북부의 언어(남아 있는지 의문이지만)와의 비교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첫댓글 믈사리님, 한가지 잘못 알고 계신 것이 있는데 청조의 만한병용식의 체제는 다른 북방민족 국가들에서도 나타납니다. 여진의 맹안 모극제도 그렇고,,박한제 교수의 북위 관련 논문을 읽어보시면 북위의 한화 정책에 대한 오해가 풀릴 것입니다. 실제로 북위는 후기에 이르기까지 국가 정체성이 유목국가에 더 가까웠습니다. 여러 풍습이나 언어에 있어 한족과는 완전히 다른 문화를 화북에 유포시키지요. 현재 북경어는 그 어원에 있어서 북방 유목민 계통의 발음이 많이 유입되어 광동어나 상해어(?)와는 많이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요의 남면관제 북면관제도 있지않나요?
지금 믈사리님이 생각하시는 유목민에 대한 관념은 한족의 눈으로 바라본 것이고 비트 포겔의 정복국가론에 의하면 당시 문화의 흐름이나 국가정체성을 주도하는 주체는 유목민이지 한족이 아니라는 겁니다. 즉, 유목민의 필요에 의해서 한족의 문화를 끌어다 쓴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즉 당대 유목민의 정복왕조는 정복한 민족의 역사 경험의 일부이지 한족의 역사경험은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서 한족의 역사경험은 주체가 아닌 객체죠. 물론 일제강점기와 비교를 하자면 이 말은 일제강점기가 우리역사가 아니냐라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만 분리해서 봐야한다는 겁니다.
즉 지배를 받은 한국인의 피지배적 경험만이 한국의 역사경험의 일부이고 한반도 지배의 역사 경험은 일본의 역사 경험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유목민의 후예들이 오늘날의 중국에 종속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유목민들이 이끈 자신만의 역사경험을 한족과 공유하진 않을 것입니다. 공유라고 해도 그것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영유했다는 것이지 근원적 무의식까지 공유한 것은 아닐테니까요. 예를 든다고 한다면 오늘날 중국에 속한 유목민의 후예는 일본에 남아있는 우리의 교포 2세, 3세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 유목민의 후예에게 각 종족별로 국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국가가 없다고 해서 종족 정체성이 없는 건 아니지요.
아,,밑에 태환님 글을 읽었는데 제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라는 것을 너무 잘 풀어서 설명해 주셨네요. 저도 저런 식으로 정리해서 생각은 못하고 있었는데 태환님 글을 보니 명확해집니다. 확실히 객체로서 녹아들어갔다가 아니라 주체로서 스스로 변화했다는게 맞는 거겠죠. 그러고 보면 오늘날의 중국은 자국을 구성하는 국민들의 역사로서 중국이란 나라의 역사를 개관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자국민의 하나가 된 집단에 대한 개별적 역사로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통합사로서 다루며 그것은 통합된 이후 발생한 중국이란 관념을 통합 이전과 구분하지 않고 그 이전에도 강요한다는데 문제가 있지요.
분명 하나의 집단을 이루는 집단 정체성의 형성 이전에는 분명한 남남일 것입니다. 내가 나임을 느끼는 것은 남을 통해서인데 우리가 우리임을 느끼는 것은 남을 통해 비교하는 것일 것이고 즉 우리가 우리인 까닭은 우리라고 인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이 집단적 무의식이죠. 즉 같은 문화, 역사 경험을 영유한 것이 '우리'라면 혈통은 무엇일까요? 혈통이 동질의식에 기본관념인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가 피가 다 섞이고 그것을 의식해 알고 있지 않은 이상 혈통이 동질의식의 필수조건은 아닐 것입니다. 즉, 그렇다라고 상정하는 것일 뿐이죠. 유전학적으로 우리는 한명의 후예입니까? 그럴리는 없을 겁니다.
역사의 시작은 내가 나임을 인지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일 겁니다. 지나온 시간은 내가 있어야 의미있죠. 나란 것을 인지하지 않는 기록이라는 것은 미래를 보기 위한 나를 보기 위함인데 그렇지 않은 기록은 의미가 없지요. 그렇다면 오늘날 중국사라는 관념의 시작은 '중국'이라는 인지가 있었던 시점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물론 혈통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중국'이라는 집단의 인지가 없었다면 그건 개별 종족이 종족 내에서 느끼는 집단 동질성에 의한 역사일 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집단으로 모인 뒤의 유목민의 역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일 수는 있어도 그 이전은 중국사라고 공언하지 못합니다.
이 의문은 한국사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가 한국사인가 하는 의문 말입니다. 저는 아직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진 못했습니다.
한단인님// "현재 북경어는 .... 북방 유목민 계통의 발음이 많이 유입되어 광동어나 상해어와는 많이 다르다" 라는 말은 마치, 유목민의 영향이 없었다면 (북부언어인) 북경어와 (남부언어인) 상해어, 광동어는 차이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북경어는 본디 광동어, 상해어와 거의 유사하였다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북경어 등 중국 북부지방의 언어는 본디부터 광동어, 상해어(우어吳語 ?) 등 남부지방의 언어와는 달랐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방민족의 영향(특히 만주족에 의한 알타이어화)에 의한 중국 북부어의 변화는 변화 이전의 흔적이 남아 있는 다른 북부의 언어(남아 있는지 의문이지만)와의 비교에서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중국어 가운에 북방어에서 유래한 단어가 있기는 합니다. 중국어에서 2인칭을 포함하는 '우리'를 뜻하는 'zanmen'은 만주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오오. 한단인님 글 놈 길어용...
물사리님 글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