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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얀미소가 머무는 곳 원문보기 글쓴이: 시그마
곪을대로 곪은 어느 내면에 갇힌 소녀, 야요이 쿠사마. 정신질환을 앓던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모르는 어머니는 매질을 했다. 그런 그녀 에게 유일한 위안은 물방울이었다. 사라지지 않는 친구이자, 정신을 잃게 하는 환영. 결국 일흔 다섯의 나이에 한 마리의 새가 됐다. 물 방울로 뒤덮인 자신의 기억을 비로소 창살 밖으로 날려보냈기 때문이 다.
■ 작가에 관한 키워드■
도널드 저드 (Donald Judd) 저드는 쿠사마 야요이의 첫사랑이었다. 쿠사마의 말대로라면, 저드의 작품은 쿠사마로 인해 새로운 광명을 발하였다. 저드는 다음 작품에 대한 고민에 쌓여서 방황하고 있었다. 하루는 그녀가 길에서 주워 와서 커피 테이블로 사용하던 판지 상자를 걷어 차 버렸는데, 상자가 뒤집혀서 뚫린 부분이 위쪽을 향하게 되었다. 바로 이렇게 해서 이 위대한 미국 조각가의 "상자" 모양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저드는 그녀의 그림을 구입한 최초의 콜렉터 중의 한 사람이다. 쿠사마의 자유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적인 성향으로 인해 그의 열정을 조금은 식히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그녀가 뉴욕에서 작업하던 초기에 여러 차례 미술 전문지에 칭찬의 글을 실어 그녀를 지지한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니다. 니시마루 시호 박사 저명한 나가노 대학의 정신 의학 교수인 니시마루 시호 박사는 1952년 마츠모토 시민 회관에서 열린 쿠사마의 전시를 보고, 그녀의 작업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쿠사마에게 자신의 병적 정신 상태를 깨닫게 해주었던 사람이 바로 니시하루 박사였다. 알렉산드라 먼로의 분석에 따르면(참고 문헌 참조), 정신 의학 박사가 쿠사마의 예술적 재능과 동시에 광기를 발견했다는 점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정신 의학은 쿠사마의 부모가 그녀에게 주지 못했던 것을 주었다. 자기 표현의 정당성과 미칠 수 있는 자유를 말이다." 환경 1964년 이후 쿠사마의 작업은 확실히 "설치"가 아니라 관람자를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가진 "환경" 작품이었다. 그러한 환경 작품 중 첫 작품은, "집합 : 천개의 배" 전시였는데, 여기서 관람자들은 몇 개의 작은 방을 지나 한 가운데 남근으로 뒤덮인 배가 당당하게 놓여있고 그 배를 찍은 사진이 벽 가득이 붙어있는 전시실로 유도된다. 1964년과 1966년 사이, 그녀는 "드라이빙 이미지"이라는 제목의 일련의 환경 작품을 제작했다. 여기에는 지역 방송을 방영하는 TV 수상기, 하나의 비트로 이루어진 사운드 트랙, 갖가지 마네킹 그리고 완두콩과 파스타로 뒤덮여 바닥에 놓인 오브제 등이 사용되었다.(마카로니를 보라) 패션 쿠사마는 1960년대 말 자신의 의상을 모방한 듯한 옷을 거리에서 여러 번 보았던 일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녀는 그런 옷이 어느 브랜드 제품인지 정확히 알아낸 후(마크스트레이트 패션) 사장을 만나서,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도용한 것에 대해 맹렬히 비난을 퍼부었다. 그 후 그들은 힘을 합쳐서, '야요이 쿠사마 패션 회사'로 회사명을 바꾸고, 쿠사마는 사장이 되었다. 사업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한두 개의 주요 매장에는 "쿠사마 의상" 코너가 마련되기도 했다. 또한 쿠사마는 1969년 뉴욕의 404번 가에 패션 부띠끄를 열기도 했는데, 특히 앞면에 구멍이 두개 뚫려서 가슴이 드러나도록 한 유명한 "은빛 드레스 Silver Dress"를 판매하기도 했다. 조지아 오키프 (GEORGIA O'KEEFFE) 1950년대 중반, 쿠사마는 한 잡지에서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을 본 후, 이런 저런 경로를 통해 그녀의 주소를 얻게 되었다. 사실, 그녀는 오키프가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여성 작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쿠사마는 오키프에게 드로잉 몇 점을 보내면서 미국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또한, 오키프에게 어떻게 미국에서 전시장을 구할 수 있는지 조언을 구하기도 했는데, 이 미국 작가가 우편으로 답장을 보냄으로써 두 여성 간의 신속한 교신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조지아 오키프는 쿠사마가 부탁한 조언에 대해 기꺼이 답을 해주었고, 이 예측 불가능한 일본 작가가 뉴욕에 머무르는 동안 자기 곁에서 돌보아 주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쿠사마는 깨진 유리창 사이로 바람이 불어 닥치는 허름한 작업실을 더 좋아했다. 환영 "그것은 환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쿠사마는 기술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1930년대 당시에는 난청이 문제였지 환영은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었다. 그녀 스스로 인정하듯이, 쿠사마는 열살 때 처음으로 환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식탁보의 빨간 꽃무늬 패턴을 보고 나서 천장이나 창 밖을 보면 그 잔상이 망막에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색의 파편들이 그녀를 둘러싼 가구와 자신 위를 온통 뒤덮어, 그녀는 마치 자신이 액세서리마냥 배경 속에 파묻혀버린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그녀의 작품 "나는 여기 있으나 존재하지 않는다." (참고. 3-4 페이지)는 이러한 감정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해프닝 1966년부터 1972년 일본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쿠사마는 오브제 보다는 해프닝 작업을 많이 했다. 해프닝 작업들은 뉴욕의 주요 공공 장소에서(센트럴 파크, 자유의 여신상.. 등) 실행되기도 했는데, 한번은 정기적으로 그녀와 함께 작업해오던 무용수들 (또는 자원한 히피들)의 나체에 물방울 무늬를 그리는 해프닝을 하다가 경찰에 의해 중단된 일도 있었다. (마이욜을 보라) 다소 유사한 해프닝들이 '난장파티'라는 단순한 이름으로 실내에서 행해지기도 했다. 그러한 해프닝들은 도발적인 슬로건으로 뒤덮인 광고 전단 배포에 이어져서 실행되었는데, 이러한 사건들은 많은 사진과 함께 일간지에 크게 보도되기도 했다. 쿠사마의 해프닝은 영화로도 촬영되었는데, 져드 얄쿠트 감독은 이를 모아서 '쿠사마의 자기 소멸'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하여 수많은 영화제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미디어 우리는 쿠사마가 미디어 또는 아이디어와 이미지를 신속하게 전파시키는 그 능력에 반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전단과 보도자료 덕분에 쿠사마의 해프닝은 늘 대서 특필되었고(그리고 되고 있고), 그녀의 모든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쿠사마는 해프닝을 할 때 항상 기자들이 현장에 있는지를 확인했다. 쿠사마 부인은 요즘에도 항상 사진가를 대동하는데, 포즈를 취해 달라는 조심스러우면서도 지속적인 요구에 언제나 기민하게 응하여, 마치 안무에 따르는 발레리나처럼,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는 눈을 부릅떠 준엄하게 카메라를 바라보곤 한다. 무한 공간 무한이라는 개념은 광기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쿠사마의 작품 속에 지속적으로 스며들어 있다. 어떻게 실제로 무한을 그릴 수 있을까? 1960년대 중반, 쿠사마는 거울로 이루어진 일련의 환경 예술 작품을 제작했다. 방안에서 서로 마주보거나 번갈아 놓여진 거울들은 (쿠사마가 환영에 시달릴 때 느낀 것 같은 심한 어지럼증을 느끼는 관람자들의 그림자와 더불어) 서로를 끊임없이 반사하게 된다. 그녀가 초대형 회화 작품 속에서 관람자가 길을 잃게끔 만들거나(무한의 망), 거울 작품(무한의 거울 방)에서 끊임 없는 공간을 구성한 것과 마찬가지로, 최근작 중의 하나인 무한의 사다리(2000)는 마치 한쪽 끝은 땅속 깊숙이 박혀 있고, 그 반대쪽은 하늘을 향해 치솟은 듯, 끝도 시작도 없는 사다리로 이루어진다. 쿠사마 (KUSAMA) 쿠사마 야요이는 자신의 이름을 마치 상표처럼 사용한다. 조금은 다다적으로, 어떤 것은 쿠사마라 하고 또 어떤 것은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쿠사마 패션, 쿠사마 난장 파티 등등…. 종종 "쿠사마"가 작가의 대리물이거나 대역, 또는 정신병적 상태내지는 스스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부분 또는 자신과 분리시키고자 하는 부분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녀는 때때로 자신을 삼인칭으로 표현한다). 오늘날에도 그녀는 자기 사진에 "쿠사마 스투디오"라는 도장을 찍는다. 강박증 (Obsessions) 쿠사마는 극도로 미세한 제스쳐를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강박증에 시달린다. 2000년도에 전시된 작품처럼 끊임없이 물방울 무늬를 그리거나 "그물"처럼 보이게 될 때까지 어둔 배경에 금색 쉼표를 나란히 그린 것처럼. "강박증"은 환각 증세를 직시하여 이를 치유하고자 하는 그녀의 심리 상태를 드러낸다. 어린 시절 20세기 초, 야요이의 부모인 쿠사마 카몬과 시게루는 나가노현의 마츠모토시에 소재한 대저택에서 살고 있었다. 쿠사마 야요이는 일본 제국이 미국을 침공하여 국세가 기울기 시작하던 1929년 3월 22일 마츠모토시에서 근대화 초기에 부를 축적한 부유한 가정의 4남매 중 장녀로 태어났다. 1926년 히로히토 국왕의 왕위 계승, 1931년 만주 침공 그리고 당시의 불길한 전운 모두가 쿠사마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소녀 시절을 전쟁 상황 속에서 보냈으며, 실제로 군수 공장에서 낙하산 재봉 일을 하기도 했다. (서예와 그림에 능한) 쿠사마의 어머니는 특히 권위적이고도 보수적이었다. 그녀는 딸에게 정신병 증세가 있다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쿠사마가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훈육이 덜 된 탓이라 여기고 심하게 꾸짖었다. (쿠사마는 어머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요즘 같으면 어머니는 아동 학대죄로 감옥에 갔을 거예요."). 쿠사마의 어머니는 자식과 남편을 가혹하게 다루었으며, 이 때문에 아버지는 자주 집을 나갔다. 이러한 예는 일본 사회의 토대를 이루는 가부장적 체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지만, 쿠사마는 이를 힘겨워했으며, 이러한 감정으로 인해 그녀의 작업은 맹렬할 반남성주의적인 성격을 띄게 된다. 페인팅 쿠사마는 전통 일본화 기법과 19세기의 신재료를 혼합한 새로운 양식의 일본화를 배움으로써 미술 교육을 시작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그림은 광기 즉 "원시적이고 본능적이며 예술과는 한참 거리가 먼 그 무엇"을 분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 1950년, 그녀는 자연의 형태에서 비롯된 추상적인 형식을 접하게 된다. 뉴욕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대형 회화작품(무한망)을 제작하였고, 이를 통해 아방가르드 미술계의 중요한 작가로 떠올라 뉴욕의 작가들과도 어울리게 되었다. 이런 작품들이 모노크롬을 중심으로 한 기획전에 초대되어 전시되기도 했으나, 쿠사마는 특정한 스타일에 매달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그런 작품은 "나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현실로부터 분리시키는 커튼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이 캔바스 작품 중 몇 점은 10미터 길이에 달하기도 했으며, 이 수고스런 작업에 쏟아 부었던 노력이 해프닝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즉, 관람자의 시선을 "화면 밖"으로 확장시키는 대규모 작업이 결과적으로 "환경" 예술을 탄생시킨 것이다. 1962년 이후부터 줄곧, 그녀는 회화를 포기하진 않았지만 주요 작업으로서 다루지는 않았다. 물방울 무늬 (POLKA DOTS) 쿠사마가 환영에 시달리기 시작하던 무렵, 그녀의 눈에 물방울 무늬가 나타나더니 곧 끝없는 망점이 되어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물체에 찍힌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맨 처음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던 자기 이름의 알파벳 이니셜을 표현 한 무늬는 "시각적 도구"가 아니라 환각에서 본 형태였던 것이다. 그녀는 물방울 무늬에서 "남성적 에너지를 상징하는 태양"과 "여성적 생산의 원리를 상징하는 달"의 형태를 보았다. 베니스(VENICE) 쿠사마는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자의적으로" 참여했다. 아무도 초대하지도 전시하도록 허가하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베니스 운하에 1500개의 반짝이는 공을 띄웠다. 나르시소스 정원 (이 작품은 1988-99년 사이의 작품을 조망한 회고전에서 재연되었다.)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차후에 루치오 폰타나의 후원을 받게 되는데, 그는 그녀에게 며칠간 밀라노에 있는 자신의 스투디오에 머물게 해주기도 했다. 쿠사마는 비엔날레 주최측에서 그녀의 영세한 대안적 사업을 저지할 때 까지, 공을 하나에 2 달러씩에 팔았다. 1993년, 이번에는 일본 대표 작가로서 공식적인 초청을 받은 그녀는 다시 베니스 비엔날레에 참석하게 되었다. (그녀의 작품은 일본관에서 열린 최초의 개인전이었다). 앤디 워홀( WARHOL) 이미 몇몇 미술사가들이 쿠사마와 워홀의 작품 간에서 보이는 혼란스런 형식적 유사성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1962년에 그녀가 만든 콜라쥬 (예를 들면, "항공 우편" 스티커를 나란히 붙여 만든 작품)은 같은 해에 워홀이 제작한 실크스크린 판화(1 달러짜리 지폐, 코카콜라 병 등)와 관련 지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1964년 천개의 보트 전시에서 벽면에 부착된 동일한 보트 이미지의 복제본들은 바로 그 후에 워홀이 디자인한 벽지를 상기시킨다. 마지막으로, 적어도 그 형식에 있어서는 워홀의 인터뷰를 계승하여 1969년 쿠사마가 발행한 타블로이드지 "쿠사마 난장파티"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다. 한가지는 분명하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쿠사마처럼 믿을 수 없이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작가는 드물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작가로서의 공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그녀의 모습은 흡사 스타의 모습과도 같다. ( 에릭 트롱시, 디종 르 콩소르시움 공동 디렉터, <야요이 구사마 카다로그>글 발췌문)
■ 작품 활동■ 1) 미술계 거장들과의 활동 야요이 쿠사마는 1950년대 말 뉴욕으로 건너가, 베트남 반전운동, 성해방운동, 인권보호운동 등 당시의 정치적 이슈에 대하여 사회적 고정관념으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아방가르드 정신'을 적극적으로 표방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초기 작업시절부터 초현실주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생물형태적 추상을 모티프로, 점차 그물모양의 패턴이 화면 전체를 뒤덮은 '무한 망 2) 사회 참여적이며 전위적인 해프닝 작가는 1970년대 초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사회 참여적이며 전략적인 해프닝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였는데, 일례로, 뉴욕의 센트럴 파크나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댄서들의 나신에 점을 찍는 행위로 경찰의 제지를 받으면서 신문의 일면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또한 1966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초대되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로, 비엔날레관 앞 분수대에 1500여 개의 은색 공들을 쏟아 붓는 행위를 하였는데, 이러한 것이 이슈화되고 전시 참여작가보다 더 유명세를 타게 됨으로써, 국제 현대미술 행사인 베니스 비엔날레의 시스템 자체를 공격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해프닝들은 이후 <쿠사마의 자기 소멸>이라는 타이틀로 영화화 되었으며,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받기도 하였다. 3) 앞선 감각의 대명사 - "쿠사마" 트레이드 마크 야요이 쿠사마는 늘 자신의 이름을 트레이드 마크로 걸며, 다양한 영역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왔다. 1960년대 후반 가슴 부위에 두 개의 구멍이 뚤린 드레스를 제작하며 "쿠사마 패션 컴퍼니"라는 부띠끄를 열기도 하였고, 1970년대 중반 이후 자신의 글을 모아 시집과 소설을 출간하며 "쿠사마 오르지"라는 잡지를 창간하기도 하였다. 또한 현재 그녀의 작품을 함께 제작하는 이들이 활동하는 회사는 "쿠사마 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작가의 이러한 다방면에 걸친 창작활동은 1960년대 당시의 사회, 정치적 운동은 물론이고 포스트모더니즘과 페미니즘 등의 사조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그녀의 작품에서 보여 지는 전위적 표현 양식들, 즉 히피적인 경향들은 이 당시 패션계와 예술계에 커다란 파급력을 가져왔다. 4) 집착과 환각을 예술로 승화하는 쿠사마의 세계 7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동경의 한 정신병원에 거주하며 작업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75세의 야요이 쿠사마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나타난 정신병리학적 집착과 환각 증세를 예술로 승화시키며, 단순하고 일관적인 요소들의 반복과 확산을 통하여 무한대의 환상적 세계를 유도하며, 밝고 환희에 찬 '쿠사마 세계'를 탄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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