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후 15일 후인 양력 2월 19일경이 된다. 날씨가 거의 풀리고 봄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시기로서 새싹이 난다. 예부터 우수·경칩에 대동강 물이 풀린다고 하였다. 태양이 황경 330°에 올 때, 우수입기일(雨水入氣日)이 되는데, 음력 정월의 중기이다. 옛사람은 우수입기일 이후 15일간의 기간을 3후(三候)로 5일씩 세분하여 ① 수달이 물고기를 잡아다 늘어놓고, ② 기러기가 북쪽으로 날아가며, ③ 초목에는 싹이 튼다고 하였다.
[2009년]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방한
←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19일 오후 10시 20분경 전용기편으로 경기 성남시 서울공항에 도착했다.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한.미 외교장관회담을 위해 19일 밤 10시20분께 전용기편으로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입국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새 정부의 첫 국무장관으로 취임 후 처음으로 방한한 클린턴 장관은 전용기에서 내리면서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준비된 차량을 타고 곧바로 숙소인 서울 시내 모 호텔로 이동했다.
이날 공항에는 한덕수 주미대사와 장호진 외교통상부 북미국장과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가 클린턴 장관을 영접했다.
클린턴 장관은 도착에 앞서 자카르타발 서울행 비행기 기내에서 미국 정부는 북한에 후계 문제를 둘러싼 내부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북한 지도체제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북한과 인접 국가간 긴장이 더욱 고조될 수 있음을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수행한 외신들이 전했다.
그는 또 "북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어떤 후계 구도가 형성될 것이며,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 등 많은 우려에 직면한 한국으로서는 지금이 특별히 중요한 시기"라며 "한국은 비핵화와 비확산 논의들이 제자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미국 정부가 최대한 노력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클린턴 장관은 특히 북한 지도부의 변화가 핵무기 해체와 관련한 논의의 진전을 더디게 하고 있다면서 누가 김정일 위원장의 뒤를 이을 것인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감안할 때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전략을 신속히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북한 내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또 벌어질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면서 "평화적으로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권력 교체가 있을 경우 불확실성이 증대하고 사회 내부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더욱 도발적인 행동을 자극할 것이라는 점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압력이 가중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에 이어 중국을 방문할 예정인 클린턴 장관은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의 목표는 북한의 행동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라면서 "한국과 중국으로부터 그들이 생각하는 다음 조치가 무엇인지 직접 듣길 원한다"고 말했다.
클린턴 장관은 20일 본격적인 방한 일정에 들어가 이날 오전 서울 용산의 주한미군 기지 및 한미연합사령부를 방문한뒤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한.미 외교장관회담을 갖는다.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이번 외교장관회담에서는 핵과 미사일 등 북한문제 외에도 ▲한미동맹 발전방안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문제 ▲국제 금융위기 및 아프가니스탄 재건을 비롯한 국제이슈 등이 두루 논의될 전망이다.
특히 클린턴 장관이 이날 언급한 북한 후계 구도와 최근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발사 움직임과 관련해 어떤 내용의 대화가 오갈지 주목된다.
유 장관과 클린턴 장관은 회담 뒤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회담 내용을 직접 소개할 예정이다.
정부 당국자는 "첫 회담이니만큼 양국의 관심사가 폭넓게 논의될 것"이라며 "미국측이 대외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주로 우리의 의견을 듣는 기회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클린턴 장관은 기자회견에 이어 대통령 예방 및 오찬, 국무총리 예방, 이화여대 방문 등의 일정을 소화하고서 숙소인 시내 모 호텔에서 국내 5개 언론사 여기자들과 간담회,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 격려행사 등을 가진 뒤 저녁에 다음 행선지인 중국으로 떠난다./동아
[2007년] 인도 열차에 폭탄테러
← 뼈대만 남은 객차 19일 인도에서 테러로 추정되는 열차 폭발 사고가 발생, 적어도 65명이 사망했다. 불에 탄 객차 안을 한 경찰 조사관이 둘러보고 있다. /AP연합뉴스
인도와 파키스탄 간 평화 정착 노력을 상징하는 양국 간 운행 열차에서 테러로 추정되는 폭발 사고가 발생해, 최소 65명이 불에 타 숨지고 수십 명이 다쳤다.
사고는 19일 오전 1시 50분쯤(현지시각) 인도 하르야나주 드와나역 근처에서 발생했다. 승객 610명을 싣고 인도 뉴델리를 출발해 파키스탄 라호르로 향하던 ‘삼자우타 익스프레스’ 열차가 갑자기 폭발음과 함께 화염에 휩싸였다. 힌두스탄 타임스는 객차 2개가 완전히 불에 타 최소 65명이 사망하고 수십여 명이 부상했으며, 이 중 20여 명은 중태라고 보도했다.
인도 경찰은 불이 나지 않은 객차 좌석 아래에서 터지지 않은 조악한 폭발물 세 개와 휘발유병 2개를 발견했으며, 이번 열차 화재가 테러에 의한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스리프라카시 자이스왈 인도 내무차관은 “발견된 폭발물은 강력하지 않고, 화재를 유발할 목적으로 제조된 것”이라고 추정했다.
인도 내무부 관계자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평화협상을 방해하려는 파괴행위”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번 열차 화재는 20일 파키스탄의 후르시드 카수리 외무장관이 뉴델리에 도착해 양국 간 신뢰 구축을 위한 대책 마련에 합의할 예정인 것을 고려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파키스탄은 외무부 대변인을 통해 “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이번 테러 행위를 규탄한다”면서 “인도 영내를 운행하는 열차의 안전 책임은 인도 당국이 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2001년 파키스탄계 이슬람 무장세력이 뉴델리 의회를 폭탄 테러한 사건으로 전쟁 직전의 위기까지 치달았다. 그러나 최근 평화 협상을 진행하며 해빙 무드로 접어들었다.
특히 사고가 난 열차는 그간 인도·파키스탄 양국 간 신뢰 회복 노력의 상징이다.
양국은 2004년 1월부터 60년에 걸친 반목의 역사를 청산키로 하는 평화회담에 착수하면서 이 열차 노선을 개통했다.
‘우정’을 뜻하는 ‘삼자우타 익스프레스’ 열차는 인도의 뉴델리와 파키스탄의 라호르를 1주일에 두 차례 운행한다./조선
[2001년] 샹송가수 샤를 트레네(Charles Trenet) 사망
← 샤를 트레네
프랑스의 샹송가스 샤를 트레네가 2001년 2월 19일 88세로 사망했다. ‘샹송의 태양왕’ ‘노래하는 광인’이란 별칭에서 알 수 있듯 그를 빼고는 샹송을 얘기할 수 없다.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도 트레네는 ‘언어의 마술사’이고 ‘프랑스 웃음의 상징’이었다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는 바다 특히 고향인 남프랑스 나르본 인근 지중해의 풍광을 서정시처럼 묘사한 노래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1913년 태어난 그는 7세때 최초의 샹송을 작곡할 정도로 음악에 재능이 많았다. 젊은 시절 장 콕토 등과 어울리며 시를 발표하는가 하면 소설도 썼다. 그러나 그의 천부적인 목소리는 그로하여금 가수의 길을 걷게 한다. 1933년 피아노 연주자 에스와 콤비를 이루며 데뷔한 그는 1938년 ‘붐(Boum)’으로 그해 디스크 대상을 수상하면서 일약 스타로 발돋음했다. 60년이 넘는 가수생활 기간 중 1천여곡의 샹송을 직접 작곡하고 노래했다.
사망 전년까지도 콘서트를 열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팬들을 만났던 트레네도 이날의 죽음으로 이제 샹송의 전설이 됐다. 대표노래로는 ‘라 메르’ ‘시인의 혼’ ‘길모퉁이’ ‘캐나다 여행’ 등이 있다.
[1997년] 중국의 정치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1904. 8. 22 ~ 1997. 2. 19
중국의 막후 실력자 등소평이 1997년 2월 19일 향년 93세로 사망함으로써 모택동 화국봉에 이은 세번째 최고지도자 ‘부도옹’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1978년 3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 전체회의(11기 3중전회)에서부터 시작된 ‘등소평시대’는 개방-개혁의 시대였다. 그러나 경제개혁은 추진하면서도 정치개혁은 외면, 과감한 정치개혁을 추진한 '고르바초프 바람'에 밀려 한때는 인기를 잃기도 했다.
등은 사천성에서 태어나 14살 때인 1918년 프랑스로 유학해 20년대 초반에 파리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발을 담그면서 혁명의 역정을 시작했다. 모스크바의 중산대학에서 공부하고 1929년 귀국한 등은 공산당원으로 맹활약, 대장정 초기인 1934년에 이미 당중앙비서장이 되어있었다. 팔로군 정치위원을 거쳐 1956년 중공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 됐다. 그러나 국가주석 유소기와 함께 경제발전을 위해 물질적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엘리트를 양성하자는 실용주의 노선을 취했던 그는 1966년 문화대혁명의 회오리속에서 홍위병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실각했다.
1973년 주은래 총리의 추천으로 복권돼 국무원 부총리가 됐지만 1976년 주은래 사후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던 이른바 4인방에 의해 다시 권력에서 밀려났다. 그해 9월 모택동이 사망하고 화국봉이 4인방을 제거하자 재기해 ‘실사구시’의 논법으로 중국 최고지도자 자리를 차지했다. /조선
[1993년] 아이티 여객선 침몰
1993년 오늘
아이티 서쪽 카리브해에서 이틀전 침몰한 여객선 넵튠호의 생존자 구조와 사체 인양작업이 계속됩니다.
지난 17일 밤 11시 넵튠호는 승객과 승무원등 2천명을 태우고 아이티의 제레미항구를 떠났으나 폭풍우로 침몰했습니다.
사고가 나자 아이티 당국이 수색에 나섰고 인접국인 미국 해안경비대가 생존자구조를 도왔습니다.
그러나 폭풍우로 수색작업이 24시간 이상 지연돼 생존자 구조와 사체인양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침몰 당시 여객선엔 2천명이상 탑승한것으로 추정됐으나 구조된 승객은 280명뿐이었습니다.
[1977년] 증권감독원 개원
← 증권감독원
증권감독원 및 증권관리위원회가 1977년 2월 19일 김용환 재무장관 등 관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발족됐다. 김 장관은 이날 "증권관리위원회와 감독원의 발족은 자본시장 발전에 새로운 이정표를 마련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자본시장 운영에서 질적인 개선과 우량주식공급확대에 중점을 둔 기업공개시책을 추진할 것"을 당부했다.
이날 업무를 시작한 증권감독원은 증권관리위원회의 지시감독을 받아 유가증권의 발행을 촉진하고 그 관리와 거래의 공정을 기하며 증권 관계기관의 감독과 검사를 하게 됐다.
그밖에 1. 증권감독원이 담당하는 업무는 유가증권의 발행 및 거래에 관한 계획의 수렴과 집행, 2. 유가증권의 등록 및 신고서의 심사, 효력의 지정, 3. 상장법인의 관리와 증권관계기관의 검사, 4. 등록법인과 상장법인의 기업분석 및 기업내용의 공시, 장외거래의 감독, 5. 정부대행 또는 정부 위탁업무나 공인회계사 감사보고서의 분석과 심리 등이다./조선
[1968년] 런던교 해체
1968년 오늘!
폭 225미터의 영국 템스 강을 가로지르는 런던교가 해체된다.
1831년 가설돼 140년 가까이 런던 시민에게 애용된 다리다.
런던교는 늘어난 교통량을 감당하지 못 해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해체된 다리의 석재는 미국 기업인에게 264만 달러에 매각됐다.
미국 남서부 애리조나주의 하바수(Havasu) 레이크 시로 옮겨져 복원된 런던교는 애리조나주의 대표적인 관광명물이 됐다.
템스 강에는 1973년 새로운 런던교가 개통됐다.
[1951년]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Gide. Andre) 사망. 1947년 노벨문학상 수상
← 지드, P.A. Laurens가 그린 유화(1924), 파리에 있는 National Museum of Modern Art 소장
1869. 11. 22 파리~1951. 2. 19 파리.
가문과 소년시절
폴 지드와 쥘리에트 롱도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남부 위그노교도 농부 집안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북부 로마 가톨릭 가문 출신이었다. 앙드레는 8세 때 파리에 있는 알자시엔 학교에 입학했지만 신경증 발작으로 인한 건강의 악화로 자주 공부를 중단했다. 1880년 아버지가 일찍 죽자 독실하고 엄했던 어머니는 아들의 장래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주로 집안에 갇혀 지내면서 냉담한 가정교사들과 어머니에게 교육받았으며, 루앙에 있는 동안 사촌누이 마들렌 롱도를 깊이 사모하게 되었다.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알자시엔 학교로 돌아와 1889년 시험에 합격한 후 일생을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여행을 하면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앙드레 왈테르의 수첩 Les Cahiers d'André Walter〉(1891)이라는 첫 작품은 청년기의 불안에 관한 자전적 작품이다. 나중에 나온 대부분의 작품들처럼 이 작품도 1인칭 고백형식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는 이 형식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상징주의기
1891년 학교 친구였던 작가 피에르 루이가 그를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가 이끄는 유명한 '화요회'(les mardis)에 데리고 갔다. 그 모임은 프랑스 상징주의 운동의 중심지로, 그는 한동안 상징주의 미학이론의 영향을 받았다. 〈나르시스 단장 Le Traité du Narcisse〉(1891)·〈위리앵의 여행 Le Voyage d'Urien〉(1893)·〈연인들의 시도 La Tentative amoureuse〉(1893) 등의 작품이 이 시기에 씌어진 것들이다. 1893년 청교도식의 엄격한 신교도 교육이 강요하는 제약들에 대한 불만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 처음으로 북아프리카에 갔다. 그는 아랍 세계와 그곳의 전혀 다른 도덕 기준을 접함으로써 빅토리아 시대의 답답한 사회적·성적 관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사회적 위선에 대한 이같은 지적 반감이 싹틈과 동시에 그는 점점 자신의 동성애 성향을 깨닫게 되었다. 프랑스에 돌아오자 파리 사교계의 '숨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는 항상 어두운 굴 속에 살아 결국 시력을 잃어버린 동물을 소재로 한 뛰어난 우화 〈늪지대 Paludes〉(1894)에서 그러한 분위기를 풍자했다.
1894년 북아프리카로 다시 돌아간 그는 그곳에서 오스카 와일드, 앨프레드 더글러스 경을 만났다. 두 사람은 그가 억압된 동성애의 본능을 받아들이도록 북돋워주었다. 그러던 중 그는 어머니의 병 때문에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었고, 어머니는 1895년 5월에 죽었다. 한편 같은 해 10월 그는 일찍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했던 사촌 마들렌과 결혼했다. 1896년초에는 라로크 자치구의 시장이 되었는데, 그의 나이 27세로 프랑스에서 가장 젊은 시장이었다. 그는 자기 직무를 열심히 수행하면서도 〈지상의 양식 Les Nourritures terrestres〉을 완성해냈다. 이 작품은 1897년에 출간되었는데, 당시에는 완전히 실패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그의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작품의 하나가 되었다. 전후세대에게 자기 내면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서슴없이 표현하라는 이 작품의 호소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위대한 창작기
〈잘못 묶인 프로메테우스 Le Prométhée mal enchaîné〉(1899)는 〈위리앵의 여행〉·〈늪지대〉의 풍자적 양식으로 되돌아간 작품으로서 인간의 개인적 가치추구를 마지막으로 다룬 글이었다. 이후의 작품들은 위대한 창작기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배덕자 L'Immoraliste〉(1902)·〈좁은 문 La Porte étroite〉(1909)·〈전원교향악 La Symphonie pastorale〉(1919) 등은 인간관계의 문제들을 다룬 것으로, 자신의 결혼생활에서 조화를 이루려는 작가의 노력을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그가 창작의 중요한 발전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즉 작품을 다루는 방법과 양식에 자신의 심리학적 문제를 결부시켜 적용해나간 것이다. 〈배덕자〉·〈좁은 문〉은 그가 '레시'(récit)라고 부른 산문 형식으로 되어 있다. 레시란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보이지만 매우 아이러니컬한 이야기로, 1인칭 해설자가 겉보기에 재미없는 회고담을 늘어놓는 가운데 삶 자체의 도덕적 구성과 모호성을 밝혀낸다. 여기서 그는 고전적 구성과 순수하고 단순한 문체를 완성했다.
이 기간의 대부분을 그는 깊은 불안과 고뇌에 시달리며 보냈다. 마들렌에 대한 사랑은 그가 '신비한 지남력(指南力)'이라고 불렀던 것을 생활에 제공하기는 했지만, 가깝고 영속적인 관계에서는 이러한 사랑과 자기자신의 욕구, 즉 자유와 모험에 대한 욕구를 조화시킬 수 없음을 알았다. 〈교황청의 지하도 Les Caves du Vatican〉(1914)는 그의 위대한 창작기가 2번째 단계로 넘어감을 보여준다. 그는 이 작품을 레시가 아닌 '소티'(sotie)라고 했다. 그는 이 용어를 비인습적인 서술구조 속에서 어리석은 미치광이들을 익살스럽게 다룬 풍자적 작품을 뜻하는 말로 썼는데, 이것은 반교권주의라는 이유로 심하게 공격받은 첫번째 작품이었다.
1900년대초 그는 이미 문학비평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1908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 진보적인 프랑스 작가들을 한데 묶어주었던 문학평론지 〈누벨 르뷔 프랑세즈 La Nouvelle Revue Française〉(NRF)를 창간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파리에서 일했는데 처음에는 적십자에서, 다음에는 회복중인 군인들의 요양소에서, 마지막으로는 전쟁난민에게 살 곳을 마련해주는 일을 했다. 1916년에는 결혼 후에 살았던 퀴베르빌로 돌아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전쟁 때문에 그의 고뇌는 더욱 깊어졌고, 1916년초에는 신에 대한 추구를 기록한 2번째 〈일기 Journal〉(1926, 〈Numquid et tu〉라는 제목으로 출판)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딜레마(그는 "가톨릭은 수긍이 가지 않고 프로테스탄트는 참을 수 없다. 그렇지만 나는 충심으로 그리스도교도라고 생각한다"고 표현했음)에서 헤어날 길이 없자 마침내 자기 나름대로 윤리를 세우고 죄책감을 벗어던짐으로써 진정한 자기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과거를 청산하고자 〈한 알의 밀이 죽지 않는다면 Si le grain ne meurt〉(1926)이라는 제목으로 자서전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출생부터 결혼까지의 자신의 생애를 기술한 것으로서 위대한 고백문학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전쟁이 끝난 후 그 역시 큰 변화를 겪었지만 얼굴에는 말년에 간직했던 평온한 표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서전을 쓰기 시작할 때 했던 결심과 1918년 〈코리동 Corydon〉(동성애를 변호하기 위해 미리 시작한 소크라테스식 대화)의 완성으로 마침내 내적인 화해를 얻게 되었다. 그렇지만 1924년 〈코리동〉의 출판은 파멸을 가져왔으며,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까지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다음 작품인 〈사전꾼들 Les Faux Monnayeurs〉(1926)은 스스로 자신의 유일한 소설로 꼽은 작품이다. 그가 '소설'(roman)이라고 할 때는 그 개념·영역·범위가 레시나 소티에 비하여 더 넓다는 뜻이었다. 1925년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곳에서 돌아온 후 〈콩고 여행 Voyage au Congo〉(1927)을 출판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프랑스의 식민지정책을 비판했다. 그가 말년의 대부분을 통해 보여준 인간에 대한 온정적이고 객관적인 관심은 당시의 정치적 활동으로 나타났다.
한때 그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것처럼 보였고 1936년 소련을 방문했으나, 〈소련에서 돌아와 Retour de l'U.R.S.S.〉(1936)·〈소련을 되돌아봄 Retouches à mon retour de l' U.R.S.S.〉(1937) 등에서 소비에트 연방체제에 대한 환멸감을 드러냈다.
후기 작품들
1938년 아내 마들렌이 죽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별거한 상태였는데 그녀가 병들자 다시 결합했다. 마들렌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그리고 유일한 사랑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전통의 가치를 깨닫고 과거의 진가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1941~42년에 걸쳐 〈피가로 Le Figaro〉에 쓴 일련의 가상 대담에서 그는 자유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발표했는데, 절대적인 자유는 개인과 사회를 모두 파괴한다고 선언했다. 즉 자유는 전통의 원리에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1942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는 북아프리카에 살았다. 그곳에서 〈테세우스 Thésée〉를 썼는데, 이 이야기는 그가 과거의 가치를 깨닫게 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테세우스는 전통이라는 실에 매달림으로써 아리아드네에게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1947년 6월 생애 최초의 영예인 옥스퍼드대학교 문학박사학위를 받았고, 11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50년 〈일기〉의 마지막 권을 출판했으며, 거기에는 80회 생일에 이르기까지의 삶의 기록이 담겨 있다. 토론을 좋아한 그는 거의 전생애에 걸쳐 관습적인 도덕성을 무시하면서 개인 행동의 자유에 대한 주장들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혁명론자로 여겨졌으나, 죽기 전에는 위대한 17세기 프랑스 전통을 계승하는 중요한 인문주의자요, 모럴리스트로 널리 인정받았다. 그의 사상의 고결함, 단편과 시 및 자전적 작품들의 특징을 이루는 양식의 순수함과 조화로움은 프랑스 문학의 거장들 속에서 그의 위치를 확고히 해왔다.
[1945년] 미군, 일본 이오지마(硫黃島)에 상륙
← 이오지마(硫黃島)에 미국 성조기가 세워지고 있다.
일본 도쿄 남쪽 약 1,200km 지점에 위치한 오가사와라(小笠原) 열도의 화산섬 이오지마(硫黃島). 태평양전쟁이 종전으로 치닫던 1945년 2월19일, 미 함대의 맹렬한 함포사격과 함께 미 해병대가 상륙했다. 4일간의 공방전이 지나고 태평양전쟁 중에서도 최악의 날로 기록된 2월23일, 산의 모습을 바꿀 정도의 맹폭으로 마침내 산 정상 스리바치산(摺鉢山)이 함락됐다.
일본군은 거의 90%에 가까운 19,900여명이 옥쇄했고, 미군도 6,800여명이나 전사했다. 이오지마 함락으로 일본은 개전후 처음, 식민지가 아닌 자신의 영토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해야 했지만 태평양전쟁은 비로소 종전으로 물꼬를 틀었다.
성조기를 스리바치산 정상에 힘있게 꽂는 6인 용사들의 모습(사진)이 AP를 타고 미 언론에 보도되자 감동과 환희의 물결이 미국 전역에 퍼져갔다.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장면보다 영웅적인 화면이 필요하기는 미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사진은 기자에게 퓰리쳐상을 안겨주며 우표와 아이스크림 등에도 사용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진짜 영웅이 아니었다. 함락순간을 놓친 사진기자 로젠탈스가 뒤늦게 산에 올라 연출한 사진임이 밝혀졌다. /조선
[1895년] 독립운동가 최해(崔海)) 출생
1895(고종 32). 2. 19 경북 울진~1948. 8. 11.
일명 해일(海日). 호는 단사(檀史). 한일합병 후 만주로 망명하여 1915년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졸업하고 이 학교 교관 및 흥업단(興業團) 간부로 활동했다. 1919년 12월 서간도의 독립군 단체들이 결합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자, 총재 서일(徐一), 총사령관 김좌진(金佐鎭) 휘하의 여단장이 되었으며,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연합군 제2연대 간부로서 활약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그뒤 독립군 단체들이 노령으로 이동했다가 자유시참변으로 무장해제된 채 일부만 만주로 되돌아오자 1923년 5월 이범석(李範奭)·고평(高平)·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옌지 현[延吉縣]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재조직하고 사령부 부관이 되어 한인교포의 교육계몽에 주력하는 한편, 병농일치의 둔경제(屯耕制)를 실시함으로써 자급자족 원칙에 충실한 독립군 조직을 꾸렸다. 그뒤 대종교를 시교(示敎)하며 민족의식을 고취 했으며,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에는 은신하면서 지하운동을 전개했다. 8·15해방 후 귀국하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훈련대장으로 활동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78년] 에디슨, 축음기 특허권 획득
← 자신의 납관식(蠟管式) 축음기를 작동해 보이는 에디슨, Mathew Brady가 찍은 사진(1878)
1878년 2월 19일 미국의 발명가 토머스 A. 에디슨이 납관식 축음기에 대한 특허권을 획득했다. 백열전구, 키네토스코프 등을 비롯해 모두 1,093개의 특허권을 얻어 이 분야 세계기록을 세운 에디슨의 재능은 1875년 뉴저지 주의 멘로파크 근교로 이사하면서 빛을 발했다. 1877년말 에디슨은 현대 전화기의 전신인 탄소송화기를 개발했으며, 이듬해 전화에서 수신된 메시지를 사람 음성의 형태로 바꿔 줄 기구를 개발하던 중 축음기를 발명했다. 축음기로 녹음된 최초의 노래는 동요 <메리가 어린 양을 데리고 있네 Mary Has A Little Lamb>였다./브리태니커
[1861년] 한말의 의병장 정운경(鄭雲慶) 출생
1861(철종 12). 2. 19 충북 제천~1939. 2. 2.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화유(和有), 호는 송운(松雲).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각처에 통문을 보내고 농민군 토벌에 앞장섰다. 1895년 명성황후가 학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유인석(柳麟錫)의 의병진에 참가했다. 1896년 1월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충주성을 점령하고 청풍(淸風)·평창(平昌)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을미의병). 같은 해 3월 전군장 겸 전군군사사(前軍將兼前軍軍事師)에 임명되어 충주·제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유인석의 지시를 받고 청나라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파견되어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으며, 유인석이 의병진을 해산하고 간도로 망명한 이후 여러 차례 간도에 다녀왔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단양 일대에서 이규석(李圭錫)·김홍경(金鴻卿)·강수명(姜秀明) 등과 더불어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전투태세가 갖추어지기도 전에 원주진위대의 습격을 받고 영춘에서 체포되었다. 1905년 11월 평리원(平理院)의 재판에서 유배 15년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황주(黃州) 철도(鐵島)로 유배되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473년]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 출생
← 코페르니쿠스, 16세기에 그린 자화상의 사본(17세기)
1473년 2월 19일 태어남 / 1543년 5월 24일 죽음 "우리가 비참할 정도로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것은 짧은 삶, 약한 감각, 태만의 무딘 감각, 무의미한 활동들 탓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것도 종종 얼마 지나지 않아, 과학과 지식의 기만적인 적(敵)인 부단한 망각을 통해 감각에서 사라져버린다." -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
코페르니쿠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 libri Ⅵ>(1543)‘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은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대상의 인식은 우리들의 주관 구성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로 표현하면서 쓴 말이다. 기존의 생각이나 이론에 반하는 획기적인 주장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하며 대담한 발상, 관점의 변화로 사고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와 관련이 있다. 오랜 연구 끝에 지동설을 주장한 16세기 폴란드의 천문학자인 코페르니쿠스는 당시까지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며 태양과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으나 우주의 중심은 태양이며 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우주관을 주장하였다. 이는 당시 사회 분위기상 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질만큼 커다란 사건이었다. 동시대 서구사회는 당시까지의 진리로 여겨졌던 프톨레마이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거의 종교적인 교리의 수준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가 주장한 이 충격적인 이론은 지구가 더 이상 우주의 중심으로서 자리 잡을 수 없으며 이는 곳 지금까지의 모든 종교적 권위와 우주에 대한 철학적인 개념을 원천적으로 뒤집어 버리는 획기적인 혁명이었다. 1520년 프라우엔부르크 대교구장으로 귀임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을 만큼 평생을 교인으로서 삶을 살았던 그였지만,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는 끊임없는 탐구심과 의문을 풀기위한 노력을 통해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였고, 이는 곳 훗날 새로운 과학의 시대를 여는 기폭제가 되어 과학의 혁명을 가져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1136년] 묘청의 난 진압
나라 안으로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전이 불타 민심이 흉흉하고 나라 밖으로는 강성한 여진족이 금(金)을 세워 고려에 압력을 가하고 있던 고려 17대 왕 인종 때. 승려 묘청이 인종에게 접근, 고려의 수도 개경(개성)은 왕기(王氣)가 다했으니 도읍을 서경(평양)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솔깃한 인종이 서경에 대화궁을 짓게 하는 등 천도를 모색하자 반대세력이 들고 일어서 묘청은 서경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지방색을 부각시킨다. 설상가상으로 대화궁에 벼락이 떨어지는 등 불길한 조짐이 보이자 인종은 천도계획을 중단시킨다. 묘청은 초조해졌다.
1135년 나라 이름을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로 정하고 서경에서 반역을 일으켰다. 김부식이 이끄는 토벌군이 서경에 당도하자 반란군은 자중지란을 일으켜 묘청은 부하인 조광에게 죽임을 당하고, 조광은 1년여를 버텼으나 식량부족과 사기저하로 정부군에 성을 빼앗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136년 2월19일이었다.
단재 신채호는 묘청이 승리했다면 조선사가 독립적ㆍ진취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며 이 사건을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 第一大事件)’으로 평가했다.
그 밖에
2007년 정기영 공군 항공우주의료원장 우주인 전담 의사로 위촉
2007년 교원평가 올해 506개교서 시범실시
2003년 이란 군용기 이란 케르만 인근에 추락, 302명 전원 사망
2002년 부시 미국 대통령 취임후 첫 방한. 20일, 도라산역 방문
2001년 영국 잉글랜드 브렌트우드 도살장에서 돼지 구제역 발생
1999년 김병현 선수, 역대 최고 계약금(27억원)받고 MLB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입단
1997년 한국-일본-대만 등 아시아 9개국을 잇는 아태해저광케이블(APCN) 개통
1992년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화해와 불가침에 관한 남북기본합의서’ 발효
1985년 노신영 국무총리 서리 취임
1983년 국세청, 36개 특정지역 고시
1982년 일본, 미국에 1백억달러 차관 제의
1981년 호남선 복선공사 기공
1981년 한전, 전남 영광군에 원전 7,8호기 기공
1981년 이조초(1402)에 제작된 세계지도인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일본서 발견
1979년 한국-코모로 국교 수립
1977년 트램펄린 선수권 대회
1970년 국토통일원, 통일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 발표
1965년 베트남 람반할 장군 쿠데타(4차) 실패. 해외도주
1965년 시이나 일본 외상 내한 반대 데모
1958년 미국 국무성, 주한미군 불철수 거듭 다짐
1957년 소설가 김내성 사망
1957년 영국-그리스- 터키, 키프로스협정
1955년 동남아조약기구(SEATO) 발족
1952년 노르웨이 소설가 쿠누트 함순 사망
1931년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 사망
1927년 덴마크 비평가 조지 브란데스 사망
1898년 토머스 에디슨, 축음기 특허 획득
1897년 한성은행(조흥은행 전신) 발족
1896년 유진덕 의병장 철원에서 항일봉기
1887년 네덜란드 작가 덱커 출생
1885년 광혜원 설립
1877년 독일 화가 뮌터 출생
1861년 러시아, 농노해방 선언
1859년 스웨덴 물리학자 아레니우스 출생
1837년 독일의 극작가 뷔히너 사망
1806년 영국 시인 엘리자베스 카터 사망
1403년 동활자 제조(태종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