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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674
11월14일[연중 제3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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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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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AxKDUw9rWvo
[수원교구 조태현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문경 성요셉치유마을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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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그저 주님 손에 쥐어진 몽땅 연필 한 자루입니다!>
살아생전 돈보스코 성인께서 늘 입에 달고 다니던 말씀들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들이 지금은 불멸의 어록이 되어, 전 세계 살레시오 가족들 사이에서 계속 사용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돈보스코의 어록입니다. “저는 청소년들을 위해 공부하고, 청소년들을 위해 일하고, 청소년들을 위해 저의 목숨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이 사랑받고 있다고 느낄 때까지 사랑하십시오.”
“청소년 여러분, 여러분이 어디를 가든지 항상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언제나 여러분 한가운데 현존해 계십니다.”
돈보스코가 만년에 이르렀을 때, 수시로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청했습니다.
한번은 돈보스코가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돈보스코, 당신이 지끔까지 이룬 업적을 보니 정말 놀랍습니다. 살레시오회와 수녀회를 창립하셨습니다. 수도원 담 밖의 살레시오회인 살레시오 협력자회도 창립하셨습니다.
수많은 사제와 수도자를 양성시켜 해외로 파견하셨습니다. 그 와중에 그 많은 책을 저술하시고 출판사까지 설립해서 양서들을 보급하셨습니다. 지금은 수천수만 명의 도움이 필요한 청소년들의 아버지가 되시고 매일 영적, 육적으로 그들을 양육하고 계십니다. 이게 도대체 돈보스코 당신 홀로 가능한 일입니까?”
묵묵히 질문을 듣고 있던 돈보스코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실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섭리하시고 보살펴주셨으며, 특히 그리스도 신자들의,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저는 그저 보잘것없는 종일 따름입니다.”
보십시오. 돈보스코의 내면 안에는 지극히 겸손한 신원의식이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업적을 이루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성공적인 사도직을 수행했지만, 단 한 번도 교만에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을 그대로 실천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말씀과도 정확히 일치합니다. “저는 그저 주님 손에 쥐어진 몽땅 연필 한 자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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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NcQ103g_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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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억지로라도 감사를 표현해야 할까?; 사람은 표현되는 자신을 믿는다>
오늘 복음은 ‘감사’에 관한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종이 하루 종일 일을 하고 돌아와 주인의 음식 시중을 들고는 이렇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9-10) 그리고 이어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을 고쳐주신 내용이 이어집니다. 나병 환자 열 사람 중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전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 한 명뿐입니다. 곧 나중에 용서의 삶을 살게 되는 이는 그 한 사람뿐일 것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7,19)
감사가 곧 믿음입니다. 믿음의 궁극적 대상은 내가 누구냐입니다. 내가 하느님께로부터 많은 능력을 받았다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사람이 믿음이 있는 사람이고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능력을 발휘합니다. 믿는 대로 되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전에 제자들은 이렇게 청했습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믿음이 곧 능력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능력은 ‘용서’의 능력입니다. 용서할 수 있다고 믿어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4) 감사는 내가 은혜를 받은 것을 아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 용서도 사랑인데 사랑은 받은 사람만 줄 수 있습니다. 아니 ‘받았다고 믿는 사람’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력 멀미 때문에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는 사연이 유튜브 ‘우와한 비디오’에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섬에 사시는데 멀미 때문에 내륙으로 가지 못합니다. 배는 물론이요, 버스도 타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륙에 사는 큰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 동안 어머니를 보지 못했습니다. 버스 한 정거장도 가지 못하는 멀미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작진의 도움으로 수없이 멀미하면서 어머니를 만나러 갑니다. 그리고 10년 만에 어머니를 만납니다. 둘은 너무 행복한 시간을 갖습니다. 불효자를 용서해 달라고 청합니다. 그렇게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아들은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어머니를 뵈러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의료진이 동행하지 않아서 그 멀미를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2년 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묻히셨지만, 산소에도 갈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장례도 참석하지 못한 죄인이 된 것입니다. 제작진은 다시 의료진을 대동해 아들을 도와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더는 멀미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하늘에서 도와주시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쨌건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5년 만에 산소를 찾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두 번째 갈 때는 멀미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어머니가 하늘에서 기도해 주셔서 그렇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한 번 다녀왔기 때문에 또 갈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미 표현된 자신을 보게 된 것이고 믿는 대로 되는 것입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며 많은 이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이미 감사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감사가 표현되고 그것을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니 더 감동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면서 자신은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어머니만큼 살 수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감사한 것들을 찾아서 표현해야 합니다. 사람은 타인이 나에게 하는 말보다 내가 타인에게 표현하는 것을 더 믿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 일기’를 쓸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 일기를 쓰며 우리 자신은 우리가 감사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제야 진정한 믿음이 솟구칩니다. 내가 진정으로 감사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왜 억지로라도 감사를 표현해야 할까요? 아담과 하와는 본인이 감사하는 존재임을 믿지 못해 뱀에게 당했습니다. 우리는 표현되는 우리의 모습을 믿습니다. 감사하는 자체가 아니라 내가 감사하는 존재라고 믿게 되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 감사하는 대상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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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고향이 좋아’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말을 했던가. 바보처럼 바보처럼 아니야 아니야/ 그것은 거짓말 향수를 달래려고/ 술이 취해 하는 말이야/ 아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 님 생각 고향 생각 달래려고 하는 말이야/ 타향은 싫어 고향이 좋아.” 이번에 한국에 다녀오면서 ‘고향이 좋아’라는 노래의 가사가 다 맞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4년이 넘게 뉴욕에 살면서 타향도 정이 들면 지낼 만 한 곳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뉴욕에는 제가 해야 할 일이 있고, 만나면 좋은 사람들이 있고,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신자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하였습니다. 부모님이 계신 추모관에 가서 연도를 하였고, 가족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보고 싶었던 동창 신부님들도 만나고, 함께 했었던 교우들을 만났습니다. 동창 신부님의 배려로 좋은 숙소에서 편히 지낼 수 있었습니다. 한국은 깨끗하고, 편리하고, 모든 것이 익숙했습니다. 그럼에도 왠지 어색하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제가 잠시 머물기 위해서 왔기 때문입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해야 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뉴욕 공항에 내리면서 하늘을 보니 마음이 편했습니다.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 될 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민 와서 정을 나누며 사는 것 같습니다. 뉴욕에서 임기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그때는 한국에 더 많은 정이 갈 것 같습니다.
생각하니 사제의 삶은 ‘유목민’의 삶과 비슷합니다.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기보다는 교구의 인사이동에 따라서 계속 머무는 곳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32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6곳의 본당에 있었습니다. 4곳에서는 보좌신부를 하였고, 2곳에서는 본당 신부를 하였습니다. 중견사제 연수와 제주도 엠마오 연수를 하였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하였고, 용문 수련장에서도 지냈습니다. 지금은 이곳 뉴욕에서 신문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처음 사제로 사목했던 중곡동에서의 생활은 먼 기억 속에 아련한 추억이 되었습니다. 용산에서는 3분의 본당 신부님을 모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세검정에서는 2년 동안 성전신축을 하면서 빌라에서 지냈습니다. 제기동에서는 말년 보좌신부로 지냈습니다. 적성에서는 드디어 본당 신부가 되어서 지냈습니다. 그러니 제게는 타향이 곧 고향 같습니다. 우리 신앙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유목민’의 삶을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정든 고향을 떠났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어디에 사느냐도 중요하겠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의로움을 드러낼 수 있다면 바로 그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내 욕망과 내 욕심을 먼저 찾으려고 한다면 아무리 편하고, 풍요로운 곳일지라도 결코 하느님의 나라가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은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유목민처럼 먼 타향에서 땀 흘린 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광부로 파견되고, 간호사로 파견되어 힘들게 살았던 분들이 있습니다. 열사의 사막에서 땀 흘린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고통받는 것 같았지만 희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신뢰한다면, 진리를 깨닫는다면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면 그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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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7,7-10: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주인과 종 사이의 관계에서 종이 주인의 명령대로 했다 해서 주인이 고마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9절) 하신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나서 겸손할 줄 아는 자세를 가지라 하신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가지 일만을 시키지 않으신다. 살면서 많은 일을 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참으로 봉사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다. 우리 자신을 앞자리에 내세워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섬기는 일을 제법 잘했다 하더라도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뽐내지 않아야 한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사는 모습, 그것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존중할 줄도 알고 자기 직분과 위치가 주는 권위를 드러내야 할 때 분에 넘치는 충동도 꺾을 줄 안다. 교만하지 않으며 만용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노력하여 얻은 영광이나 명예와 권세도 자기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인 다른 이들의 도움이 되기 위해서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위해 사용할 줄도 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여라.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10절). 입으로 영광을 떠드는 자들은 덕행을 실천하여도 그것으로는 아무런 은총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온갖 덕을 실천하더라도 그것을 자랑삼는 사람은 결국 빈손으로 돌아가고 말며 모든 것을 잃고 만다. 또한, 주님 앞에 자신을 무로 돌릴 줄 아는 자세도 가져야 하겠다. 우리는 마당을 쓸 때 빗자루를 이용하고 쓸고 난 뒤에는 그 빗자루를 좋은 자리에 고이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 문 뒤 한적한 곳에 세워 둔다. 즉, “주인이 필요하여 나를 쓰셨고 이제는 내가 할 바를 했으니 내가 차지할 곳은 이곳입니다.” 하는 것과 같다. 주님 앞에 그리고 우리의 이웃 앞에 또한 겸손한 봉사자의 모습을 가지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스승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삶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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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봉사와 희생을 할 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세상의 기준에 따르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지배하고 내리누르며 무시하는 것이 낯설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신분 제도가 있던 시대와 달리 종과 주인이 구분되지 않지만, 오히려 돈과 권력과 지위 같은 가치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갑과 을을 나눕니다. 이러한 기준으로는 나보다 약한 사람을 아무렇게나 대하여도 상관없고, 자신의 욕구 불만이나 짓눌린 감정을 아무런 관련이 없는 힘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분출하거나 화풀이하여도 괜찮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세상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8; 마르 10,45 참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도 그러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스승보다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와 봉사와 희생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거나 좋은 평가를 얻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해하거나 서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곧 겸손하게 섬기는 종의 자세면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도와 봉사와 희생은 우리 자신을 향하여 있습니까? 아니면 하느님을 향하여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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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언뜻 보면 주인이 퍽 야속해 보입니다. 고된 일을 하고 돌아온 종을 따스하게 맞아들여 밥부터 먹이기는커녕, 다시 주인의 시중을 들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어 이렇게 덧붙이지요.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오늘 복음은 인간이 하느님을 섬기는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마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섬기는데, 어떤 보상을 바라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지요.
만일, 하느님의 일을 얼마만큼 했다고 하여, 그에 따른 대가를 요구한다면 참된 종의 자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그에 따른 의무를 다해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러고는 오늘 복음처럼 응답해야 합니다. “저희는 ……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일을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할 때, 하느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에게 이렇게 마음을 써 주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이 마음이 인간을 바라보시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주님의 일을 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하느님께 끝없이 매달리며, 묵묵히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이럴 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가득 채워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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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제1독서인 지혜서는 하느님께 선택받은 의인들, 주님께서 명하신 바를 충실히 실천하는 의인들이 이 땅에서는 시련으로 단련을 받지만 결국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단언하며, 주님을 신뢰하는 의인들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노래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님께 선택받은 제자들, 곧 새 계약의 의인이 될 이들에게, 주인의 명을 다 실천한 뒤 이렇게 말하라고 명하십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마치 종 부리듯 부리시는 분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러 오신 분이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루카 22장 27절 참조)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위하여 제자들을 종 부리듯 부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모든 의인을 “종”이라고 부르시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스스로의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기에 하느님 앞에서 자랑할 것도, 대가를 바랄 것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남을 섬기는 겸손한 종처럼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대단히 잘한다고 해서 하느님께서 굳이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말고 다른 이들을 통해서, 아니 땅에 굴러다니는 돌을 가지고서도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뽑아 당신 일을 해나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 이상 종이라 부르지 않으시고, 친구라 부르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종이 되시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쓸모없는 종을 위하여 기꺼이 당신 아들의 목숨마저 내어 주시는 주인을 모시고 있기에 우리는 늘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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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
우리는 살아가면서 적은 노력에도 남이 칭찬해 주고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기대하였는데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해하고 화를 내며 다투기도 합니다. 때로는 남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에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말고 주님 눈에 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주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는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언젠가 ‘아름다운 손’이라는 제목으로 한 시민이 거액의 돈을 주워 경찰에 맡김으로써 주인이 잃은 돈을 찾을 수 있었다는 기사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순간적인 유혹도 있었겠지만, 주인에게 돌려준 귀한 마음에 박수를 보냅니다. 그 마음 항상 지켜지길 희망합니다. 그렇지만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 돈은 분명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보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고 어떤 이는 그런 행위를 바보짓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저“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 하는 사람이 미련한 사람, 바보가 되는 세상입니다. 그래도 그런 바보라면 얼마든지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교부 실루스는 “모든 일이 당신의 생각에 가장 좋은 방향으로 되기를 바라지 말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되기를 바라라. 그러면 혼란에서 벗어나 기도 중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는 사람이 그리운 세상입니다. 우리의 존재,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고 우리는 관리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은 특권입니다.
시간도, 능력도, 재물도 주님께 공을 이루고 물릴 줄 아는 사람, 그저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참된 노고는 남의 눈에 띄지 않습니다. 남의 눈에 띄는 노고는 허영심만 키울 뿐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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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리학의 해설서라 할 수 있는 ‘근사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공자의 논어를 읽어서, 읽기 전과 읽은 후나 그 인간이 똑같다면 구태여 읽을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제게 책을 어떻게 읽느냐는 질문을 많이 하십니다. 정독이냐, 다독이냐, 일 년에 어느 정도의 책을 읽어야 하느냐 등을 물어보시지만, 근사록의 말처럼 1,000권을 읽어도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물론 책을 읽는 것 그 자체가 의미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저자는 읽었을까요? 또 이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유의 시간을 가졌을까요? 따라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유능한 과외 선생님 한 분을 보시고 직접 교육을 받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과외 선생님이 바로 옆에 있다고 하더라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또 보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다면 굳이 돈 들여서 과외 선생님을 모실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이처럼 책을 읽는 것도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면 오히려 책 읽는 것이 낭비일 수 있습니다.
유능한 선생님도 학생이 따라오지 않으면 그 유능함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습니다. 즉, 학생의 자세가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완벽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함께하지 않고, 또 하느님의 뜻을 계속 무시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개조시켜서 당신의 뜻을 따를 수 있도록 만드실까요?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계속해서 우리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면서 기회를 주실 뿐입니다. 따라서 변화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무슨 일인가를 했다고 해서 자기 자랑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주인이신 주님께는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했다고 주님께서 부귀영화를 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족함 없는 분이 우리의 기도나 선행, 희생을 가지고서 무엇을 얻으시겠다는 것일까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환하게 웃는 것만으로도 그 부모가 큰 기쁨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으로 당신의 길을 따르기만을 원하실 뿐입니다. 그래서 자랑할 것도 없고, 당연히 해야 할 일임을 기억하면서 자기의 변화를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면 됩니다. 그 결과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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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을 떠올리면>
루카 17,7-10 (겸손하게 섬겨라)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당신을 떠올리면>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내가
뭐라고
그럼에도
내게
맡기시니
오직
나는
고마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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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지혜롭게 하는 고통>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의인들이 죽은 것처럼 보이고 그들의 말로가 고난과 파멸로 여겨지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오늘 지혜서를 보면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지혜로운 사람의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에 혜안이라는 표현이 있고 그 사람은 혜안이 있다는 말도 있는데 혜안이라는 말이 바로 지혜의 눈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인도 사람의 미간과 부처님의 미간에 있는 점과 보석이 바로 이 혜안을 뜻하는 것인데 두 눈으로만 봐서는 안 되고 이 지혜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그 안에 있습니다.
실로 지혜의 눈을 가진 사람은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의 두 눈은 보이는 것만 보지만 지혜의 눈은 보이는 것 너머를 보고 꿰뚫어 보기 때문입니다.
우선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죽음밖에 볼 수 없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죽음 밖에 있는 생명을 보고 그래서 죽음 앞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불사의 희망을 지닙니다.
이 얘기는 죽음의 안과 밖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안을 보면 죽음만 보이지만 죽음 밖을 보면 죽음이 아닌 생명도 보이는데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죽음만 보고 죽음 밖은 볼 수 없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죽음 밖의 생명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통 또는 시련을 보는 눈도 다릅니다. 역시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고통을 시련으로만 보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눈은 고통을 단련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은 고통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고통은 곧 불행이지만 단련은 고통이 우리를 단단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시련은 당하는데 비해 단련은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시련은 수동적인데 비해 단련은 능동적인 것이며, 설사 단련을 스스로 하지 않고 받더라도 의미를 알고 단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지혜에도 등급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지혜와 영적인 지혜의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인간적인 지혜는 고통을 단련으로 보고 고통 안에서 증강增强의 씨앗, 곧 고통을 통해 더 강해지고 성장하리라는 것만을 본다면 영적인 지혜는 고통 너머에서 하느님을 보고 더 나아가서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단련시키는 하느님의 사랑까지 봅니다.
그래서 영적인 지혜를 지닌 사람은 용광로 속의 금처럼 불로 단련을 받아 하느님께 맞갖은 아들이 되고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라고, 그것은 하느님께서 이들에게 은총과 자비를 주시기 때문이라고 오늘 지혜서는 얘기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지혜가 고통 속에서 하느님과 사랑과 행복을 보게 하는 면도 있지만 고통이 이런 지혜를 갖게 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호적인 측면, 곧 고통이 지혜롭게 하고 지혜가 고통을 사랑과 행복으로 보게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니 고통을 겪지 않은 사람은 지혜를 얻기 힘들고, 영적인 지혜는 더더욱 얻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오, 지혜롭게 하는 고통이여!'라고 고백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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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귀가(歸家)의 여정>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삶-
어제 수도형제들과 함께 참 오랜만에 왜관 수도원 장례미사에 참석했습니다. 독일에서 파견된 선교사들중 가장 친화력이 좋고 한국말을 잘하며 명랑하고 활달했던 거의 한국인과 같았던 주광남 보나벤투라 수사님 장례미사였습니다. 수사님의 약력도 각별한 느낌이었습니다.
1937년에 태어나 17살(1954년)에 수도원에 입회했고 22세(1959년)에 종신서원후 한국에 파견되어 86세(2023년)까지 선교사로 사셨으니 64년을 한국에서 사신 것입니다. 그러나 말년에는 파킨스병의 악화로 병상에서 참 힘든 삶을 사셨으나 끝까지 순종하는 자세로 사시다가 선종한 것입니다. 어제 날씨는 겨울 날씨처럼 추웠지만 참 아름다운 만추(晩秋)의 위령성월이라 뜻 깊게 생각되었습니다.
“아, 수사님은 삶의 온갖 병고에서 해방되어 죽음의 마지막 문을 통과해 아버지의 집에 귀가하셨구나! 아, 축제와 같은 죽음이다! 죽음은 해방이요, 귀환이요, 해후요, 화해요, 위로요, 구원이로구나!”
저절로 나온 고백이었습니다. 정말 장례미사는 물론 장지에서의 느낌 역시 축제같은 느낌이었고, 수도원 묘지에는 정다운 추억을 지닌 세상을 떠난 무수한 수도형제들이 살아서 수사님을 반가이 맞이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떠오른 18년전 2005년 위령성월 단풍잎들 찬란히 덮인 땅을 보며 쓴, “마침내 별들이 되어” 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별들이
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단풍 나뭇잎들
하늘 향한
사모(思慕)의 정(情) 깊어져
빨갛게 타오르다가
마침내
별들이 되어
온땅을 덮었다
땅이 하늘이 되었다
오!
땅의 영광
황홀한 기쁨
죽음도 축제일 수 있겠다”-2005.11.
그런데도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고해 인생이 아니라 축제 인생이요, 죽음도 축제일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 믿는 이들의 삶은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의 여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죽음은 ‘무에로의 환원’이 아니라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라는 것입니다. 미사경문 제3양식 중 장례미사 시 제가 좋아하는 대목입니다.
“성자께서 죽은 이들의 육신을 다시 일으키실 때에
저희의 비천한 몸도 성자의 빛나는 몸을 닮게 하소서.
또한 세상을 떠난 교우들과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떠난 이들을
모두 주님 나라에 너그러이 받아들이시며
저희도 거기서 주님의 영광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하소서.
저희 눈에서 눈물을 다 씻어 주실 그때에
하느님을 바로 뵈오며
주님을 닮고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리이다.”
바로 우리의 궁극의 희망을 보여줍니다. 이런 좋으신 사랑의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지혜서 역시 의인들의 죽음에 대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그들은 평화를 누리며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단련을 조금 받은 뒤 은혜를 크게 얻을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주님을 신뢰하는 이들은 진리를 깨닫고,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분과 함께 사랑 속에 살 것이다. 은총과 자비가 주님의 거룩한 이들에게 주어지고, 그분께서는 선택하신 이들을 돌보시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그분께서 선택받은 우리들에게 주신 은총은 헤아릴 수 없이 무궁무진합니다. 우리가 드릴 응답은 찬미와 감사, 겸손과 순종, 사랑과 믿음뿐일 것입니다. 모두가 은총인데 새삼 무엇을 청하겠는지요! 참으로 이런 주님께 희망을 두고 믿고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다만 ‘종과 섬김의 삶’에 충실하며 ‘귀가의 여정’을 살 것입니다.
특히 강조할 것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쉬운 것은 우리이지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쉬워서 기도하고 미사드리는 것이지 하느님이 아쉬워 기도하고 미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쉬워, 구원받기 위해, 찬미와 감사요, 섬김의 삶입니다. 바로 이런 내용이 ‘연중 평일 감사송 4’ 양식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희의 찬미가 필요하지 않으나,
저희가 감사를 드림은 아버지의 은사이옵니다.
저희 찬미가 아버지께는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나
저희에게는 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도움이 되나이다.”
그러니 우리가 아쉬워, 필요해, 살기위해, 구원받기 위해, 주님을 열렬히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찬미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차고 넘치는 은혜와 감사인데 새삼 무엇을 요구하겠는지요! 이렇게 이해하면 오늘 복음에서 종의 반응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주님의 다정한 충고 말씀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평생 화두로 삼아 깊이 늘 새기고 지내야 할 복음 말씀입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이런 종들 정말 주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지혜롭고 겸손한, 충실하고 의로운, 멋지고 매력적인 종들입니다. 이런 정신으로, 이런 영성으로 종과 섬김의 삶을 살면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자체가 구원이요,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역시 순탄대로를 밟을 것입니다. 저절로 이어지는 감사와 놀라움의 고백일 것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 사랑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의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시고, 하루하루 한결같이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가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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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17,10)
<겸손한 봉사!>
오늘 복음(루카17,7-10)은 '겸손하게 섬겨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믿는 이들의 신원(Identity)'을 분명하게 밝혀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밝혀주신 믿는 이들의 신원은 '종(Servus)'입니다. '하느님의 종(Servus Dei)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봉사자로 불림을 받았고, 봉사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봉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신분에 맞는 소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성직자는 성직자에게 맞는 소명이, 수도자는 수도자에게 맞는 소명이, 신자들에게는 신자들에게 맞는 소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소명이 바로 '봉사직의 소명'입니다.
이 소명을 다하고 나서 우리도 이렇게 고백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17,10)
'우리 모두는 종입니다.'
교황님도 종이고, 성직자도 종이고, 수도자도 종이고, 신자들도 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님께서 종이셨기 때문입니다.(마르10,45 참조) 그리고 매일 종의 모습(성체성사)으로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의인들의 영혼은 하느님의 손 안에 있어, 어떠한 고통도 겪지 않을 것이다."(지혜3,1)
'영원한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의인들'은,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처럼 자신을 한없이 낮춘 종의 모습으로 산 이들', '겸손한 봉사를 한 이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서로가 그렇게 봉사하려고 애쓰는 이들이 모여 있는 바로 그곳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천국)'입니다.
우리 안에 '겸손한 종들(봉사자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천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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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O271Dk0GXH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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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루카 17, 10)
정신을 차리게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쓸모없는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 사랑을 지금
이 순간에도
만나게됩니다.
영원한 기쁨은
이 모든 것을 맡기는
겸손에서 옵니다.
작아져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작아져야 할
우리자신입니다.
주님께 중심을
내어드려야 합니다.
주님이 중심이 되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쓸모없기에
어리석은 우리의
의지를 멈추게됩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우리를 물들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있기에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부정할 수 없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작아지고 낮추어야 할
우리의 모든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작아지면질수록
모든 것은 은총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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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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