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는 삶이다.
태안장로교회 원로목사
사회복지사
글:-남제현목사
태안신문사 칼럼니스트
삶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시기와 시간에 따라 다르고 그리고 종교심에 따라 다르다. 그래서 어떤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가진 고유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나’라는 실존에 구체적인 일과 사명을 가지고 산다.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그래서 각 개인의 임무를 찾아오는 기회는 자신에게 유일한 희망이 된다. ‘자기’라는 것을 인식하고 자기 삶에 책임을 짊어지는 의무를 지고 살아야 한다,
자기 생명에 대한 책임은 ‘나’라는 실존은 유일한 축복이다. 자살은 삶의 마지막이다. 절대로 자기 생명을 소홀히 할 수 없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하루평균 자살자는 39명이다. 안전망 없는 사회의 삶으로 전쟁터에서 쓰러져간 사람들과 갔다. OECD 34개국 평균인 12.1명보다 17명이나 많은 우리의 현실이다. 자살 기도자는 자기 생명에 대한 무지한 것도 모르고 죽고 싶다는 순간의 반응만 일으켜 그렇다. 인간을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설국의 저자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의 소설가로 1968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분이다. 고아로 자란 그는 청년 시절에는 가까운 친척까지도 모두 잃었다. 그런데 노벨상을 받았을 때, 그는 작품 속에서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으며 평생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다고 한다. 제자인 미시마 유키오가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삶에 의미를 모르고 그저 깨닫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자기라는 인식부터 잘 시작하면 된다. 여기서 삶에 대한 책임은 삶의 질문에 책임감을 느끼는 응답이다.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물음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죽음의 수용소의 프랭클의 실존주의에 바탕을 둔 심리치료 '로고테라피'는 불교 철학에서는 '무' 또는 '공' 사상에 관한 이야기다.
'무', 와 '공' 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무언가 무의미한 느낌, 공허한 느낌이 든다. 이것은 세상은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고, 일 분, 한 시간, 하루, 100년이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다. 이런 사상은 시간도 공간도 허상일 뿐인 실체 없음이기 때문이다. 노벨 문학상을 탄 유명한 소설가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를 보면 노인이 바다에서 고기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그러면서 그 노인은 고기를 잡으면서 무엇 때문에 고기를 잡아야 하는지 몰랐다. 어쨌건 노인에게 뜻밖에 매우 큰 고기가 걸려들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잡은 그 고기를 끌고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고기 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 떼와의 싸움 끝에 그 큰 고기는 앙상한 가시만 남게 되었고 육지로 나올 때 지쳐버린 노인에게는 아무런 것도 남은 것이 없다. 마치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와 목적을 모르면 아무리 부지런히 살고 열심히 살아도 결국 허무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을 쓴 헤밍웨이는 인생 말년에 권총으로 자기 머리를 쏘아 자살하게 되어 우리에게 큰 충격을 가져다준 사람이다.
헤밍웨이는 아주 경건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세계적 부흥사인 무디와 아주 가까웠고 그의 아버지는 의사로서 평생 선교의 꿈을 버리지 않고 살아온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자식들을 신앙으로 키우려고 애쓴 분이다. 그러나 그는 어른이 되면서, 신앙에서 이탈하게 되고 급기야는 하나님 없이 제멋대로 사는 사람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끊어야 하는 무의미한 삶을 살았다.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허무한 노인의 모습이 실제로는 내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
허무한 인생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인생 속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소망한 욥의 고백에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비추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어 보는 소중한 삶이 되기를 원한다. 이스라엘 역대 왕 중 가장 지혜로웠다는 솔로몬은 백성을 사랑하는 대견스러운 왕이다. 그런데 본인은 자신에 대하여 지혜롭게 살지 못했다. 이것이 자신의 실존에 대한 한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