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의 봄, 꽃나무들이 땅 밑 양분과 물을 빨아 올려 푸르른 새살을 만든다. 이 때쯤이면 남해 다랭이 마을 동백꽃도
송이채 후두둑 땅바닥에 피를 토하듯 떨어지고 할매집 농주(막걸리)가 농익는다.
나는 동백꽃 피고 지는 계절에 먹는 막걸리를 최고로 쳤다. 이것이 바로 ‘감성이 미각을 지배한다’는 나의 맛에 대한
생각과 딱 맞아 떨어지는 대목이다. 나이 들어가며 꽃과 나무에 대한 애정이 깊어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붉디붉은
동백꽃도 쉰 소리로 꺾어지는 막걸리집 주모의 노래 가락도 무슨 사연이 있어 그렇게 피 토하듯 절절하단 말인가.
봄꽃여행길마다 먹어 본 막걸리 중 마음까지 사로잡은 맛은 없었다. 벚꽃 떨어져 꽃비 되어 내리는 하동 화개동천
거리의 술집은 꽃은 좋았으나 막걸리는 별로였고, 구례 산동 별 닮은 산수유 노란 꽃은 때가 늦어 벌써 져버렸는데,
산수유 막걸리는 그런대로 입맛은 채워주었다.
남해는 벚꽃이 유명해서 발길을 놓았는데, 남해 첫머리에 바다와 육지를 잇는 남해대교가 꽃보다 먼저 여행자를
반긴다. 그렇게 찾은 남해에서 벚꽃 구경을 하면서 섬의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꽃길은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남해대교를 건너서 섬의 남쪽으로 가는 새로 난 도로이고, 다른 하나는 옛 도로다.
꽃길은 옛 도로가 낫다. 남해 여행 지도를 들여다보며 갈 곳을 궁리하다가 ‘다랭이 마을’이라는 독특한 이름을 찾았
다. 이름이 예뻐서 다른 생각 없이 그 길을 택했다.
■ 바다를 마당으로 동백을 친구로 삼고 …
비탈진 골목길로 내려간다. 회칠한 벽과 담장, 낡은 대문은 활짝 열려 있고, 대문 없는 집은 그 기둥이 집의 역사를
말해준다. 추억에 빠져 골목을 따라 내려가며 마을 구경을 한다. 골목을 따라 내려가다가 대문 기둥에 문패처럼
달려있는 ‘시골할매 막걸리’ 표지판을 보고 그 집으로 들어갔다.
막걸리집이라고는 하지만 마당에 탁자와 의자 몇 개가 다다. 마당가에 키 작은 나무 몇 그루 보인다. 동백나무였다.
선운사 뒷산이나 여수 오동도, 거제도 동백 숲 등 동백꽃 유명한 곳에 있는 동백나무는 모두 사람 키보다 훨씬 컸는
데 이곳 동백나무는 사람 눈 아래에 묻힌다. 이유를 물으니 동백 씨를 심어서 키운 나무란다. 동백나무에 주었던
눈길을 들어 멀리 바라보니 바다가 보인다.
동백꽃은 송이채 후두둑 떨어져 내렸지만 씨부터 자란 그 수고로움에 작은 동백나무에 정이 붙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막걸리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누구의 수필 문장에 빗대어 표현하자면 ‘걸인의 안주, 왕의 술’
이었다. 안주는 겉절이 하나였지만 막걸리 맛만큼은 최상의 수준이었다.
■ 대를 이은 할머니표 막걸리
바다를 마당삼고, 씨동백을 친구삼아 한 잔 두 잔 들이킨 술이 두 병이 넘었다. 우리는 그 맛을 두고 그냥 일어설
수 없어 막걸리를 빚은 사람이 누군지 확인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주인 아줌마를 불렀다. 알고 보니 막걸리를
담은 사람은 그 집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 순사들을 피해서 다랭이 마을로 들어왔다. 이렇게
맺은 다랭이 마을과 할머니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다랭이 마을 막걸리는 동백꽃 피고 질 때 먹어야 제 맛이다. 꽃 피고 지는 때가 한 나무라 할지라도 바로 옆 줄기가
다르고 옆 가지가 다르니 꽃피고 꽃모가지 떨어지는 구경은 꽃핀 뒤로 족히 한 달은 볼 수 있을 것이다. 남해 수평
선이 보이는 막걸리 집 마당에 앉아 있으면, 바람이 실어 오는 바다냄새와, 씨를 심어 키운 동백의 향기, 그리고
농익은 막걸리 냄새가 한창 피어나는 벚꽃과 참 잘 어우러진다.
첫댓글 좋은사진 아름다운 음악 잘 듣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