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연휴 추천도서
[침묵]엔도 슈사쿠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바다는 너무나 파랗습니다(작가의 묘비문), 같은 마음이신 분
-이지경에 왜 주님은 침묵합니까? 싶으신 분.
-하루를 살아내느라, 가족을 먹여살리느라 또, e편한세상 사느라 본의아닌 배교의 길을 걷고 계신 분.
-설 지짐굽다 도망쳐 집나가신 분.
-설 연휴, 초례봉외에 갈곳 없는 분.
-아,새해엔 좀 침묵해야지ㅡ 싶으지 싶으신 분.
-스마트 세상 지긋지긋할때, 마음 좀 말랑말랑해지고픈 분.
추천합니다.
침묵!
2021년 1월에 읽은 책.
엔도 슈사쿠[침묵]
주제의 흐름은 이렇다.
지금까지 인류 최대의 화두: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그럼,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정의로운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 불의와 불공정과 인생의 고통 앞에서 왜 침묵하는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1600년대 초기, 포르투칼의 <예수회> 소속 신부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선교를 하기 시작한다. 당시 일본은 임진왜란이 막 끝난 시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 장악력이 필요할 때다.
서양에서 온 이상한 종교가 이상한 말을 하고 다닌다. 선교 금지령을 내린다. 대대적 박해가 시작되고, 당시 선교사로는 일본선교의 전설적 인물, 페레이라 신부가 있었다. 숨어서 선교를 계속하다 체포된다.
당시, 신자가 잡히면 잔인한 방식으로 고문 한다.
구덩이에 거꾸로 메달아 놓는다.
피가 머리 쪽으로 쏠린다.
귀 뒤쪽에 작은 상처를 낸다.
피가 한방울 한방울 떨어진다.
고통을 받으며 오래토록 살아있게 하는 것
이것이 가장 잔인한 방식의 고문이다.
페레이라는 거꾸로 메달린채 5시간 만에
나무아미타불!
소리친다.
이게 배교다. 그는 배교하고 말았다.
나무아미타불은 배교하겠다는 신호다.
교황청과 유럽에서 이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페레이라는 당연히 순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견고하고 존경받는 신부 페리이라가 배교를 하다니...
페레이라의 제자 로드리고 신부(실제인물:주세페 키아라)는 일본으로 선교하기 위해 일본으로 들어간다. 숨어서 선교를 하다가 체포된다. 그도 고문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한다.
그럼에도 신부는 배교하지 않는다.
이때 일본당국은 작전을 바꾼다.
신부앞에서 일본신자들을 고문한다.
‘당신들이 전한 기독교 때문에 저 순진한 백성들이 고문을 당한다.’
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로드리고가 페레이라 신부를 만났다.
소문대로였다.
배교하고, 일본여자와 결혼.
이제 배교를 강요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로드리고가 페레이라 신부에게 말한다.
“도대체 어떤 일이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냐”
페레이라의 말이다.
“내가 배교한 것은 구덩이에 매달렸기 때문은 아니야. 사흘간...나는 오물이 잔뜩 들어 있는 구덩이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어. 그러나 한 마디도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 내가 배교한 것은 말야 듣고 있나? 들어주게나.
구덩이 넣어진 뒤 들렸던 저 소리에...어려운 고통을 당하는 신도들의 저 신음소리에, 하나님이 무엇하나 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런데 거꾸로 메달리는 구덩이에 들어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배교의식이 하나 있다. 성화판을 밟아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얼굴이 그려져 있는 동판(=후미에)을 발로 밟는 것. 이것을 밟으면 배교했다고 인정한다.
소설 [침묵]의 절정부문은 로드리고 신부가 이 성화판 앞에 서서 머뭇거리는 장면이다. 성화판은 수많은 사람들이 밟아서 이미 반질반질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앞에서 고민을 했을까. 그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로드리고도 그 앞에서 고뇌를 하고 있다. 배교할 것인가. 순교를 할 것인가.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다.
“그때 밞아도 좋다고 동판에 새겨진 그 분이 신부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멀리서 닭이 울었다.”
침묵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하나님의 침묵.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침묵은 침묵이 아니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침묵 속에 담긴 하나님의 진심이다. 이 진심이 담긴 침묵은 침묵을 깨트린 가벼운 말과 행동보다 차원이 다른 깊이다.
다음은 배교자들의 침묵이다. 세상은 순교자들에게 관심이 있지 배교자들에겐 관심이 없다. 비겁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할 수 밖에 없는 배교자들을 품고 있다. 왜? 이들이 배교했지만, 하나님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
따지고 보면 우리 시대에도 매일 배교하고 산다. 어쩌면 페레이라, 로드리고 같은 배교자가 곧 우리인지도 모른다. 오늘하루를 살아내기 위해서,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의 성화판을 밟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생이다.우리는 계속해서 성화판을 밟는 연약하고도 연약한 존재들이다.
정말 하나님은 이런 자를 버리실까?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은 자신을 배신한 자를 버리실까?
하나님의 침묵은 진짜 침묵이 아니었다. 배교자들의 침묵까지 보듬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침묵. 그 하나님의 침묵은 우리를 향해 십자가를 지신 침묵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다. 설령, 침묵처럼 보였다 해도 침묵은 아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분에 대해서 여전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엔도슈사쿠의 [침묵], 줄거리 및 독후감|작성자 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