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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 수요일 한가위 - 루카 12,15-21
<풍요와 감사>
오늘은 즐거운 추석입니다. 추석은 외국으로 말하면 추수감사절 정도가 될 것입니다. 특별히 이렇게 모든 것이 풍성할 때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것은 참 좋은 전통 같습니다.
모든 것이 풍성할 때 그 소출들의 가장 좋은 것들을 조상에게 먼저 차례 상에 올려 드리는 것은 아마도 이 모든 축복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며 조상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 느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오는 모든 것들이 조상들 덕이 아니라 하느님의 덕임을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따라서 신앙인들에게 한가위란,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로 가진 것을 나누는 감사와 풍요의 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서로 나누지 못하는 마음은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런 마음 때문에 지구상에 극빈자가 3분의 1이나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에 돌고 있는 재화나 식량은 세상 모든 인구들이 충분히 먹고도 남는 양인데 나누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굶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부자는 수확을 많이 올려 곡간을 늘려야 할 정도가 되었지만 바로 그 날 밤에 하느님께서 그를 불러 가십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그만큼 부자가 되게 해 주셨지만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잊고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자가 다 일찍 죽는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꼭 쥐고 있는 손을 좀 풀어서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적어도 오늘만은 실천해보자는 의미에서 이 복음을 한가위 복음으로 넣었을 것입니다.
제가 첫 영성체 받을 때 교리를 가르쳐주시던 수녀님이 하늘나라에는 우리 각자의 이름이 쓰여진 창고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그 창고에 돈이 쌓여 나중에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그 재산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원히 살아야 할 하늘나라에서 부자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토마사도의 이야기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인도에서 전교를 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인도의 어떤 왕은 매우 부강하여 자신을 위한 큰 왕궁을 짓기를 원했고 기술자를 찾기 위해서 이스라엘 쪽으로 사신을 보냈습니다. 이 사실을 계시로 알고 있던 토마사도는 그 사신에게 자신이 훌륭한 건축가임을 말하고 그를 따라갔습니다. 그 큰 건물을 짓겠다는 그의 담대함에 놀란 왕은 궁전 지을 비용으로 많은 양의 금을 주고 자신은 2년 동안 다른 곳에서 살았습니다. 토마는 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선교를 계속했습니다. 2년이 지난 뒤 왕이 귀국하여 이 상황을 알자 곧 토마를 잡아 가두고 어떻게 고통스럽게 죽일까 생각하다가 생가죽을 벗기고 화형을 시키기로 하였습니다.
그 때 왕의 동생이 죽었다가 나흘이 지난 뒤에 살아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형에게 자신이 죽어서 겪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 보았더니 이 세상에서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궁전이 하나 있더라고 합니다. 그는 그 궁전의 문지기라도 하면 좋겠다고 함께 있던 천사에게 말을 했습니다. 천사는 이 궁전은 토마사도가 당신의 형을 위해서 지어놓은 것인데 그는 여기에 살 자격이 없으니 원한다면 다시 살려줄 테니 형에게 그 돈을 갚고 영원히 그 궁전을 차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왕은 토마사도에게 회개하고 값비싼 옷을 입으라고 내어 놓았습니다. 토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모릅니까? 하늘에서 영광을 얻기를 원하는 사람은 육신이나 현세에 관계되는 것은 무엇 하나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는 자신의 재산을 잘 사용할 줄 안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가스실에서 죽어야 할 유태인들을 빼냈습니다. 이 영화의 명장면은 나중에 생명을 구한 사람들이 앞에 앉아있는데 자신의 차와 시계와 반지 등을 팔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는 장면입니다. 그것들을 팔았으면 10명은 더 구해낼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늘나라에 큰 보화를 쌓은 것입니다. 도울 수 있는데 돕지 못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우리 옆에서 배고파 쓰러져가는 사람이 있는데 모른 척 하였다면 선행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악행을 한 것입니다.
신문지를 집어가서 크게 싸움이 났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문지가 그들에게는 유일한 이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린 분은 많은 신문지를 더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가운데서 하나를 잃어버렸다고 다른 사람을 그렇게 심하게 나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담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카인이었고 하나는 아벨이었습니다. 카인은 농부였고 아벨은 목축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벨의 제물은 즐겨 받으셨고 카인의 제물은 즐기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봉헌’엔 ‘감사’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데 그 감사의 마음을 아벨은 지니고 있었고 카인은 지니지 못했던 것뿐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니, 추수 때가 되면 카인은 먹지 못해서 버려야 할 것들을 하느님께 바쳤고 아벨은 작은 것에도 감사하니 남들이 보기에도 가장 아까운 살찐 짐승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결국 하느님은 예뻐 보이는 아벨을 더 축복해 주셔서 재물을 더 풍족하게 해 주셨고 아벨은 시간이 갈수록 흉년만 들게 되어 더 가난해졌습니다. 누구라도 더 감사한 마음을 갖는 사람에게 더 많이 주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왜 물질에 집착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교만의 원죄 때문입니다. 하와는 눈이 밝아져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다”는 뱀의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됩니다. 아담도 다른 모든 것은 먹어도 된다고 허락되었지만 굳이 먹지 말라고 한 것까지 먹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조금이라도 당신 것을 떼어 놓으라고 하시며 ‘모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해 주셨습니다. 인간은 그 영역까지도 침범함으로써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님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신데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인간이 ‘이것도 내 것, 저것도 내 것’ 하며 하느님 행세를 하게 되는 것이 교만의 원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내 여자!’라고 하지만 사람은 사람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내 아이!’라고 하지만 부모님은 아이의 머리카락 하나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내 집!’이라고 하지만 죽으면 다른 사람이 들어 와 살게 될 것입니다.
‘내 돈!’이라고 모두가 돈을 움켜쥐고 있으면 경제는 망하고 맙니다. 돈은 피와 같아서 순환해야 하는데 꼭 쥐고 풀지 않으면 나도 죽고 다른 사람들도 죽게 만듭니다. 물이 들어와 빠져나가지 않아 죽은 바다가 되어버린 사해를 생각하면 집착이 자신도 주위 사람도 죽인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목숨!’ 누가 나에게 생명을 주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나에게 생명을 주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태어났겠습니까? 그런데도 내 목숨이니 내 맘대로 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까?
이런 원초적인 소유욕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어떤 가난한 집에서 살다가 부잣집으로 시집 간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 자매님은 부자처럼 보이려고 온갖 보석이며 옷을 사고 걸치고 다녔습니다. 보다 못한 시어머니께서 며느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야, 네가 왜 부자로 보이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이미 우린 부자란다. 남들은 네가 가짜 다이아를 하고 가짜 밍크를 걸쳐도 다 진짜라고 믿어.”
그렇습니다. 우린 어쩌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남들과 비교해서 더 돈 많은 것처럼 보이려고 돈을 모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속을 약속받은 부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걱정은 오늘 하고 내일 걱정은 내일 하라고 하시며 필요한 만큼 채워줄 터이니 돈 걱정 하지 말고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나에게 있는 아주 작은 것부터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기 시작합시다. 그러면 부족한 가운데서도 나눌 줄 알게 되고 그렇게 나눌 줄 아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되로 흔들어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재물을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보름달처럼 꽉 찬 신앙인일 것입니다. 감사와 나눔의 한가위가 되기를 빕니다. ^ ^*
한가위와 대희년
얼마 전 인간극장, ‘아빠와 흑진주’를 통해 뇌출혈로 죽은 가나출신 부인을 그리워하며 삼남매 양육에 헌신하는 생활로 시청자를 울렸던 40대 홀아버지가 부산 태종대에서 투신해 자살한 일이 신문에 보도된 것을 읽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자살 경위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세 아이를 키우기에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또 며칠 뒤, 마산과 창원을 연결하는 마창대교에서 한 아버지와 아이가 자살하는 장면이 CCTV에 찍힌 뒤 뉴스에 방영이 되었습니다. 마창대교는 물과의 거리가 70m나 되어서 떨어지면 살기 힘든 곳이라 다리가 세워진 뒤 많은 사람들이 뛰어내리는 곳입니다.
엄마는 위암으로 누워있고 아버지는 대리운전으로 힘겹게 살다가 아이와 함께 투신한 것입니다. 아이는 뛰어내리지 않으려고 다리 난간을 잡고 있다가 아버지가 밀어서 떨어졌고 뒤에 아버지가 뛰어내렸습니다.
역시 우리나라는 ‘돈만 있으면 세상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고 돈이 없으면 가장 살기 힘든 곳’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그 와중에 몸에 4억을 걸치고 다닌다는 일명, 명품녀가 등장하여 나누지 못하는 삶을 한탄하는 사람들에게 부러워서 그런 소리 한다고 말을 했다가 욕을 먹기도 했습니다.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가 우리나라입니다. 정말 살기 어려운 나라가 위리나라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추석입니다. 외국의 추수감사절과 같은 명절입니다. 추수한 것에 대해 조상에게 감사하고 그러기 위해 가족들이 모이는 즐겁고 행복한 때입니다.
이런 면에서 재물이란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없으면 손님이 오는 것도 누구를 방문하는 것도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가장 풍요로울 때이기 때문에, 손님을 맞이하는 것도, 부모님을 찾아뵙는 것도 가능한 때가 바로 한가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추석이 되었다고 다 마음 편하게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는 형편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에겐 매우 부담되는 명절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기쁜 때를 ‘대희년’이라고 합니다. 처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때 땅을 똑같이 배분하여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 때는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니 모두가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살다보니 땅을 다 잃고 다른 사람의 종이 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매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50년째 되는 해엔 종은 다시 자유로워지고 더 가진 재산은 다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어 처음처럼 다시 똑같아지는 해로 대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법은 있으나 이스라엘 역사상 이 법이 지켜진 때는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더 가진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부자의 비유처럼 재산을 나누라고 하시다가 부자들에 의해서 돌아가셨습니다. 대희년, 정말 기쁜 해를 만들어보자고 하시다가 그러기 싫은 사람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추석은 어쩌면 이스라엘의 대희년과 같이 함께 기뻐해야 하는 절기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극심한 생활고로 자살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사치를 자랑하는 시기가 된다면 이것이 어찌 기쁜 명절일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풍요로울 때, 우리 신앙인들만이라도 주위 부족한 사람에게 떡 한 접시, 과일 한 개라도 나눌 수 있는 명절이 된다면, 하늘도 기뻐하는 명절이 될 것입니다.
♥ 전삼용 요셉 신부 ♥
첫댓글 주님 제 마음이 기쁘고 즐거울 때 일수록 주변의 이웃을 살펴보고 그 기쁨을 나눠줄 수 있는 제가 되게 하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아멘! 좋은 말씀 감사 드립니다. 한국의 추석이 부럽습니다. 여기는 오늘 봄이 시작 합니다. 한가위 잘 지내 십시요. 영육간에 늘 건강 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