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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사도라함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사람으로 예수님께 사도로서 임명을 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나 유일하게 예수님과 동고동락하지 않고도 사도로서 불리이우는 사람이 바로 바오로(바울로) 사도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바오로 사도는 초기 교회 때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사도 8:1~3 참조)이었으나 후에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고 삶에 전적인 전환을 이루어(사도 9:1 이하 참조), 사도가 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 대한 복음 선포를 위해 베드로를 세우셨다면,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을 위해서는 바오로 사도를 뽑으셨다.
12사도들이 무식한 어부들이 많았던 반면에 바오로사도는 일류교육을 받아 학식이 풍부하였으며, 더욱이 당시에 1등 시민권인 로마 시민권을 가진 바리사이파에 속하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박신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방인들의 도시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선포하였다. 3차례에 걸친 그의 전도 여행은 신약성서의 사도행전과 서간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각각의 전도 여행에서 바울로가 방문하고 전교한 곳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 1차 전도 여행(사도 13:1~14:28) : 안티옥, 이고니온, 리스트라, 테베
○ 2차 전도 여행(사도 15:35~18:22) : 시리아, 길리기아, 트로아스, 데살로니카, 베레아,
아레오파고 법정, 고린토, 에페소와 예루살렘을 거쳐 아티록.
○ 3차 전도 여행(사도 18:23~21:17) : 갈라디아, 프리기아, 에페소, 트로아스(체류),
트로아스와 가이사리아를 지나 예루살렘
따라서 바오로 사도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를 하는 사람이라면 사도행전과 서간을 미리 읽는 것이 가장 1차적인 준비라 할수 있겠다.
■ 사도 바오로의 생애
예수는 팔레스티나 안에서 활동하면서 주로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예수의 비극적인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 후에 예루살렘에서 창립된 원시 교회도 한동안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유대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하였다. 그 후 33년경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자, 박해를 피해 달아난 해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몇몇이 안티오키아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였는데(사도 11:19-21), 이것이 이방인 전도의 효시이다.
물론 그전에 필립보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였고(사도 8:26-40), 베드로가 가이사리아로 가서 고르넬리오 백부장 가족에게 세례를 베푼 사례가 있지만(사도 10,34-38), 그러한 전도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것이었다. 이방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한 사도는 바르나바와 바오로인데, 그들은 1년 동안 함께 안티오키아에 복음을 선포한 이후에(사도11:25-26) 지중해 동부 여러 지역에서 전도하였다. 특히 바오로는 세차례에 걸쳐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하였고(13:1-21:16), 그의 노력으로 민족적, 지역적 종교가 인류 전체를 향한 세계 종교로 탈바꿈하였다.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삶을 철저히 산 그리스도인이면서 지중해 곳곳에 예수를 널리 전한 사도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인생을 관조한 신학자였다.
1. 출생 연대와 출생지
33년 경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사울로라는 젊은이"가 스테파노를 돌로 쳐죽이던 사람들의 겉옷을 맡았다고 한다(사도 7:58). 그리고 바오로는 55년경 에페소에소 필레몬에 게 보낸 편지에서 노인으로 자처한다(필레 1:9). 바오로의 출생 연대 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곳은 이렇게 두 구절뿐인데, 젊은이과 노인의 기준이 매우 모호한 까닭에 이런 표현들을 근거로 바오로의 출생 연대를 밝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계에서는 흔히 5-1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할 뿐이다.
바오로는 당시 문화,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 다르소(Tarsus)에서 태어났는데(사도 9:11, 21:39, 22:3), 그 곳은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고 스토아 학파의 유명한 철학자들이 활약했던 곳으로, 기원전 64년 로마에 병합되었고 기원전 57년에는 길리기아(Cilicia) 속주의 수도로 승격되었다. 다르소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민을 와서 정착하고 있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바오로는 태어나고 성장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는 그리스어와 셈족어를 비롯하여 그 문화들을 익힐 수 있었다.
2. 가족관계
바오로의 출생, 할례, 성장, 처신 등을 살펴보면 그는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으며 철저한 바리사이로 처신하였다(갈라 1:13-14). 바오로는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자처하였는데(로마 11:1, 필리 3:5-6), 당시 제관이나 레위가 아닌 평신도 유대인들은 유다 지파 아니면 베냐민 지파 출신으로 자처하였다. 특이한 점은 그의 부모가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였기 때문에 바오로는 태생 로마 시민이었다는 사실이다(사도 16:37-38, 22:25-29, 23:27).
3. 이름
바오로는 친서에서 자신을 일컬어 언제나 '바오로'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도 행전 7장 58절부터 13 장 7절까지에서는 '사울로'라고 하다가, 13장 9절에서는 "일명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로"라고 동일시한 다음에 13장 13절-28장 25절에서는 '바오로'라고만 하였다. 또한 사도 행전에 세 번(9:1-19, 22:3-21, 26:9-18) 나오는 바오로의 회심에서는 그를 일컬어 '사울'이라고 하였다(9:4.17, 22:7.13, 26:14). 이 이름은 베냐민 지파 출신이요 이스라엘 초대 임금인 사울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사울을 그리스어로 음역하 면 ' 사울로'가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바오로'는 로마-그리스식 이름이다. 바오로는 이스라엘 문화와 언어권과 아울러 그리스 문화와 언어권에 살았기 때문에 '사울(로)'과 '바오로'라는 이름을 지니게 된 것이다.
4. 직업
바오로는 전도하면서 스스로 생계비와 전도비를 조달하였다(Ⅰ데살 2:9 : Ⅰ고린 9:4-18). 그는 신 자들에게 신세를 지거나 돈 때문에 전도한다는 오해를 받기 싫어하였다.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였는지 바오로는 밝히지 않았지만 51-52년경 그가 고린토에서 전도할 때 아퀼라와 브리스킬라 부부와 함께 천막 짜는 일을 하였다(사도 18:3).
5. 성격과 언변
바오로는 유대교를 믿을 때도 남달리 철저하였고 회심한 다음에는 예수를 열성적으로 선포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린토 교우들로부터 말주변이 없다는 평을 받았고(2고린 10:10), 자기 스스로도 눌변을 시인하였다(2고린 11:6, 2:7).
그의 성격은 그의 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외경인 「바오로 행전」 에 의하면 바오로는 키가 작고 대머리이며, 다리는 약간 굽었으나 걷는 데는 지장이 없었고, 속눈썹이 길었으며, 코가 컸다고 한다. 다른 외경이나 초대교회의 여러 저서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는데 이것은 아마 사도행전(9:25,14:11-12)과 바오로의 편지(2고린 10:10, 11:23)를 보고 추측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그는 키가 작은 사람으로 전해지는 데 바울로(Paulus) 라는 말이 라틴어로 ‘작은’ 것을 뜻한다고 해석한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외모 에 대한 이런 말은 모두 근거가 없다.
바오로의 성격 역시 그의 편지와 사도행전을 통하여 짐작할 뿐이다. 그의 편지를 읽어보면 그의 성격이 불같았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 바오로는 매우 강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자기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적 의지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박해하는 데도 앞장 섰고, 또 회심한 다음에는 어떠한 난관 앞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명설교가였던 아폴로와는 달리 바오로는 말재주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정열적이고 다혈질로서 정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감정에 치우치는 일없이 자신의 성격을 잘 조절하여 균형과 조화를 잃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행동 위주의 인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편지에 나타나듯이 그는 깊은 영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자립심이 강하여 많은 사도직 활동을 하면서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스스로 노동하면서 생계를 꾸려 갔다. 누구에게든 거리낌없이 바른 말을 하는 용기도 있었고 교회 건설을 위해 필요할 때에 는 당당하게 사도로서 권위를 내세울 줄도 알았다. 그러면서도 모든 이와 함께 할 줄 아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체험 이후 오직 그리스도 한 분에 의해서만 살고 움직인 인물이었다.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서 그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알았고 모든 사람에게 봉사할 줄 알았다. 그리스도만이 그의 힘의 바탕이요, 명철한 이성과 판단의 열쇠 요, 나아가 그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6. 성장 배경
바오로가 자라면서 받은 영향은 유대교, 그리스 문화, 로마 정치 배경이다. 유대교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바오로는 독실한 유대교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철저한 종교 교육을 받았고(필리 3:5, 갈라 1:14),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평신도 단체인 바리사이파에 가입하였다(필리 3:5, 사도 23:6, 26:5). 그의 그리스 문화 배경을 살펴보면, 그는 그리스 견유 학파와 스토아 학파에서 애용한 '디아트리베' 논법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디아트리베'는 반대자의 반론에 맞서 상대방을 2인칭으로 부르면서 독설을 퍼 붓는 논법이다(갈라 5-6장 : 1고린 9장).
7. 교회 박해
철저하게 유대교를 신봉하는 가정에서 태어난 바오로는 율법에 정통한 바리세인이었다. 로마 시민권을 갖고 있던 그는 율법을 비판한 예수(마태 5:21-48)를 용납할 수 없었고 율법과 성전 체제에 도전하다가 처형된 예수는 "저주받은 자"(갈라 3:13)이지 메시아일 수 없다고 확신하였다. 더구나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은 더욱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다. 왜냐하면 부활은 역사의 종말에 있을 미래 사건이지, 역사 한가운데서 일어난 과거 사건일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 다. 그런 까닭에 다혈질인 바오로는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섰다(갈라 1:13, 23, 1고린 15:9, 필리 3:6). 그가 박해한 그리스도인들은 토박이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고 율법과 성전에 대해 비판적인 헬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사도 6:11-14).
행전에 따르면 그는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대표자인 스테파노가 예루살렘에서 순교할 때 가담하였고(사도 5:57), 시리아 지방의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그곳에 가기도 하였다(9:1-19, 22:3-21, 26:9-18).
8. 회심
33년경 바오로는 다마스커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던 도중 한 점의 구름도 없는 맑은 하늘로부터 번개와 같은 한 줄기 빛이 그를 땅에 쓰러뜨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이 들려왔다. 그가 땅에 넘어진 순간에 그의 몸에 비쳤던 빛은 그의 마음까지도 꿰뚫어 비췄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주께서는 바오로의 물음에 "나는 너희가 박해하는 예수다. 너는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두 번이나 되풀이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는 뉘우침과 괴로움으로 견딜 수 없어 몸부림치면서도 마음은 온통 넘치는 희망으로 부풀었다. "주여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주께서 "일어나 읍내로 들어가거라. 네가 마땅히 무엇을 할 것을 네게 일러주리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바오로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 후 극적인 개종을 불러 일으켜 전 생애를 「예수를 주님으로 선포」하는데 바쳤으며 그를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로 만들어 주신 주님의 크신 사랑이다. 예수님의 발현은 시공을 초월한 복음전달의 상징이다(사도 9:1-189, 22:6-11).
예수를 뵙고 그리스도인 및 사도가 되었는데, 부활한 예수를 뵙고 그분을 대하는 시각이 한 순간에 달라진 회심이야말로 바오로의 앞날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싫어하고 예수를 주님으로 선포하는 데 전심 전력한(2고린 4:5) 사도 바오로는 그 회심 사건을 그저 몇 차례에 걸쳐 간결하게 언급하거나 암시할 뿐이다(갈라 1:15-16, 1고린 9:1, 15:8, 필립 3:12, 2고린 4:6). 그런데 루가는 세 번에 걸쳐 나오는 이야기는 바오로 체험담이 아니고 루가가 그 체험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바오로는 회심한 다음 율법과 성전에 대해서 비판적인 신앙 조선을 따르면서, 유대 민족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들에게도 활발히 전도하며 스스로 이방인들의 사도로 자처하곤 하였다. 사도 행전에 따르면 회심한 다음 그는 우선 다마스커스 교회를 방문하여 세례를 받고(사도 22:16) 설교하였다고 한다(사도 9:20-22). 그 후에 그는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이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고 아라비아로 떠나갔다가 다시 다마스커스로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 3년 후에 나는게파를 만나 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와 함께 보름을 묵었습니다"(갈라 1:17-18). 바오로는 아라비아에서 나바테야인의 미움을 사서 다마스코스로 피신하였고, 36년경 다마스커스에 거주하던 나바테야인들이 바오로를 체포하려고 하자 극적으로 탈출하여(2고린 11:32-33 : 사도 9:23-25)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서 보름 동안 게파(베드로)와 함께 지냈다. 36년경 예루살렘 교회의 두 지도자 게파와 야고보를 만난 후 바오로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가서 동안(36~44경) 전도하였다(갈라 1:19-24, 사도 9:30, 11:25).
그 무렵 스테파노의 순교를 계기로 흩어진 해외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에서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도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의 교회를 창립하였다(사도 11:19-20).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그 교회를 돌볼 책임자로 키프로스 섬 출신인 사제 바르나바를 파견하였다. 바르나바는 다르소에 있던 바오로를 초빙하여 만 1년 동안(44~45경) 안티오키아 교회를 함께 돌보았는데, 이 사실은 바오로의 서간에는 나오지 않고 사도 행전 11장 19-26절에만 적혀 있다. 바오로는 앞으로 세 차례에 걸쳐 지중해 동부 지역으로 광범위한 전도 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때 안티오키아를 전도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리고 예수를 신봉하는 안티오키아 시민들을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렀다(11:26).
1) 다마스커스에서 전도함 9:20
2) 아라비아로 감 갈 1:17
3) 다마스커스로 돌아감 갈 1:17
4) 예루살렘 방문 갈 1:18
5) 교회의 의심을 받음 9:26
6) 바르나바와 친구가 됨 9:27
7) 유다인의 박해 22:17-18
8) 환상 중에 떠날 것을 명령 받음 9:30
9) 다르소로 감 11:25-26
10) 바르나바가 안티오키아로 감 11:26
■ 사도 바오로의 여정
진리의 사도, 이방인의 사도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성인은 바오로(Paulus) 성인이다. 좁은 팔레스티나를 벗어나 소아시아와 그리스 반도를 거쳐 로마 제국에 까지 3차에 걸친 전교여행으로 하느님을 전하면서 지역적 민족적 종교에서 그리스도교를 인류 전체를 향한 세계 종교로 탈바꿈 시켰다.
그리스도교 초창기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 영향을 주었던 인물로 한편의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삶을 보였던 그는 생애뿐만 아니라 그 마지막에도 신앙적 여운을 남겨준다고 하겠다.
공식 축일은 6월 29일이고, 개종 축일은 1월 25일에 지낸다.
그리스도께서 산 이와 죽은 이의 주님이심을 바오로는 깨달았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를 간택함은 네가 이미 본 것과 또 내가 나타나서 너에게 보여야 할 일에 대해서 증인을 삼기 위함이니라" 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 불가사의한 성소가 맞설 수 없는 하느님의 거룩한 뜻임을 바오로가 깨달았기에 "내게 있어서 사는 것은 그리스도 이십니다"고 외치며 초인간적인 존재 그리스도를 자기 품에 품고 세계 정복의 선교길에 나섰다.
★ 제1차 전교여정: 사도행전 13-14
45년부터 49년까지 그는 키프로스, 베르게, 비시디아 안티오키아, 리가오니아를 전교했고, 이 여행에서 이름을 바오로로 개명했다. 여행을 마치고 49년경에 예루살렘에 온 그는 베드로와 야고보 및 다른 사도들을 설득하여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음을 확신시키는데 성공함으로써 그리스도교회의 보편성 확립에 기여한 한편, 그의 이방인 선교를 예루살렘 교회가 인정하도록 하는 등 교회의 체제 면에서도 가일층 진보된 단계를 맞게 하였다.
★ 제2차 전교여정: 사도행전 15;36-18; 22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직후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제2차 전교여행을 계획한다(49-52년). 제1차 전교여행에서 세운 교회들을 재차 방문한 뒤, 바오로는 마케도니아를 가로질러 갔고 최초로 유럽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에 교회를 세웠으나, 아테네에서는 ‘알지 못하는 신’을 비판하는 ‘아레오파고’ 법정 진술만 다소 효과를 내었을 뿐 신통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 제 3차 전교여정: 사도행전 18;23-21;16
안티오키아로 귀향한 그는 다시 제 3차 전교여행을 계획하였으나(53-58년), 2년 동안은 코린토스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에페소에서는 데메드리오라는 은장이 사건이 유명하다. 58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그는 야고보를 만나 보았고, 이레 동안의 정결 기간이 거의 끝날 무렵에 그는 유대인들에게 곤욕을 치르다가 출동한 로마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자기의 개종을 설명하고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경위를 비롯하여 로마 시민권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60-61년 사이에 몰타연안을 따라 로마에 갇히게 되었다.
■ 로마에서의 순교
당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외교인을 성전에 데리고 오는 경우 사형으로 다스렸다. 불길한 예감을 했던 바오로도 외교인을 성전에 데려왔다고 공박을 받아 수난을 겪었으나 겨우 죽음은 면하고 로마에 미결수의 몸으로 도착하여 2년간 감시가 별로 심하지 않은 미결수 생활을 하면서 집을 얻어 방문객과 만나기도 하고 선교활동까지도 할 수 있었다(사도 28:17-31). 이 동안에 그는 수인서간(에페소서, 골로사이서, 필레몬서, 필립비서)을 집필했다.
이탈리아 로마 남문 밖 교외에 위치한 「세 분수의 성당」(Chiesa di Tre Fontane)은 사도 바오로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정열적 인생의 막을 내리고 참수 당했던 장소다. 바오로의 목을 올려놓고 칼로 쳤던 돌기둥이 보관돼 있고 사형 집행자가 목을 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을 볼 수 있는 이곳은 바오로의 목을 벤 순간 그의 목이 세 번 튀었고 튀었던 자리마다 샘이 솟아나고 있다는 전설에서 세 분수, 즉 「뜨레 폰타네」라고 불려지고 있다. 바오로의 유해는 4세기에 이르러 사도에게 봉헌된 쌍 빠울로 풀레무레의 제단 밑에 옮겨졌고, 또한 2세기 말엽부터 바오로의 무덤이라고 전해오는 곳에는 성 바오로 대성전이 세워졌다.
■ 사도 바오로의 사상 및 업적
바오로 사도가 유태인과 이방인에게 설교했던 모든 내용은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다. 이는 내가 너희를 보는 것과 같이 그분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 한 예수님의 부활, 즉 예수님께서 그 신비체인 교회 안에 항상 계시고 교회가 나누어 주는 은혜로 신자들의 영혼 안에 늘 계신다는 것이 영원한 진리임을 증거하고 주장하기를 한 시도 그치지 않고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 피 흘렸던 것이다. 또한 사도로서 바쁜 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남의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생계유지를 위해 벌이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생각했다. 그는 한 장소에서 설교하고 나면 복음 그 자체가 주의 세계를 건설했다고 보았다. 바오로 서간 안의 권고는 힘찼고, 일상생활 주변에서 일어난 일을 서술할 때도, 신학적 측면으로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모든 것을 주님의 입장에서(in Christo) 즉 신앙과 사랑의 눈길로 보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교세계가 알지 못하였던 겸손과 애덕이라는 두 가지 덕을 모든 피조물에게 부여했다. 뛰어난 시인 바오로가 노래한 "사랑의 찬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천만번을 들려준다 하더라도 싫증이 나지 않고 천국의 문 저 편에서 들려오는 것과 같이 신성하고 청신함을 느끼게 한다(고린토 전서 13장 참조). 사도 성 바오로, 그는 유랑자와 같이 이 세상을 살면서 항상 천상의 것을 원했으며 이를 지상에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므로 그의 얼은 오늘도 순교의 영광 속에 찬란히 빛나고 있다.
■ 사도 바오로와 초대교회
◆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지금은 터키의 안타키아(Antakja)라는 이름의 보잘것없는 도시에 불과하지만 바오로 사도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 중의 하나인 시리아의 수도로서 로마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대도시였다.
루가에 의하면 안티오키아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던 사람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던 곳이며(사도 11:19-26) 초대교회 선교의 출발지라고 할 만큼(사도 13:1-3, 14:26-28, 15:35-40, 18:22) 중요한 곳이었다. 성서시대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안티오키아는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근거지였다.
◆ 키프로스 섬
바르나바의 고향으로 스테파노 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던 첫번째 박해 때 그리스도인들이 피해온 곳이기도 하다. 사울(바오로)과 바르나바는 제1차 전교여행 때 이곳에서 전교 했다(사도 11:19 이하).
현재는 약 7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는데 그 중 80퍼센트가 그리이스계 사람으로 그리이스정교 신자이고 18.7퍼센트가 터어키계 사람으로 이슬람 신자인데 인종적 종교적 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 갈라디아
도시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의 이름이다. 오늘의 터어키의 수도 앙카라 근처를 지칭한다. 학자들 사이에는 사도 바오로가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갈라디아가 정확히 어느 지역을 두고 말하는지 논란이 되는데 그 이유는 갈라디아는 로마제국의 행정구역('주')으로서의 갈라디아를 가리킬 수도 있고, 또는 좁은 의미로 기원전 3세기 초 갈리아 지방에서 오늘의 앙카라 근처 지역으로 이주해왔던 켈트족이 살았던 지역을 지칭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필립비
필립비는 데살로니카 북서쪽에 있는 카발라에서 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지금은 작은 도시지만 바오로 사도 당시에는 꽤나 번창한 도시였다고 한다. 원래 이곳은 로마와 소아시아 지역을 연결하던 간선 상업도로요 군사도로였던 에냐시아 가도(Via Egnatia)가 있던 곳인데 여기에다 필립 2세는 도시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따서 필립비라 하였다 한다. 필립비 교회는 바오로가 제2차 전교여행 때 세웠던 교회로 유럽지역에서 첫 번째로 세운 교회였다. 바오로는 기타 다른 지역에서의 전교활동 중에서도 이 필립비 교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특별히 사랑하였다. 바오로의 편지들 중 필립비서 만큼 정이 넘치는 편지도 없을 것이다(사도 16:12-40, 1데살 2:2, 2고린 7:5-7, 8:2, 11:8-9, 필립 4:15-16).
◆ 데살로니카
알렉산더 대제의 막료 장군이었던 카산드로스(Cassandros)가, 에냐시아 가도가 지나는 길이며 항구를 끼고 있던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알렉산더 대제의 이복누이이자 자기 부인이었던 데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고 한다. 로마제국시대 때에는 마케도니아주의 수도가 되어 급속히 발전하였다. 따라서 사도 바오로가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을 즈음에는 매우 번창하던 도시였다.
◆ 아테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중심지로 최고 전성기는 5세기. 기원전 404년 펠레폰네소스 전쟁 때 스파르타에 패함으로써 고전 아테네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고전 시기에 아테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를 비롯하여 정치가, 시인, 역사가 등등 오늘날까지도 인류의 문화에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인물들을 배출했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 고린토
현재 고린토라고 하는 시는 신 고린토이며 1858년과 1928년의 대지진 후에 세워진 곳으로 아테네에서 서남쪽으로 80킬로미터 되는 거리에 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가 전교했던 고린토는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천혜의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데 즉 서쪽에는 이오니아해와 이탈리아로 향하는 레카이온 항구를 품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아테네를 바라보며 에게해로 나갈 수 있는 켄크레아 항구를 품고 있던 상업중심지로 국제도시였다.
◆ 에페소
이곳 역시 지금은 지도에서 찾아보기조차 어려운 곳이 되어 버렸지만 바오로 사도 당시만 해도 아시아 주의 수도로 동양과 서양을 잇는 상업 중심지 항구도시였다. 에게해를 사이에 두고 고린토 항구와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바오로 사도가 진정 그렇게 열심히 선교하였고 초세기 교회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소아시아(오늘의 터키 지역) 교회들은 오랜 세기동안 이슬람의 지배 속에 있던 탓인지 지금은 이슬람 사원들만이 곳곳에 보일 뿐 찬란했던 교회들의 자취는 고고학적 발굴에서나 엿볼 수 있을 뿐이다.
■ 바오로의 편지
◆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신약성서 중 가장 오래된 성서로서 51-52년경에 쓰여졌다. 바오로는 공동체의 모범적 신앙에 관하여 권고하며 공동체와 자신의 관계를 확인한다. 이 편지 전체에서는 재림사상이 흐르고 있다. 바오로는 죽은 이들과 재림 때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 모두가 주님의 재림에 참여할 것이라고 공동체에게 설명한다.
◆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바오로는 재림사상을 위협하는 진술에 반대하고 종말이 바로 눈앞에 있지 않고 표징을 통해 알려진다는 것을 공동체에게 가르친다.
◆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
바오로는 이러한 공동체에서 드러나는 개인주의와 열광주의자들과 논쟁한다. 또한 신자들에게 내려지는 은사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여 바로 잡아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
바오로는 ‘복음의 진리' 즉,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복음을 위해 정열을 다해 싸운다.
◆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로마서의 주요 테마들은 세상의 죄의 상태와 복음의 구원능력(1- 3장), 아브라함, 믿음의 아버지(4장), 죄와 죽음의 율법과 성령의 생명을 주는 힘(5-8장),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 있는 이스라엘(9-11장), 공동체에게 행한 권고들(13-15장)등이다
◆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이 편지에서 바오로는 자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공동체에게 편지를 쓴다. 공동체를 일치와 사랑으로 강하게 하기 위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길에 관한 옛 그리스도 찬미가를 인용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가신 비천함과 영광의 길은 공동체의 모범이어야 한다.
◆ 골로사이인들에게 보낸 편지
바오로는 이 공동체에게 볼 수 없는 하느님의 형상인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충만한 생명이 있음을 말한다. 전례에서 사용되는 찬미가를 인용하여 공동체가 주님께 의지할 때 그 기초가 튼튼하고 안전해진다고 강조한다.
◆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찬양하는 찬미가이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시키셨다.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유다인과 이방인들간의 적대관계는 극복되었고 이제 한 몸인 교회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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